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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江) ④

fabiano 0 1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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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麻露 작가의 말:
江은 흐른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역사도 흐르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민자들의 삶도 그렇다. 이 흐름 속에서 얘기는 바로 한 세대의 삶의 현장이 될 것이다. 나중에는 빛 바랜 추억 으로 남아있겠지만 당시엔 치열했던 그런 시간들을 반추해 보는 거다. 그러나 결국은 흐르고 말겠 지. 그래서 江이라 부르고 싶다.
흘러 흘러가면서 많은 사연들을 담고 있는 그런 江.
조용히 소리 내 며 흐르다가도 때론 큰 포말을 일으키고 범람도 하며 살아있는 江.
모두가 너와 나 본연의 모습이리라.
이민이란 파종(播種)이다. 전혀 다른 세계를 맞게 되면서 가치관과 질서의 혼란이 오고 직업은 물 론이고 가정의 위계도 바뀌게 된다.
당연한 사연이지만 그런 변화 속에는 또 아픔도 함께 자리한다.
치유되기도 하지만 그 아픔에 함몰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민 오기 전의 관습, 이민 온 나라의 규 범, 그 둘이 섞어져서 나오는 또 다른 형태의 현장들, 이 모든 것들이 시간에 따라 성숙하기에 이민 연수에 따라 또 다른 생각들이 어우러지며 갈등도 빚는다.
이런 이민의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서민 들의 모습을 담아보려고 했다. 흐르는 江처럼...
 
* 명동시대(明洞時代).
산업화로 발돋움하는 시기에 취업은 절대적인 명제였다. 대우실업의 김우중 신화도 흘러나왔고 율산실업의 신선호와 제세산업의 이장우에 관한 일화가 캠퍼스에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영웅이었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선배들이 그들의 휘하에 들어가 또 다른 작은 이야기거리를 만들 고 내곤 했다.
해외여행이 쉽지 않던 시대인지라 출장을 다녀 온 선배들은 외국에서 겪은 일과 직접 눈으로 본 자신들의 경험을 장황하게 떠들면서 너도나도 신화의 주역이 되길 원하고 행동했다.
실제로 짧은 기간에 많은 재산을 축적하고 독립하여 사업을 하는 선배들도 많았다.
그들이 가끔 학교의 후배들을 불러 술이나 통닭도 사며 영양 보충하라고 용돈을 주기도 했다.
또 각 기업체에선 우수한 인력확보를 위해 아름 아름의 작전을 펴기도 했는데 시골 출신의 우태는 이런 선배들을 보면서 올바 른 직장이라도 잡아야 한다는 강박감으로 자신을 무장했다.
친구들과 단칸방을 얻어 자취하는 지긋지긋함도 벗어나야 될 것 같았고 졸업 후에 빈둥거린다는 것은 절망처럼 여겨졌다.
 
작은 단칸방에 서 3명이 자취생활을 하기 때문에 한 사람은 칼잠을 자야 했고 반찬이라야 매번 시장에서 싸구려로 담근 김치와 잡탕으로 끓인 찌개가 전부였다.
밥을 얹어놓을 밥상도 없어 책을 포개어 신문지를 깔아놓고 사는 이런 생활은 학생시절에만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졸업 후에도 이런 생활이 연속된다면 이는 패배자의 삶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함께 자취하는 장성욱과 제봉호도 각자 열심이었지만 제봉호는 계속 당국의 감시망이 따라다녔다.
형사들이 가끔 자취방을 기웃거렸지만 소위 그들이 말하는 불온서적도 나오지 않았고 집에선 일체 모임을 가진 적이 없이 밥만 아침에 해먹고 잠자는 시간에 들어오기 때문에 큰 탈이 없었다.
장성욱은 지금은 학생으로 잠깐 엎드려 있다가 언론사에 취업하여 본격적인 민주투쟁을 해 나가야 더 효율적이라며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하면서 졸업준비를 해 나갔다.
공장에 나가는 옆방의 아가씨들도 학생들에게 우호적이었고 실제로 마주칠 일이 서로 거의 없었다. 또 건넛방의 일반택시 운전사부부에게 물어도 전혀 이상이 없는 모범 학생들이었다.
이 무렵 민혜에 대한 그리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잘 살고 있겠지 하는 막연한 안도감만으로 자신을 달래고 위로 삼았다.
학교 수업도 충실하였지만 군대생활 3년에 잃어버리고 녹이 슨 인문적 지식의 축적을 위해 일반 교양서적도 도서관에서 빌려 읽으면서 주로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대학 도서관도 항상 만원이라 새벽 통행금지 해지와 동시에 나가 줄을 서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붐비었다.
꼭두새벽에 나가 줄을 서서 조용하고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햇볕도 잘 들어오는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새벽 독서를 한 후에 다시 자취 방으로 돌아가 아침을 해 먹고 도시락을 준비해 학교 로 갔다.
저녁엔 식은 밥에 찌개를 데워 대충 비벼먹곤 다시 도서관으로 갔는데 이때 당번은 취사도구를 청소해 둔다.
운동권 친구나 선후배들과도 종종 만나 술도 마셨지만 도서관 주변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도 많아 그들과도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의식도 있고 감성도 풍부하고 예술적 감각 을 지난 후배 여학생들과도 여러 가지 주제에 대해 토론을 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군 시절 만났던 이경순과의 관계도 이 시기에 많이 진척되면서 연애를 하게 되었다.
도서관에선 점심때마다 모두 잔디 밭으로 나와 각자 싸온 도시락을 함께 펼쳐 먹으면서 당일의 주제에 대한 토론을 이어갔다.
어쩌다 의기가 투합하거나 토론의 열기가 상승되면 학교 건너편의 돼지고기 파는 집으로 달려가 조금씩 추렴하여 삼겹살을 연탄불에 구워 먹으며 체력관리를 위해 필수적이라고 떠들어댔다.
 
제대 후에 도서관 주변에서 만나는 이들과는 이념적이기 보다는 문학적이고 정감서린 대화를 하기 때문에 단죄하는 식의 반대나 네가 틀렸다는 식의 결론이 나지 않아서 스트레스도 덜 받고 결론이 신선했다.
만나고 토론을 하고 나면 오히려 에너지가 솟아오르는 기분이 들 정도로 기분이 흡족했다.
복학생으로 만학의 기쁨도 누리면서 진정한 대학생활은 이런 멋이야 하고 착각할 정도로 정신적인 충만감을 누 리며 지냈다.
민혜와도 그랬다.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서로가 일치됨을 느끼곤 했다.
민혜가 명동으 로 불러 나갈 땐 정말 왕자가 되는 기분이었다.
당시 명동의 다방에선 반드시 젊은이들을 위한 음악이 필수조건이었는데 좋은 음향시설로 최신의 유행 음악들을 많이 들려주었다.
또 민혜는 여러 가지 노래를 신청곡이라고 메모에 적어 내곤 했는데 그 때 그때 기분 좋게 틀어주어 분위기를 고조시 켰다.
 
명동엔 청자 다방, 심지 다방, 로방 다방, 용 다방이, 충무로의 본전 다방, 퇴계로의 알파 다방 이 다 그랬다. 통기타를 치고 노래를 하던 송창식과 윤형주, 양희은, 서유석, 이장희, 김세환 같은 젊은 가수들은 청바지를 입고 오비스 캐빈과 명동장, 쉘부르의 우산에 나타났다.
한국형 록의 대부라 는 신중현은 명동 국립극장 맞은 편 유네스코 빌딩 스카이라운지에서 사이키데릭 조명과 함께 현란한 음악을 들려주었고 이곳엔 봄비를 절창으로 부르는 박인수, 님은 먼 곳에를 부른 김추자도 나왔다.
그 외 히식스, 키 보이스, 에드 포 등의 보컬 그룹과 여성의 펄 시스터즈, 점블 시스터즈와 같은 그룹들도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한국형 가수로는 남진의 ‘가슴 아프게’, ‘님과 함께’와 나훈아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 ‘찻집의 고독’ 등으로 불꽃 튀기는 경쟁을 하였고 여자 가수로는 이미자가 단연 선두를 지켰고 패티 김, 윤복희가 간간히 히트곡을 냈다. 배호의 ‘누가 울어’, ‘돌아가는 삼각지’, 최 희준의 ‘종점’, ‘인생은 나그네길’, ‘현미의 밤안개’ 등을 야유회에서 모창 흉내를 내며 부르긴 해도 음악다방에선 잘 듣질 않았다.
이런 모든 음악은 클래식이 아니고 대중음악이었으며 클래식은 또 종로의 르네상스와 같은 곳에서 들을 수 있었다.
 
충무로의 카페 떼아뜨르 에선 추송웅의 모노드라마 ‘빨간 피터의 고백’이 장기 공연을 하였으며 명동의 곳곳은 이렇게 젊음을 발산하기엔 참으로 좋은 낭만의 거리였다.
지금도 현역방송인으로 활동이 왕성한 최동욱, 이종환의 인기 DJ 프로는 라디오 방송의 꽃이었고 야심한 밤엔 ‘밤을 잊은 그대에게’, ‘한 밤의 음악편지’와 같은 심야프로로 젊은이들은 대화의 갈증을 풀거나 사랑의 쓰린 가슴을 달래기도 했다.
 
박원웅, 피세영, 임국희 등의 명 DJ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라디오 전성기였다.
그 뿐 아니라 명동엔 전혜린의 검은 옷 유행이 잔존 하면서 그녀가 뿌린 선구자적인 멋이 가슴을 설레게 했다.
그녀의 수필집인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젊은이들의 필독서처럼 읽혔고 그녀의 사고를 철학처럼 성숙시켰다는 독일 뮌헨의 슈바빙 거리도 들먹거려졌다.
 
민혜도 자신이 독문학을 전공해서 더욱 그랬겠지만 전혜린과 루이제 린저에 푹 빠져 고독한 멋을 잘 이해하는 선구자적인 견해를 나타내기도 했다.
명동백작 이봉구의 명동에 서린 여러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이봉구는 ‘명동에 비가 내리면’과 ‘명동 십년’과 같 은 책자를 출간하여 일반 독자들의 명동에 대한 관심도를 더 높였다.
또 ‘목마와 숙녀’로 유명한 박 인환 시인의 ‘세월이 가면’이라는 시는 시보다 노래로 더 알려졌다.
요즘엔 가수 박인희의 노래로 알 려졌으나 당시엔 가수 나애심과 테너 임만섭 선생의 가창으로 명동과 캠퍼스 일대를 휩쓸었다.
 
명동 의 빈대떡집에서 박인환이 시를 쓰자 극작가이자 언론가인 이진섭이 즉흥적으로 곡을 붙이고 그 자 리에 함께 있던 테너 임만섭이 식탁 테이블 위로 올라가 열창을 하였다는 뒷소문과 함께 명동 전체를 촉촉이 적시는 아름다움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명동엔 명동 성당이 있었다.
검붉은색의 고색창 연한 성당은 가톨릭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푸근한 위안과 정신적 안식을 주었다.
성모 마리아상 앞에서 기도하는 연인들의 모습은 그 자체가 천사처럼 아름다웠는데 우태와 민혜도 종종 이곳에 들 려 기도도 드리며 쉬기도 했다.
 
민혜는 함께 사는 민지 언니가 교회에 열성적이라 자주 같이 예배를 보았고 성가대에 참석하기도 했다.
우태는 기독교에 심취하지 않았지만 가끔씩 교회도 나가고 CCC 에도 참가한 경험도 있어 그런지 성당의 건물을 보면서 도심 속에, 더구나 명동에 이런 성당이 우뚝 서 있다는 자체가 축복처럼 여겨졌다.
이렇게 명동의 거리를 감상하며 학교에서 들이쉬는 최루탄의 뽀얗고 매캐한 냄새를 피해 민혜와 정답게 음악을 듣고 대화하는 시간들은 참으로 천국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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