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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司祭들의 주장-종교적.사제적 기준에 옳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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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류근일

‘사제단’이 그 동안 너무 특정한 방향으로 세속적 정치적 이념적 ‘운동(activism)’ 그룹화(化) 했다.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이라는 일부 사제들의 임의단체가 <추기경의 궤변>이라는 문건을 발표하고 정진석 추기경이 “주교회의는 난개발을 하지 말고 개발을 하려면 잘하라”고 한 것이라고 말한 신문 인터뷰를 비난했다.
 
 차제에 문제의 ‘사제단’과 생각을 달리하는 천주교 대다수 사제들과 평신도들에게 묻고 싶다.
귀하들은 왜 가만히 있는가? 이런 질문이 나올 때마다 “그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고, 그들에 대해 일일이 맞서다 보면 천주교가 마치 분열이라도 한 것처럼 보일까보아 침묵하는 것”이라는 설명이 따르곤 했다.
그러나 더 이상 그래선 안 되리라 본다.
 
 일부 사제들이 천주교라는 이름을 앞세워 공공의 문제에 관해 특정한 주장을 펴고 그 주장이 공정성과
보편성을 결여한다고 생각될 때는 정면으로 진지하게 반론을 펴는 것이 정도(正道)이지, 언제까지나
못들은 체, 못 본 체 피하기만 하는 것은 한 번 두 번도 아니고 오히려 당당하지 못하다는 평을 들을
우려가 있다.
 
 개인적인 관찰로는 이른바 ‘정의구현 사제단’이라는 ‘극소수’ 사제들의 임의단체는 1970년대 당시의
그들의 선배들의 담론(談論)이 갖추고자 했던 교회적 신학적 복음적 국민적 보편성과 정신적 권위,
그리고 다양한 개인과 집단들을 끌어 모을 광범위한 공감대 확보로부터 벌써 오래 전에 멀어진 것으로
비친다.
 
지금의 그들의 담론은 그 명칭을 떼고 보면 여늬 세속 운동 단체의 거친 성명서와 거의 차별성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그게 뭐가 나쁘냐고 반발하겠지만, 교회인과 사제신분의 담론이라면 그래도 뭐가 달라도 달라야 한다.
 
 4대강에 대해서는 물론 반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반대의 논리가 만약 ‘개발=오염과 파괴’ 일변도로 나간다면 그것엔 동의할 수 없다.
그보다는 하천보수, 홍수예방, 수자원 확보, 주변환경 정비 등, 그 취지는 좋으나 소통 없는 일방적
 졸속 난개발만은 없어야 한다는 정도로 비판의 논리를 조율(調律)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자세일 것이다.
 
 ‘사제단’은 그 동안 도심 광장에 집결해 ‘이명박 아웃’이라는 피켓을 들고 대규모 정치성 군중집회를
과시하기도 했다. 이게 교회적 종교적 사제적 기준에서 과연 마땅하고 옳은 일이었는가?
그것을 지지하는 정파와 진영(그들이 누구인지는 자명하다)들은 물으나 마나 ‘마땅하고 옳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 쪽 정파와 진영은 그것을 마땅치도 않았고 옳지도 않았다고 할 것이다.
그 만큼 ’사제단‘은 이미 세속적인 정치갈등의 한 쪽 당파가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권위주의 하에서 그들의 선배들이 ’하느님 모상 대로 창조된 인간의 기본적 인권에 대한 침해‘에
복음적으로 개입한 것하고, 오늘의 민주화 시대에서 그들의 후배 ’사제단이‘ 4대강 사업을 비롯한
정책사항에 일일이 “된다, 안 된다” 개입한 것은 결코 동일한 것일 수 없다.
 
사제들은 고도의 기술적 전문적 ’노하우‘를 요하는 공공사업에 대해 ’일반적인 우려‘를 표할 수는 있다.
그러나 대규모 토건사업 같은 고준위(高準位) 정책 문제는 비전문가인 사제들보다는 정책 전문가들의
토론에 맡길 일이다.
정부 당국자 역시 4대강 사업과 관련해 소통(疏通)의 성실성을 게을리 했다는 비판만은 면할 수 없다.
 
 사제의 현실참여는 복음적 진리의 문제가 걸린 고도의 보편적 관심사로 한정할 것을 요구받는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이다.
이에 비한다면 ‘사제단’의 관심사는 예컨대 지방선거에서 특정 정파가 승리하느냐 패배하느냐 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정치투쟁과 무관치 않은 듯한 양상을 결과적으로 빚어냈다.
 
지방선거와 때를 맞춰 “4대강 지지정당은 뽑지 말자”는 의사를 표출했다면 그런 활동은 종교행사를
특정 정파의 당선과 낙선을 위한 선거운동 판으로 만든 게 아닌가 하는 회의(懷疑)를 느끼게 할 만했다.
이것 또한 종교인들이, 사제들이 취할 정당한 현실참여 방식이라 할 수 있는가?
 
 추기경의 발언에 대해 이의(異意)를 제기할 경우에도 교회적인 품격을 살리기 위해, 그리고 교회 내부의 화합을 위해 그 표현과 태도만은 최대한 정중하고 예의 바른 방식을 취해야 할 것이다.
 
 ‘사제단’은 이 요청에 충실했다고 할 수 있는가?
 ‘사제단’이 추기경에 대해 제기한 쟁점들에 일일이 세밀하게 개입할 생각은 없다.
그것은 유관 교회 당사자들이 합당한 방식으로 풀어나갈 일이다.
 
 다만 집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사제단’이 그 동안 너무 특정한 방향으로 세속적 정치적 이념적 ‘운동(activism)’ 그룹화(化) 하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이 민주화 시대 종교인들의 현실참여의 보편타당한 모델인가 하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그에 대해 비판적이며, 따라서 깊은 유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 ‘사제단’과 다른 생각을 가진 교회인들이 더 이상 몰(沒)가치적인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해선
안 되리라 믿는다. 교회가 일부 사제들의 일방적인 마당인양 비치는 것을 언제까지 방관만 할 것인가?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http://cafe.daum.net/aestheticismcl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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