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左派 新自由主義 五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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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1514980709487983.gif 左派 新自由主義 五賊
작성자 1514980709487983.gif 김성한 1514980709487983.gif 2006-04-11 


左派 新自由主義 五賊

   한명숙 씨의 總理 指名으로 大統領·國務總理·黨議長·統一部長官·法務部長官 等 權力核心部가 親北으로 一色化됐습니다.


盧大統領 執權 4年 차인 2006年 3月 現在, 或者는 이들을 가리켜 ‘親北五賊’이라 부릅니다. 前述한 한명숙씨 以外 4人의 行蹟을 要約해보겠습니다.  


1. 盧武鉉 大統領 - 金正日 政權에 대한 條件 없는 사랑


盧大統領은 지난 1月25日 內外信記者 會見에서 美國의 北韓에 대한 制裁가 持續될 境遇 韓美間 摩擦이 不可避할 것이라고 再警告(?)했습니다.


그는 北韓 僞幣製造에 따른 美國의 對北金融制裁와 關聯, “韓國政府는 北韓體制에 대해 問題를 提起하고 壓迫을 加하고 또 때로는 崩壞를 바라는 듯한 美國 內 一部 意見에 同意하지 않는다”며 “아직은 아니지만...美國 政府가 그와 같은 方法으로 解決하려 한다면 摩擦과 異見이 생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떠한 形式으로도 金正日 政權을 制裁해서는 안 된다’는 立場은 就任 以後 盧大統領의 一貫된 路線이었습니다.


그는 “美國의 對北武力制裁 時 全面戰의 憂慮가 있다(2002. 12. 30 등)”는 論理로 武力制裁에 反對함은 勿論, “美國의 맞춤型 封鎖政策이 北韓을 制御하거나 屈伏시키는 데  果가 있을지 懷疑的으로 생각한다(2002. 12. 31 등)”며 非武力制裁도 反對해왔습니다.


 盧大統領의 ‘어떠한 形式’은 勿論‘어떠한 狀況에서도’ 金正日 政權을 制裁해서는 안 된다는 立場입니다.


그는 2005年 2月10日 北韓의 核武器 保有宣言 以後인 같은 해 4月 13日 獨逸 訪問 中 ‘디 벨트’紙와의 인터뷰에서 “一部에선 制裁까지 包含해 北韓에 대해 壓力을 行使하기를 바라고 있지만 對北壓迫을 强化한다고 해서 北韓이 核 프로그램을 抛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럴수록 狀況이 더 惡化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앞서 2004年 11月 12日 美國 LA訪問中에는 “1987年 以後 北韓은 테러를 恣行하거나 그 밖의 테러를 支援한 일이 없다”며“北韓이 核과 미사일을 外部의 危脅으로부터 自身을 지키기 위한 抑制手段이라고 主張하는 것은 여러 가지 狀況에 비추어 一理가 있는 側面이 있다”고 말 했었죠.


北韓의 核武器 保有, 人權問題, 痲藥·僞幣와 같은 不法行爲 등‘어떠한 狀況에서도’, 武力·非武力의‘어떠한 制裁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世上에는 모두 條件附 사랑뿐인데 盧大統領의 金正日 政權에 대한 사랑은 條件이 붙지 않습니다.


   純  情!


붉은 띠 머리 두른 或者들은 純粹한 民族愛(?)의 大統領을 자랑스러워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盲目的 사랑에는 國家가 가려지고, 同盟이 사라집니다.


大韓民國 正體性을 毁損해서라도...韓美間 葛藤과 緊張을 覺悟하고서라도 ‘사랑하겠다’는 것입니다.


盧大統領은 就任 直前인 2003年 1月 18日 KBS會見에서 “美國과 葛藤이 있더라도 (美國의) 北韓 攻擊은 막아야겠다고 생각하고 始作했다”고 主張했습니다.


그는 2003年 3月2日 東海 公海上에서 北韓 戰鬪機가 美軍 偵察機를 20餘分間 危脅한 事件과 關聯, 3月4日 美國에 대해 “너무 지나치게 나가지 말 것을 促求한다”고 했고, 3月5日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大統領은 國民의 安全을 責任지는 만큼 美國에 ‘지나친 冒險을 삼가라’고 要請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지난 1月25日 內外信 記者會見에서 美國의 北韓에 대한 制裁가 持續될 境遇 韓美間 摩擦이 不可避할 것이라는 警告는 이런 脈絡에서 一貫된 것입니다. 盧大統領은 ‘정말로’金正日 政權을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金正日 委員長이 韓半島 非核化가 故 金日成 主席의 遺訓이라고 强調한 데 대해 留意 한다(2005年 6月23日)”“金正日 委員長이 韓半島 非核化 努力에 대한 意志와 北核問題의 平和的 努力에 대한 原則을 갖고 있음을 確認했다(2005年 11月16日)”는 等 金正日 政權에 대한 信賴를 繼續 表現해왔습니다.


‘네가 나를 속일지라도, 네가 나를 해칠지라도 나는 너를 믿겠다’는 그야말로 純情입니다.


盧大統領은 급기야 2005年 11月19日 “北韓과 敵對關係가 發生할 것인가를 前提하고말하는 것은 對話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北韓과 친구가 되기 위해 誠意를 다해 對話를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金正日 政權과 親舊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狀況이 이러다 보니 盧大統領은 2005年 9月19日 ‘6者會談 共同聲明(이하 9·19宣言)’이 北韓의 核武器 廢棄義務 不履行으로 霧散됐음에도 北韓과 軍事交流를 主張하고 나섰습니다.


그는 2005年 10月12日 “韓半島平和體制와 東北亞 安保協力體制 定着은 우리의 生存과
繁榮戰略이자 반드시 實現해야 할 課題”라며 “앞으로 北韓과의 經濟 分野 交流를 持續的으로 擴大해 나가며 軍事 分野 交流도 活潑히 推進해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2. 鄭東泳 黨議長 - 北暴政 無差別支持·擁護·强化


鄭東泳 열린우리黨 黨議長 亦是 統一部 長官 在職 當時 金正日 政權에 대한 一貫된 支持·擁護·强化政策을 展開해 온 人物입니다.


鄭 議長은 北韓이 2005年 2月10日 核武器 保有宣言을 한 狀況에서 200萬KW 對北送電을
또 다시 提示, 軍事·政治·經濟·外交的으로 北韓과 運命共同體가 되는 新南北關係를 招來했다는 評價를 받고 있습니다.


鄭 議長은 2005年 7月12日 當時 “北韓이 核 廢棄에 合意하면 現在中斷 狀態에 있는 輕水爐 建設을 終了하는 代身 우리나라가 獨自的으로 200萬㎾의 電力을 送電方式으로 提供하겠다”는 內容의 `所謂‘重大 提案’을 發表했었죠.


그러나 北韓이 같은 달 22日 朝總聯 機關紙 朝鮮申報를 通해 “電力支援이 核武器 抛棄의 動機가 될 수 없다”고 하고, 24日 다시 “電力만으로는 朝鮮半島 平和體制가 樹立될 수 없다”고 反應하자, 金正日 政權에 ‘더 큰 膳物(?)’을 마련했습니다.


鄭 議長은 같은 달 26日 “北韓이 核 抛棄에 合意하면 南北間 ‘重大提案’을 協議하겠다”고 發言했고, 한 달 뒤인 8月26日 統一部는“北韓의 經濟再建과 有關國間의 關係正常化를 거쳐 ‘南北經濟共同體’로 發展해 간다”는 要旨의 大大的 對北經濟支援 프로그램을 發表했습니다.


鄭 議長은 2005年 8月11日“우리 立場에서 一般的 權利로서의 核 利用, 卽 農業用·醫療用·發電 等 平和的 目的의 核 利用 權利는 北이 마땅히 가져야 한다고 본다. 이 部分에서 韓國과 美國의 생각이 다르다”고 主張했고, 이 같은 所謂 ‘平和的 核 利用權’主張은 같은 달 23日, 25日에도 反復됐습니다



鄭 議長은 급기야 지난 1月22日 國防費를 줄여 “南北兩極化”等 5大 兩極化를 解消하겠다며 大韓民國 國防費로 金正日 政權을 支援하겠다는 主張을 하고 나섰습니다. 그는 2月18日 黨議長 受諾演說에서도 “5大 兩極化 바다를 건너 하나의 코리아를 만들겠다”며 이 같은 意志를 再確認했습니다.


 <停戰體制 崩壞 나선 鄭東泳>
  
統一部長官 在職 時 鄭 議長의 政策은 韓半島平和體制 實現이라는 目標 下에 進行돼 왔습니다.‘停戰 體制’의 ‘平和體制’로의 轉換을 意味하는 韓半島平和體制는 그간 北韓과 南韓 內 親北勢力이 主張해 온 對南革命論理였습니다. 停戰協定에 根據해 駐屯하고 있는 駐韓美軍을 撤收시켜 平和體制를 만든 뒤 ‘낮은段階聯邦制’乃至 ‘聯合制’를 거쳐 北韓과 聯北·聯共勢力이 主導하는 所謂 ‘聯邦制’統一을 이루겠다는 發想입니다.


鄭 議長은 2005年 8月15日 民族大祝典 南北共同行事 記念辭에서 “韓半島 停戰狀態를 終熄하고 恒久的 平和體制를 構築하자”며 北韓側에 平和體制 構築을 公式提案한 데 이어 9月19日·20日, 10月17日에도 이를 再確認했습니다. 같은 해 光復節에는‘停戰體制’의 ‘平和體制’로의 轉換을 象徵的으로 보여주는 北韓商船의 濟州海峽 通過가 許容됐죠. 


鄭 議長은 9·19宣言이 霧散된 狀況에서도 韓半島平和體制 實現을 밀어 부쳤습니다.


그는 2005年 10月24日 國會에서 “平和體制 構築을 넘어서서 南北聯合을 내다본다면 憲
法 3條의 領土條項을 손질해야 한다”며 北韓을 反國家團體가 아닌 國家的 實體로 認定
해야한다는 뜻을 披瀝했습니다.


그는 2005年 12月13日에서 16日 사이 濟州道에서 열린 第17次 南北長官級會談에서도 北
韓의 “國保法 撤廢” 要求를 受容,“對決時代의 낡은 觀念에서 벗어나 相對方의 體制를 定하고 尊重하여야 한다는데 認識을 같이하고 그를 위한 實踐的 措置들을 取해나가기로 하였다(第1項)”는 共同報道文을 發表했습니다.


<太極旗 거꾸로 달고 “同志”呼稱>


鄭 議長은 政策 外 各種 言行을 통해서도 國民들의 安保意識을 解體해왔습니다.
2005年 10月31日 西江大 特講에서 “金正日 委員長은 통 큰 指導者라고 밑에서 이야기 한다”고 말한 鄭 議長은 같은 해 12月 濟州長官級會談에서 太極旗 배지를 거꾸로 단 채 北側 代表團을“同志”라고 呼稱했습니다.


그는 2005年 3月14日 헨리 하이드 美國 下院 國際關係委員長이 “韓國은 누가 敵인지 分明히 말해야 한다”고 말한 것과 關聯, “適切하지 않고 同意하지도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같은 해 7月8日 알렉산더 버시바우 駐韓 美大使가 北韓을 `犯罪政權(criminal regime)으로 描寫한 것과 關聯,“政府는 6者會談을 毁損하고 惡影響을 미치는 要素가 增加하는것을 걱정하고 있다”며 不滿을 表出했습니다.


鄭 議長은 自由民主主義 體制에 挑戰하고 있는 親北勢力의 蠢動을 擴散시키는데도 一助
해왔습니다.
그는 2005年 1月4日 “(南北間) 體制競爭 政策은 이미 廢棄됐다”며 2004年 11月 情報
通信部가 接續 遮斷 措置를 한 30餘個 北韓 關聯 웹사이트 가운데 一部를 解除하겠다고
말했습니다.


訪北 不許 對象者인 利敵團體 祖國統一凡民族聯合(凡民聯), 韓國大學生總學生會聯合(韓
總聯) 所屬 人物들도 民族和解協力凡國民協議會(民和協) 等 合法的 團體의 構成員 身分
으로 訪北할 수 있는 길이 마련됐습니다.


3. 李鍾奭 長官 - 將星들에 “對北敵愾心 敎育 말라”指示


이번에는 李鍾奭 統一部 長官 차례입니다. 그는 宋斗律의 ‘內在的 接近法’을 借用, ‘
北韓의 論理로 北韓을 理解하자’고 主張해 온 學者입니다.


成均館大 行政學科 78學番인 李 長官은 1989年 ‘金日成의 抗日빨치산運動硏究’로,
1993年 ‘金日成 主體思想과 朝鮮勞動黨 硏究’로 碩·博士學位를  모두 成均館大에서
받았습니다.


李 長官은 碩士論文에서 金日成을 가리켜 “軍事指導者로서의 卓越性을 보여 준다”고
評價하며, 金日成의 ‘普天堡戰鬪’에 대해 “歷史的 意義는 결코 過小評價될 수 없다”
고 激讚했습니다.


그는 碩·博士 過程 以來 ‘眞正한 統一은 民族民主運動陣營이 韓國社會를 强占하는
帝國主義 勢力을 逐出하는 民族解放을 通해 可能하다’(月刊誌 「社會와 思想」 88年
9月號 等)는 要旨의 統一觀을 보여 왔습니다.


李 長官은 盧政權 出帆 以後 NSC事務次長으로서 外交·統一·安保政策의 立案 및 執行
全 過程에 參與하면서 金正日 政權을 支持·擁護·强化시키는 政策을 推進했다는 評價를
받고 있습니다.


‘李鍾奭의 NSC’는 2003年 2月‘東北亞中心國家論’을 筆頭로‘戰時作戰統制權 還收(2
003年 8月 等)’‘自主國防論(2003年 10月 等)’‘作計5029推進 中斷(2005年 4月 等)’
‘東北亞均衡者論(2005年 3月 等) 等 韓美同盟 破裂을 自招하는 非現實的 政策들을 連
發해왔습니다.


2006年 1月 初에는 北韓이 줄곧 主張해 온 對南政策이었던 韓美聯合독수리訓練(FE)과
韓美戰時增援訓練(RSOI) 延期를 推進하다 霧散되기도 했죠.


‘李鍾奭의 NSC’는 2年 間 對北퍼주기가 北韓의 2005年 2月10日 核保有宣言을 통해 失
敗로 立證됐음에도  △2005年 7月12日 200萬KW 對北電力提供 △2005年 8月26日 北韓에
대한 大規模 經濟支援(‘出帆 前半期를 마친 參與政府의 對北政策 成果와 向後 展望’
資料 中) △2006년 1月22日 鄭東泳 열우黨 常任顧問의 軍費減縮 통한 “南北兩極化 解
消”支援 等을 主導했습니다.


또 △2005年 12月 第17次 南北長官級會談에서 北韓의 國保法 撤廢 要求를 受容하는 共
同報道文 發表 △2004年 11月15日 “北 核 一理 있다”는 盧大統領 LA發言 △2003年 4
月16日 外交部 UN人權委 北韓人權決議 贊成投票 制動  △2003年 8月19日 盧大統領에게
‘保守團體 人共旗 燒却’과 關聯 北側에 遺憾表明토록 說得하는 等 對北屈從行態의
背景에도 ‘李鍾奭의 NSC’가 干與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李 長官은 個人的으로도 △2004年 6月15日 休戰線 隣近의 對北‘自由의 소리’放送 中
斷을 主導했고(2004年 6月 月刊朝鮮 報道) △2004年 3月‘參與政府의 安保政策 構想’
에서 主敵槪念 削除, 2004年 6月19日 陸士‘2004 無窮花會議’“北韓에 敵愾心 敎育
말라”講演 等을 통해 2005年 國防白書 主敵槪念 削除에도 影響을 미쳤습니다.


李 長官은 統一部 長官 就任 直後인 지난 2月16日 休戰線에 配置된 前方警戒哨所(GP;
Guard Post)撤收를 主張해 衝擊을 줬다. 그는 이날 午前 外交通商部 廳舍에서 在外 公
館長들을 對象으로 한 講演에서 “南北이 GP를 撤收하는 問題 等을 解決하도록 努力해
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GP는 休戰線 南方限界線에 設置돼 北韓軍의 動態를 把握하고 戰略的 軍事判斷을 左右하
는 現場情報를 確認*報告하는 任務를 맡은 곳이다. 軍事專門家들은 GP撤收는 對北防禦를
抛棄하겠다는 安保抛棄行爲라고 指摘하고 있다.


4. 千正培 長官 - 檢察人事에서 公安檢事 昇進 全無


왜 천정배(千正培)를 넣었는가 의아해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千장관은 대한민
국 반대편에서 보면 최고의 공신(功臣)입니다. 千장관의 재임기간 중 체제수호를 위한
‘마지막’ 권력기관으로 남아있던 검찰의 공안기능이 사실상 무력화됐기 때문입니다.


千長官은 2005年 10月12日 北韓의 對南戰略과 궤를 같이해 온 東國大 敎授 姜禎求를 庇
護키 위해 憲政史上 初有의 法務部長官 檢察指揮權을 發動했습니다. 그는 같은 달 14日
김종빈 檢察總長의 辭退를 비롯한 與論의 빗발치는 批判 속에서도 姜 敎授 不拘束을 밀
어붙였죠.


千長官은 2005年 10月21日 MBC 100分 討論에서 “個人的으로 國保法廢止 後 刑法補完이
바람직하다고 보지만 長官으로 있으면서 國保法이 實定法으로 存在하는 限 無力化시키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實際 온 오프라인 상에서 亂舞하는 金正日 政權에 대한 鼓舞·讚揚 및 南韓 利敵·
親北團體 關係者들의 北韓 對南關係者들과의 通信·會合에 대한 國家保安法上의 制裁는
事實上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 같은 雰圍氣를 反證하듯 지난 2月1日 檢察 人事에서 公安 檢事는 單 한名도 檢事長으
로 昇進하지 못했습니다.


千長官은 이러한‘公安’홀대 指摘에 대해 2月10日 言論과의 인터뷰에서 “時代가 變化하
고 있고 그 變化에 따라 公安部의 機能과 業務領域이 合理的으로 再調整되고 있다”는 말
로 直接的 對應을 回避했습니다.


그러나 檢察組織에서 昇進漏落은 “이제 公安檢察로 일하지 말라”는 가장 强力한 指示입
니다. 國家考試에 여러 차례 首席했다는 千長官의 有能함(?) 德分에 國家保安法은 植物人
間으로 轉落하고 말았습니다.


한명숙 議員을 包含한 이 다섯 名을 여러분들은 어떻게 부르실 생각입니까? ■


김 성 욱 (파스코리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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