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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늙어 가는 아내에게

fabiano 0 1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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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했잖아.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곱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고주고 싶게 유난히 커 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 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부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 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저도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 알 한 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있는 만큼 그대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 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 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 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 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 묻힌 손으로 집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 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 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 일거야.



- 늙어가는 아내에게, 황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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