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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長津湖) 전투

fabiano 0 1117  
 長津湖 전투

장진호 전투는 1950년 10월26일 원산에 상륙한 미 해병1사단과 미 육군7사단 병력 일부가 개마고원에 있는 장진호 인근으로 진격했다가 중공군 6개 사단에 포위되었다가 탈출, 그해 12월15일 흥남에서 철수하기까지 50여일에 걸쳐 치른 전투를 말한다.  당초 미군은 원산에 상륙, 개마고원을 넘어 서쪽으로 진격해 서부전선에서 북진해 오는 유엔군과 함께 북괴군을 포위,섬멸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미군이 개마고원 깊숙이 진격해 들어갔을 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12만 명의 중공군 9병단 병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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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육군 7사단 및 7사단에 배속된 한국군 병력(카투사)이 중공군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가운데, 미 해병1사단은 그야말로 영웅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투혼을 발휘했다. 이들은 낮에는 영하 20도, 밤에는 영하32도까지 떨어지는 살인적인 추위 속에서 밤낮없이 중공군과 싸우면서 장비와 건제를 고스란히 유지하면서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흥남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후퇴가 아닌 뒤로 공격하는 최고의 철수작전

미국의 전사가 에드윈 P.호이트는 해병대의 장진호 전투를 두고 "군사상(軍史上) 가장 위대한 후퇴 작전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다. 하지만 '후퇴작전'이라는 표현에 대해 장진호 전투에 참가했던 미 해병대원들은 강하게 반발한다.  "그건 공격작전이었지, 후퇴작전이 아니었습니다. 장진호 전투 전체가 공격작전이었다는 말입니다. 처음에 우리는 북쪽으로 유담리까지 쳐올라갔고, 다음으로는 유담리에서 서쪽으로 1500m지점까지 공격해 갔으며, 그리고는 남쪽으로 유담리에서 황초령까지 공격했습니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우리가 그러는 중에 후퇴한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우드로 윌슨 테일러)

"우리는 수동에서 중공군과 처음 조우했을 때부터 그들을 무찔렀고, 나중에 답교를 건너면서도 그들을 무찔렀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항복했지, 그 반대가 아니었습니다. 후퇴라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겁니까?" (조셉 오웬)

당시 미 해병1사단장 올리버 스미스 소장도 "우리는 후방으로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후방으로 공격한다"고 일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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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리버 스미스 소장

 

오끼나와 상륙작전보다 더 큰 피해를 본 미해병1사단

장진호 전투에서 미 해병1사단은 700여 명의 전사자와 200여 명의 실종자, 3500여 명의 부상자를 냈다. 그밖에 6200여 명의 비전투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들은 대부분 동상환자였다. 이에 반해 중공군 9병단은 2만5000명의 전사자와 1만2000명의 부상자를 내고, 사실상 전투력을 상실했다.  미 해병1사단의 감투 덕분에 동부전선으로 진격했던 다른 미군과 국군 부대, 그리고 10여 만 명의 피난민들이 철수할 수 있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중공군 9병단의 전투력을 사실상 마비시켜, 중-동부 전선에서 중공군의 남하를 차단했다는 점이다.  당시 서부전선에서는 중공군13병단의 공격으로 유엔군이 일패도지하고 있었다. 서부전선의 유엔군은 이듬해 1월에는 다시 서울을 중공군에게 내 주고, 오산-제천-원주로 이어지는 북위37도선까지 후퇴해야 했다.  만일 미 해병1사단이 장진호에서 중공군 9병단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안겨주지 못했다면, 9병단은 중-동부전선으로 남하해 서부전선의 13병단과 함께 유엔군을 강하게 압박했을 것이다.

 

중공군13병단의 공격만으로도 유엔군이 북위37도선까지 후퇴해야 했던 것을 상기하면, 9병단 12만명이 중-동부 전선에서 함께 남하했을 때, 그 결과가 어떠했을지는 충분히 상상이 된다. 아마도 유엔군은 전면적으로 패퇴해 한반도에서 철수했을 것이고, 우리는 강정구가 그렇게 염원하는 것처럼 공산화된 한반도에서 질곡의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미 해병1사단의 감투가 한반도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 장진호 전투를 다룬 마틴 러스의 <브레이크아웃-1950 겨울, 장진호 전투>에서 인상적인 대목들을 소개해 본다.

 

    미해병 1사단은  인해전술로 덤비는 중공군보다  개마고원의 강추위와 더 처절하게 싸워야 하였다.  이 추위는

2차대전을 치루었던  그 어떤 미군도 경험해 보지 못한 그런 추위였다. 

 

2. 미해병의 가장 무서운 적은 바로 개마고원의 추위

장진호에서의 끔찍했던 추위에 대한 증언들부터 보자.  <5연대 의무대장이었던 체스터 레슨덴 해군소령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용해가 안 되고, 수혈관이 얼음조각 때문에 막혀서 혈장을 사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붕대를 갈지도 못했는데, 붕대를 갈기 위해 장갑을 벗으면 손이 바로 동상에 걸리기 때문이죠. 상처부위를 살펴보기 위해 부상자의 옷을 자를 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몸이 얼어버리기 때문이죠....한 가지 긍정적인 점은 추위 때문에 지혈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무기가 추위 때문에 성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수류탄은 잘 터지지 않았고, 중기관총 총열의 냉각통에는 부동액을 채워야 했다. 또 경기관총은 얼어붙는 것을 막기 위해 목표물이 있건 없건 몇 분 간격으로 사격을 계속해야 했다....따뜻한 텐트 안에는 눈을 녹인 물을 석유난로에 끓여서 꽁꽁 언 C-레이션을 끓는 물 안에 던져 넣었지만, 대부분 바깥쪽만 녹아서 얼어 있는 안쪽까지 먹어치운 해병들은 심한 장병과 설사를 겪어야만 했다.>

물론 추위는 미군뿐 아니라, 중공군에게도 끔찍한 시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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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때 버려진  미 해병 1사단 차량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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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병의 전통으로  부상자 뿐만 아니라 전사자도  함께 철수 하였다.

 

<쉐퍼 병장이 다가와 데이비스에게 보여줄 것이 있다고 말했다. 쉐퍼를 따라간 중령은 그가 몸을 낮춰 중공군으로 판명된 커다란 얼음덩어리를 참호에서 끌어내는 것을 보았다. 그 중공군은 그때까지도 살아 있었고, 데이비스는 그의 눈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주위에 그런 모습의 중공군이 여러 명 있었는데, 몸을 따뜻하게 하려고 참호에 여러 명이 함께 들어갔다가 대부분이 얼어죽은 것 같았다.>

 

중공군들은 포로를 만들지 않았다.

<중공군은 황량한 고지에서 내려와 트럭들을 샅샅이 뒤지면서, 따발총의 총구를 높이 들어 그 안에 타고 있던 미군 병사들을 사살해 버렸다.

중공군은 포로 획득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들의 후방에서 잠재적 골칫거리가 될 지도 모르는 미군들을 미리 제거해 버리겠다는 전술적 목적으로 미군들을 사살했다. 이런 일이 발생하기 시작하자 차량행렬을 따라갔던 많은 미군 병사들이 호수 쪽으로 방향을 틀어 가능한 한 빠르게 호수의 얼음 위를 달려나갔다. 보름달이 그 고통스런 광경을 환히 비춰주고 있었기 때문에 중공군은 사격 목표물을 찾아내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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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혹독한 상황 아래서 해병대원들은 불굴의 투혼을 발휘했다.

<1개 분대의 병력을 거느린 윌리엄 G.윈드리치 하사가 적군의 역습을 오랫동안 저지하여 I중대가 어둠 속에서 재편성을 마치도록 했는데, 그 과정에서 12명 중 7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수류탄 파편에 머리를 다치고도 후송을 거절한 윈드리치는 1소대를 이끌고 돌격하다가 다시 부상을 입었다. 접근하는 위생병에게 오지 말라고 손을 저으며, 그는 "아직 아냐"라고 말했으나, 몇 분 후 숨을 거두었다.>

부상병들도 다시 무기를 들고 싸워야 했다.

<해리슨 포머스는 구호소 텐트에 들어온 바버 대위가 병력이 부족해 부상자들 중에 사선으로 돌아올 자원자가 필요하다고 설명하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여러 명의 부상자들이 간신히 일어나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들의 이름을 지금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들은 모두 영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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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병대원들은 치열한 전투를 치르면서 수많은 전우들을 먼저 보내야 했다.

<앨런 헤링턴 상병 ; "우리가 그들을 위해서 하갈우리라는 외부로 나가는 관문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기분이 좋았습니다. 도로 장애물 옆에 서서 친구나 아는 사람들을 찾았지요. 부대 하나가 지나갈 때마다 내가 아는 하사관을 찾으면 그 부대의 누군가가 트럭 뒤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전사'라고 말했습니다. 잠시 동안 거기 서서 얼어붙은 시신들이 트럭에 실려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는데, 가끔씩 아는 얼굴들도 있었습니다. 대부분은 모르는 얼굴들이었지만, 그래도 그들 모두는 내게는 개인적 슬픔으로 다가왔습니다. 피가 흐르다가 얼어서 고드름이 된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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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의관 헨리 리트빈 중위에게는 이스트힐 전투가 긴 악몽의 일부분 같았다.

"부상당한 해병의 철모를 벗겼을 때 그의 심장이 그때까지 뛰고 있었는데도 뇌수가 냄비의 스튜가 쏟아지듯이 골 밖으로 나와 있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참혹한 모습에 가슴이 저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는데, 그를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모두가 영웅은 아니었다.

<새벽이 가까워졌고 준비를 갖추고 이동할 시간이었다. 중화기 중대 소속 랄프 뵐크 일병의 기관총 반원인 어린 해병이 더 이상 못 가겠다고 버텼다.

"그 친구는 키가 180센티미터난 되는 텍사스 출신이었으며, 나이는 18살이었는데....'더 이상 안 가겠어요'라고 그가 말했죠. 처음에는 농담하는 줄 알았습니다, 우리가 침낭을 둘둘 말아 싸고 이동할 준비를 하는 동안 누워만 있더라구요....그 친구는 내 말이 안 들리는 것 같이 굴더군요. '할 수 있을 만큼 했어요. 더 이상 안 가요'.... 그 친구는 모든 걸 포기한 거였어요. 혼이 빠져나간 거죠. 마침내 중위가 '출발해야 해'라고 말하고는 그 친구를 운반할 자원자를 찾기에 나도 자원했습니다. 그 불쌍한 애를 끌고 산과 계곡을 건너 2킬로미터는 족히 갔을 겁니다."

...행군하기를 거부했던 그 18살짜리 텍사스 친구는 구호텐트로 옮겨졌고, 그의 상태를 점검한 위생병은 아무 부상부위나 상처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 어린 친구는 단지 살고자 하는 의지를 잃어버린 것이었다. 그는 폭스힐에 도착한 지 3시간 만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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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혹독한 전장에서 꽃핀 해병들의 전우애에 대해 역사가 린 몬트로스는 이렇게 말했다.

<전투력이 기강이나 무기의 성능보다 다른 무엇에 의해 결정되는 때가 있는데, 그걸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전투원이 자기 옆의 동료를 끝까지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고, 반대의 경우도 성립될 때 갖게 되는 감정입니다. 전쟁은 잔혹한 것이지만 사전에서 자주 목격할 수 있는 이타심만큼 멋진 것은 이 세상에 없지요. 사소한 것들이 그 순간에는 사라져 버립니다.>

 

중공군들이 피난민들을 방패막이로 삼는 바람에 미군들은 적잖은 고생을 해야 했다. 이에 관한 증언들은 이 책 여러 군데에서 나오는데, 소위 노근리 사건을 비롯해 6-25 전쟁 중 미군이나 국군에 의한 양민학살사건(?)이라는 것이 어떤 상황 아래서 발생한 것이었나를 짐작하게 해 준다.

<마지막 전차 뒤에서 시끄럽게 떠들면서 몰려오고 있던 피난민 대열 속에서 동요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있던 피트 블랜드 병장은 누군가가 중국어 억양이 강한 영어로 일단의 중공군이 투한하고자 한다고 말할 때까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랐다.

"중공군 병사들이 지금 항복합니다"라는 말이 반복해서 들리자 블랜드는 소대장에게 보고하려고 도로를 따라 걸어 내려갔고, 소대장과 그가 돌아왔을 때 전투가 바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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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담리 최초의 중공군 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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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전투에 투입되는 중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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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전투에서의  중공군 사령관들

 

 

기관총을 진지 오른편에 설치한 지글러 일병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오던 선두의 중공군이 비무장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미오트는 뒤에 오던 4명의 중공군이 따발총으로 무장했다고 단정했다...딱딱 소리와 함께 방망이 수류탄이 피난민 대열 속에서 날아와 폭발하는 바람에 하겟은 땅바닥에 쓰러졌으나, 몽롱한 정신상태로 땅에 누운 채 아미오트가 자동소총으로 그 허둥거리는 중공군 다섯 명을 사살하는 소리를 들었다.시끄러운 총소리가 산과 계곡 사이에서 메이리치더니 서서히 사라져갔다. 민간인 한 명이 "많아,많아"라고 한국말로 외치는 소리를 들었던 하겟은 나중에 가진 인터뷰에서 그 남자는 피난민 속에 침투한 적이 많다는 것을 미군에게 경고하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블랜드 병장 ; "그러던 중에 피난민들 속에서 중공군이 벌떼처럼 튀어나왔고, 동시에 측면에 있던 철도 제방에서도 중공군들이 몰려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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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전투는 강력한 미군의 항공력 지원이 결정적이었다.  항공력은 미해병의 구세주였다. (F4U 콜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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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상에서 출격 준비중인  콜세어기. (장진호근처엔 소련이나 중공군의 항공전력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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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기로 후송하는 모습.   장진호 전투에서 헬기의 전술적 가치가 최초로 입증되었다. 고정익기가 접근할 수

없는 위치에서  헬기의  수송및 부상병 후송작전은 또 다른 장진호 전투의 보석이었다.

 

 

 

3.

<브레이크아웃>에는 그밖에도 많은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나온다. 전우의 시체라도 버리지 않고 오려는 미 해병대원들의 눈물겨운 노력, 병사들과 고락을 같이하는 사단장, 전우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장병들, 굽히지 않는 전투의지, 유머....

 

장진호 전투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잘 훈련되고 감투정신에 불타는 불과 1만여 명의 미 해병1사단 장병들은 한반도의 운명을 바꾸었다. 그것은 말단 소총소대의 병사 한 사람 한 사람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 결과였다.

 

지금 우리 애국세력은 장진호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됐던 미군들보다 더한 위기에 놓여 있다. 좌익세력은 운동권,시민단체, 인터넷 매체는 물론 방송, 경찰,검찰, 사법부, 교육계까지 장악하고, 애국세력을 포위하고 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진지는 좌익들이 장악했다. 나라를 걱정하는 애국세력들이 적지 않지만,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마치 장진호 전투 당시 미 육군7사단이나 거기에 배속된 한국군 병사들처럼 싸우는 방법도 모르고, 싸울 의지도 없이 지리멸렬해 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고 손들고 포기할 수는 없다. 앞에서 나는 아무런 부상도 없으면서도 단지 '살고자 하는 의지'를 잃어버린 것 때문에 죽은 병사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개인이나 집단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여기서 우리가 포기하면, 진짜 대한민국은 죽고 만다. 대한민국이 죽으면, 우리도 죽는다.

하지만 장진호 전투에서 대부분의 미 해병1사단 장병들은 혹독한 추위와 압도적으로 우세한 적의 공세 속에서 '죽기로 싸웠고',그러는 가운데 살 길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들의 용전분투의 결과, 대한민국도 살았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다. 애국세력들을 미 해병1사단 장병들처럼 불굴의 투지와 전우애로 뭉친 전투집단으로 조직화하고, 훈련시키야 한다. 그리고 인터넷 상에서, 거리에서, TV토론장에서 좌익들과 '죽기로 싸워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살고, 대한민국이 사는 길이다

 

출처 :
양 재 혁 (詩 的 自 由) -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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