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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그현장]60년대 한국영화진흥 큰 획을 긋다

fabiano 9 2701  
 
영화속 주인공 보려고 대전시내 인산인해
중도일보 ‘白馬賞’ 영화제

[대전=중도일보] 중도일보, 67~71년에 5회 개최
한국영화의 황금기 견인차 담당

당대 대종상 버금가는 인기행사
목마른 시민정서에 ‘단비’ 역할                                              
                                                                                               [안영진 중도일보 煎 주필]   2007. 05. 03.


60년대 후반, 중도일보가 ‘白馬賞` 영화제를 거행했다면 젊은 층에선 의아해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67~71년에 걸쳐 5회를 치른 이 행사는 대전을 환호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일대사건이었다. 요즘은 TV와 비디오 등살에 극장은 소형화추세지만 흥행만은 꾸준하게 이뤄지고 있다.

6?25전란 후, 70년대 중반까지 영화란 시대의 ‘기린아`요, 정서에 굶주린 국민들에겐 더없는 양식거리였다. 지금은 부산영화제와 전주영화제가 있지만 ‘백마상`은 당시 ‘대종상` 다음으로 인기가 높았다. 영화제하면 출품작을 상영, 심사를 거쳐 시상하는 게 순서지만 그때는 환경이 여의치 못해 방화(국산영화)만을 대상으로 삼았다.

그때는 작품.감독상보다 배우(주연, 조연, 신인상)에 관중의 눈이 쏠려 시상식장은 흥분과 환호, 갈채의 도가니였다. 어떻든 중도일보(지방지)가 주최한 이 잔치는 시민정서와 영화진흥에 기여한 것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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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배우 문희씨(중앙)와 심사위원들이 함께 한 기념사진(문희씨 좌측이 필자).


영화의 선구자는 ‘프랑스`

영화의 원조(元祖)가 프랑스라지만 그것이 예술의 ‘장르`로 자리를 굳힌 것은 무용, 음악, 미술, 문학에 뒤지는 1895년의 일이다. 영화의 모태인 ‘사진`에 갖가지 기능과 기계를 연결, 영화형태를 갖춰 시사(試寫)한 것은 프랑스의 ‘오거스트 뤼메르`와 ‘루이스 뮈메르` 형제였다.

그때는 지금처럼 1~2시간짜리 필름이 아니라 각기 다른 테마(1~2분짜리)를 묶어 방영했다. 여기서 움직이는 사진 앞에 관객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달리는 기차의 씬(Scene) 앞에 비명을 질렀다고 역사는 증언한다. 관객은 지금처럼 스크린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천체(天體) 망원경을 다루듯 좁은 구멍을 통해 관람하는 원시형태였다.

그 무렵 영화란 과학적인 발명품이라거나 새로운 미디어로 간주,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 마술, 또는 ‘환상적 사기술`로 치부했다. 그것이 예술의 한 장르로 자리매김한 것은 20세기에 접어들어서였다. 처음에는 ① 렌즈 ② 기계와 전기 ③ 화학물질의 기능 ④ 인간욕구에 의해 만들어진 발명품으로 파악을 했다.

다시 말하면, 촬영기와 셀룰로이드 필름을 합성시키고서야 비로소 제 구실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선진국들이 치열하게 경쟁을 벌인 결과 오늘과 같은 시대적 총아로 자리를 굳혔다. 오늘날 영화는 어쩔수 없이 미국이 선두요, 그 다음이 프랑스, 독일, 영국, 러시아 순으로 평가하는 게 일반적인 경향이라 하겠다.

미국에선 영화를 국가 4대산업의 하나로 지목, 추진해온 바람에 세계의 영화시장을 휩쓸고 있으며 우리는 일본영화와 미국영화에 진작부터 익숙해 있다. 일본은 36년간 우리를 지배한 역사성 때문이고 미국영화는 해방이후 줄곧 우리 시장을 주름잡아온데 그 까닭이 있다. 우리의 뇌리에 아른거리는 미국영화를 무작위로 열거해 보자.

‘벤허`, ‘쿼바디스`, ‘무기여 잘 있거라`, ‘콰이강다리`, ‘도라 도라 도라`, ‘소돔과 고모라`, ‘흑선(黑船)`, ‘남태평양`, ‘로마의 휴일`, ‘25時`,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초원의 빛`, ‘대지(大地)` ‘노인과 바다`, ‘황야의 무법자`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만큼 우리는 미국영화에 마취(?)되어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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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 영향을 받은 한국영화

우리 보다 한발 앞서 개항(開港)을 한 일본은 영화에서도 앞질러 갔다. 흉내를 잘 낸다고 ‘몽키`라는 별명을 받은 일본이다. 이에 걸맞게 일본은 1897년 영화를 자체 제작하기 시작했다. 나운규가 1929년에 ‘아리랑`을 제작했으니 우리보다 32년이나 그들이다. 그 당시 일인들은 영화를 ‘활동사진`이라 불렀는데 그것은 무성영화시대 이야기다.

이어 발성영화(터키)를 만들며 태평양전쟁과 전후라는 단계를 거쳐 ‘시네마스코프`를 제작, 국력에 걸 맞는 영화산업을 일으켰다. 우리 영화는 개화기, 일본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장족의 발전을 했다. 가요계도 마찬가지다. 일본의 ‘엥카`와 우리 대중가요는 가사와 곡조, 무대분위기 모두에 있어 유사하다는 점은 눈 여겨 볼 대목이다.

그들은 중?일 전쟁과 태평양전쟁 시엔 군대의 무용담 ‘사무라이`극 일색으로 나갔다. ‘외눈과 한손잡이(당게사젱)` 영화와 ‘미야모토 무사시`, ‘마라이(馬來)의 하리마오`, ‘육탄삼용사`, ‘니시스미大尉` 등 전쟁물이 판을 쳤다. 1945년 패전 후엔 문예물과 서민의 애환을 담은 서정물을 제작, 감독상, 작품상, 주연상 등 국제영화제를 석권한 때도 있다.

일본영화의 해외수출은 역시 전후의 일로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의 ‘라쇼몽(羅生門)`은 일본열도를 뜨겁게 달궜다. 이어 ‘사이카쿠(西鶴)`와 ‘미소구치(溝口)` 그리고 ‘기누카사(衣笠)`의 작품이 국제영화제에서 연이어 수상하는 등 황금기를 맞는다. 뿐만 아니라 영화 ‘일본곤충기`는 일본제국주의 시대를 배경으로 가난한 집안출신, 한 여성의 인생 유전(流轉)을 그린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또 야쿠자세계를 그린 ‘도쿄방랑자(東京流れ者)` 역시 해외에 널리 알려진 작품이고 ‘벌거벗은 섬(裸の島)`은 주연배우를 제외하고 모두를 현지주민을 동원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모스크바 그랑프리상을 받았다. 이밖에도 눈을 끄는 것은 ‘미친과실(狂つた果實)`로 이는 현재 도쿄도지사 ‘이시하라(石原愼太郞)`의 원작을 그가 직접 각색을 하고 그의 동생 ‘유지로`가 주연을 맡았으니 형제 합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시하라`는 소설가로도 유명하지만 도쿄도지사 3선을 따낸 정객으로 그의 소설 ‘太陽의 季節`은 일찍이 젊은이의 우상이었다. 오늘에 와선 정치적으로도 대성,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을 외쳐 국민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하지만 우리 한국민과는 ‘감정의 골`을 파놓은 인물이라 선입견이 좋지 않다.

한국영화가 걸어온 길

한국영화는 80년의 나이테를 자랑하지만 1929년 나운규가 제작한 ‘아리랑`이 그 효시라는 걸 모를 사람은 없다. 일제하, 해방, 6?25라는 전환기를 타고 넘으며 장족의 발전을 거듭해온 게 사실이다. 아리랑 제작자 나운규는 항일혐의로 한 때 형무소 생활을 한 일이 있으나 출옥 후 ‘풍운아`, ‘벙어리삼룡`, ‘오명녀` 등 민족정기를 담은 영화를 제작했다.

하지만 일제 말 ‘남편은 경비대로`, ‘금강한` 등 일본영화에서 악역을 맡는 등 친일 쪽으로 기울어 명예를 구겼다. 그의 동향(회령)친구 윤봉춘은 해방 후 ‘자유만세`, ‘유관순`, ‘윤봉길의사`, ‘논개`, ‘성불사`, ‘다정도 병이런가?` 등 많은 작품을 남겨 대조를 이뤘다.

현재 한국영화는 세계적 수준에 와 있으며 1970년 이전에도 ‘성춘향`, ‘순애보`, ‘자유부인`, ‘산유화`, 찔레꽃‘,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오발탄`, ‘마부` 등을 내놓는 바람에 황금기를 맞이한다. 이때 중도일보가 ‘白馬賞` 제도를 마련, 5회까지 이를 끌고 갔다. 요약하면, 한 해 영화와 가요계를 빛낸 가수와 배우에게 시상을 하는 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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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남우주연상으로는 김진규, 최무룡, 김희갑, 남궁원, 조연상에는 최남현, 장동휘, 박노식, 남춘역, 여자 주연상은 황정순, 문정숙, 도금봉, 조미령이 뽑혔다. 신인상은 문희, 태현실, 남정임, 고은아가 환호 속에 트로피를 안았고 가요대상은 정은희, 김부자, 이미자 정미조, 신인상엔 김상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은 1~2주 걸리는 행사지만 당일 잔치인데도 대전 시내가 뒤집히는 그런 분위기였다. 기관장들만 차를 몰고 다니던 시절, 군부에서 30여대의 무개차를 빌려 수상자를 태우고 거리를 행진했으니…. 거기엔 군악대가 앞장을 섰다. 도청 앞 광장 - 역전 - 인동네거리 - 충무체육관 - 대고오거리를 거쳐 식장으로 가는 코스였다.

수십 명의 배우와 가수가 무개차(無蓋車)를 타고 시가행진을 했으니 그것은 난리 속이었다. 호루라기를 불며 거리를 정리하는 교통순경, 쏟아져 나온 군중의 환호성, 도청과 시청, 고층건물 창가엔 사람들이 줄줄이 매달려 함성을 질렀다.

손을 흔들며 관중에게 답례하는 수상자들…. 시상식 앞좌석(중앙)엔 도지사와 각급 기관장, 그리고 군 장성들이 자리했다. 행사전후 식사 때 화월식당(역전통)과 ‘옥림(요정)` 골목은 인파에 막혀 이를 정리하느라 교통순경들이 식은땀을 흘렸다. 유리창(정문)이 깨지는 소동이 벌어지고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영화제` 치른 뒤의 일화

‘영화제`를 치르고 나면 이런저런 뒷이야기가 있기 마련이다. 당시 대전에는 ‘옥림`이라는 요정이다. 그 주인은 유성호텔 특실(박대통령 전용) 당번을 지낸 ‘군자(기미꼬)`였다. 필자는 그집에서 외상술을 퍼마신 일이 있어 그녀를 알고 있는데 한 번은 필자에게 이런 제안을 해왔다. ‘식사대, 술값을 일체 안 받을 테니 수상자 전원 초청한다기에 이를 수락, 행사경비를 줄인 일도 있다.

한번은 심사를 같이 본 작곡가 ‘박춘석`을 따라 유성 ‘만년장`에서 코가 비뚤어지도록 마셔댔다. 알고 보니 ‘문정선`이 테스트를 받는 밤이었다. 권서정(유성온천사장)이 박춘석에게 문정선을 추천했다는 것이다. 작곡가 앞에선 가슴이 떨린다며 포장을 늘인 무대 뒤에서 노래를 불렀다.

성량이 굵고 꽤나 발랄해 보이는 지망생. 그녀는 박춘석에 의해 그렇게 데뷔했고 지금도 ‘보리밭`은 문정선의 대표곡으로 꼽힌다. 또 한 가지, 최무룡이 남우주연상을 받던 날, 그를 따라 ‘만년장`에서 밤새 퍼마시고 이튿날 아침 해장을 하는데 ‘형! 시내로 나가자구!` 재촉하기에 따라 가보니 양복점이었다.

그는 얼른 재라고 했다. 당혹해 하는 필자를 향해 “형!, 나 최무룡이 아시아의 스타라구!” 이렇게 몰아붙였다. “기분이라니까….” 그 바람에 양복 한 벌을 얻어 입었지만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달아오른다. 그 다음은 여우주연상의 황정순 차례다. 오래전 TV에 출연, ‘나의 애장품(愛藏品)이라는 프로에서 중도일보 영화제를 하는 걸 본 이가 여럿 있다.

수상한 트로피(백마상)를 어느 자선행사에 내놓았다가 되돌려 받았다는 뒷이야기…. 그것은 순금이 아니었다. 그 바람에 지금도 애장품 1호로 소장 중이라 했다. 중도일보가 주최했던 ‘白馬賞` 영화제…. 이제는 망각의 늪에서 동면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시대, 역사의 한 구간, 시민정서 선양과 영화진흥에 기여했음을 그 누가 부인할 것인가.
<안영진 중도일보 煎 주필의 다른기사보기>

9 Comments
fabiano 2009.02.28 05:42  
이 포스트는 대전의 중도일보의 안영진 전 주필께서 쓰신 글로서 그 당시(1967~1971), 지방紙에서 주관개최한 영화상 에 관한 것으로 귀중한 포스트여서 발췌했습니다. 이러한 포스트는 널리 알려 영화지망생이나 관련자료로 활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여쁜 나 2017.03.17 20:08  
요새 영화제 시상식에서 여배우들의 노출의상들을 사진들로 보니까 너무 야하더라구요? 참고로 노출심한 드레스를 처음으로 선보인 우리나라 여배우는 지금도 활동중인 김혜수씨인데요? 1990년대중반부터 가슴푹패인 드레스를 입기시작해 현재에 이르게 되었고 그전까지는 화려한 드레스라 할지라도 노출이 거의없는 공주풍이나 왕비풍이 대다수였더군요? 하기야 북한에서도 평양국제영화제 시상식에 참여한 북한여배우들을 보면 전부 한복아니면 양장차림인거 두말할것도 없죠~!!!!
fabiano 2017.03.19 00:09  
─━★
어여쁜 나 2017.03.21 12:34  
노출의상을 전면금지하는 이란에서야 말을말죠~!!!! ㅡㅡ;;;;;;;
fabiano 2017.03.24 20:28  
아무렴은...
어여쁜 나 2017.04.26 16:17  
하루빨리라도 남북통일이 되어 우리나라 여배우들과 북한여배우들이 서로 웃으며 잘지내기를 기원하는바인데....!!!!
fabiano 2017.04.27 21:44  
남북통일은 되어야 하는데...
어여쁜 나 2017.07.17 21:37  
남북통일이 되면 저는 평양에 가서 직접 북한의 배우들을 만나 이야기도 하고 사진도 찍고 그랬으면 좋겠네요? 근데 김정은 이새끼땜에....!!!!
fabiano 2017.07.18 13:23  
그러면 좀, 좋으랴만은...뚱돼지 녀석땜에... 북한이 하루빨리 붕괴되어야 하는데...누구는 직접 한번 만났으면 하고... ㅉㅉ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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