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site-verification: naverf83ad7df1bcc827c523456dbbc661233.html 백남준의 예술 인생 "원래 예술은 고등 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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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의 예술 인생 "원래 예술은 고등 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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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쾰른 미술관에 76년 작업한 ‘TV 의자’에 앉아있는 백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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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오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을 찾은 관람객들이 서울올림픽을 기념한 백남준씨의 작품 ‘다다익선’을 감상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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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의 1974년 작 ‘TV 부처’. 명상하는 부처가 TV 모니터와 마주한 자세로 놓임으로써 다시 텔레비전 화면 안에서도 부처는 명상에 든다.
29일(한국시간 30일) 타계한 백남준(白南準)은 전 세계에 통하는 상표를 여럿 지녔던 드문 한국 예술가였다. '비디오 예술의 선구자' '전위 음악가' '행위 예술가'로서 그는 유명세를 치르며 살았다. 21세기 초인 지금까지 백남준이 이룩한 명성과 예술적 성취를 뛰어넘을 만한 한국 출신 예술가는 나오지 않았다. 그는 서구 예술판에 뛰어들어 인정받은 아시아인이자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로 꼽힌다.

1996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고서도 그는 성공 신화의 주인공답게 좌절을 몰랐다. "사람들은 내가 곧 죽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상승세다. '비디오 아트의 대부'로서 이제는 '비디오 이후의 프로젝트'라고 이름한 레이저 작업으로 다시 한번 현대미술을 뒤집어 놓겠다"고 장담했다. 그리고 꼭 10년. 거인은 휠체어에 앉아 전자매체가 가져온 인류의 희망과 낙관을 꿈꾸다 조용히 숨을 거뒀다.

백남준은 그가 60년대부터 일군 예술적 성과에 비해 한국에는 뒤늦게 알려진 거장이다. '콜라주 기법이 유화를 대신하듯 브라운관이 캔버스를 대신할 것'이라는 발언으로 서구 미술계를 강타한 그는 평생을 예술적 투쟁으로 이어진 한 편의 드라마처럼 살았다. 84년 새해 첫머리에 TV로 생중계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비디오 아트라는 색다른 장르를 한국인이 창시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시청자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서구 예술의 우월주의를 공격한 뚝심 또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세계 주요 국가에서 동시 방영된 인공위성 TV프로그램 '굿모닝 미스터 오웰'에서 그는 "여전히 좋은 아침입니다, 오웰씨"를 외치며 35년 만에 금의환향했다. 게다가 귀향 첫마디가 "예술은 사기다"였으니 백남준과 그의 예술이 한국에 미친 영향은 돌풍이라 할 만했다.

그는 독일과 미국을 떠돌며 영어 잘 못하는 이방인으로 살았다. 기존 서구 예술계에 도전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었던 백남준은 해학과 해프닝을 뒤섞은 '사기'라는 강도 높은 단어로 생존 전략을 삼았던 셈이다.

그는 이렇듯 상업자본주의 시대에 전자매체의 총아인 TV를 주물러 대중예술로 만들었다. 서구미술계는 이런 업적을 기려 '백남준학(學)'을 개설하고 그가 20세기 예술에 세운 가장 큰 공로로 '기술의 탈 신격화'를 꼽았다. TV 수상기가 기술적 차원을 넘어 새로운 질서와 조화, 서양의 물질문명과 동양의 정신문명을 잇는 상징이 되었다는 것이다.

'TV 부처'는 물론 'TV 십자가'를 만들고, 'TV 안경'에 'TV 페니스'까지 만드니 그는 비디오로 인간의 정신과 몸 영역을 두루 피돌기하게 만든 주술사였다. 그의 작품은 새로운 형식의 무속행위였고, 그는 그 굿판에 선 무당이었다.

"예술가의 역할은 미래를 사유하는 것"이라고 말했던 백남준, 우주적 상상력으로 전위적이며 기발하고 풍자적인 작품을 내놓던 인물, "2012년까지는 살아야 내 예술적 욕심을 웬만큼 채우겠다"고 큰소리치던 그가 병술년 새해 첫 머리에 숨을 거뒀다. 그는 갔어도 치열하게 타올랐던 그의 전위정신은 길이 살아남을 것이다. '바이 바이, 미스터 백'.

정재숙 기자 <johanal@joongang.co.kr>
사진=강정현 기자<cogito@joongang.co.kr>

*** 그가 남긴 말말말

▶"전위 예술은 한마디로 신화를 파는 예술이지요. 자유를 위한 자유의 추구이며, 무목적한 실험이기도 합니다. 규칙이 없는 게임이기 때문에 객관적 평가란 힘들지요. 어느 시대건 예술가는 자동차로 달린다면 대중은 버스로 가는 속도입니다. 원래 예술이란 반이 사기입니다. 속이고 속는 거지요. 사기 중에서도 고등 사기입니다.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것이 예술입니다."

-1984년 6월 35년 만에 귀국해 연 기자회견

▶"악평 같은 거, 내가 일생 동안 악평 오죽 보았어요. 미국에서는 이제 악평 같은 거 받으면 받을수록 예술가가 자라지요. 나도 콘서트 하다가 노출 때문에 경찰에도 가고, 피아노 파괴했다고 파괴주의자라고 얻어맞았지만 그거 개의하지 않으니까 여기까지 올 수 있었지요."

-86년 11월 '춤'지 인터뷰

▶"방송이란 것은 물고기 알과 같은 것입니다. 물고기 알은 수백만 개씩 대량으로 생산되나, 그 가운데 대부분이 낭비되고 수정(受精)되는 것은 얼마 안 되죠. 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수억의 세계 인구를 상대로 발신한 것이었는데, 이 발신의 내용이 얼마나 수정되었는지는 그야말로 다다익선입니다."

-88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설치한 비디오 나선형탑 '다다익선'의 제목 설명

*** 연표로 본 백남준의 일생

▶1932년 7월 20일 서울 출생. 경기중 재학 때 피아니스트 신재덕과 작곡가 이건우로부터 음악 수업

▶50~56년 한국전쟁으로 부산 피란 뒤 일본 도쿄에 정착해 도쿄대학 문학부 미학미술사학과 졸업

▶58년 독일로 건너가 뮌헨대.프라이부르크 고등음악원.쾰른대에서 음악 공부 중 존 케이지 만남

▶61년 '플럭서스(Fluxus)' 운동의 창시자 조지 마치우나스와 만나 창립 멤머가 됨

▶63년 독일 부퍼탈의 파르나스 화랑에서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 열어 최초의 비디오 아트전으로 기록

▶84년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소재로 한 인공위성 프로젝트 '굿모닝 미스터 오웰' 전 세계 방영

▶93년 베니스 비엔날레 독일관 대표작가로 나가 대상(황금사자상) 수상

▶96년 뇌경색으로 쓰러져 몸의 왼쪽 신경 마비로 휠체어에 의지해 작품 활동

-제5회 호암상 예술 부문과 제1회 월간미술 대상 수상

-독일 '포쿠스'가 뽑는 '올해의 100대 예술가' 선정

▶2000년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회고전, 이어 서울 호암.로댕 갤러리에서 '백남준의 세계' 회고전

-금관문화훈장 수상

▶2006년 경기도 용인시 기흥읍에 '백남준 미술관' 실시 설계중

▶2006년 1월 29일 74세로 타계

2006.01.30 19:31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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