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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實錄] 일제下 朝鮮日報 기자들의 삶과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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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實錄] 일제下 朝鮮日報 기자들의 삶과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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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이렇게 싸웠고, 좌절했다. 그리고 견뎌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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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4976557203007.gif 李光洙·廉想涉·玄鎭健·金東煥·沈熏·李陸史·朱耀翰·金東仁·金起林 등 우리 가슴을 뛰게 하는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들은 모두 조선일보 기자였다. 李商在·申錫雨·安在鴻·曺晩植·張志暎 등 민족주의 독립 운동가들과 朴憲永·林元根·金丹冶·曺奉岩 등 좌익 활동가들이 조선일보에 몸담으며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조선일보사 사료연구실
대표 정리 : 李漢洙 조선일보 기자〈he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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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4976561435732.gif朝鮮日報를 만든 당대 최고 지식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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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견지동 사옥 앞에서 간부진들이 사진을 찍었다. 앞줄 왼쪽에서 첫 번째가 사장 신석우, 오른쪽에서 첫 번째가 편집국장 한기악이다. 뒷줄 왼쪽에서 첫 번째는 홍명희의 동생인 판매부장 홍성희, 두 번째는 상무이사 백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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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 3월5일 창간한 朝鮮日報는 동아일보(1920년 4월1일 창간)와 더불어 일제시대 양대 민간지로서 우리 민족과 더불어 영욕을 함께했다. 일제의 탄압에 억눌린 좌절과 고통의 시간이 없지 않았지만 朝鮮日報는 국권을 잃은 조선 민중의 대변지로서 일제에 항거하고 민족 문화를 유지, 발전시키는 데 진력했다. 일제의 언론 탄압과 빈약한 자본 속에 社主(사주)와 사옥, 기자들이 수없이 바뀌는 생존의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내실과 외형의 성장을 거듭한 조선일보는 1940년 8월10일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될 때 발행부수 6만3000부의 최대 민간지가 돼 있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5만5000부였다.
 
  일제시대 청년 지식인들은 조선일보를 비롯한 민간 신문사에서 일하기를 소망했다. 의식 있는 젊은이들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서 근무하는 것조차 賣身(매신)이라 하여 꺼렸다. 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식산은행 등 일제의 수탈 기관을 제외하면 젊은이들이 일할 수 있는 직장은 민간 신문사가 거의 유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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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를 만든 사람들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었다. 李光洙·廉想涉·玄鎭健·金東煥·沈熏·李陸史·朱耀翰·金東仁·金起林 등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들은 대부분 조선일보 기자였다. 李商在·申錫雨·安在鴻·曺晩植·張志暎 등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과 朴憲永·林元根·金丹冶·曺奉岩 등 좌익 활동가들도 조선일보에 몸담았다. 조선일보 사람들의 역사는 한국 언론사일 뿐만 아니라 오롯이 한국의 근현대사를 형성하고 있다.
 
  이 같은 「조선일보 사람들」(가제·랜덤하우스중앙刊)의 이야기가 곧 책으로 출판될 예정이다. 이 책은 조선일보사 사료연구실이 1년 3개월여 동안 자료를 수집하고 관계자들을 취재해 일제시대 조선일보 기자 100여 명(상권)과 광복 후부터 1970년대까지 활약한 조선일보 기자 100여 명(하권)의 삶과 활동상을 복원해 낸 것이다. 이 중 일제시대 기자들의 이야기를 요약·발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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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14976561435732.gif芮宗錫, 일 벌이기 좋아하는 마당발
 
  총독부로부터 조선일보 발행 허가를 받은 사람은 大正實業親睦會(대정실업친목회) 간사 芮宗錫(예종석)이었다. 그는 1920년 3월 스스로 부사장에 취임하고 소문난 부자인 조선상업은행장 趙鎭泰(조진태)를 초대 사장으로 추대했다.
 
  대정실업친목회는 1916년 조선의 실업인들이 일본 고위 관리들과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만든 단체이다. 조선일보는 이 단체에 재정적 후원을 기대했으나 창간 자금으로 모인 돈은 당초 20만원 목표에 턱없이 못 미치는 5만원에 그쳤다.
 
  결국 조선일보는 창간 5개월 만인 1920년 8월12일 『본사는 지금부터 대정실업친목회의 관계를 분리하여 株主의 독립경영으로 진행함』이라는 社告(사고)를 내고 결별을 선언했다.
 
  조선일보는 창간 첫 해에만 「불온 기사」로 두 차례 停刊(정간)을 당했다. 조진태와 예종석은 5개월간 재임한 뒤 차례로 조선일보를 떠났다. 총독부가 작성한 비밀문서 「朝鮮出版警察槪要(조선출판경찰개요)」는 『조선일보는 발간 이래로 같은 해 7월27일까지 발매반포금지 및 압수처분을 받은 일이 23회에 이른다』며 『겉으로는 사장, 부사장 등을 교체하고 불량기자를 면직시키는 등 社內의 쇄신을 도모하고 근신하는 뜻을 보이게 꾸몄으나 그 속으로는 여전히 일본을 배척하는 사상을 키우고 그 붓끝을 고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종석은 당대인들로부터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회장 자리가 한두 군데가 아니요, 말썽 많은 일 귀찮은 일에 발 벗고 나서지만 아기를 낳아 놓고 친정으로 간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조선일보 1939년 11월17일자)는 후대의 평가로 미루어 그는 일 벌이기를 좋아하는 마당발 스타일의 인물이었던 듯하다.
 
  예종석은 광복 후 반민특위에 소환됐다. 손자 芮相烈(예상렬)은 『무죄로 석방되긴 했지만 그때부터 의기소침해져 바깥출입을 잘 하지 않으셨다』고 했다.
 
  그는 1955년 타계했다.
 
 
  1514976561435732.gif총독 암살 기도한 方漢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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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찍이 일본 군마의 발굽에 함부로 짓밟힌 조선민중은 누구누구 할 것 없이 모두 일본 군인을 두려워하였고, 총과 칼을 두려워하였다. (중략) 우는 어린 아이를 달랠 때에 「아이고, 왜놈 온다」 하는 것이 오직 한 가지의 모책이었다. (중략) 일본 사람이 총과 칼로써 조선민족을 쓸어 죽이려 한 것은 밝은 사실이 증명하는 바이다』(조선일보 1920년 6월9일자)
 
  일제통치에 통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는 이 글은 「朝鮮民衆(조선민중)의 民族的(민족적) 不平(불평)!!」이란 제목의 조선일보 연재 기사이다. 기사는 「왜놈」이라는 자극적인 표현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 기사는 조선일보 창간 때부터 기자로 활동한 方漢旻(방한민)이 동료기자 崔國鉉(최국현)과 번갈아 가며 집필했다. 방한민은 주로 독립운동 관련 취재를 맡았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 柳光烈(유광렬)은 『조선일보가 동아일보보다 앞서 발행정지를 당한 것도 방한민이 쓴 기사가 많은 작용을 하였다』고 술회했다(「기자협회보」 1969년 1월31일자).
 
  방한민은 조선일보가 민간지 최초로 정간당하는 빌미가 된 논설 「自然(자연)의 化(화)」(조선일보 1920년 8월27일자)를 집필하기도 했다. 이 논설로 그는 조선일보를 떠나야 했다.
 
  1923년 7월 그는 조선총독을 암살하려는 거사를 도모하다 사전에 발각돼 1928년 6월까지 5년간 복역했다. 출옥 후 조선일보에 복직했으나 1929년 6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다시 감옥에 들어가 1937년 10월까지 8년간 수감생활을 했다. 그는 오랜 옥살이와 고문의 후유증으로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방한민은 1·4 후퇴 때 서울에서 실종됐다. 손자 方丙健(방병건)은 할아버지의 행적을 추적해 2∼3년간 모은 자료를 정부에 제출했고, 정부는 1990년 방한민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방한민과 함께 「조선민중의 민족적 불평!!」을 쓴 崔國鉉은 1920년 5월부터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했다. 그가 입사한 시기는 조선일보가 3호까지 발행하고 재정난으로 두 달간 휴간한 끝에 정상적으로 발행되기 시작한 때였다.
 
  최국현은 일제의 탄압에 맞서 언론 자유 투쟁을 벌였다. 1922년 일제가 「신천지」, 「신생활」 두 잡지의 기사를 문제삼아 관계자를 구속하자 최국현은 『당국의 처치가 크게 가혹하다』며 『우리는 언론의 자유를 옹호하기 위해 협동 노력한다』는 선언문에 조선일보 대표로 서명했다.
 
  그는 1923년 사회부장에 올랐지만 1925년 10월 「辛日鎔 (신일용) 논설 사건」으로 퇴사했다. 「신일용 논설 사건」이란 1925년 9월8일 논설반 기자 신일용이 쓴 사설 「조선과 露國(노국)과의 정치적 관계」로 인해 조선일보가 정간되고 사회주의 및 민족주의 계열 기자들이 대거 퇴사하게 된 사건이다.
 
  사설은 「赤露(적로·붉은 러시아)의 힘을 빌려 독립하자」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
 
  광복 후 최국현은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1948년 반민특위가 발족되자 그는 재판부장 金炳魯(김병로) 휘하의 특별재판관 15인 중 한 명으로 선임됐다. 그는 『염도 하지 말고 상여도 메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1970년 타계했다.
 
 
  1514976561435732.gif제목 잘 뽑은 玄鎭健, 기자 시절 「貧妻」 발표
 
  1920년 12월 스무 살의 무명작가 玄鎭健(현진건)이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그는 한 달 전 단편 「犧牲花(희생화)」를 「開闢(개벽)」에 발표해 데뷔한 신진 작가였다. 당시 그의 작품은 『하등의 예술 형식을 갖추지 아니한, 소설도 아니요 독백도 아닌 일개 무명의 산문』(「개벽」 1920년 12월호)이란 혹평을 받았다.
 
  현진건은 입사 후 투르게네프의 소설 「첫사랑」을 번안해 「初戀(초연)」이란 제목으로 조선일보 1920년 12월2일자부터 이듬해 1월23일까지 연재했다. 이어 「浮雲(부운)」이라는 번역소설을 4월27일까지 연재했다.
 
  조선일보 기자로서 문학 습작을 한 것은 그의 필력에 큰 도움이 되었던 듯하다. 출세작 「貧妻(빈처)」는 그가 조선일보 기자로 근무하면서 「개벽」에 발표한 것이었다.
 
  현진건은 기사 제목을 잘 뽑아내는 명 편집자였다. 조선일보 기자를 지낸 李瑞求(이서구)는 『붉은 잉크를 붓에 듬뿍 찍어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주옥같은 명제목을 달아 선후배들로 하여금 그 재주에 혀를 내두르게 했다』고 회고했다. 조선일보 사장 李商在(이상재)가 사망했을 때 사회부장이던 현진건이 단 제목 「無窮恨(무궁한), 不盡淚(부진루), 靈柩(영구)는 萬年幽宅(만년유택)에」는 명제목으로 회자됐다.
 
  그는 미남으로 유명했다. 韓基岳(한기악)·李相和(이상화)와 더불어 현진건은 『경성의 3대 미남』(「인문평론」 1940년 4월호)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方仁根(방인근)은 그에 대해 『살결이 희고 맑으며 귀공자 타입으로 예쁘장스러운 미남』이라 회고했다.
 
 
  1514976561435732.gif대한민국 국호 발안한 독립운동가 申錫雨
 
  현진건은 1943년 폐결핵으로 타계했다. 그의 사돈이 된 소설가 朴鍾和(박종화)도 창간 초기 기자로 활동했다.
 
  1924년 9월 申錫雨(신석우)는 조선일보의 판권을 인수했다.
 
  당시 조선일보 판권은 宋秉畯(송병준)이 가지고 있었다. 경영난으로 표류하던 조선일보의 판권을 산 송병준은 이완용과 더불어 당대에도 『賣國(매국)의 元凶(원흉)』(조선일보 1926년 2월13일자)으로 불리던 인물이다.
 
  그가 판권을 쥐고 있을 때 조선일보 사장은 황성신문 사장을 지낸 원로 언론인 南宮薰(남궁훈)이었다. 송병준은 남궁훈의 견제로 신문 제작에는 전혀 손을 대지 못했다.
 
  신석우가 조선일보를 인수하는 데 들인 돈은 8만5000원으로 쌀 4300가마를 살 수 있는 큰돈이었다. 신석우는 의정부의 대지주인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 대부분을 여기에 쏟아부었다.
 
  그는 「조선 민중의 신문」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민족의 사표로 추앙받은 月南 李商在(월남 이상재)를 사장으로 추대했다.
 
  신석우는 上海 임시정부에서 교통총장을 지내며 「대한민국」이란 국호를 발안한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1919년 4월10일 임시정부 첫 의정원(국회) 회의에서 「大韓(대한)」이란 국호를 제안했다. 신석우가 조선일보 경영을 맡은 기간은 모두 6년 6개월이다. 이상재가 사망한 뒤인 1927년 3월부터는 사장에 취임했다.
 
  그는 이 기간에 약 42만원에 달하는 거금을 조선일보에 쏟아부었다. 훗날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서 3년간 在喪(재상) 중에도 그때의 채무관계로 인하여 지불명령이니 집행명령이니 하는 창피한 꼴을 범 38회나 당하였다』고 회고했다. 광복 후 초대 중화민국(대만) 대사를 지낸 그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조선일보 판권을 인수한 신석우는 1924년 가을 이상재의 집을 찾았다. 신석우는 지면을 대폭 쇄신해 조선일보를 「조선 민중의 신문」」으로 거듭나게 할 각오를 밝히고 이상재에게 사장 직을 맡아 줄 것을 요청했다.
 
  이상재는 『동아일보와 서로 경쟁하지 말고 합심하여 민족의 계몽육성에 힘써야 한다』는 조건으로 신석우의 제의를 수락했다.
 
  이상재는 左·右派 양쪽 모두로부터 「민족의 師表(사표)」로서 권위를 인정받았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무거운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권위는 올곧으면서도 희생적인 그의 평소 모습에서 나왔다.
 
  어느 해 추석이었다. 이상재가 편집국에 들어와 『자네들 송기떡(송편)이나 먹었나?』고 물었다. 기자들이 『월급이나 받았으면 좋겠습니다』고 대답했다.
 
  이번에는 사장실에 들어가 간부들에게 『자네들 송기떡 먹었나?』고 물었다. 『네』하는 대답이 돌아오자 그의 입에서 벼락이 떨어졌다. 직원들은 월급이 안 나와 끼니도 못 이을 지경인데 어찌 간부들만 송기떡을 먹느냐는 질책이었다.
 
  이상재는 1927년 2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연합하여 창립한 민족협동전선인 新幹會(신간회)의 회장에 만장일치로 추대됐다.
 
  당시 신간회는 李商在·申錫雨·安在鴻(안재홍)·張志暎(장지영) 등 조선일보 사람들이 주축이었다.
 
  총독부가 「조선일보가 신간회인지, 신간회가 조선일보인지 모르겠다」고 할 정도였다.
 
 
  1514976561435732.gif李相協, 『불 속에라도 들어가 취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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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7년 병석에 누워 있던 이상재는 3월 25일 조선일보 사장에서 물러났다. 수차 밝혔던 사임의사가 조선일보 간부들의 만류로 번번이 반려되다가 끝내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는 사장을 사임한 나흘 뒤 78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전날 후배들의 손을 잡고 『나는 가오. 일 많이 하오』라고 남긴 한마디가 그대로 유언이 되었다.
 
  李相協(이상협)은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신문이 없을 정도로 언론계를 풍미한 「신문 귀재」였다. 그는 동아일보 창간 발행인이었고, 조선일보를 혁신시킨 주인공이었으며, 민간신문인 중외일보를 창간하고 매일신보 부사장을 역임했다. 신문의 편집과 경영에 관한 지식과 경험은 당대 최고였다.
 
  그는 기자를 훈련시킬 줄 알았다. 그가 냉정한 표정으로 취재지시를 내리면 누구도 군말을 달지 못했다. 화재 현장에 나간 한 기자가 전화를 걸어와 『불길이 너무 맹렬해 취재할 수 없다』고 하자 이상협은 『취재할 거리가 없으면 불 속에 들어가 찾아보라』고 일갈했다.
 
  이상협은 조선일보에서 부인견학단 모집, 변장기자 탐방, 만화 「멍텅구리」 연재, 무선전화 공개방송 등 기발한 기획을 연이어 터뜨렸고, 독자들의 뜨거운 환호를 이끌어 냈다. 그는 1924년 9월부터 1년 조금 넘는 짧은 기간 조선일보에 재직했지만 후배 언론인들은 그의 황금기를 조선일보 시대라고 일컫는다.
 
  1949년 2월 이상협은 반민특위에 소환됐다가 수감 당일 석방됐다. 이상협과 매일신보에서 함께 일했던 반민특위 재판관 최국현은 『만일 이상협씨를 구금한다면 나도 친일파이니 구금하라』고 했다.
 
  이상협의 며느리 李禮遠(이예원)은 『시아버님이 친일파였다면 우리 아버님께서 결혼을 시켰을 리 없다』고 했다. 이예원은 조선일보 영업국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李昇馥(이승복)의 장녀로 李文遠(이문원) 독립기념관장의 누나이다.
 
 
  1514976561435732.gif아홉 번 감옥 간 長江大河의 문장가 安在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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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6년 12월 의열단 소속의 청년 羅錫柱(나석주)가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자결했다. 이때 조선일보 주필 安在鴻은 경찰조사 대상 제1호였다. 안재홍은 조사를 받으면서도 기개를 꺾지 않았다. 그를 직접 신문했던 종로경찰서장 모리(森)는 『안재홍은 범 같은 놈이다』고 혀를 내둘렀다. 일본군 헌병 대좌 아리가(有賀)는 『도대체 조선의 安씨들은 못마땅하다. 안중근·안명근·안창호·안재홍…』이라 중얼거렸다.
 
  최남선이 창간한 시대일보의 논설위원을 지낸 안재홍은 이상재·신석우 체제로 개편된 「혁신 조선일보」의 주필로 초빙됐다. 그는 이후 발행인·부사장·사장을 거치면서 약 8년간 조선일보에 재직했다. 그는 이 기간에 사설 980여 편, 시평 470편 등 1450여 편에 이르는 글을 쓰면서 네 차례에 걸쳐 1년 이상 옥고를 치렀다. 그는 일제시대 모두 아홉 차례에 걸쳐 7년 3개월을 복역했다.
 
  안재홍은 1928년 5월9일자 사설 「濟南事變(제남사변)의 壁上觀(벽상관)」에서 일본의 山東(산동) 출병을 외국의 사례를 인용해 비판했다. 그는 압수나 정간되는 사태를 막고자 최대한 우회적인 표현을 썼으나 총독부는 『국민으로 하여금 출병의 진의를 오해케 하고 국위를 中外(중외·나라 안팎)에 훼손케 하려는 非국민적 집필』이라며 그를 구속했다. 조선일보는 무기정간 처분을 받아 133일간 신문을 내지 못했다.
 
  그는 대단한 速筆(속필)이었다. 마감시간을 넘기는 일이 없었고 손님이 찾아오면 대화는 대화대로 나누면서 글을 써내곤 했다. 광복 후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과 美 군정下 민정장관을 지낸 그는 1950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6·25전쟁 중 납북됐다. 정부는 1989년 그에게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을 추서했다. 시인 安惠初(안혜초)는 그의 장손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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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14976561435732.gif궂은일 도맡은 언론계의 제갈공명 李昇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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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7년 신간회 창립을 전후한 때 조선일보 부사장 신석우는 동아일보와 시대일보에서 영업국장을 지낸 李昇馥을 三顧草廬(삼고초려) 끝에 영입했다. 이승복은 錢主(전주)들의 자금을 유치하는 데 남다른 능력을 발휘했다. 주위 사람들은 자금을 잘 융통해 오는 그를 두고 「난국타개의 1인자」, 「小諸葛(소제갈·작은 제갈공명)」이라고 부르곤 했다.
 
  이승복은 조선일보와 신간회 양쪽에서 궂은일을 도맡았다. 독립운동가 朴重華(박중화)는 그에 대해 『남달리 스케일이 큰 영웅적 기질을 지녔으나 좋은 자리는 남에게 맡기고, 자기는 늘 후선에서 일만 해 왔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여기자 崔恩喜(최은희)는 『그 빼어난 인품과 남다른 인성에 탄복했다』고 했다.
 
  그는 5년여간 영업국장으로 재직하면서 조선일보의 실질적인 경영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1932년 3월 「만주동포 구호금」을 유용했다는 혐의를 받고 안재홍과 함께 투옥된 뒤 감옥에서 사직했다. 그는 1945년 3월 예비 검속에 걸려 헌병사령부에 구금되었다가 감옥에서 광복을 맞았다.
 
  그는 광복 직후 건준의 교통부장에 임명됐으나 끝내 고사하고 고향인 충남 예산으로 낙향해 1978년 83세로 타계할 때까지 공식적인 활동을 중단했다. 198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그의 장남 李文遠은 독립기념관장을 맡고 있다.
 
 
  1514976561435732.gif독일에서 유학한 최초의 모스크바 특파원 金俊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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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5년 1월5일 金俊淵(김준연)은 3년 간의 독일 유학을 마치고 베를린을 떠나 런던과 上海를 거쳐 일본 고베(神戶)에 도착했다. 항구에는 뜻밖에도 조선일보 이사 白寬洙(백관수)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백관수는 조선일보가 「조선 민중의 신문」으로 거듭난 과정을 설명하고 『함께 일하자』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김준연은 일본 東京帝大(동경제대) 유학 시절부터 친형제처럼 지낸 백관수의 요청을 뿌리칠 수 없었다. 백관수와 김준연은 일본 유학시절 2·8 독립선언에도 함께 참여했다. 김준연은 2월21일 경성(서울)을 출발, 하얼빈과 이르쿠츠크를 경유해 50일 만인 4월11일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동아일보는 김준연이 조선일보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출발한 다음날 역시 유럽에서 유학한 엘리트 李灌鎔(이관용)을 급히 모스크바로 보냈다.
 
  그에게 비친 러시아는 결코 바람직한 이상국가의 모습이 아니었다. 소비에트 전체회의에선 의장이 무슨 제의를 하기만 하면 참석자들은 기계적으로 「흐르쇼(옳소)」만 연발했다. 호텔을 옮길 때마다 그의 통역과 안내를 맡았던 현지 조선인 유학생들로부터 『도청장치가 있을 것이니 조심하라』는 말을 들었다.
 
  광복 후 그는 민족진영의 지도자로 정계에 투신했다. 1948년 제헌의원에 당선된 후 3~6代 의원을 지냈다. 1950년 법무장관을 거쳐 1967년 민중당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모스크바에서 김준연과 경쟁했던 李灌鎔은 일제시대 손꼽히는 엘리트였다. 그는 20代 초반부터 10년간 영국·프랑스·독일·스위스 등 유럽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공부한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1933년 8월 그가 타계했을 때 조선일보의 부음 기사는 그의 學歷(학력)을 이렇게 썼다.
 
  『이관용씨는 서력 1891년 경성에서 출생하야 1907년에 관립 한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13년에 전수학교를 마친 다음 영국에 건너가 「억스포-드(옥스포드)」대학에서 정치사를 학습하야 1916년에 이를 마치고 즉시 불란서 「파리」에 건너가 불란서 어학을 배우고 1917년으로부터 同 19년까지 瑞西(서서·스위스)로 가서 「쮸리히」 대학에서 철학을 배워 「덕터 어부 필로소피」(철학박사)의 학위를 얻고 1920년에는 다시 「파리」로 와서 당시 「파리」에서 열렸든 강화회의에서 활약하였고 이듬해인 1921년에는 이태리를 거쳐 독일에 가서 伯林(백림·베를린) 「예나」대학과 백림대학에서 철학을 연구하고 白耳義(백이의·벨기에)와 和蘭(화란·네덜란드)을 시찰한 후 1923년에 북미합중국을 경유하야 귀국(했다)』(조선일보 1933년 8월14일자)
 
  이관용이 조선일보와 관계를 맺은 것은 1927년 2월 그가 신간회 간사로 선출된 무렵인 것으로 보이지만 입사 시점은 분명치 않다. 이 해 9월부터 조선일보 지면에 그의 기사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1929년 초까지 조선일보 특파원 자격으로 몇 차례 중국을 드나들며 국제적 감각을 살린 현장 기사를 많이 썼다.
 
 
  1514976561435732.gif일제의 조선인 학살현장을 파헤친 李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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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이관용은 민중대회 개최를 모의했다는 혐의로 일제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1932년 1월 가석방으로 출감했다. 출옥 후 그는 조선일보에 다시 복귀해 1933년 8월13일 불의의 사고로 타계할 때까지 편집고문으로 재직했다. 그는 함북 청진의 해수욕장에서 물놀이를 하다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1924년 8월11일 평북 위원군 화창면 산골 마을에 화재가 일어나 여섯 가구가 불타고 주민 28명이 불에 타 숨졌다. 조선일보 기자 李奭(이석)은 경성의 전체 기자를 대표하는 「무명회 특파원」 자격으로 사건의 진상을 취재하기 위해 현장으로 떠났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취재 길이었다. 4년 전 북간도 동포 학살 사건을 취재하던 동아일보 기자 장덕준이 살해당한 일도 있었다.
 
  이석은 현장 취재를 통해 사건의 전말을 상세하게 보도했다. 그가 쓴 「위원 학살사건 현장답사 실기」는 조선일보 1924년 9월27일자 사회면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사건의 발단은 한 무리의 「독립단」이 산골마을에 은신했다가 주민들이 지어준 점심과 저녁을 먹고 사라진 데서 시작됐다. 며칠 뒤 일제 경찰이 들이닥쳐 주민들을 위협하고 고문하며 이들의 행방을 추궁했다. 그러던 중 8월11일 마을에 화재가 발생했고 주민들이 불에 타 숨졌다.
 
  이석은 일제 경찰이 「불을 질렀다」는 표현을 쓰지 않았지만 기사는 제목부터 「一村(일촌) 6호의 전멸, 평북 경찰부장이 인솔한 토벌대가 통과한 이튿날 밤에」라고 해 누가 만행을 저질렀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이석은 1925년 「火曜會(화요회)」 회원으로 활동한 사회주의자이다. 본명이 李鳳洙(이봉수)인 그는 광복 직후 경주군수를 지내고 1969년 타계했다. 장남 李雄根(이웅근)은 「조선왕조실록 CD-ROM」을 비롯해 학술 언론 관련 서적과 자료를 출간하는 「동방 미디어」의 회장이다.
 
  李商在·申錫雨 체제의 등장으로 安在鴻·白寬洙·李相協 등 민족주의 계열의 언론인이 대거 조선일보에 입사한 한편, 사회주의 계열의 기자들은 홍증식을 중심으로 조선일보의 한 축을 형성했다. 홍증식은 조선공산당의 모태가 된 火曜會의 발기인으로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1924년 9월 그가 조선일보의 영업국장에 취임하자 金在鳳(김재봉)·辛日鎔(신일용)·洪南杓(홍남표)·孫永極(손영극)·曺奉岩(조봉암)·金丹冶(김단야)·朴憲永(박헌영)·林元根(임원근) 등 좌익 성향의 기자들이 대거 조선일보에 몰려들었다. 당시 좌익 성향의 이들을 「主義者(주의자)」라 불렀는데 홍증식은 「주의자들의 代父」로 통했다.
 
  그는 조선일보를 근거지로 삼아 좌익조직 확대에 힘을 기울였다. 영업국장으로 취임한 직후인 1924년 11월 그는 공산주의 행동단체인 火曜會를 결성하고 본격적인 조직확대에 들어갔다. 그는 탁월한 말솜씨와 폭넓은 대인관계로 유명했다. 재기가 번뜩이고 책략도 풍부해 당시 「주의자」들은 그를 曺操(조조)에 비유했다. 광복 후 홍증식은 대표적인 좌익紙 「조선인민보」의 사장을 맡았다. 이후 월북해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1514976561435732.gif글 잘 쓴 불운의 혁명가 金丹冶
 
  1924년 12월31일,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 金丹冶는 중국 上海로 가는 배의 객실에 앉아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취재차 가는 것이었지만 그는 코민테른(국제공산당) 대표와 만나 조선의 독립에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했다.
 
  김단야는 1924년 9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약 1년 1개월간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활동했다. 입사 당시 그는 이미 「주의자」로 알려져 있었다. 박헌영·임원근과 1900년생 동갑으로 훗날 「화요 3인조」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김단야는 조선일보에 「레닌 회견기」(1925년 1월22일~2월3일)를 11회 연재했다. 레닌이 사망한 지 1년이 되는 때였다. 그는 1922년 1월21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해 레닌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내가 만나던 날의 2년 후가 그(레닌)의 별세하던 날』이라면서 레닌의 이름 앞에 『프로공화국의 아버지』, 『인류역사상 위대한 새 기록의 주인공』 등의 수식어를 붙였다. 당시 사회부장 유광렬에 따르면 김단야는 글솜씨가 매우 훌륭했다고 한다.
 
  그는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1925년 4월 은밀히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결성대회를 준비했다. 그는 1925년 4월18일 박헌영의 집에서 열린 고려공산청년회 모임에 영업국장 홍증식과 함께 조선일보 대표 자격으로 참석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작성한 강령을 낭독하고 이를 통과시켰다.
 
  김단야는 모스크바에서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했다. 1937년 11월 소련 군사법정은 그에게 『일제 첩보기관의 밀정이며 反혁명폭동과 反혁명테러활동을 목적으로 한 조직의 지도자로서 1급 범죄자』라는 판결을 내렸다. 1938년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514976561435732.gif기사보다 조직에 열중했던 朴憲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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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朴憲永은 1925년 5월 말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이때 林元根도 함께 입사해 이미 사회부 기자로 활동하고 있던 金丹冶와 더불어 「화요 3인조」가 모두 조선일보에 둥지를 틀게 됐다.
 
  박헌영은 셋 중에서도 가장 원칙적이고 급진적인 면모를 가졌다. 하루는 좌익 청년들이 신문사에 들이닥쳤다. 당시 신문사에는 기사에 불만을 품은 좌익 청년들이 쳐들어와 기자들을 폭행하기도 했다. 김단야는 『신문사는 신문사대로 입장이 있는 것이다』고 흥분한 청년들을 말렸다. 그러나 박헌영은 『무엇 때문에 나서느냐』며 김단야를 만류하고 청년들 편에 섰다.
 
  박헌영은 좌익운동에 열성적이었지만 기자로서 활동은 미미했다. 그는 기사를 거의 쓰지 않았고 기자로서의 글재주도 뛰어나지 못했다. 당시 사회부장 유광렬에 따르면 그는 『글을 지독히도 못 썼다』고 한다. 박헌영은 조선일보 지면에 단 한 편의 기명 기사도 남기지 않았다.
 
  박헌영은 조선일보를 떠난 후 1925년 12월 제1차 공산당 사건으로 체포되었을 때 미친 사람 행세를 했다. 자신의 변을 허겁지겁 집어먹을 정도였다. 그의 연극이 얼마나 완벽했던지 담당 의사도 속았다. 그는 1927년 11월22일 병 보석으로 풀려 나왔다.
 
  출감했을 때 그는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그와 경성고보 동창이자 기자로 함께 근무했던 沈熏(심훈)은 그의 모습을 보고 「박군의 얼굴」이라는 詩를 지어 울분을 토로했다. 이 詩는 조선일보 1927년 12월2일자에 실렸다.
 
  〈여보게 박군, 이게 정말 자네의 얼굴인가?/두개골이 드러나도록 바싹 말라버린 머리털/아아 이것이 과연 자네의 얼굴인가?/오냐 박군아/눈은 눈을 빼어서 갚고/이는 이를 뽑아서 갚아 주마!/우리들의 심장의 고동이 끊길 때까지〉
 
  박헌영은 1946년 월북한 뒤 북한에서 남한 좌익들의 활동을 배후에서 조종했으며, 북한 정권 수립 후에는 부수상 겸 외무상을 지냈으나 1955년 「미제의 간첩」으로 몰려 1956년 7월 처형됐다.
 
 
  1514976561435732.gif영화배우들과 난투극 벌인 廉想涉
 
  廉想涉(염상섭)은 툭 하면 신문사를 때려치우고 나왔다. 성에 차지 않으면 사표를 던졌지만 그는 이내 기자로 다시 돌아가곤 했다. 그는 조선일보를 비롯해 동아일보·시대일보·매일신보 등에서 근무했다.
 
  당시는 기자가 자신이 근무하는 신문 지면에 문학작품을 발표하는 게 드문 일이 아니었다. 원고가 부족해 어려움을 겪었던 신문사에서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염상섭은 조선일보 학예부장으로 근무하던 1931년 1월1일부터 이듬해 9월17일까지 자신의 대표작이 되는 장편 「三代(삼대)」를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잡지 「동광」(1931년 10월호)은 『조선일보의 소설은 혼자 맡아 놓았다는 듯이 톡톡이 긴 놈을 꾸준히 매일 발표하는 (염상섭)씨의 정력에 먼저 경의를 표치 아니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다혈질의 성격으로 흥분을 잘하는 그는 싸움에 자주 휘말렸다. 「삼대」 연재를 시작하던 날 그는 뜻밖의 봉변을 당했다. 조선일보에 난입한 영화인들과 난투극을 벌인 것이다. 당시 영화계 인사들은 민간紙 학예부 기자들에게 극도의 반감을 품고 있었다. 일부 영화담당 기자들은 배우와 제작자를 공개적으로 무시했고, 때로는 기자들 모임에 여배우를 불러내 술을 마시기도 했다.
 
  1930년 12월31일 송년회를 갖던 영화인들은 이튿날 새벽 조선·동아·중외 등 민간신문사에 난입해 윤전기에 모래를 뿌리는 등 소동을 벌였다. 여배우 복혜숙은 『조선일보의 경우는 학예부장인 염상섭씨를 필두로 한 기자들과 배우가 난투극을 벌이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광복 후 염상섭은 경향신문 초대 편집국장을 지냈다. 1963년 타계하기 직전까지 술을 즐겼고 만년에 솟기 시작한 이마 위의 혹은 그를 떠올리게 하는 명물이 되었다.
 
 
  1514976561435732.gif친일파 권총 앞에서도 당당한 韓基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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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8년 어느 날 조선일보 편집국은 긴장 속에 빠져들었다. 朴春今(박춘금)이 편집국장 韓基岳에게 면회를 신청한 것이다. 박춘금은 1920년 日鮮融和(일선융화)를 주장하는 노동단체 「相愛會(상애회)」를 만들고 조선인 노동자를 착취하고 폭행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은 인물이었다.
 
  당시 조선일보는 기사를 통해 농어민을 협박해 농토를 강탈하는 박춘금의 행태를 격렬하게 비판하고 있었다. 한기악은 1926년부터 1932년까지 편집국장으로 재직했다. 험악한 상황이었지만 둘의 대화는 희극적으로 느껴졌다. 박춘금이 일본어로 소리를 지르면 한기악은 우리말로 응수했다.
 
  박춘금이 권총을 들이대고 『당신 절대로 기사를 취소하지 못하겠단 말이지?』라고 일본어로 악을 쓰면 한기악은 우리말로 『그렇다. 할 말이 있으면 정식으로 고소를 하라』고 대답하는 식이었다. 수십 분 실랑이 끝에 박춘금은 권총을 집어넣고 『어디 두고 보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上海 임시정부 초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한기악은 5代 독자이자 유복자였다. 남편의 장례를 치를 때까지 태기를 느끼지 못했던 그의 어머니는 어느 地官(지관)으로부터 『除節(제절·산소 앞뜰)에 자손이 가득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얼마 후 어머니는 태기를 느끼고 그를 낳았다.
 
  지관의 예언대로 그의 자손들은 제절 앞에 가득하게 된다. 장남 韓萬春(한만춘)은 연세大 교수를 역임했고, 차남 韓萬年(한만년)은 출판사 「일조각」을 경영하며 학술서적을 많이 냈다. 삼남 韓萬靑(한만청)은 서울大 교수를 지냈다. 손자들도 학계로 많이 진출했다. 한만춘의 아들인 한민구(서울大)·한인구(한국과학기술원), 한만년의 네 아들인 한성구(서울大)·한경구(국민大)·한준구(서울大)·한홍구(성공회大) 등이 모두 대학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1990년 한기악에게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1929년 11월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다. 조선일보는 11월4일자 석간에서 『광주고보생과 중학생의 충돌로 20명이 중경상을 입었다』고 보도하고 『일본인 중학생이 조선 여학생을 놀린 것』이 사건의 원인이라 짚었다.
 
  조선일보 서무부원 金武森(김무삼)은 사건을 전해듣고 분노했다. 그는 견지동 조선일보 사옥 골방에서 광주학생운동 지지와 조선독립을 촉구하는 격문을 쓰고 거사를 일으키리라 다짐하고 「삐라(전단)」 1000여 장을 만들었다.
 
  12월13일 인사동 조선극장에선 토월회의 「부활」 공연이 열렸다. 톨스토이 원작의 「부활」은 1000여 명의 관객이 객석을 가득 메울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김무삼은 삐라가 든 가방을 들고 2층 맨 앞자리에 앉았다.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관객들은 여주인공의 비극적인 운명에 눈시울을 적셨다.
 
  공연이 끝나자 객석에 불이 환하게 들어왔다. 이때 김무삼은 2층 객석에서 가슴에 품고 있던 삐라를 꺼내 1층을 향해 뿌렸다. 그리고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가 『광주학생운동 절대지지』, 『조선 독립 만세』를 힘껏 외쳤다. 아직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던 관객들은 이 거사에 박수를 보내며 호응했다. 조선일보 사회부장을 지낸 김기진은 『이것이 서울에서의 광주학생 사건의 첫 봉화』였다고 기록한다. 김기진은 당시 영업국장 이승복이 김무삼에게 거사를 지시했다고 했다. 김무삼은 광복 후 서울신문 상무와 주필 겸 편집국장, 합동통신 상무를 역임했다.
 
 
  1514976561435732.gif잡지 발행인이 된 시인 金東煥
 
  토월회 공연에서 거사를 일으킨 김무삼이 일본 경찰에 연행될 때 조선일보 종로경찰서 출입기자는 「국경의 밤」으로 유명한 시인 金東煥(김동환)이었다. 이날 회사에 돌아온 김동환은 편집국이 떠나가라 욕설을 퍼부으며 흥분했다.
 
  『개 끌 듯 끌고 가는 개새끼들』, 『짐승만도 못한 놈들』
 
  사회부장 유광렬은 얼굴이 붉어진 김동환을 달래며 말했다.
 
  『기사는 안 쓰고 왜 그렇게 소리만 지르고 있어? 기자는 본 그대로 기사만 쓰면 되는 거야. 흥분하면 안 돼』
 
  흥분과 감격을 잘하는 성격 때문에 김동환은 사회부 기자로선 적당하지 않다는 평가도 받았다. 사회부 후배 기자 金乙漢(김을한)은 『성격이 순수하고 개결하여 적어도 사회부 기자로는 적당하지 못한 듯하였다』면서 『혹시 큰 뉴스를 다른 신문사에 빼앗긴 때에도 어디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태연하였다』고 했다.
 
  김동환은 조선일보 기자 시절 잡지 「삼천리」를 창간했다. 「동광」 1931년 8월호는 『김동환씨가 사회부 기자로서의 수완은 어떠한 것이었는지 그렇게 뛰어나는 기록을 들을 길 없는 것이 유감이외다만은 잡지기자로의 또는 경영자로의 솜씨에는 새삼스러이 놀래지 아니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삼천리」가 안정권에 접어들자 1929년 12월 조선일보를 퇴사했다.
 
  그는 일제 말기 제호를 「삼천리」에서 「대동아」로 바꾸며 親日 노선을 걸었다. 광복 후 그는 반민특위에서 재판장에게 『그 당시 강압적인 주위 환경으로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김동환은 반민족행위처벌법 위반으로 공민권 정지 5년의 선고를 받았다.
 
 
  1514976561435732.gif3형제가 조선일보 기자였던 저항시인 李陸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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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항 시인 李陸史(이육사)는 1930년 첫 詩 「말(馬)」을 조선일보에 발표했다. 1월 3일자 7면 하단에 1단으로 실린 10행의 짧은 詩에서 그는 「채찍에 지친 말」이지만 새해에는 힘차게 소리칠 것을 다짐하고 있다. 이육사와 조선일보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 詩를 발표한 후 중외일보 대구지국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한 이육사는 1931년 8월 조선일보 대구지국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육사가 대구 지국기자로 조선일보 지면에 쓴 첫 기명 기사는 「대구의 자랑 藥令市(약령시)의 유래」이다. 1932년 1월14일부터 네 차례에 걸쳐 쓴 이 기사에서 그는 「肉瀉生(육사생)」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육사는 스포츠 관련 기사를 쓰기도 하는 등 활발하게 기사를 썼다.
 
  이육사의 형제는 모두 여섯이다. 첫째가 源祺(원기), 둘째가 육사 자신인 源祿(원록), 셋째 源一(원일), 넷째 源朝(원조), 다섯째 源昌(원창), 여섯째 源洪(원홍)이다. 그의 형제들은 저항정신이 투철해 1927년 대구조선은행 폭탄사건 때 첫째 원기부터 넷째 원조에 이르기까지 4형제가 모두 일제 경찰에 붙잡혀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지금은 이육사가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1930년대엔 넷째 이원조가 더 유명했다. 이원조는 육사가 조선일보에 작품을 발표하기 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2년 연속 詩와 소설을 당선시킨 문사로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가 되었다. 육사 형제의 맏형 이원기의 장남인 李東英(이동영) 前 부산大 교수는 『당시 조선일보 기자 이원조가 워낙 유명해서 육사는 그의 仲兄(중형)으로 소개될 정도였다』고 말했다.
 
  다섯째 이원창은 1940년 폐간 때까지 조선일보 인천지국 주재기자로 활동했다. 그는 폐간호인 1940년 8월11일자 석간 3면 지방 특파원 방담기사에서 『저는 기자생활 5년인데 무슨 인연인지 3형제가 본사에 관계한 것은 잊을 수 없는 사실입니다』고 회고했다.
 
  1930년대 접어들면서 조선일보의 경영상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사원들은 월급을 받지 못하기 일쑤였다. 점심값도 없을 때가 많아 소속 국장 앞으로 밥값을 달아 놓고 식사를 해결했다. 사장 신석우는 부도를 막기 위해 米豆商(미두상) 林景來(임경래)의 사채를 빌려 썼다. 다급할 때마다 500원, 1000원씩 빌린 돈이 7000원까지 불어났다.
 
  1930년 가을 임경래는 빌린 돈을 전부 갚으라고 요구했다. 돈을 갚지 못하면 조선일보 판권을 저당 잡히라고 요구했다. 신석우는 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부산 동래 출신의 임경래는 證券取人所(증권취인소·증권거래소)에서 큰돈을 번 사람으로 사채업을 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사원들은 사장 신석우가 임경래의 돈을 쓴 것을 성토하고 퇴진을 주장했다. 신석우는 이에 책임을 지고 1931년 5월 물러났고 부사장 겸 주필 안재홍이 사장으로 취임했다.
 
  임경래는 자신을 반대하는 사원들이 점거한 견지동 사옥을 떠나 明治町(명치정·現 서울 중구 명동) 同順泰(동순태) 빌딩에 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독자적으로 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그는 몇몇 기자들과 함께 신문을 발행했다. 이때 견지동 사옥에서도 사원들이 별도의 신문을 발행해 『견지동과 명동에서 두 개의 조선일보가 각각 발행된 때도 있었다』고 유광렬은 회고했다.
 
  임경래는 보름 가량 신문을 내다 발행을 포기했다. 수지타산도 맞지 않았고 비난 여론 속에 실속 없이 신문을 계속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임경래는 1933년 방응모에게 조선일보를 넘겨 준 후 언론계에서 자취를 감췄다.
 
 
  1514976561435732.gif조선일보를 인수한 금광왕 方應謨
 
  1932년 말 경영난과 내부 분란으로 표류하고 있는 조선일보를 평북 定州(정주)의 金鑛王(금광왕) 方應謨(방응모)가 인수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조선일보의 정상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던 편집국장 朱耀翰(주요한)은 여러 차례 방응모를 찾아가 조선일보 인수를 설득하고 있었고, 분란 타개를 위해 1932년 11월 초빙된 사장 曺晩植(조만식)도 방응모에게 조선일보의 경영을 맡으라고 종용했다.
 
  당시 신문사는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자선사업 정도로 인식되었다. 한 잡지는 이런 상황에서 조선일보를 인수한 방응모에 대해 『부호의 의무를 다할 줄 아는 인격자』라며 『바라건대 금후의 금광왕들은 모두 방응모씨를 본받아 사회와 고락을 같이하여 주기를 바란다』(「삼천리」 1933년 10월호)고 썼다.
 
  방응모의 경영 능력은 비범했다. 1933년 7월 조만식에 이어 제9대 사장으로 취임한 그는 李光洙(이광수)·徐椿(서춘)·咸尙勳(함상훈)·金東進(김동진) 등 人材들을 불러 모으고 과단성 있게 사업을 펼쳐 나갔다. 1933년 조선일보의 보급부수는 2만9341부로 동아일보(4만9945부)의 절반 가량이었지만 방응모 사장 취임 후 불과 3년 만에 6만626부로 동아일보(3만1666부)를 두 배 이상 앞서기 시작했다. 조선일보는 1940년 폐간 때까지 조선에서 발행되는 민간 신문 중 최다 부수를 자랑했다.
 
  일제시대 방응모는 드러나지 않게 독립운동가를 후원했다. 그는 安昌浩(안창호)와 가곡 「선구자」의 주인공으로 전설적인 독립운동가였던 一松 金東三(일송 김동삼)의 장례비를 댔다. 그의 손자 김중생은 『1937년 할아버지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을 때 만해 한용운 선생이 시신을 수습했고, 계초 방응모 선생이 자금을 내놓아 5일장을 치렀다』고 말했다.
 
  방응모는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이 소식지를 찍어내는 데 활자를 제공하기도 했다. 李康勳(이강훈) 前 광복회장은 간도와 만주에서 독립운동하던 때를 회고하면서 『당시 계초 방응모 선생께서 조선일보의 자모활자를 빌려줘 독립운동 소식을 찍어 알리는 데 요긴하게 사용했다』(조선일보 1991년 11월12일자)고 회고했다.
 
  방응모는 일제의 요구로 시국강연에 불려 다니기도 하고 「임전대책협력회」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이 단체에는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조선의 지도급 인사들이 총망라됐다. 1948년 8월 반민특위가 발족했을 때 방응모는 『시국강연 기타에는 (동아일보 사장) 백관수씨와 같이 당시 신문사장으로 부득이 참가한 듯하며, 특히 排日(배일)도 親日(친일)도 할 사람이 아니다』(「친일파 군상」)는 평을 들었다. 6·25 전쟁 발발 후 그는 피란을 가지 않고 서울 중구 신당동 자택에 머무르다 7월6일 납북되었다.
 
 
  1514976561435732.gif조선 신문계의 무솔리니, 李光洙
 
  1933년 8월 동아일보 편집국장 李光洙(이광수)가 조선일보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기자 언론계가 발칵 뒤집혔다. 그는 동아일보에 10년간 재직하면서 논설·사설·소설·횡설수설을 모두 써 『신문의 4說(설)을 도맡았다』는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런 이광수가 동아일보를 버리고 조선일보로 간다 하니 대단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이광수는 1919년 2·8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후 중국으로 건너가 上海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의 편집국장을 지낸 경력을 가지고 있는 언론인이었다. 그는 「삼천리」와의 인터뷰에서 『사장 방응모 씨나 편집국장 주요한 군 그밖에 여러 동지의 관계로 보아 조선으로 아니 갈 수 없어서 그리 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조선일보에 소설 「有情(유정)」을 연재했다. 독자를 사로잡는 데 그의 소설은 「보증수표」였다. 그는 조선일보에서 부사장 겸 취체역·편집국장·학예부장·정리부장 등 무려 다섯 개의 직책을 맡았다. 이렇게 수많은 겸무를 맡자 『조선 신문계의 무솔리니』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그는 입사 9개월 만에 조선일보를 떠나게 됐다. 어린 아들의 죽음 때문이었다. 그는 슬픔에 빠져 1934년 5월 조선일보를 퇴사하고 금강산으로 향했다. 이광수는 1935년 다시 조선일보사에 입사, 편집고문으로 취임했다. 갑작스러운 사직으로 중단됐던 「그 여자의 일생」을 다시 연재했고 이어 「이차돈의 사」, 「애욕의 피안」, 「그의 자서전」, 「공민왕」 등의 작품을 조선일보 지면에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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