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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美 해병 1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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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9월 28일은 9-28 수복 58주년이 됩니다. 나의 부모, 조부모, 외조부모 등 모든 친척은 한국전쟁 당시 서울에서 ‘赤治 90일’을 보내야 만 했습니다. 서울 사람들이 모두 그랬습니다. 한강다리를 넘다가 다리가 폭파되어 죽은 서울 사람들도 많습니다. 한강교 폭파가 물의를 빚자 이승만 정권은 폭파를 책임졌던 육군 공병감 최창식 대령을 총살합니다. 그러나 5-16 후에 열린 재심에서 대법원은 최 대령에게 무죄를 선고합니다.

전쟁에 대비하고 있지 않다가 서울에서 황망하게 도망간 정부가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명령에 충실했던 국군 장교를 총살했던 것입니다. 서울 수복 이후 이승만의 자유당은 서울 사람들의 지지를 상실했습니다. 서울에서 자유당은 선거를 이긴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서울 사람들이 느낀 배신감과도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민도(民度)가 높은 서울 사람들 상대로 올빼미 표, 피아노 표 같은 부정선거 장난을 할 수도 없었으니까요.

한국전쟁 초기에 한국군은 물론이고 급히 파병된 미군도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맥아더 휘하에 있던 미 8군은 일본에서 점령군 행세하느냐고 훈련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병들은 주말에 외출해서 게이샤하고 살을 섞고 노는 것이 일과였습니다. 2차 대전의 맹장인 워커 장군(그는 패튼 장군의 3군에서 기갑사단장으로 그 유명한 발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습니다.)은 기강이 해이한 8군의 지휘관으로 부임해서 의기가 소침했다고 합니다. 더구나 그는 맥아더 사령부로부터 소외되어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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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치슨 장관이 8군을 한국에 파병하자고 했을 때 그는 8군이 그 지경이었는지 몰랐겠지요. 아마도 국방부나 합참도 몰랐을 것 입이다. 맥아더는 2차 대전 발발 당시 마닐라에 있었을 때도, 본국 정부에 보고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 합참의 작전개시 명령도 따르지 않고 있다가 결국 군대를 남겨놓고 자기만 빠져 나왔습니다. 자신만의 ‘왕국’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기야 조지 마셜도 자기의 후배였으니 상부가 상부로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오만 때문에 미군이 필리핀과 한국에서 큰 대가를 치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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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미군은 본토에 막강한 예비전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82 공수사단(The 82nd Airborne Division)입니다. 노르만디 상륙작전과 마켓가든 작전(영화 ‘멀고먼 다리 A Bridge Too Far’가 마켓가든 작전을 그린 영화입니다)에서 명성을 날린 82 공수사단이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것 입이다. 그러나 트루만과 애치슨은 82 공수사단을 한국에 투입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82 공수사단은 소련이 서유럽을 침공할 때 투입할 부대였기 때문입니다. 82 공수사단은 베트남 전쟁에도 투입하지 않고 있다가 1968년 초 북베트남의 구정(舊正) 대공세 때 비로소 투입해했다가 2년 후인 1969년 말에 철수했습니다. 82 공수는 1991년 걸프 전쟁 때 연합군 선봉군으로 이라크에 가장 먼저 가장 깊숙이 진군해서 전세를 장악했습니다. 82 공수는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에도 참전했습니다. 그러나 정예부대치고는 실전경험이 상대적으로 적은 셈입니다.

인천 상륙작전과 서울 수복에 앞장섰고, 장진호에서 잘 싸운 미 해병1사단은 2차 대전 중 과달카날, 펠리우, 오키나와에서 싸운 부대입니다. 2차 대전 후 병력이 1개 연대 정도로 감축되어 있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예비군을 소집해서 다시 사단병력이 되어서 한국에 파병됐습니다. 당시 사단장이었던 스미스 소장은 매우 소탈하고 겸손한 장교로서, 부하들은 그를 ‘교수(professor)’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는 장진호 전투에서 10배나 병력이 많은 중공군 9병단에 치명타를 입혀 결국 중공군 참모총장 팽덕회가 실각하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스미스 소장은 그 후 4성 장군으로 진급한 후 은퇴했습니다.) 해병 1사단은 1965년-71년 동안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서 많은 전과를 올렸습니다. 특히 1968년 구정 대공세 때 치열한 시가전을 벌여 북베트남군을 패퇴시켰습니다. 2003년 봄 이라크 침공 당시 해병 1사단은 가장 먼 거리를 가장 단기간에 진군한 부대로서 기록을 세웠고, 2004년 11월엔 팔루자 전투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습니다. 2차 대전 후 치열한 전투를 가장 많이 치른 부대로 뽑을 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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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우리나라를 구한 전투로선, 낙동강 하류의 영산-창녕 방어 전투, 장진호 전투, 그리고 지평리 전투를 들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낙동강에선 웨스트포인트를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젊은 장교들이 자기들이 무너지면 부산이 하루만에 넘어간다는 각오로 싸우다가 무수히 전사했습니다. 혹한 속에서 싸운 장진호 전투는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우리말로 번역된 마틴 러스의 ‘브레이크아웃’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장진호는 북한에 있으니까 그렇다고 치고, 서울에서 멀지 않은 양평군 지평리에서 그런 중요한 전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우리 국민이 얼마나 될까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전쟁은 군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인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정치 지도자는 전쟁을 결정할 때 정말 신중해야 합니다. 일단 전쟁을 결정하면 그 집행은 군에게 맡기고 간섭하지 말아야 합니다. 정치군인은 군에서 추방해야 합니다. 정치를 의식한 작전은 실패하기 마련이고 막대한 인명손실을 가져오기 쉽습니다. 그것이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그리고 이라크 전쟁의 교훈입니다. 너무나 큰 대가를 치르고 얻은 교훈입니다.

이상돈 (중앙대 법대 교수)


출처: http://www.leesangdon.com

<Battle of Chosin>


<Korean War (Inch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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