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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수기-북한의 죽음의 냄새와 중국의 절망, 모든 것을 잊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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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KVIsion 9 호 ( 2008. 10 )
[국내입국 탈북고아 수기]
북한의 죽음의 냄새와 중국의 절망, 모든 것을 잊고 싶다

김철원(가명) | 대학생

깊고 긴 세월을 잠들어 있었던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왕자가 나에게 키스를 해주길 기다리다 지쳐, 어느 날 스스로의 의지로 깨어났다. 너무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던 탓일까 주변의 모든 것들은 바뀌었고, 그렇게 친하던 친구들과 심지어는 가족들까지 모두 사라져 버렸다. 언젠가 읽은 책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처럼 차원이동을 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 낯선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호기심으로 문 앞과 창턱에서 끊임없이 주변을 감시한다. 혹시 이곳이 미래의 감옥은 아닐지, 혹은 이 세상에는 나와 다른 생김새를 가진 종족이 살고 있지는 않는지, 나는 끊임없는 이 말도 안 되는 생각의 끝머리를 집착에 가깝게 잡고는 놓으려하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나의 모든 기억을 부정하며 거의 모든 기억을 내면 깊숙이 봉인하려고 노력한다.
내가 태어난 곳은 함경남도 함흥시 어느 조용한 마을이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부모님과 형제들의 축복을 받으며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풍족하진 않았지만 부족한 것도 없는 평범한 부모님 아래에서 난 평범하게 성장하였다. 북한의 모든 이들이 그렇듯 7살에 인민학교에 입학하였고 11살에 고등중학교에 입학 하였다.

운명의 여신의 장난인지 아니면 그 어떤 다른 초월적인 존재의 장난인지, 평범한 나의 일상은 모든 것이 뒤틀리고 꼬아져 혼돈(混沌)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소설책에서 등장하는 자고 일어나니 모든 것이 바뀌어있는 그런 미스터리한 이야기처럼 나의 일상도 너무 갑자기 바뀌어 버렸다. 아니 나의 일상만이 아니라 북한 전 지역 거의 모든 이들의 일상이 바뀌어 버렸다. 욕심도 없고 야욕도 없는 순진한 산골마을 사람들의 삶속에 뛰어든 하이에나떼와 같이 질병과 기아는 거침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음의 길로 인도하고 또 산지사방으로 흩어 놓았다. 그것이 1996년의 봄, 나와 우리가족 그리고 북한의 대다수 주민과 그들 가정의 불행의 시작이었다.

불행은 쌍으로 온다 했던가, 미처 저항할 틈도 없이 불행은 연속적으로 우리를 덥쳤고, 그 불행의 해일 속에 많은 사람들이 삶의 권리를 아무런 조건도 없이 빼앗겼다. 죽음 앞에 초연한 고승처럼 나는 아무런 감흥도 없이 죽음을 받아들이도록 만성화 되어갔지만 매일 괴롭히는 배고픔은 죽음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고, 출처도 없이 떠도는 소문의 한 끝머리에 의지해 나는 2001년 중국행을 결심했다.

2001년 2월 23일 두만강을 건넜다. 어둡고 캄캄한 새벽 2시 폐를 얼릴 것 같은 공기와, 감각을 마비시키는 차가운 두만강 물을 건너서 중국 땅에 도착했다. 수없이 뒤돌아본 북한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침묵하였고, 앞쪽에 웅크린 거대한 중국산들은 내가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한 것이 못마땅한 듯, 혹은 비웃는 듯 거만하게 내려다보았다.

14억 인구 중에 나 하나 설 곳이 없겠냐는 생각에 나는 얼어붙은 몸을 입김으로 녹이며 무엇에 쫓기는 듯 더 멀리 더 높은 곳으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연신 부르짖으며 달음박질 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렸는지, 얼마나 왔는지도 모르고 마지막 남은 한줌의 기력까지 쥐어짜고서야 멈추었다. 한밤중 캄캄한 산중에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 상황에서 나는 저 멀리 반짝이는 작은 불빛을 보고 힘겹게 걸었다. 그 불빛은 작은 오두막이었고 그 안에는 몇 명의 사람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들은 나의 초췌한 모습에 송장을 볼까 두려웠는지 인심 좋게 먹을 것을 내어주었다. 나는 그렇게 중국 땅을 밟고 사람을 만났고 먹을 것을 얻었다. 또한 그 오두막에서 잠을 잤다. 다음날 나는 주인들이 일러준 길을 따라 연길을 목표로 부지런히 걸었다. 오두막 주인들은 고맙게도 먹을 것과 갈아입을 옷까지 제공해 주어 더 이상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오두막을 떠나 3일 만에 연길에 도착했다. 하지만 아는 사람 하나 없고 낯설고 물 설은 중국 땅은 당연히 나를 이방인 취급을 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먹어야 할지, 어린 나는 하루하루 지쳐갔다. 꿈속에서 보이는 부모님과 형제 그리고 다정했던 친구들을 생각하며 시리도록 파란 밤하늘의 별들과 소름끼치는 추위 속에서 내일 아침 살아 있기를 기도하며 그렇게 하루하루의 고역을 견뎠다.

나에게 있어서 하루는 너무나도 길고 긴 고역이었고 고난이었다. 오늘은 어디서 자야 하는지, 또 어디서 먹을 것을 구해야 하는지, 중국 공안에 잡히지는 않을지, 말도 모르고 문화에도 익숙하지 않는 나에게 중국생활은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눈앞에 있는 음식은 천국이요, 그것을 보고도 먹을 수 없는 것은 지옥이었다. 그렇게 언젠가는 나도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맛좋아 보이는 음식을 마음 것 먹을 날이 있을 거라는 한 가닥의 희망을 찾아 드넓은 중국 땅을 정처 없이 배회 했다. 나는 그렇게 남들이 다 웃을 만큼 소박한 꿈을 꾸었다. 하지만 나이에 비해 작은 체구인 나에게 일거리는 주어지지 않았고, 중국말을 모르는 심리적 불안감은 나를 조금씩 병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끈질긴 것이 사람의 목숨이라 금방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하는 나의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더 삶의 강렬한 욕구로 단단해져만 갔다. 하루는 비럭질을 해서 연명했고, 하루는 남들이 버린 쓰레기 더미에서 하나의 희망을 찾아 연맹했고, 또 하루는 도둑질을 해서 연맹했다. 많은 날들을 굶주림으로 하늘의 별을 빵 삼아, 차가운 공기를 국 삼아 부질없는 내일의 소박한 꿈을 반찬 삼아 하루를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은 하나의 인연을 만들어 주었다. 여느 날처럼 거리를 배회하던 나는, 너무 지쳐 잠시 쉬고 있었다. 지나가던 중국인(한족)이 나를 불쌍하게 여겼는지 나에게 조선 사람인가 물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그렇다고 대답 했더니 자신의 집에서 일해 볼 생각이 없냐고 다시 물었다. 나는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앞뒤 생각해볼 틈도 없이, 아니 그 사람이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갈까봐 두려워 바로 가겠다고 했다.

그렇게 자신을 ‘왕’이라고 소개한 사람을 따라 그의 집으로 가게 되었다. 춥고 어둡고 길기만 하던 겨울이 하루아침에 봄으로 바뀐 양 나는 이 말도 안되는 인연과 하늘의 은혜에 너무나 감격해서 눈물마저 쏟을 번했다. 내게도 갈 곳이 있고 따뜻한 밥을 삼시 세끼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천국이며, 지상 최고의 낙원이었다. 물론 진수성찬과 따뜻한 잠자리를 공짜로 받겠다는 마음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즐거운 꿈을 꾸며 도착한 그의 집은 정말 아담하고 마음에 쏙 들었다. 물론 돈 많은 어느 부자의 별장처럼 꽃밭으로 뒤덥힌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작지만 나의 방도 있었고 안주인도 마음씨가 좋았다. ‘왕’은 조선말을 조금 할 줄 알았지만 안주인은 조선말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손짓과 몸짓으로 거의 모든 대화가 가능했고 또 모른다고 해도 크게 문제될 것 없었다. 나는 고단하지만 행복한 하루하루에 감사했고 나를 믿어준 ‘왕’과 그 부인에게 나날이 고마움을 느꼈다. 그래서 비록 체구는 작고 힘이 없더라도 최선을 다 했고 매일매일 제일 먼저 일어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다했다. 마음씨 좋은 ‘왕’과 그 부인은 쉬엄쉬엄 하라며 말리기도 하였다.

그렇게 날이 가고 달이 바뀌며 나는 그 집이 마치 내가 처음부터 살아온 양 정이 들었고 ‘왕’씨 부부도 나를 친아들처럼, 아껴주고 챙겨주었다. 나또한 북한에 계신 친부모님에게는 미안한 소리지만 ‘왕’씨 부부를 친부모처럼 생각했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 더 이상 굶지 않아도 된다는 것, 한 동안 잊어버려 모르는 그런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배우며 행복한 삶을 이어 나갔다. 노래의 한 가사처럼 해 뜨는 아침이면 일하러가고 해지는 저녁이면 TV앞에서 쉴 수 있는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하지만 신은 나의 행복한 모습에 질투를 느꼈는지, 장난치기 좋아하는 개구쟁이마냥 순탄한 나의 앞길을 마구 헤집어 놓았다.

‘왕’의 집에서 봄에서 가을로 계절이 바뀌는 동안 나는 살도 많이 올랐고 키도 컸다. 그렇게 겨울을 맞이한 어느 날 ‘왕’이 나에게 ‘그동안 수고 했으니 오늘 하루는 시내에 나가서 실컷 놀자’고 했다. 나는 기쁘고 설레는 마음에 그동안 아까워서 입지도 못하던 새 옷을 꺼내 입고, 장가가는 총각인양 한껏 멋을 뽐내며(내 개인적인 생각) ‘왕’과 함께 시내로 나섰다. 하지만 ‘일장춘몽’이라 했던가, ‘왕’이 화장실에 간 틈에 공안들이 다가와 나에게 검문을 요청했다. 중국말을 모르는 나는 당연히 잡혔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내가 ‘왕’의 집에서 잡힌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내가 ‘왕’의 집에서 잡혔으면 그 마음 좋은 ‘왕’과 그 부인도 공안에 시달렸을 것이라는 생각에 슬프고 억울한 마음과 안도의 마음이 겹쳐서 나타났다.

나는 경찰서에서 몇 가지 취조를 받은 뒤(고향이 어디며, 이름, 나이, 중국 어디에 거주 등) 연길 감옥으로 옮겨졌다. 보통은 경찰서에서 변방교도소로 바로 압송되지만 변방교도소가 꽉 찬 관계로 연길감옥으로 보내지게 되었다. 나는 매일 밤 감옥 천장을 바라보면서 ‘왕’씨 부부가 혹시 나를 꺼내주지 않을까, 지금쯤 없어진 나를 찾아 연길시를 헤메지는 않을까를 생각을 하면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가족들 생각과 그 끔찍한 곳으로 다시 가야한다는 생각, 북한에 잡혀 나가면 죽이지는 않는지, 이런 순서 없는 생각과 잡혀 나가면 북한의 가족들에게 위해가 갈까 두려워 자살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끊임없이 생각하며 밤을 새기가 일쑤였다.

그렇게 한 달을 연길 감옥에서 지낸 후 변방으로 압송 되었고 나는 그곳에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나와 한 방에 있던 사람과 이야기 하다가 ‘왕’씨에 대해 듣게 되었다. 사실은 내가 잡힌 것은 ‘왕’씨가 공안에 신고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왕’씨는 매해 봄이면 북한사람들을 일꾼으로 쓰고 겨울이 되어 할 일이 없어지면 그런 수법으로 공안에 신고해 붙잡히게 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머리가 차갑게 식혀지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뒤따르니 ‘왕’씨가 화장실에 간다고 간 것과 거리 한가운데서 공안이 나만 검문을 한 것 등 이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점점 내가 잡힌 것이 ‘왕’씨가 공안에 신고한 것 때문이라는 생각이 굳어지면서 나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배반감, 그리고 수치심에 치를 떨어야 했다. 일이 많은 봄철부터 가을철까지 기껏 열심히 부려먹고는 돈 몇 푼이 아까워 겨울철이 되면 사람을 팔아넘기다니, 그런 분노감에 삶을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은 이성의 저편 너머로 사라지고 어떻게 하든 탈출해야 한다는 생각이 마음속을 지배했다. 그런 마음에 어느 날 변방교도소에 지진이 일어나 벽이 무너지기를, 또는 운석이 떨어져 벽들을 날려 보내기를 되지도 않을 환상을 꿈꾸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들에게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천지지변은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차가운 족쇄를 차고 북한 온성보위부로 북송 되었다. 차가운 눈초리와 입에 담기 힘든 험한 말들을 듣고, 견디기 힘든 매를 맞아가며 나는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지옥 같은 보위부 감옥에서 7일을 보냈다. 다행이 나이가 어려 집결소 보다 조금 낳은 구호소로 보내지었다. 나는 여전히 복수를 포기하지 않았고 탈출할 기회를 엿보며 하늘의 신들에게 기회를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던 나에게 드디어 탈출의 기회가 온 것이다. 북한에서는 밥을 하건 물을 끓이건 모든 것을 나무나 연탄으로 해결한다. 하지만 연탄은 조금 비싸서 산이 가까운 곳에서는 나무로 해결한다. 이런 현실로 인하여 구호소에서도 나무를 하러 산에 올랐던 것이다. 나는 배 아픈 척 하면서 화장실에 간다며 바로 달아났다. 그렇게 나는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멀리, 될 수 있으면 멀리 달아나려고 모든 힘을 쏟아 부었다. 그렇게 탈출에 성공하였고 나는 그날 저녁 두만강을 다시 건넜다. 이것이 나의 두 번째 중국행이었다.

배반의 복수심으로 다시 밟은 중국 땅의 모든 것이 증오스럽고 혐오스러워 보였다. 산속을 홀로 걸으며 나는 어떻게 복수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며 걷고 또 걸었다. 배고프면 산속에 떨어진 나무 열매나, 간혹 빈집에 들어가 남은 밥을 먹고 밤에는 차가운 바람과 더불어 계속되는 복수심으로 몸을 덥히며 추위를 이겨냈다. 그렇게 멀게만 느껴지던 연길에 4일 만에 도착하였고 나는 도착과 함께 현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내가 ‘왕’씨에게 복수를 한다고 하여도 나 또한 잡힐 것이고 그에 합당한 벌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 사형을 당하거나 평생 감옥에서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갈등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삶에 대한 욕구가 더욱 컸던지 나는 끝내 복수를 하지 말고 다시 한 번 중국의 삶을 개척해 가려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억울하고 분하지만 내가 그에게 복수를 한다면 나 또한 파멸할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복수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나에게 남은 것은 또 배고픔과 갈 곳 없는 막막함, 두려움과 적막함뿐이었다. 그렇게 정처 없이 연길시내를 떠돌아다니던 나에게 뜻하지 않게 일자리가 생겼다. 전에 연길감옥에 함께 있던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가 연길시멘트 공장에서 일꾼을 구한다며, 그곳에 있는 친구를 소개시켜 주었다. 나는 그의 도움으로 간신히 연길시멘트 공장에 취직 했고 그곳에서 3달을 일했다. 일은 힘들었지만, 적은 돈이라도(북한사람이라고 적게 주었음) 받을 수 있었고 먹을 것과 잘 곳이 있다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이런 생활도 잠시, 갑자기 중국 공안의 검열이 심해졌고 결정적으로 나에게는 신분증이 없었으므로 그곳에서 나와야 했다.

그렇게 또다시 갈 곳을 잃은 나는 돈이 아까워 매일 밖에서 잠을 청했다. 봄이었지만 밖은 추웠고 때때로 쏟아지는 비에 나는 매일 젖은 상태로 지내야 했다. 그렇게 몸을 혹사해서 그런지, 아니면 시멘트공장에서의 일 때문에 그런지 나는 폐렴에 걸리게 되었다. ‘이제 이렇게 끝나는구나’, ‘그렇게 살려고 발버둥 쳤는데 이렇게 죽는구나’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외각의 한 야산에 올라가 큰 나무 밑에 누워 제발 아프지 않게, 내 부모님과 형제들도 알 수 없게, 되도록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내 시체가 발견되기를 바라며 죽음을 받아들이려 했다. 하지만 끈질긴 것이 사람 목숨이라 했던지 인적이 드문 이곳에 아랫마을 주민이 올라 왔다가 나를 발견했다. 마음씨 좋은 그 사람은 자신의 돈을 들여 치료해 주었고 자신의 집에 머물도록 해 주었다. 하지만 한 번의 배신은 나를 늘 불안하게 했으며 사람을 늘 경계하게 만들었다. 또한 마음 한곳에서는 죽음의 문턱에서 나를 살려준 그 사람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마음을 놓아도 된다는 생각이 무럭무럭 자랐다.

그렇게 나는 그 집에서 3달을 살았고, 그에게서 한국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한국은 우리 같은 북한 사람을 받아 주고, 또한 그 곳에서는 우리를 잡는 사람도 없고 말도 통하니 우리에게는 천국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 처음 한국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의 권유대로 한국행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의 소개로 알게 된 한국행 브로커의 말을 듣고 북경으로 갈 결심을 하고, 그동안 나를 보살펴준 그의 가족과 그에게 감사를 전했다. 그가 준비해준 기차표를 들고 북경으로 향했다. 북경행 기차는 유난히 시끌벅적한 중국인 특유의 말투와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로 소란스러웠지만, 드넓게 펼쳐진 들판과 아득히 높은 하늘이 마음의 여유를 더 해주는 듯 했다. 오랜만에 타보는 기차는 집을 떠나 국경으로 오던 길에 탔던 기차와는 사뭇 다르게 나에게 또 다른 희망을 안겨 주었다. 한편으로 ‘한국에 가면 북한의 부모님과 형제들은 어떻게 될까? 혹시 정치범 수용소와 같은 곳으로 보내진 않을까’하는 생각과 그럴 리 없다는 자기 변병이 교차하며 나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바로 그때, 때 아닌 신분증 검열이 시작 되었다. 물론 떠날 때 혹시 신분증 검열을 할 수도 있다고 했던 말이 떠오르긴 했지만, 떨리는 몸을 추스르며 애써 담담한척 연기를 했다. 그러나 결국, 기차에서 다시 중국 공안에게 잡혔다. 그렇게 나의 두 번째 중국 생활도 끝나게 되었고 나는 다시 한 번 차가운 족쇄와 따가운 눈초리 그리고 쏟아지는 욕과 매를 맞으며 북한 땅으로 되돌아갔다. 몇 번 자살을 생각해 보았지만 그래도 죽는 것은 두려웠고, 삶의 강렬한 열망에 다시 한 번 탈출하게 되었다. 나의 세 번째 중국행이었고, 한국으로까지 입국하게 되었다.

이번에 추석의 달은 유난히 크고 슬퍼보였다. 밤의 공기는 유난히 차갑고 밤은 길게만 느껴졌다. 밤이 긴만큼 꿈도 길다. 나는 오래도록 꿈을 꾼다. 세 번의 중국행을 모두 꿈꾸기에는 이 긴 가을의 밤도 짧은 듯하다. 물론 나는 다른 탈북자들보다 유난히 짧고 별로 굴곡도 없는 중국 생활을 경험 했지만, 그 짧은 경험도 이 백지 위에 옮기기가 슬프기 그지없다. 누군가가 너는 남한의 젊은이보다 중국과 북한의 생활을 경험했기 때문에 오히려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잊고 싶다. 아니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다. 북한의 죽음의 냄새와 비릿한 배고픔, 그리고 중국의 고난과 두려움 그리고 절망을. 나는 원래부터 고아였고, 이제까지의 기억은 나의 길고 긴 꿈이었을 뿐이고 현실이 아니었다고 말이다.
10 Comments
어여쁜 나 2016.11.26 17:42  
이만갑이나 모클에 출연중인 탈북미녀들중에서 북한에서 고아로 자란 탈북녀들도 많았습니다~!!! 김아라인가? 그애가 1990년생인데 북한에서 배우를 했었을법한 예쁜얼굴과는 달리 어렸을때 새어머니에게 구박을 받고 사람들의 눈칫밥을 얻어먹어가며 어렵게 자랐다네요? 그러다가 2002년도에 탈북해 6년동안 중국에서 생활을 해왔고 2009년도에 입국해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는군요?
fabiano 2016.11.29 12:18  
끄덕끄덕~~~
어여쁜 나 2016.11.30 21:57  
이번 4월에 입국한 닝보 류경식당 종업원 13명(그중 1명은 남자로 지배인임.)들 사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탈북자가 된 케이스랍니다~!!! 이에 대해 일본의 모 TV방송에서 닝보 류경식당 집단탈북사건의 의혹에 대해 방영을 했었어요~!!!! 이때문에 북한에서 멀쩡하게 살아있는 가족들이 나와서  오열을 하더라구요?(과장된 연극이 아닙니다~!!!! 북한사람들이라고해서 연극이나 해대는 사람들이 아니라는걸 아셔야할때)물론 탈북종업원 가족들 전부 우리나라정부를 대놓고 쌍욕해대며 당장 내딸을 돌려보내라고 항의까지 했다네요? ㅡㅡ&#59;&#59;&#59;&#59;&#59;물론 우리나라 보수탈북자단체들이나 국정원 통일부에선 이사실을 전면 부인했으니....!!! 모르죠~!!!! ㅡㅡ&#59;&#59;&#59;&#59;
fabiano 2016.12.01 13:04  
그렇다면, 대한민국 정부에서 이들을 부추기거나 납치했다는 야그?
어여쁜 나 2016.12.03 10:25  
그럴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합니다~!!!!(괜한말씀을 해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닝보 류경식당 지배인이었던 남자가 북한에 있을때 부패행위를 저질러왔고 중국 닝보에 있었을때에도 공금횡령을 저질러와 북한정부측에서 그를 강제송환할려고 하자 우리나라 국정원측에서 그 남자에게 "그러지말고 그냥 종업원들을 몽땅 데리고 대한민국으로 와라."하며 탈북을 권유했다고 하더군요? 분명히 일본방송에서는 그들이 집단탈북을 하게된 원인에 대해서 정확하게 방송을 해줬어요~!!!! ㅡㅡ;;;;;;;
fabiano 2016.12.06 10:52  
거~참~~~
어여쁜 나 2016.12.06 19:08  
어제 우리민족끼리 유튜브 동영상에서 닝보류경식당 탈북종업원 가족들이 또 나왔어요~!!!! 비록 그 동영상이 우리측입장에서는 북한정권을 선전선동하는 선동매체겠지만 이념사상과는 별개로 사랑하는 딸들을 사랑하는 부모품으로 돌려보내라는 부모들의 피타는절규 내년에도 계속이어질것같더군요?
fabiano 2016.12.07 15:16  
쉽게 돌려 보내기도 어려울 듯...워낙, 북한정권의 하는 짓이...
어여쁜 나 2017.03.07 10:20  
이게 다 분단의 비극이라는것을 잊지말아야할것 같네요? ㅠㅠㅠㅠㅠㅠㅠ
fabiano 2017.03.07 10:43  
단일 민족인 우리가 왜, 이런 남북분단의 고통을 당하는지? 네 생각과 내 생각이 극단적으로 다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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