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글] 육영수와 3남매, 북악산 자락의 추억
fabiano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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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7 03:51
육영수와 3남매, 북악산 자락의 추억 | |||||||
<그리운 나라, 박정희>엄격한 가정교육, 세자녀 키워내 "내 집 내가 지킨다는 각오만 돼있으면 무서울게 없다" | |||||||
2008-09-06 07:24:19 | |||||||
요즘 TV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에서 털털하고 구수한 멋의 연기를 보여주고 하는 탤런트 백일섭이 젊은 시절 청와대에 갔었던 이야기를 공개했다. 1960년대에 느닷없이 청와대의 부름을 받고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잔뜩 긴장하고 갔다가 뜻밖으로 박정희 대통령 내외와 식사를 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어른의 이름에는 ‘씨’라는 존칭을 반드시 붙여야 한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아차 싶어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백일섭씨’로 호칭을 정정했다. 한창 뛰어 놀아야 할 소년소녀 시절에 청와대는 답답한 곳이다. 역대 대통령 가족 중에서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낸 박근혜와 그 동생들이 그러했다. 특히 막내 박지만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친구도 없이 집안에서 외톨이로 지내야 했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TV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연예인 중에 대중의 사랑을 받는 코미디 명콤비로 ‘막둥이’ 구봉서와 ‘후라이보이’ 곽규석이 있었다. 박지만이 TV를 보다가 누나에게 외쳤다. “누나, 후라이보이씨 나왔어.” 그 소리에 가족들이 모두 웃었다. “후라이보이씨는 이상해.” “그냥 후라이보이라고 해.” 꼬마 박지만은 이 말을 납득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후라이보이’는 애칭이니까 ‘씨’를 안붙여도 된다고 다시 일러주었다. 장녀 박근혜는 청와대 시절을 회고하면서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가정교육에 엄했고, 어머니는 바른 예절을 가르치는 데 비중을 크게 두었었다고 말하고 있다. 어머니는 아이들이 친구집에 놀러 가면 어른께 반드시 깍듯이 인사를 차리도록 했고, 일상의 평범한 언어까지도 올바른 습관을 갖도록 가르쳤다. 이러한 예절교육은 혹시라도 아이들에게 특권의식이 생겨 남에게 버릇없이 굴거나 눈밖에 나는 언행으로 남의 손가락질을 받는 일이 없어야 하겠다는 경계심으로 인한 것이었다. 어머니는 아이들의 옷을 남대문시장에서 사다 입히는 것이 예사였으며, 정초에 아이들에게 세배돈조차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누군가에게 조르거나 보채는 일이 용납되지 않았다. 아이들은 제 또래보다 좋은 장남감을 가질 수가 없었는데, 어쩌다 누군가 막내 박지만에게 보내온 외제 장남감은 박지만이 제대로 만져보기도 전에 치워졌다. 그럼에도 세상 인심이 곱지만은 않았다. 아이들의 중학교 입학이 무시험 추첨제로 바뀌자 “공부 못하는 대통령 아들 때문에 입시제도가 바뀌었다”거나 심지어 “대통령 자녀들이 연필 끝의 고무를 빨고 물어뜯는다고 해서 연필에 고무를 달지 못하게 한다”는 둥 우스개 장난 같은 별의별 풍문이 다 나돌았다. 그러나 어머니 육영수는 1960년대에 가장 가슴 아팠던 일로 1.21사태를 회고한 적이 있다. 무장공비가 청와대 인근까지 왔다는 소식에 시중에선 금의 매점매석으로 금값이 폭등하고, 피난가려고 허둥대는 사람들도 꽤나 술렁거렸다.
60년대에는 한일회담 반대 시위대가 청와대 앞까지 진출해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등 적지 않은 시국 사건들이 요동을 쳤지만, 1.21사태의 충격파만큼 슬프고 마음의 상처가 컸던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육영수는 말했다. “어떤 경우를 당해도 당황하거나 흐트러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들 손으로 건설해 놓은 이 땅을, 아니 하루속히 선진국으로의 건설에 이바지해야 할 우리들이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어요. 각자 내 집은 내 힘으로 지키겠다는 각오만 되어 있다면 두려울 게 없습니다.” 그 시절 철부지 막내 박지만은 청와대에 순한 사슴만 기르는 것이 불만이었는지 “우리도 사자를 길러요”라고 졸랐다고 한다. 세 자녀의 학창생활은 청와대와 학교 외에 제3의 장소가 자유롭지 않은 제한된 공간의 세월이었다. 그들에게 경호원이 따라다니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부자유스러움이었다. 어머니 육영수는 둘째 근영이 대통령 가족으로 얼굴이 알려지는 것을 유독 싫어했다고 한다. 학교를 오갈 때 남들이 얼굴 알아보는 게 부담스럽다고 해서 언론의 신년특집으로 대통령 가족을 촬영할 때도 사진 찍기를 거부해 야단을 맞을 정도였다. 그는 개성이 강하고 활달한 편이었는데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광화문 근처에서 구걸하는 소년을 청와대로 데려와 어머니를 놀라게 했으며, 아버지에게는 성당에서 영세받은 이야기를 하면서 기뻐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영세받은 일을 물었다. “어느 신부님한테 받았지?” “스페인 신부님인데 이름이 우에라 구에리카라고 해요.” “다 좋은데 그 신부님 이름이 왜 그리 우굴쭈굴하냐.” 그러면서 부녀가 함께 웃었다. 대통령 박정희가 ‘님’자 존칭을 붙이는 대상은 학교 교사, 목사, 신부, 승려들이었다. 존칭의 의미가 포함된 스님을 비롯해 선생님, 목사님, 신부님 등등으로 호칭을 했다. 그는 고향 구미 시절 교회에 다닌 적은 있지만 특별히 신앙하는 종교를 갖지는 않았고 유불선(儒佛仙)의 전통 가치관이 강한 편이었다. 부인 육영수는 ‘대덕화’라는 법명을 가진 불자였다. 그런가 하면 박근혜와 근영 두 딸이 모두 학교에서 천주교 영세를 받을 만큼 대통령 내외는 자녀들의 종교 문제라든가 학교의 일에는 아무런 간섭을 하지 않았다. 다만 자녀들이 남의 부러움을 사지 않도록 교통수단만큼은 주로 버스나 전차를 이용하게 했다. 박근혜의 경우 성격이 온순하고 모난 데 없어 교우관계도 원만했지만, 친구 따라 어디를 놀러 가거나 빵집에서 수다를 떤다든지 하는 게 자유롭지 못했다. 그 자신은 그런 제한의 부자유를 별로 느끼지 못하고 학교 생활에 충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처음 원효로의 성심여중에 입학해서는 기숙사 생활을 했고, 2학년 때 학교 증축 관계로 기숙사가 폐쇄되자 청와대에서 통학을 했다. 얼마 동안 경호원과 함께 승용차로 다니다가 어머니의 뜻에 따라 전차 통학을 했다. 효자동에서 원효로를 왕복하는 전차였다. 그러자 대통령 딸이 전차 통학을 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학생이 다니는 학교에 대통령 딸이 다닌다면서?” “네, 다녀요.” “전차 타고 다닌다던데?” “그런가 봐요.” “그 학생 공부는 잘하나?” “그런대로 하나봐요.” “귀엽게 생겼어?” 또박또박 대답하던 여학생이 약간 난처한 듯 망설였다. “글쎄요.” 자신없는 대답을 했다. “키는 얼마나 되는데?” 이 물음엔 자신있게 대답했다. “저만 해요.” 이 여학생이 바로 박근혜였다. 암띤 소녀 박근혜의 내숭이 보통 아니었던 모양이다. 학교에서 돌아온 박근혜가 전차에서 있었던 일을 가족에게 이야기해서 한바탕 웃었다고 한다. 청와대는 바깥 나들이가 불편한 곳이다. 대통령 박정희는 무교동 낙지집이 몹시 그리웠지만 가지 못했다고 한다. 부인 육영수는 막내 박지만이 좋아하는 탤런트 백일섭을 한번 만나보고 싶어했다. 방송국에 연락을 해서 비서관이 그를 지프에 태우고 왔다. 말로만 듣던 청와대에 난생 처음 들어온 그를 대통령 부인이 웃으며 맞이했다. 바로 식당으로 안내를 받아 들어가니 거기에 TV에서 보던 키 작은 대통령이 있었다. 잔뜩 긴장한 백일섭이 정신을 차릴 경황도 없이 대통령에게 인사를 하고 식탁에 앉으니 대통령 부인이 부드러운 웃음으로 말했다. “점심으로 국수를 먹을 예정이었는데 오늘은 손님 대접으로 스테이크를 준비했어요.” 대통령 부인이 손수 썰어주는 고기를 먹으면서 그는 묻는 말에 겨우 몇마디 대답을 했을 뿐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더라고 했다. 육영수는 대통령 남편이 초대손님 한두명과 식사를 함께 하는 단촐한 자리에서는 손수 음식을 만들기도 하고 반찬을 손님 앞에 놓아주며 으레 음식 수발을 했다. 초등학교 4학년생 박지만은 그때 학교에 가고 없었다. 대통령은 백일섭을 ‘백군’이라고 했다. “지만이가 백군을 봤으면 좋아할 텐데….” 이렇게 백일섭은 청와대의 추억담을 전하고 있다. 그 시절의 박지만은 학교에 숙제를 안해 가서 담임 선생에게 손바닥을 맞기도 하는 개구장이였는데, 장녀 박근혜에 대해 어머니 육영수는 “잘못됐다고 지적할 만한 허물을 만들어보지 않은 아이”라고 했다. 그 박근혜를 그후의 세월이 중년의 무게있는 정치인으로 바꾸어 놓았음에도 그에게는 ‘바른생활 소녀’라는 별명이 붙어다닌다. 그는 동생인 근영, 지만에게만 반말을 할 뿐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보좌관과 비서관들에게도 존칭을 쓴다고 한다. ‘바른생활 소녀’는 보태거나 뺄 것 없이 인간 그대로의 모습을 간명하게 나타낸 별명이겠거니와, 거기에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가정교육으로부터 비롯된 결코 무심치 않은 연유가 있는 것이다. 북악산 자락 청와대의 그때 그 시절, 어머니 육영수는 자녀들의 일기장, 공책, 성적표, 그림들을 차곡차곡 모아 두었다. 나중에 시집 장가를 갈 때 주려고 보관해 두었지만, 한번도 그것을 주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했다. 그 뒤로 청와대를 거쳐간 대통령과 부인들이 여럿 있었음에도 웬일인지 거기를 다녀온 정치와 이해관계가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대통령 박정희 내외만을 추억하고 있다. 그 추억의 갈피마다에는 특유의 정서가 그리움으로 깃들어 있다. 그리고 그리움이 잠들면, 눈물 메마르고 아픔도 고즈넉이 가라앉은 길을 따라 세월은 속절없이 잘도 흐른다.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아픔을 가슴에 갈무리해둔 저마다의 인생 행로는 또다시 무심히 이어지고 있다. *참고자료 : 박목월 <육영수 여사>, 중앙일보 <청와대 비서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