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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48년체제'의 위대한 遺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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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48년체제'의 위대한 遺産 ①
이승만(1875∼1965)은 생애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역할에 있어서도 서독의 아데나워(1876∼1967)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두 지도자는 생존 연대도 비..[2008.07.29]
written by. 이주영

 이승만(1875∼1965)은 생애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역할에 있어서도 서독의 아데나워(1876∼1967)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두 지도자는 생존 연대도 비슷했고, 집권기간도 거의 같았다. 그리고 통치자로서는 드물게 최고의 학력인 박사 학위를 가졌다.

 '文明史的 전환'의 주역

 무엇보다도 두 지도자는 모두 자기 나라의 문명적인 성격을 바꾸어 놓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즉, 두 인물은 자신의 조국이 '대륙 문명권'에서 벗어나 '海洋文明圈(해양문명권)'에 편입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두 지도자는 미국 지배의 '팍스 아메리카나' 체제, 또는 '글로벌리즘' 시대의 출현을 일찌감치 간파한 문명의 先覺者(선각자)들이었다. 그러한 세계 질서에 편입되기 위해, 서독은 대서양 건너 미국과 군사적, 문명적 결합을 이룩해야 했고, 대한민국은 태평양 건너 미국과 군사적, 문명적인 결합을 이룩해야 했다. 그 때문에 아데나워는 '대서양주의자'로, 이승만이 '태평양주의자'로 불리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명사적 전환'을 이룩함에 있어서 이승만은 아데나워 보다 더 큰 어려움을 겼었다. 국력, 국민수준, 주변국들과의 관계, 무력 충돌의 측면에서 대한민국이 서독 보다 훨씬 더 가혹한 조건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오랫동안 익숙해 온 공동체주의적인 '중국적 생활방식'을 버리고 낯선 개인주의적인 '미국적 생활방식'을 새로이 받아들이는 과정은 정말로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은 새로운 해양문명에 적응하는데 성공했고, 그 대가로 '자유와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개신교는 선진문명의 도입 수단

 이승만은 아데나워와 마찬가지로 종교가 문명의 성격을 결정하고 그 때문에 충돌하게 된다고 믿었다는 점에서 새뮤얼 헌팅턴이 말하는 문명충돌론 자였다. 두 사람은 모두 종교들 가운데서 기독교가 가장 높은 수준의 문명을 가져온 종교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이승만에게 개신교는 선진문명을 받아들이는 좋은 수단이었다. 그 때문에 이승만의 통치기에 개신교는 국교와 비슷한 역할을 했다. 정부의 각종 국가의전은 기독교식으로 집행되고, 미군정기에 정한 크리스마스 공휴일도 그대로 지켜졌다. 국기에 대한 경의는 경례대신 주목례로 바뀌고, 형무소와 군대에는 「형목제도」와 「군목제도」가 도입되었다. 그리고 선교를 위한 기독교방송국과 극동방송국이 인가되고, 국영 중앙방송국을 통한 기독교 선교도 묵인되었다.

 그리고 개신교도들을 정부 요직에 등용하여, 그의 12년 통치기간에 임명된 135명의 장관급 부서장 가운데서 개신교도가 47.7%에 이르렀다. 이러한 개신교도들의 발탁에는 그의 종교적 편견도 있었겠지만, 개신교가 일찍이 해양문명에 필요한 새로운 엘리트를 양성해 놓은 사실도 작용하였다.

 이승만과 아데나워는 패전국, 분단국, 약소국에게 동맹이 얼마나 중요한가하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NATO에 가입함으로써 미국과 동맹관계를 맺으려고 애썼다. 이승만도 미국, 대만, 필리핀 등을 묶어 동아시아판 NATO를 결성하고자 했다. 이 시도는 미국의 반대로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6.25전쟁을 겪으면서 NATO의 기본 정신을 대한민국에 만이라도 적용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것은 1953년의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토대로 한 한미동맹이었다.(kon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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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48년체제'의 위대한 遺産 ②
자유선거와 대통령 직선제의 확립 한미동맹의 체결은 19세기말 고종 황제가 추구했던 목표였다. 이지러져 가는 조선 왕조를 구출하기 위해 동맹국을 ..[2008.07.29]

 자유선거와 대통령 직선제의 확립

 한미동맹의 체결은 19세기말 고종 황제가 추구했던 목표였다. 이지러져 가는 조선 왕조를 구출하기 위해 동맹국을 찾음에 있어서 고종 황제가 최우선 조건으로 삼았던 것이 "영토적 야심이 없는" 강대국이었다. 당시 그 조건에 맞는 나라는 미국뿐이었다.

 고종은 미국을 동맹국으로 삼는데 실패했지만, 반세기 뒤에 이승만은 성공하였다. 이승만의 의도로, 한미동맹은 북한, 러시아, 중국에 대항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일본에 대항한 것이기도 하였다. 한미동맹은 그러한 이중적인 목표와 맞았고, 그 때문에 대한민국은 그 울타리 안에서 '자유와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로버트 올리버의 지적대로, 이승만은 自由放任(자유방임)의 미덕을 믿는 제퍼슨 적 자유주의자였다. 그의 자유주의적인 태도는 지주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農地改革(농지개혁)을 추진하게 했고, 그 결과로 한국 사회는 자작농 사회와 자유자본주의 사회로 발전할 토대가 마련되었다.

 여기에 덧붙여 이승만은 민주제의 핵심인 自由選擧(자유선거) 제도를 도입하였다. 그가 근본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 자였다는 것은 12년간 통치기간에 국회의원 선거든, 대통령 선거든,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자기에게 불리한 경우에도 어김없이 선거를 치렀다.

 또한 국회를 해산하거나 인위적으로 정당을 개편한 적도 없었다. 야당을 탄압하기는 했지만 존속하지 못할 정도의 가혹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1955년부터는 민주당이 출현함으로써 자유당과 함께 양당제도의 틀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한민당계의 <동아일보>, 흥사단계의 <사상계>, 카톨릭 계의 <경향신문>이 거의 제한을 받지 않고 자유당 정부를 비판할 수 있을 정도로 언론의 자유가 있었다.

 특히 1952년부터 대통령 선출 방식을 국회 간접선거에서 국민 직접 선거로 바꾸는 대통령 直選制(직선제)를 도입하였다. 대통령 직선제의 시행에는 '발췌개헌안'과 '4사5입개헌'이라는 무리한 방법이 따르고 선거부정 시비가 일기도 했지만, 선거는 4년마다 어김없이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민주제의 핵심적인 제도를 자유선거, 특히 대통령 직선제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1987년의 '6.29선언' 이후의 이른바 '민주화'는 기본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도입한 대통령 직선제의 부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엘리트 育成(육성)과 산업화 토대의 마련

 미국식 자유민주 체제에 대한 그의 신념은 주권자인 국민의 교육정책으로 나타났다. 국민의 대부분이 문맹인 나라에서 미국식 자유민주체제의 실현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義務敎育(의무교육)제도의 시행을 서두르게 하였다. 가난한 나라의 작은 예산이기는 하지만 연평균 10%이상이 교육에 투자되었다. 그 결과로 임기 말인 1959년에 오면 학령아동의 95.3%가 취학하고, 국민의 문맹률이 78%에서 22%로 떨어지는 놀라운 성과를 보였다. 그 때문에 로버트 올리버는 그를 가리켜 '교육 대통령'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의 교육정책은 새로운 '엘리트' 양성에서도 나타났다. 1953∼1960년 기간에 해외 정규 유학생으로 4,884명이 미국을 주로한 선진국으로 나갔다. 1953∼1961년 기간에 단기연수 기술훈련생으로 2,309명의 기술자가 해외로 나갔다.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온 군 장교와 하사관은 1만 명이 넘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나중에 산업화에 기여한 귀중한 인재들이었다.

 충주 비료, 문경 시멘트, 인천 판유리공장의 건설로 중화학 공업의 토대가 놓이고, 영암선, 태백선 등 수많은 철도의 건설로 산업 '인프라'가 구축되었다. 그 결과로 최악의 조건에도 불구하고 휴전이후(1953∼1959)의 평균 경제 성장률은 5.1%로 높았다. 통치기간 전체의 평균 성장률은 4.2%로 높았다.

 그리고 1959년에 산업발전위원회의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은 박정희 통치 기의 경제기획원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들의 선례가 되었다.

 이승만과 아데나워는 모두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그리고 그들의 반공주의에는 모두 기독교 윤리가 토대를 이루고 있었다. 특히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들의 잘못된 생활태도를 문제 삼았다. 공산주의자들이 자신의 불행에 대한 책임을 남에게 돌리고 남을 타도하기 위한 革命(혁명)을 정당화하는 그릇된 인생관을 갖는 한, 그들과의 타협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kon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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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48년체제'의 위대한 遺産 ③
'87년 체제' 출현과 대한민국의 위기 이와 같은 반공주의적 태도는 미국무부와 충돌하게 만들었다. 루즈벨트와 트루먼의 민주당 정부는 공산주의 종주..[2008.07.29]

 '87년 체제' 출현과 대한민국의 위기

 이와 같은 반공주의적 태도는 미국무부와 충돌하게 만들었다. 루즈벨트와 트루먼의 민주당 정부는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과의 협조를 통해 국제문제를 해결한다는 左右合作(좌우합작) 노선을 내걸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볼 때 미국의 좌우합작 정책은 어리석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조직이 강한 좌파와 조직이 없는 우파가 손을 잡았을 때 반드시 우파가 패배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제2차 대전 직후에 좌우합작연립 정부를 세웠던 동유럽 국가들, 그리고 '국공합작'을 내세웠던 중국이 共産化(공산화)된 사실에서 증명되었다. 따라서 입장이 애매모호한 좌우합작주의자들과의 싸움은 입장이 분명한 공산주의자들과의 싸움 보다 더 어려운 것이었다.

 이승만은 國家保安法(국가보안법)의 제정으로 공산주의자들의 인권을 지켜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혹독한 비판을 받아야 했다. 그러한 비난에는 한국도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공산화 통일이 될 수 있었는데 이승만 때문에 공산화되지 못했다는 좌파들의 분노도 섞여 있었다.

 1987년의 6.29선언에 뒤이어 10월에 이루어진 9차 헌법 개정과 함께 이른바 '87년 체제'가 나타나면서, 이승만의 '48년 체제'는 바뀌기 시작하였다. 1948년의 헌법은 전문에서 대한민국이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3.1운동 정신)을 계승…"한 것임을 밝혔으나, 1987년의 제9차 개정 헌법의 전문은 대한민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1987년에 대한민국의 이념적 토대가 "3.1운동 정신"으로부터 "임시정부"로 바뀐 것은 대한민국이 반공국가에서 좌우합작국가로 바뀌어 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왜냐하면 임시정부는 1942년부터 좌파들을 받아들인 左右合作(좌우합작) 정부이기 때문이다.

아직 국가보안법이 그대로 남아있기는 하지만, 대한민국은 사회주의를 용납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게 된 것이다. 그 때문에 지난 20년간 대한민국은 국가정체성 문제에 있어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현대판 衛正斥邪派(위정척사파)'의 도전을 받는 '개화파의 대한민국'

 이처럼 좌우합작의 길로 가는 과정에서 일어나고 있는 혼란은 한 세기 전 구한말 해양세력이 한반도를 향해 몰려오고 있었던 때를 연상시킨다. 그때 지식인들은 '開化派(개화파)'와 '衛正斥邪派(위정척사파)'로 갈려 처절한 싸움을 벌였던 것이다.

 이러한 갈등 구도에 비추어 보면, 대한민국은 분명히 개화파(문명개화파)의 전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세운 나라이다. 따라서 그것의 이념적 토대에는 일본의 國家主義(국가주의)와 미국의 自由主義(자유주의)가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이에 맞서는 反(반) 대한민국 세력은 '위정척사파'의 전통을 이어 받은 북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그 동조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이념적 토대에는 民族主義(민족주의)와 民衆主義(민중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대한민국이 위정척사파의 나라가 아니라 '개화파의 나라'라는 사실, 따라서 대륙문명권이 아니라 '海洋文明圈(해양문명권)'에 속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천명함으로써, 대한민국 정체성 위기의 주원인인 '左右合作化(좌우합작화)'를 막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운동의 중심에는 이승만이 상징적 지도자로서 있는 것이다.(konas)

 이주영(건국대 사학과 명예교수)





7 Comments
홍모세 2008.07.31 12:15  
역사는 역시 두 가문이 대를 이어가며 벌이는 투쟁인가요? 그렇다면 먼저 족벌부터 확실히 구분해야겠지요? 위정척사파냐 개화주의자냐, 좌파냐 우파냐, 사회주의자냐 자유주의자냐, 진보냐 보수냐. 아 역시 우리는 끝까지 나누고 나누고 나누는 것이 옳은 것이군요. 더구나 시대가 변해도 진리는 변하지 않는 것이니 그때의 조선민주주의 공화국의 추종자들은 지금의 사회주의자들 혹은 좀 멀긴 하지만 진보진영의 조상이 되는 것이군요. 씨를 말려야 겠네요? 그죠? 계급투쟁이 아닌 족벌투쟁이네요? 아니 신계급투쟁이라고 해야되나?
홍모세 2008.07.31 12:20  
이승만 대통령님, 존경합니다. 위에 말씀하신 부분은 굳이 말씀안하셔도 의식이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그렇지 않은 분들도 있지만) 사실아닌가요? 그의 업적을 부정한다면 어려운 시절에 부모의 몸바친 희생을 모른다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런데요 제가 궁금한 것은요.. 김구선생님은 그럼 그냥 없으니만 못한 사람이었다는 것인지.. 흑백논리가 아닌지 모르겠지만 왠지 역사의 패배자처럼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군요.물론 이승만 박사께선 대한민국의 아버지입니다. 아버지 말씀이 옳은 것이었구요.
홍모세 2008.07.31 12:26  
하지만 김구 스승님의 말씀도 틀린 것은 아니었지 않나요? 비록 현실의 여건이 스승님의 말씀을 따르기가 어렵고 결과적으로 반대되는 상황으로 흘러갔지만 그래도 스승님의 말씀이 더 큰 가르침이 아니었던가 이 말 입니다.그래서 시간은 강물과 같은 것이고 시대는 새로운 요구를 부르니 스승님의 가르침을 다시 되새긴다면..그것은 아버님의 은혜를 져버리는 것이고 아버님이 세운 나라를 부정하는 것이 되는 건가요?
홍모세 2008.07.31 12:32  
또 하나.. 역사는 물론 돌고 돈다고 합니다. 위정척사파와 개화파의 처절한 싸움이 현재의 진보 보수의 갈등(어떤 사람들을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자꾸 이것을 부각시키고 편을 가르므로 실제로 얼마나 갈등이 심각한건지는 확실치 않다)과 닮은 점이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겠지요? 그럼 다른 면도 언급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냥 그런 연상을 시킨다..이렇게 말씀해주시니 홍위병을 연상했다는 이문열씨가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네요.. 아 이런 오해를 부르는 표현들은 정말 대한미국에서 갈등의 씨앗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fabiano 2008.07.31 12:35  
거두절미하고... 그 시절이라면 지식인 대부분이 공산사회주의 사상에 공감했고 실제, 그쪽으로 많이 활동했지요. 오늘날엔 일부 사람들이 진보적인 사상으로 그쪽을 옹호하고 논리를 펴지만 이승만, 김구 선생의 정신은 지금까지 아니, 앞으로도 지켜야 할 것입니다.
홍모세 2008.07.31 12:39  
그래요. 개화파가 옳은 것이었죠. 그런데 옳은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꼭 지금도 옳다고 하는 데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요? 사실 저도 어떤 것이 옳은 지는 몰라요. 선생님의 말씀을 듣다보니 역시 우리는 해양세력의 편에서서 자유주의를 강력히 표방하며 사는 것이 옳은 것이구나 하는 생각도 드네요. 하지만 저는 자유도 배웠지만 평등도 배웠는데.. 아 갈등되네요.. 그냥 둘다 취하는 건 정말 안되는 건가요? 조화로우면 안되는 것은.. 아니겠죠?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닌 것으로 알겠습니다.
fabiano 2008.07.31 20:09  
역사란 돌고 도는 것이며 논리적으로 모순인데 버젓히 진실인 것으로도 나타나더군요. 설명하기 어려운 일도 많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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