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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화살은 날지 않는다 ...모순(矛盾)

fabiano 0 1121  
1. 제논(Zenon)의 역설(逆說)

  제논(zenon)이라는 사람은 씨가 먹히지 않은(?) 비상식적인 얘기를 많이 했다 하여 궤변론자(詭辯論者)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사람의 주장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나는 화살은 날지 않는다.”

  말도 안 되는 주장 같지만 그는 이 명제에 대해 그럴 듯한 설명을 붙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령 비디오로 나는 화살을 찍어 각 장면을 정지화면으로 볼 때, 그 정지화면들의 연속이 ‘나는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그것은 정지된 것의 연속이므로 결국 화살은 날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공간을 무한히 분할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성립될 수 있는 논리(?)입니다.

  “나는 화살이 날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처럼 서로 상반되는 주장이나 설명을 동일한 대상에 적용하는 것을 우리는 ‘모순(矛盾)’이라고 말합니다. 본래 ‘창(矛)과 방패(盾)’를 가리키는 이 말이 어째서 “앞뒤가 안 맞는 얘기”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을까요. 오늘은 이 말의 유래와 내력을 알아보기로 합시다.

   춘추전국시대는 그야말로 전쟁과 병합의 혼란기였습니다. 혼란한 천하를 바로잡겠다는 사상가들이 “온갖 꽃들이 일제히 향기를 피우듯(百花齊芳)” 나름의 독특한 처방을 제시하고 나섰습니다. 그 가운데 공자(孔子)를 중심으로 한 유가(儒家)와, 노자(老子)와 장자(莊子)를 중심으로 한 도가(道家)에 대해서는 잠시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살펴볼 ‘모순(矛盾)’이라는 말은 이들과는 전혀 성격을 달리 하는 법가(法家)에서 나온 말입니다.

    2. 창과 방패의 대결

   법가의 사상가들은 황제권을 공고하게 하고 천하를 병합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의 편에 서서 한가하게 인의(仁義)를 말하는 유가를, 국력을 약화시키고 사회적 기강을 해치는 나약한 사람들이라고 비난했습니다. 법가는 군주의 공고한 권력을 중심으로 경제를 통제하고 사회를 조직하여 적나라한 전쟁을 이겨 살아남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법가의 사상을 집대성한 사람이 바로 한비(韓非)입니다. 그가 지은 책인 《한비자(韓非子)》는 당연하게도 유가들이 주장하는 어설픈 낙관론을 통렬히 비판하는 대목이 많은데 <난편(難篇)>도 그 하나입니다. 난(難)이란 여기서는 ‘어렵다’가 아니라 ‘비판한다’는 뜻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모순이란 말의 유래를 읽을 수 있습니다.

  초나라에 방패와 창을 파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방패를 들고 “내 방패는 견고하여 어떤 창도 뚫을 수 없습니다”라고 자랑했다. 또 창을 들고서는, “내 창은 예리하여 어떤 방패도 뚫을 수 있습니다”라고 자랑했다. 이 말을 듣고 누군가가 나서서 말했다. “그럼 그 창으로 그 방패를 한번 뚫어보면 어떻겠소.” 장사꾼은 그만 말을 잃고 말았다고 한다. 무릇 뚫리지 않는 방패와 무엇이든 뚫을 수 있는 창은 동시에 양립할 수 없다. 지금 요(堯)와 순(舜)이 함께 칭탄을 받을 수 없는 것도 이 ‘창과 방패의 설’과 같은 것이다.
또 순(舜)이 백성들의 잘못을 바로 잡는다 하나 1년에 하나의 잘못을 바로잡는다면 3년에는 3개의 잘못만을 바로잡을 수 있을 뿐이다. 순(舜)의 능력도 한계가 있고 수명도 한계가 있는데 천하의 잘못된 병폐는 한도 끝도 없다. 한계가 있는 것으로 한계가 없는 것을 쫓아 나가다간 결국 몇가지 폐단밖에 바로잡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상벌을 정해 천하로 하여금 실행하게 하라. “법규를 준수하는 자는 상을 주고, 법규를 준수하지 않는 자는 벌을 준다”는 영을 내리면, 아침에 내린 영이 저녁에 그리고 저녁에 내린 영은 다음날 아침이면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열흘이면 온나라에 효력이 나타날 것이니 1년을 기다릴 것도 없는 것이다. 순(舜)은 요(堯)에게 건의하여 이를 시행하게 하지 않고 몸소 번거롭게 나섰으니 통치의 방법을 제대로 몰랐던 소치이다.
또 몸소 수고함으로써 백성들을 교화하는 것은 요(堯)와 순(舜)이 택한 어려운 길이다. 위세를 업고 아랫 사람을 부리는 것은 평범한 보통군주들이 택하는 쉬운 길이다. 장차 천하를 다스리는데 보통 군주라도 할 수 있는 쉬운 길을 버리고, 요(堯)와 순(舜)이 할 수 있는 어려운 길을 떠드는 자들과는 함께 정치를 논해서는 안된다.
요(堯)와 순(舜)은 아득한 시절 야만의 중국에 본격적으로 문명을 일으켰다 하여 유가학파가 지극한 존경으로 받드는 성인(聖人)들입니다. 이른바 ‘요순시절’은 가장 안정된 정치 아래서 백성들의 복지가 가장 잘 보장된 사회로 요순은 동양인의 정치적 유토피아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비는 이들 유가의 이념에 대해 강력한 비판적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순이 미천한 지위에 있을 때 백성들을 감화시켰다는 것은 그야말로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이라고 주장합니다. 순이 사람들을 교화시켰다고 하면, 그것은 최고통치자인 요가 사람들을 교화시키지 못했다는 얘기가 아니냐는 것이지요. 그리고 만일 요가 이상적 통치자였다면 순이 사람들을 교화시킬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면서 둘 중 하나는 성군(聖君: 성스러운 군주)으로 추앙받을 이유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든 예가 바로 방패와 창의 이야기입니다.

   무엇이든 뚫을 수 있는 창과 그 무엇도 뚫을 수 없는 방패는 서로 양립할 수 없다는 것, 같은 원리로 “요가 현명했다면 순의 덕화가 성립할 수 없고, 순의 덕화가 성립한다면 요가 현명하지 않았다”고 논증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모순이란 말의 유래입니다. 그리하여 ‘방패와 창’은 “양립할 수 없음”을 뜻하는 말로 굳어졌습니다.

     3. <모순>이란 말의 진화

   이 말이 논리학에서 쓰이는 ‘contradiction’의 번역어로 채택된 것은 아주 자연스런 일이었습니다. ‘contra’는 contrary 등에서 짐작되듯 ‘반대된다, 맞선다’라는 뜻이고 ‘dict’는 ‘말한다 적는다’이니 contradiction은 ‘서로 상반되는 말이나 주장’이 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모순’이 아니겠습니까. 동일한 주어에 상반되는 술어가 동시에 성립하지 못한다는 논리학의 원칙은 아득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창안한 것인데 그것을 모순율(矛盾律)이라고 번역합니다.

   그런데 무릇 언어란 진화하는 것이라서 이 말은 변증법(dialectics)적 사유의 발전과 함께 자못 다른 뜻으로 진전되게 되었습니다. 일찍이 그리이스의 헤라클레이토스는 “사람은 동일한 냇물에 몸을 담글 수 없다”고 했습니다. 냇물은 흘러 흘러 가는 것이기 때문에 동일한 물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자연 뿐만 아니고 사람도, 그리고 사람 사이의 관계도 나날이 새롭게 변하지 않습니까. 운동하고 생성하고 변화한다는 것은 결국 현재 상태를 부정하는 것이고, 그것은 외부적 요인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자체 내부에서 자체를 부정하는 ‘모순’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헤겔은 모순을 자연 내부의 본질로 이해합니다. 헤겔은 세포의 단계에서 우주적 진화에 이르기까지 모순이야말로 변화와 생성을 밀고 가는 변증법적 역학을 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헤겔을 이은 마르크스는 모순이 사회적 계급구조 안에 있다고까지 밀고 나갔습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자, 부르조아와 프롤레탈리아, 요컨대 생산수단을 독점한 자본가와 그러지 못한 피동적 객체인 노동자, 농민 사이에 모순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때의 모순은 ‘현실적으로 어긋나 있고 대립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헤겔은 모순이 순전한 대립과는 다르게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 영향을 끼치고 있고, 이것이 상호 침투하여 영향을 끼치는 과정에서 서로를 변질시켜가는 이른바 변증법적 관계를 지니고 있다고 말합니다.

   ‘모순’이라는 개념을 이처럼 확대하여 쓰는데 대해 비판적 시각도 만만치 않습니다. 존재하는 대립물 사이의 침투와 연관은 모순의 본래뜻을 훼손하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모순이란 아리스토텔레스가 설정했고, 우리의 일상적 용법이 그러하듯 어떤 현상에 대한 양립할 수 없는 주장을 뜻하는 것으로 순전히 논리적 의미로 한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순은 인식에 속하는 범주이지 현실에 속하는 범주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언어는 고정되고 박제된 의미로 붙박혀 있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진화와 변모를 거듭하고 있는 살아있는 생명체입니다. 의미의 전이와 중첩, 확장은 반길 일이지 터부시할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올바로 사용하려는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 출처  :  쏘사랑의 가을바람님의 글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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