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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고을(광주) - 그 시절

fabiano 0 2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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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하는 부녀자들 (1949)

지금의 태평극장 부근으로 멀리 보이는 것이 광주대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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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보의 시민공원 보트장 (1933)

당시 가네보에서는 동양 최대 규모의 방직공장을 광주에 세우기로 하고 부지는 수질이 좋은
광주천 하류 임동 구 임업시험장 묘포를 포함한 16만평을 확보했는데,

이로 인해 임업시험장은 쌍촌동(지금의 호남대학 자리)으로 옮겼고 신안리를 비롯한
광주 시민의 문전옥답을 가혹한 토지수용령을 걸어 강제 매수하여 많은 농민들을 울렸다.

가네보는 16만평의 부지 중 7만평에 동양 최대 규모의 공장을 짓기로 하고
나머지 9만평에는 광주시민을 위한 시민공원과 위락시설을 조성하여
광주시에 기증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이 공장 규모는 1933년 일본 관서지방의 대풍수해로 물가의 상승과 아울러
시멘트 철근을 비롯한 각종 건축 자재와 품귀와 가격 폭등으로 말미암아
당초의 계획보다 축소되었다.

시민공원 조성에 있어서도 당시 1백여만엔 규모의 예산을 들여 식물원·동물원·공설운동장 등을 건설키로 하고 가네보 아동공원 설립 사무소까지 설치하여 첫 단계로 풀장을 개설했다.

현재의 전방공장 자리에는 묘포를 만들어 각종 나무를 심고 원숭이 등 일부 동물을 들여오기도 했으나 중일전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이 계획은 중단되고 말았다. 이것이 오늘날의 무등경기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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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덕정 (1955 ㅡ 사직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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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공원 (1955)

광주공원에는 1940년 신사를 개수할 당시 한국의 각 도와 일본의 각 지방은 물론 멀리 몽골 만주 대만 남태평양 등의 아시아 여러곳에서 많은 종류의 나무를 옮겨 심어 광주지방에서는 가장 많은 수종과 희귀한 나무가 밀집하여 마치 식물원을 방불케 했었다. 그러던 것이 해방 후 사회의 혼란을 틈타 많은 수목이 도벌 당하고 공원도 황폐하여 옛 자취를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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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8월 15일 광복 1주년을 맞이하여 기념식에 갖기 위해 운집한 시민들(광주서중학교 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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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장사 (1952)

한 아낙네가 시내에 나무를 팔러가고 있다. (학동 구 기마대 자리 하천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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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시장 (194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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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장터 (1917)

당초 광주의 장은 광주천이 중심이었다. 지금의 부동교 방면 넓은 백사장에는 작은 장이 섰고, 여기서 광주천을 타고 내려가면서 지금의 한일극장과 현대극장 사이에 큰 장이 섰다.

1928년 광주천 제방사업을 하면서 두 시장을 합쳐 현재의 태평극장 앞 광주천 건너편
사동의 매립지에 1932년 3월 사정시장을 개설하였다. 큰 장, 작은 장을 합쳐
2, 4, 7, 9일 장이 섰다 .

그러나 1940년 4월 사정시장 가까이에 있는 광주공원의 신사가 국가 관장으로 격이 높아지자, 신사 주변을 정비하면서 지금의 양동시장로 옮겨지게 되었다. 사진은 광주 큰 장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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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시장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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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장터 (1920)

광주공원에서 바라본 광주장터의 모습(광주대교 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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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인시장 입구 (1951)

계림극장과 중앙초등학교 사이에 있었던 동문다리(현 대인시장 입구) 주변으로, 현재는 하천이 복개되어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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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자촌 상가 (1970)

광주교에서 양동시장까지 광주천변에 가건물이 들어서 상가가 조성되었는데 1974년 광주천 정비시 철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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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천 풍경 (1965)

지금의 광주대교에서 천교 사이의 광주천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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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우젓 장사 (1940년) 학운동

종전의 현준호 제각(지금의 목화예식장) 앞에서 새우젓을 사려는 아낙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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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구니 장수 (192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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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포로 수용소 (1952)

전남의대 뒷변 간호전문대학 일대에 있었다.
적치기간에 부역하다가 아군수복과 동시 입산해 군경토벌 작전에 의해 체포된 일반포로 48,000명이 수용되었는데 이중 여자가 3,800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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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대통령의 중앙포로 수용소 방문 (1952)

1952년 12월 중앙포로 수용소를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으로 옆의 안내 헌병은 초대 수용 소장인 송인섭 소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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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참보 (1920)

지금의 적십자병원 앞의 모습으로 당시에는 보를 쌓아 조참보라 하였으며 그 곳에는 고목이 울창하게 우거지고 그 밑에 넓고 깊은 웅덩이가 생겨 하루노야란 요리집에서 수상누각을 지어 뱃놀이를 즐겼다. 멀리 보이는 다리는 광주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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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장 (1946) 7월

1930년대 가네보 전남공장(지금의 전남·일신방직 전신)을 세우면서 약속한 시민공원 조성사업의 첫단계로 수영장을 개설하였으나, 다른 시설은 중일전쟁관계로 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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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설운동장 전경 (1962)

전남방직(구 가네보)에서 조성키로 했던 시민공원 부지(임동 하천부지)에 1959년 준공된 공설운동장의 전경으로 당시에는 관람석이 언덕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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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공설운동장 (1965)

제46회 전국체전을 대비하여 공설운동장 부지에 조성된 광주 공설운동장(현 무등경기장) 전경으로 1964년에 착공하여 1965년 9월 30일 준공된 주 경기장은 3만명, 야구장은 1만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건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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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장로 2가 (1953)

1가에서 2가 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좌측에 광주우체국이 보인다. 그 뒤에 산업은행 광주지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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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동 일대 (1956)

월산공원에서 바라본 백운동 일대의 모습으로 좌측에 보이는 건물이 월산동 천주교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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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습으로 화염에 싸인 전남방직 공장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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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비행장 활주로 (1969 )

광주 비행장은 과거 상무대에 있었는데 현재의 광주공항은 1966년 7월 15일 준공되었으며 1969년 6월 대한항공사 광주지사가 설치되어 광주∼서울, 광주∼부산간의 두 항로를 개설, 28인승 BC 3형 항공기가 취항, 주 3회 운항하였으며 1988년 12월 23일 제2 민항인 아시아나 항공이 광주∼서울을 취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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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너릿재 터널공사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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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역 이전 (1968)

동구 대인동에 있었던 광주역이 북구 중흥동 신역으로 이전을 기념하는 전경으로 수많은 시민들이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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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역내의 구름다리 (1930)

대인동 소재 현재 동부소방서 자리에 있었는데 지금의 광주역으로 옮겨갈 때까지 역내에서는 구름다리를 이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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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광주역 (1936)

1930년 12월 25일 광주∼여수간 철도가 개통되어 학동에 역사를 짓고 신 광주역이라 했는데, 1948년 4월 남광주역으로 이름을 바꾸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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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리 역 (1950)ㅡ 한국전쟁 당시 송정리역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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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축된 광주역사 (1952)

한국전쟁중에 파괴된 광주역의 개축된 모습 (현 대인동 소재 동부소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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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역 광장 (1950)

한국전쟁중 공습으로 파괴 되기전 광주역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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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사에서 바라본 무등산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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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 잣고개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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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산동 꾓재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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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 다원 (1954)

증심사 대나무 숲 뒷편에 자리잡은 이 곳은 운모질 부엽토로 된 토질이 깊은 지형으로 아침이면 산자락의 안개구름이 스치고, 낮이면 남향의 따스한 햇살이 조화로운 천혜의 조건을 모두 갖춘 다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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뽕뽕다리 (1960)

현재의 학림교가 가설되기 이전에는 방림동 주민이 이 다리를 많이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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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수때의 경양지 (1946)

광주시에서 1967년에 태봉산을 헐어 메워 없어진 경양방죽은 조선 세종 때에 축조한 저수지였다.
이 경양지는 수심 약10m, 면적 약 5만평 이었으며, 1967년 태봉산을 깍아 매립하여 현재의 시청사와 인근 주택지를 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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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 골프장 (1947)

계림동 경양호(경양방죽) 옆에 있었는데 산책 나온 시민들이 즐겨 이용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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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의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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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읍성터는 1992년 4월 전라남도청 주차장을 만들기 위하여 부지정리를 하던 중
확인된 유적으로 지적도상에도 그 흔적이 나타나고 있다.
1879년 간행된 「광주읍지」에는 석축 둘레가 8,253척, 높이 9척이며 성안에 1백개의 우물과
여첩이 있으며, 못은 지금은 없어지고
성문으로 서원(瑞元 동), 광리(光利 서), 진남(鎭南 남), 공북(拱北 북)의 4문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1904년 광주 읍성의 인구는 1만명 내외였으며, 성은 그때까지 잘 남아있었다.
1931년 기록에는 관찰부(觀察府)가 무덕전(武德殿)자리에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읍성의 철거는 1909년 일본군이 한말 의병항쟁을 탄압하면서 시작되었고,
그 자리에는 도로가 개설되어 일본인 신시가지가 형성되었는데 오늘날의 충장로 2·3가이다.

동헌등 조선시대 광주읍성 관아가 있었던 전라남도청은
고려초기 무진년명 석등(시유형문화재 제5호)등의 유물로 보아 원래는 절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읍성은 조선시대 이후에 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는 성벽과 관련된 돌들과 흙으로 된 둑만 일부 남아 있는데
확인된 성벽이 높이는 1.9m 이다. (문화재자료 제20호 : 1994. 4. 13 지정)
▶ 광주읍성 이야기 광주읍성은 중앙로∼황금로∼구 시청사거리∼도청 뒤∼노동청∼전남여고∼중앙 초등학교 정문까지 석축으로 둘러 싸여 있었다.

성밖은 모두 도랑을 파서 외부침입을 막았으나 도시가 커지면서 성을 철거하기 시작했다.
1908년부터 8년에 걸쳐 바지게 등을 이용하여 작업이 이루어졌다.
4대문을 열고 닫을때는 태평소를 불며 취타(吹打)를 울렸다.

취고수(나팔수와 북잽이)는 노란제복을 입고 남색띠를 둘렀으며 머리에는 초립을 쓰고
미투리를 신었다.
지금의 충장로 2가 조선대학교 동창회관 쪽에서 무등극장에 이르는 일대가
옛날의 광주객사터였는데, 객사안에는 목사의 집무장소로 쓰인 동헌과 부속건물이 있었다.

(자료 : 광주광역시,「광주의 맛과 멋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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