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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란 무엇인가?⑥ 후퇴·반격·휴전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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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김순욱

 1·4후퇴
 UN군은 1950년 12월 31일까지 임진강 하류(서부)와 동해안 38도선을 잇는 새로운 방어선으로 후퇴하였다. 1951년 신정을 기해 중공군 16만명, 북한군 7만명 등 모두 약23만명은 38도선을 일제히 돌파하려고 기도했다. 이에 대한 방어선 구축을 시찰 중이던 8군사령관 워커장군이 12월 23일 자동차 사고로 전사, 릿지웨이 중장이 12월 26일 후임으로 부임하였다.

 1월1일 제8군 정면에는 평상시의 10배에 달하는 포탄이 낙하, 파상적인 인해전술로 공세를 집중하고 돌파구가 점차 확대되어 1월 3일 현 전선이 붕괴됨에 따라, UN군은 1월 4일 서울을 포기하고 새로운 방어선 [오산-제천-삼척]으로 철수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하는 동시에 부대재편에 착수하였다.

 서울 재탈환
 1951년 1월 15일 미군 특수임무부대는 오산-수원간의 적 배치상황을 탐색하기 위하여 탐색 정찰전을 개시했는데,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복귀하는 전세호전의 징후가 엿보였기 때문에 릿지웨이 장군은 1월 25일부터 선더볼트(Thunderbolt) 작전 즉 항공지원하 보전포(步戰砲. 보병, 전차, 포병이 협동하여 하는 전투작전) 협동작전으로 적군을 분쇄하면서 한강선까지 진출했다.

 이토록 수많은 작전의 성공과 실패 등을 거치면서 반격을 계속하여 3월 18일 UN군은 서울을 재탈환하였다.

 휴전 협정 조인
 1951년 후반에 접어들면서 전쟁의 양상은 점차 변해갔다. 휴전회담의 개막과 더불어 쌍방은 다 같이 마지막 합의에 도달할 때까지 군사작전을 계속 할 것이라는 태도를 밝혔으나 내심으로는 협상을 파국으로 몰아 넣을지도 모를 대규모 공세작전은 자제하는 분위기였다.

 그리하여 전쟁의 양상은 '진지전', '수색정찰전', '고지쟁탈전', '교란사격과 방해폭격' 등으로 변했으며, 1952년 초 중동부 전선의 '금화지구전투', 양구북방 '크리스마스' 고지작전, 그리고 52년 후반의 '백마고지 전투'가 전사에 특기할 만한 전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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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1. 7. 11 서울시민 정전회담 반대데모

 1953년 휴전 직전인 5월 및 7월, 2차에 걸쳐 중공군은 휴전을 유리한 조건으로 성립시키고자 3개사단 및 8개사단 규모의 공격 작전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UN군의 반격으로 종결되는 작전들이었고, 그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퇴각하곤 하였다.

 대한민국의 거국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1951년 7월10일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개시된 이래 24개원간 협상 끝에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조인되어, 우선 포성은 멎었으나 그렇게도 바라던 통일의 꿈은 이루지 못하였다.

 대한민국 온 국민은 거리거리에 나와 외쳤다.
"통일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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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 7. 27 한국전 휴전협정 조인

 konasnet@kona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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