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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란 무엇인가? ⑤ 중공군의 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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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김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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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1. 1 중공군 팽턱회 사령관과 북괴 김일성의 야전 전략회담

 1950년 10월 15일 웨이크(Wake)섬에서는 트루만 미국 대통령과 맥아더 UN군 사령관의 회담이 열렸다. 맥아더 장군은 한국동란에 중공군이 개입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실은 이미 일주일전, 10월 7일부터 약 12만의 중공군이 압록강 및 두만강을 도하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 속에서 10월 24일 국군 제6사단 1연대에서 중국공산군 포로 1명을 나포하여 사단장에게 보고하였으나 "대수로울 것 없다. 계속 북진!"했고, 10월 25일 제6사단 2연대는 온정리 서북쪽에서 중공군과 첫 교전이 있었는데 이때 중국공산군은 꽹과리와 피리를 불면서 공격해왔다는 보고 등 중요한 판단요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0월 26일, 제6사단 7연대 1대대 수색소대는 초산을 거쳐 압록강에 가서 태극기를 꽂고, 대통령께 진상할 압록강 물을 담아왔다.

 서부전선의 미 제8군은 11월 1일 청천강까지 철수하라는 명령이 하달되면서 중국공산군과의 전투에 돌입하게 된다.
UN군이 동서로 분단되어(미 제8군과 제10군단) 서로 독립작전을 실시함으로써 동·서간 50마일의 공간이 형성되어 군수 보급문제 등 제반작전에 지장을 초래하게 되었다. 1950년 10월과 11월에 한국전선에 투입된 중국공산군 병력은 9개군단, 약 36만명으로 추산된다.(휴전시까지 100만명으로 추산)

 중국공산군이 참전하자 한국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청천강 지역에서 11월 24일 미제8군은 총공격을 시도하였는데 이에 맞선 중공군 주력 5개 군단은 11월 25일 근대미문의 인해전술로 일대반격을 감행하여 UN군의 북진을 저지했을 뿐만 아니라 12월 1일 UN군에게 청천강 남안으로의 철수를 강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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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1. 1 중공군 부대의 인해전술 남하

 평양 철수 작전

 서부전선 UN군은 가급적 접전을 회피하면서 청천강 방어선에서 철수하였고, 국군 제1사단 15연대가 12월 14일 최종부대로 평양을 철수하였다.
이 작전에서 가장 위협이 되었던 것은 동측으로부터의 중국공산군의 포위였다. 특히 미 제1기병사단과 터키 여단, 영국군 제27여단은 미 제8군 우익에 투입되어 이 철수 작전을 엄호하는데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다.

 장진호 지구 전투

 11월 27일 이 지구에 투입된 중국공산군 제3야전군 주력인 6개 사단 약10만명 병력에 의해, 장진호 서측을 통과하여 북진중인 미 해병 제1사단이 완전 포위를 당하고, 호수 동쪽에 있던 미 제7사단의 2개 대대도 돌파를 당하였다.

 알렉산더 헤이그(당시 10군단 참모, 전 미국 국무장관)의 증언에 의하면 11월 말경 상당히 지친 모습을 한 중공군 포로 26명을 알몬드 10군단장이 직접 심문하였는데 그들은 10월초에 이미 투입된 것으로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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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진호 전선에서의미군 동사자들 수송장면

 미해병대는 전혀 예기치 못한 함정에 빠진 것이다. 영하 30도의 강추위, 1m이상의 폭설 등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부상자들은 그대로 동사했으며 사상자 수는 4천4백여명에 이르렀고, 미군 전쟁 역사상 최악의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함재기(항공모함에서 이륙한 전투기), 공군기의 지원과 엄호를 받으며 적을 화력으로 제압하면서 포위망을 돌파하여 겨우 12월 9일 제1연대 1대대가 미 제3사단 특수임무 부대와 합류에 성공하여 흥남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흥남 철수 작전

 국군 13,000명 미군 31,000명 등 모두 44,000명이 12월 11일 흥남항에 집결 14일 승선을 개시하면서 철수 작전이 시작됐다. 중공군은 인해전술로 눈이 오는 날은 백색 위장복을 착용하여 교두보를 침투 위협하였으나, 미공군의 근접지원 폭격, 해군의 함포사격 등으로 막대한 타격을 입게되자 12월 21일 인해전술을 포기하고, 북한군 단독으로 공격할 것을 종용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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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년 12월, 미국상선 메레디스호(7,600톤, 승조원 59명)에 피난민 14,000명을 싣고 3일간 거제도까지 항해도중 5명의 신생아 등 전원 무사히 도착.(기네스북에 게재)

 12월 24일 미 제3사단 병력이 승선 완료함으로써 흥남철수 작전은 성공리에 완료되었다.
흥남에서의 민간 피난민 소개작전은 6·25동란 가운데 으뜸가는 '모세의 기적' 같은 역사였고 '한국의 모세' 또는 '한국의 쉰들러'라고 불릴 현봉학 박사(의사)는 한국전쟁사에 기리 빛날 것이다.

 현봉학씨는(1922년 청진생) 당시 제10군단 알몬드 장군의 민사고문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피난민을 함께 승선시킬 수 없다는 군단장에 애원하여 98,100명(상당수가 기독교인)의 생명을 구원하였다.(헤이그 전 미국 국무장관 및 포니 해병대령의 증언) 수송선 7척, LST6척 도합 13척에 10만명 가까운 피난민들이 선박 구석구석, 차량 밑, 장갑차 위에까지 쪼그리고 앉아 거제도까지 홍해를 건너는 심정으로 실려왔다.

 김성은 장군(당시 해병연대장) 증언에 의하면,
"현 박사가 해병대 통역관으로 있을 때 전투 중 부상당한 해병대원에게 그 자신의 혈관과 부상병 혈관을 직접 호스로 연결하여 피를 넣어주는 장면을 보았다"고 한다. (계속)

konasnet@kona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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