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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란 무엇인가?④ 북한진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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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김순욱

 9월 29일 UN 총사령부는 모든 작전부대에 대하여 일단 38도선에서 진격을 멈추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6·25의 불길 속에서 찾아낸 단 하나의 보람이 있다면 그것은 '국토통일'인데... 이 명령을 못마땅하게 여긴 이승만 대통령은 즉시 군 수뇌들을 불러 비장한 결의를 다짐했다 - [단독북진!!]

「이승만 대통령과 정일권 총사령관과의 대화」

이승만 대통령 : "국군의 통수권자는 맥아더냐? 아니면 이나라 대통령이냐?...UN은 우리가 38선을 넘어가서 국토통일을 이룩할 권리를 막을 수 없다..."

국군 총사령관 정일권 소장 : "... 국군의 작전지휘권은 이미 대통령 각하께서 서명하신 문서에 따라 UN군 총사령관에게 이양되었으므로 지금 다시 이중으로 명령을 내리시게 되면 혼란을 가져올 것입니다. 또한 북진에 관하여는 UN에서도 곧 결정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오니 좀더 형세를 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 의견은 다만 군사지위 계통에서 말씀 드리는 것이고, 대통령각하께서 국가 대계로 보아 꼭 그렇게 하시는 것이 좋겠다고 명령을 내리신다면 저희들은 오직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그러자 대통령은 품안에서 명령서를 꺼내어 정일권 총사령관에게 건넸다.

"내가 이 나라의 최고 통수권자이니, 나의 명령에 따라 북진을 개시하라"['晩'자의 서명]

정일권 총사령관은 강릉지구로 북진하고 있는 1군단장 김백일 소장에게 "작전손실을 방지하기 위해 우리 국군이 반드시 점령해야 할 38선 북방의 뚜렷한 지형지물이 없겠는가?" 정일권 장군은 제1군단장의 회신을 받고, 워커 8군사령관과의 협의, "38선 바로 북쪽 ○○고지로부터 적의 저항이 치열하여 국군이 큰 손실을 입고 있으니 이를 점령 안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정일권 총사령관은 다음날 제1군단 사령부를 방문, 최전방 제3사단(이종찬 대령) 23연대 작전지역으로 나아가 전선을 시찰, 그곳에서 38선 돌파를 명령했다. 10월 1일 국군 제3사단 23연대(김종순 대령), 22연대(김응상 대령)도 이미 월선 직전에 있었는데, 정일권 소장은 전방시찰 중 23연대장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현 전황 어떤가?"
"한 사람도 월북 안했습니다."
"뭘 꾸물꾸물하고 있어! 빨리 북진해!


 맥아더 사령부는 10월 1일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에게 "항복"하라는 성명을 발표했으며, 10월 2일 북진을 명령하였다. 10월 5일 중부전선에서 국군 제6사단이 월선북진을 시작했고, 제3사단 23연대와 24연대는 교호로 선두전진하며 하루 24㎞씩이나 북진하였다.

 10월 7일 "한국 평화통일에 관한 8개국 결의안"이 UN에서 찬성47 / 반대5 / 기권8로 가결되었는데, 제2항에 "UN군은 한국 통일정부 수립에 필요한 기간을 넘어서서, 한국의 어떠한 지역에도 머무를 수 있음"이라 했다.

 [에피소드] 백선엽 제1사단장은 10월 6일 미 제1군단 본부에서 '작전명령'을 수행하라는 연락을 받고, 단독으로 청주에서 대전으로 가서 작전명령을 받아 보고 매우 실망하였는데; 평양 공략을 포함한 북진계획에 제1사단은 예비대로서 해주 공격의 임무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억울하고 분통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음은 그의 수기의 일부이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묘한 감정을 억누르면서 다시 한 번 간청을 했다.
"밀번 장군! 평양은 저의 고향입니다. 그러므로 평양까지의 도로나 지형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장군께서도 아시다시피, 여기 평양까지 가는 도로는 산악지대이기 때문에 차량의 기동에 많은 장애가 있습니다. 이러한 지형에선 어떤 경우에는 차량보다 도보행군이 더 유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단에게 임무를 주십시오. 그러면 밤낮으로 도보행군을 강행하여 미군보다 먼저 평양에 입성하여 보이겠습니다."
나는 어느새 흥분하고 있었다.
평양 탈환은 기어코 내 손으로 이룩해 보겠다는 의지가 감정을 자극해 버린 것이다.
밀번 장군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두사람의 시선이 어색하게 교차하고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초조와 불안과 분노의 격류가 온 몸을 휘감고 드디어 두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와 버렸다.
나는 위신도 체면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밀번 장군앞에서 울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도 평양 공격의 임무를 원합니까? 제너럴 백"
"원랍니다! 꼭 맡겨 주십시오, 밀번 장군!"
나는 나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말했다.
"제1사단의 기동력으로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문제없이 평양을 탈환해 보이겠습니다. 약속하겠습니다. 훌륭한 전과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좋습니다. 제너럴 백! 당신의 애국심과 용기를 샀습니다."
결심을 한 그는 행동이 빨랐다. 즉시 참모장을 전화로 불렀다.(하략)


 10월 20일 평양시내의 수많은 교회당에서 종소리가 일제히 울려 퍼지는 가운데, 국군과 UN군을 환영하는 인파가 평양거리를 메웠다. 10월 21일 오전 이승만 대통령은 인산인해를 이룬 평양시민 대회에 참석했다.

 "나의 사랑하는 동포여러분! 만고풍상을 다 겪고 39년 만에 처음으로 대동강을 건너 평양성에 들어와서 사모하는 동포여러분을 만날 적에 나의 마음 속 감상을 목이 막혀서 말하기 어렵습니다. 40년 동안 왜정 밑에서 어떻게 지옥생활을 했던가를 생가갛면 눈물이 가득합니다..."

 평양입성의 선봉으로 영예의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은 국군 제1사단은 멸공통일의 결의를 다시 한번 다짐했다.

 같은 날 도쿄에서 날아온 맥아더 원수는 미군 첫 평양돌입 부대인 제5기병연대 F중대를 사열했다. 이때 그는 96일전 포항에서 처음으로 상륙했던 200명 가운데 고참병이 있으면 앞으로 나와 보라고 말했다. 나온 병사는 겨우 5명, 그 중에서 3명은 부상을 입고 있었다.

 중부전선: 국군 제2군단(제6,8,7사단)은 덕천, 희천, 온정리를 거쳐 10월 26일 초산 압록강까지 진출하였다.

 동부전선: 국군 제1군단(제3사단, 수도사단)은 10월 10일 원산 진출(제3사단), 10월 17일 함흥, 흥남에 진출(수도사단)하였다. 10월 26일 미 제10군단이 이원(利原)으로 상륙하여 미 해병 제1사단과 미 제7사단 일부 및 국군3사단 일부는 혜산진까지(11월 21일) 그리고 수도사단은 11월 24일 현재 청진까지 진출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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