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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고려인 이야기 (6)

fabiano 0 970  

이 글은 김재영의 연해주 고려인 리포트<대지의 슬픈 유랑자들> '내 눈물에 당신이 흐릅니다'라는 소설의 일부입니다.

 -한얼미디어 출판-
조국광복의 발원지인 연해주를 분석하고 고려인들이 일구어 낸 황금같은 옥토을 소개 함으로써 민족긍지를 되살리고 오늘의 우리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독립투사들의 몸으로 던진 피흘린 대가이었음을 확인하고 나아가 잊고 있었던, 지금도 유랑신세로 떠도는 연해주 고려인들의 삶을 재조명 하므로 역사 속에 감추어진 그들의 업적을 드높이 평가해야 한다는 인식에 감히 포스트에 옮겨 보았습니다.초인류 인터넷의 강국이며 조선업과 반도체의 업적으로 세계의 위상에 우뚝 선 한국이라는 나라가 있건만 20세게 밀레니엄 시대에 우리의 핏줄인 한민족이 저토록 아픈 질곡의 삶으로 아프리카 빈민보다 못한 비참한 실상으로 러시아 변방 광활한 땅덩어리에서 아직도 버려진 우리민족인 고려인이 있다는 것에 슬픔이 강물처럼 흐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름은 바로 고려인일 것입니다.
참고로 김재영의 소설 '내 눈물에 당신이 흐릅니다'는 구 소련이 붕괴되면서 생겨난 독립국가의 그 어느나라에도 속하지 못하고 러시아 연해주에서 무국적자로 살아가고 있는 고려인의 기구한 삶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죽음보다 더한 40일 동안의 여정

 

칠흙 같은 어둠을 뚫고 끝없는 시베리아 벌판을 달리고 있는 이 화물열차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한인들을 가득 태운 호송열차 508호는 끝없는 시베리아 대륙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로질러 달리고 있다.
1937년 고려인 강제이주는 한인 이주사에 있어 유례없는 비극의 서막을 울리고 있었다.
같은해 8월 21일 모스크바 크렘린 궁에서는 당시 소연방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스탈린이 극동구 국경지역으로부터 모든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키라는 공식명령을 내린다. 그 한 장의 종이는 18만 러시아 고려인의 생사를 갈라 놓는 죽음의 문서로 작용된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겨 연해주로 이주해야 했던 한인들은 도 다시 일본과 지리적으로 인접한 변방에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수십 년 살았던 삶의 터전을 더나 하루아침에 중앙아시아의 불모지로 떠나야 했던 것이다.
유구한 역사와 자랑스런 언어를 가지고 남의 땅에서나마 많은 문화적 자산을 축적했던 한인들은 이 날의 비인간적인 만행으로 모든 것을 빼앗겼다. 실로 우리 민족사에서 최대 수난사로 기록될 이 날의 강제이주는 한민족 파멸의 서막을 예고하는 것이다.
스탈린 소수민족억압정책의 첫 번째 희생자로 지목된 소련 땅의 한인들. 사람들은 왜 스탈린이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켰는가 하는 의문을 두고 설왕설래 말들이 많았다. 그러나 모아지는 결론은 단 하나, 중앙아시아의 광활한 지역에 농업 집단화를 추진하는데 있어 한인들만큼 적절한 대상이 없었다는 것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으며, 연해주 농업개발에 성공한 저력이 있는 한인들보다 적절한 대상은 없었으리라는 결론이었다.
강제이주는 지식인의 사전 처형으로 시작됐다. 2500여 명의 한인들이 영문도 모른 채 소리 소문 없이 처형됐고, 끌려간 수천명의 한인 지도자들도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곧 이어 진행된 강제이주 역시 단 이틀 전에 출발이 통보되었으며, 통보 후 여행은 금지되었고 친척집도 자유로이 왕래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틀 뒤, 한인들은 2~3일분의 간단한 식량과 가재도구만을 챙겨 화물기차에 올랐다.
강제이주는 계획적이고 그리고 신속히 진행됐다.
추수기를 앞두고 심은 곡식을 거두지도 못한 채 정든 땅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 그 와중에도 곡식의 씨앗을 잊지 않고 품어온 사람들. 그 고통과 질곡의 세월 속에서도 다시 중앙아시아를 옥토로 만들 수 있었던 저력은 씨앗에 대한 애정과 농사에 대한 그들의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화물차와 가축 운반차를 개조하여 만든, 가끔 죄수들을 실어 나르기도 했던 차량에 짐짝처럼 실린 사람들. 가축도 죄인도 아니었던 그들은 단지 고려인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매서운 시베리아의 삭풍 속을 40일간 달려 중앙아시아의 사막에 버려졌다. 이렇게 벼려진 사람들이 모두 18만여 명. 그 해 9월 9일 한인 366가구가 호송열차 503호에 실리는 것을 시작으로 이후 124대의 기차에 한인들이 실려졌고, 연해주 땅엔 단 한 사람의 한인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여정 중 가장 곤란했던 것은 화장실이 없는 것과 먹을 것이 공급되지 않는 것. 그리고 무서운 추위였다. 명령대로 2~3일 분량의 식량 밖에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은 굶기를 밥 먹듯 했다. 아이들은 굶어 죽어갔고, 아비는 배곯아 죽는 자식을 어두운 밤 잠깐 멈추었던 어느 이름 모를 땅에 맨손으로 묻었다. 한밤중 인적이 없는 기차역에 기차가 서면 모두들 짐승처럼 기차 밑으로 들어가 대소변을 보았고 그마저도 긴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이 죽음의 여행에서 발생한 또 하나의 문제는 전염병이었다. 홍역과 학질, 이름 없는 병들이 기차간을 돌았다. 한 집 건너 한 집의 아이들이 죽어갔고, 노인과 임산부는 속절없이 그 생명을 단축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죽어간 아이들이 10명 중 6명. 단 40일간의 시간 속에서 수만 명의 한인들이 이유도 모른 채 한 많은 죽인을 당해야 했다. 어느 난리통이 이처럼 참혹했겠는가.
"굶어 주지, 앓아 죽지, 추워 죽지."
그 열차에 탔던 노가이 지나이다 할머니는 그날의 설움 때문에 돌아가실 때가지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셨다.
그러나 추위보다, 배고픔보다, 불처럼 끓어오르는 고열보다 두려운 것은 불안감이었다. 하루가 가고 한 주가 가고, 그렇게 시간은 흐르는데 이 죽음의 열차는 멈출 줄을 몰랐다. 곯아버린 배를 움켜쥐고 모로 누운 사람들은 다시금 불안해졌다. 어디로 가는 것인가. 이렇게 모두가 죽는 순간까지 이 열차는 달릴 것인가.
한 달쯤 달렸을까. 가득 찼던 열차간은 조금 헐렁해졌다. 재갈거리던 아이들의 소리도 아이를 어리던 할머니의 소리도 사라졌다. 맥없이 늘어진 아이의 어미와 여전히 두 무릎을 그러모아 애써 불안을 감추고 있던 아비의 모습만 있을 뿐, 그 한 달 사이에 인간의 세대는 사라져버렸고 역사는 죽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짐승처럼, 죄인 아닌 죄인으로 끌려간 사람들이 공식적인 통계로 124대의 수송열차에 36,442가구 171,781명이었다. 이들은 모두 중앙아시아의 10개 지역으로 수송 배치되었다. 우즈베키탄 16,272가구 76,525명, 카자흐스탄 20,170가구 95,2567명, 마지막 기차는 12월 15일 노보시비로스크에 도착했다.
지금은 6일이면 당도할 수 있는 시베리아 철도를 장장 40일 동안이나 달려, 실로 정처없는 6000KM의 고난의 장정을 드디어 마칠 수 있었다.
가을에 떠나 겨울에 도착한 사람들. 죽음의 열차는 다시 한번 그들에게 살아보라, 어디 한번 살아보라는 듯 조롱의 기적을 울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은 또 어디란 말인가. 기차간에서 겪은 그 무서운 추위를 또 한번 겪어야 하는 이곳은 어디란 말인가. 허허벌판, 바람 한 점 막아 주는 곳이 없는 이 소금 투성이의 황무지는 또 어디란 말인가.
자식을 묻고 아비를 던지고 달려온 40일의 여정은 또 한번의 죽음을 예고하고 있었다.

 

살아 있는 것인가, 죽어 있는 것인가?

 

...<서문 생략>
텔레비젼 다큐멘타리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에도 소개되었던 연성용 시인(당시 88세). 그는 또 한번 겪는 이 혼란의 세월을 '시마저 쓸 수 없는 땅' 이라고 했다.
"비극입니다. 비극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제 나라가 없어 그곳에 갈 희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외지에서 발붙이고 살아본들 쫓기고 쫓기는 생활, 이것이 비극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스물일곱에 연해주에서 강제이주 화물차에 몸을 실었던 그는 이제 다시 짐을 꾸려야 하는 이 말년의 고통이 어디서 연유하는가, 두 눈을 모으고 가슴을 글어 당겨보아도 답이 없다고 눈물짓는다.
여전히 자식들을 키우고 살아야 할 사람들, 여전히 삶을 이어가야 할 그들은 오늘도 날선 벼랑 끝에 서서 갈 곳 몰라 하고 있는 것이다.
노시인은 꿈을 꾼다. 어린시절 마당가를 뛰며 놀던 한인들의 마을을 그리며, 가슴으로 목메여 부른다. 수남촌아, 오 수남촌아.

 

오 전주한다
스탈린의 개인숭배
수많은 무죄한 사람들을
살해한 죄악
때때로 잊지 못할, 용서치 못할 죄악
오늘도 나는 수남촌을 회상한다
텡텡 빈집들 열어제킨 창문들
어데로 우리를 두고 가느냐고
눈마냥 우리를 바라보며
묻는 듯하였다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잊혀지지 않는 그 이름
오 수남촌 수남촌아
보고 싶은 마음은 끝없어라
정든 내 집 처마 밑으로
제비들은 해마다 날아오는지
내 심은 수양버들은 얼마나 컸으며
살아 있기나 한지
정든 수남촌아, 고향 마을아. 
  
수남촌. 숨막힐 듯 그리워하던 그 땅 연해주는 그러나 그들을 반겨주지 않았다. 아무것 하나 건져올 수 없었고, 재산을 모두 정리한다 해도 기것 한 뙈기의 땅도 가져볼 수 없는 연해주는 그들을 반겨주지 않았다. 돈도, 양식도, 집도, 직장도 아무것도 없는 맨 몸통이 생활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들의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 이 땅을 찾아오고 있다. 조국은 불러주지 않고, 그나마 연고지라 하여 찾아들 수 있는 곳이 이들에겐 연해주 땅 한 곳밖에 없었다.
러시아 정부는 재이주해 오는 이들에게 강제이주 피해보상 차원에서 군막사를 폰드(고려인 재생기금)를 통해 무료로 임대해주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수도도 없으며 난벙조차 되지 않는 그 비참한 현실을 임대해준 것이다. 유리창은 깨어져 찬 바람이 들어오고, 물을 길어다 먹어야 하는 곳.
60여 년 피 땀의 보상으로 그들은 이 현실을 '임대' 받았다. 임대, 빌리는 것. 여전히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을 말이다.
일생 남의 땅, 남의 집, 남의 공기를 안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
시베리아 찬바람 속에서 오늘 그들이 살고 있다. 억울하고 억울하다, 서럽고 서럽다, 내 조국은 어디에 있는가 소리치며 말이다.
2년 전인가. 우즈베키스탄에서 재이주해 온 어느 아주머니의 집은 두 구의 시신으로 곡성이 터져 나왔다.
"여보 여보, 아들아 아들아!"
하늘을 향해 곡을 한들, 땅을 치며 피을 토해 낸들 죽은 이가 다시 살아올 수 있겠는가. 6개월 전 사라진 아들과 남편은 봄이 되어 언 강이 풀리자 총에 맞은 두 구의 시신으로 그렇게 찾아왔다.
살아보겠다고 다시 찾은 곳. 그래도 살 수 있을 것이라 꿈꾸었던 곳, 연해주. 그곳에서 모녀는 떨어진 꽃잎을 밟으며 다시 떠나고 있다. 죽은 몸 뉘일 곳조차 없는 남편의 시신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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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란한 연해주 고려인의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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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돕기운동회의 지원으로 트랙터를 구입한 고려인의 모습에서 또다른 기쁨보단 아픔이 더한 무엇을  느낍니다.너무나 좋아했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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