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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고려인 이야기(5)

fabiano 0 945  
이 글은 김재영의 연해주 고려인 리포트<대지의 슬픈 유랑자들> '내 눈물에 당신이 흐릅니다'라는 소설의 일부입니다.
-한얼미디어 출판-

조국광복의 발원지인 연해주를 분석하고 고려인들이 일구어 낸 황금같은 옥토을 소개 함으로써 민족긍지를 되살리고 오늘의 우리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독립투사들의 몸으로 던진 피흘린 대가이었음을 확인하고 나아가 잊고 있었던, 지금도 유랑신세로 떠도는 연해주 고려인들의 삶을 재조명 하므로 역사 속에 감추어진 그들의 업적을 드높이 평가해야 한다는 인식에 감히 포스트에 옮겨 보았습니다.초인류 인터넷의 강국이며 조선업과 반도체의 업적으로 세계의 위상에 우뚝 선 한국이라는 나라가 있건만 20세게 밀레니엄 시대에 우리의 핏줄인 한민족이 저토록 아픈 질곡의 삶으로 아프리카 빈민보다 못한 비참한 실상으로 러시아 변방 광활한 땅덩어리에서 아직도 버려진 우리민족인 고려인이 있다는 것에 슬픔이 강물처럼 흐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름은 바로 고려인일 것입니다.
참고로 김재영의 소설 '내 눈물에 당신이 흐릅니다'는 구 소련이 붕괴되면서 생겨난 독립국가의 그 어느나라에도 속하지 못하고 러시아 연해주에서 무국적자로 살아가고 있는 고려인의 기구한 삶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 이름 그대로, 파르티잔스크

 

연해주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시호테 알린 산맥에 의해 동서로 구분된다. 서쪽은 주로 야산과 어우러진 평원지대이고 동족은 산림지대가 주류를 이룬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자동차를 타고 동쪽으로 4시간 거리에 '파르티잔스크' 라고 불리는 작은 도시가 있다. 지형이 한국과 비숫하여 지난 2002 월드컵 본선에 참가했던 러시아 축구 대표팀이 장기간 합숙 훈련을 한 곳이기도 하다.
파르티잔스크의 원래 명칭은 '수찬' 이며 '수청水淸', 소성蘇城' 으로도 불렸다. 처음엔 중국인들이 개척한 곳인데, 산이 높고 물이 맑아 수청이라고 불렀다. 연해주를 남북으로 길게 뻗은 시호테 알린 산맥의 끝부분에 위치한 이곳은 러시아 내전기에 빨치산들이 험준한 산맥에 의지해 용감히 싸웠다 하여, 1972년 파르티잔스크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파르티잔스크 역시 항일투쟁 지역으로서 중요한 거점이었다. 한인들이 많이 거주했었던 곳이고, 현재도 우수리스크 다음으로 고려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다. 5천여 명 정도의 고려인들이 김 블라지미르 고려인협회 회장을 중심으로 고려인 문화센타를 건립하는 등 민족의 정체성을 이어가기 위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1896년 3월 1일 김광성, 김경오 등이 처음으로 이곳을 개척하였으며, 20여 개의 한인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크라스키노와 함께 의병항쟁의 책원지였으며, 의병도모와 군자금의 상당 부분을 이곳에서 담당하였다. 1911년 10월 20일에는 수청일대에 있는 12개 지회가 연합하여 대한인국민회 수청 지방총회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활동한 저명한 항일 운동가로는 백마 탄 김경천 장군과 홍범도 장군을 들 수 있다.
김경천 장군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현역 일본군 장교로서 후에 광복군 총사령관이 된 이청천과 함께 1919년 3.1 운동 이후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 후 압록강 건너 서간도 지역에 위치한 대한독립청년단의 회원 및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 활동하다 무기 구입을 위해 다시 러시아로 돌아와 수청 고려의병대와 고려혁명군 등에서 항일투쟁을 선도하였다. 그는 일본 육군사관학교 기병과 출신으로 시베리아에서 투쟁할 때에도 말을 타고 기병부대를 지휘하였는데, 백마를 탄 만주와 시베리아를 누빈 전설적인 항일영웅으로서 알려졌다.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진 홍범도 장군은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한 후 1937년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로 강제이주 되었다. 그 후 그는 그곳에서 극장 청소부로 일하면서 말년을 보내다가 1943년 10월 25일 서거하였다. 홍범도 장군은 재소동포들의 마음의 안식처였으며,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가 극장 청소부로 일하시다가 돌아가셨니..., 우리는 역사책에서 그가 후진을 양성하다 돌아가셨다고 배웠을 뿐인데... .
1920년 4월 블라디보스톡 신한촌 참변 이후 한인 독립운동이 크게 악화 되었는데, 그 해 6월 5일 수청 당어재골에서 14명이 한인무장부대를 조직한다. 일명 솔발관 빨치산부대로 1922년까지 파르티잔스크 일대에서 활발한 무장투쟁을 건재한다. 솔발관 부대는 조선의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러시아혁명을 도와야 한다고 판단하여 볼세비키와 함께 항일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블라디보스톡과 하바로브스크 중간 지점에는 이만이라고 불렸던 달네레친스크가 있다. 1921년 12월 4일 이곳에서 한용운이 이끄는 한인 빨치산 부대와 일본군과 러시아 반혁명군이 전투를 벌였는데 한인은 49명, 러시아인은 20명이 전사하였다. 일본군의 진격을 죽음으로써 하루 연장시켰다 하여 러시아 달네레친스크 남부 변두리 철도 부근에 기념탑을 건립해 주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그 누구보다도 피흘려 싸웠지만, 이들은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조국과 단절되고 만다. 1937년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쫓겨난 강제이주의 뼈아픈 역사는 이들에게 조국의 존재를 잊어버리게 했다. 물론 조국도 이들의 존재를 잊어버린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들이 조국의 소식을 접한 것은 88서울올림픽 대였다. 그제서야 이들은 조국 대한민국이 아직도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데올로기의 장막에 가려져 있던 조국의 실체를 50년만에 다시 본 것이다. 그리고 60년이 지난 후 중앙아시아에서도 쫓겨나 연해주로 되돌아오고 있는 이들 고려인. 그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연해주에서 피 흘려 싸웠던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임에 틀림이 없다.
우리 민족처럼 수난을 많이 겪은 민족도 없을 것이다. 우리 민족 중에서도 고려인들 만큼 비극의 역사를 산 사람도 없을 것이다. 아시아 대륙을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쫓기고 쫓겨야 했던 그들의 수난의 역사도 이제는, 정말이지 이제는 막을 내려야 하지 않겠는가?

 

*이 글은 <박환의 항일유적과 함께 하는 러시아 기행>(국학자료원)을 참고하였다.

 

리 올가 할머니의 노래

 

...<서문 생략>

현재 생존해 계시는 이 올가(75세) 할머니의 아버지 리관섭 선생도 독립운동을 하다 시비리스키에 끌려가 옥고를 치루다 1938년도에 잠드셨다고 한다. 할머니의 가족은 독립운동을 하다 말 그대로 풍비박산이 난 형국이었다. 아버지에 이어 삼촌도 화형에 처해졌고, 할머니 역시 자신의 고향이 어디인지 뿌리도 모른 채 이곳 파르티잔스크에 남아 혼자 생활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할머니의 노랫소리는 강물처럼 파르티잔스크를 맴돌고 있다. 눈물이 담겨 있는 그 노래 한 자락을 소개한다.

고국산천을 떠나서 수천리 타향에
물설고 산설은 타향에 객으로 유하니
섭섭한 마음 고향 뿐이오
다만 생각하노니 정든 친구여!

불과 한 세기 전, 여기 누워 있는 그들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 후손들은 오늘도 동토의 땅에서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이렇게 살고 있다.
먼저 간 이들의 무덤을 가슴에 안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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