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site-verification: naverf83ad7df1bcc827c523456dbbc661233.html 두바이 칠성급 호텔이 반한 손맛…그의 레시피는 바로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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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바이 칠성급 호텔이 반한 손맛…그의 레시피는 바로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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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이만훈]
#1990년 초 서울 왕십리의 한 경양식집 주방에선 고교를 갓 졸업한 앳된 젊은이가 땀을 뻘뻘 흘리며 일을 거들고 있었다. 말이 주방보조이지 청소를 하거나 양파 껍질을 까고, 파를 다듬고, 무·배추를 씻어 나르는 허드렛일이었다. 하지만 눈썰미가 보통을 넘는 데다 손끝이 매웠다. 그를 지켜보던 주방장 왈 “솜씨가 제법이여. 소질이 있구먼.”

#그로부터 18년이 흐른 지난달 말 서울 성동구 약수동 한 사진 스튜디오에선 30대 후반의 멋쟁이 사내가 화보 촬영을 하고 있다. 미남 배우를 뺨치는 얼굴과 1m80㎝의 잘 다듬어진 몸매-. 바로 그이다. 촌티가 흐르던 ‘왕십리 시절’보다 세련되기는 했지만 틀림없는 권영민(37), 그이다.

#간단한 퀴즈 하나. 축구엔 박지성, 바이올린 하면 사라 장, 그러면 요리엔? 정답은 바로 에드워드 권(권영민의 영어식 이름)이다. 왜냐고 되물으면 곤란하다. 그는 현재 세계 최고라는 의미에서 7성급(星級) 호텔로 불리는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 있는 ‘버즈 알 아랍(Burj Al Arab)’의 수석총괄주방장이니까. 세계의 웬만한 셰프(chef·요리사) 치고 그를 모르면 ‘간첩’이다. 혹여 모르면 그는 분명 피스톨로 무를 썬다는 사람일 게다.

버즈 알 아랍은 일반 룸의 하루 숙박비가 750만원, 로열 스위트룸의 경우 무려 3500만원이나 할 정도여서 일반인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는 고급 중의 고급. 그러다 보니 세계적인 스타나 갑부, 국가원수급들이 주로 이용하는데, 에드워드 권이 이들의 입맛을 책임지고 있으니 세계 요식업계에서 그의 위상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그래서인지 한 달 말미로 휴가차 온 그와 인터뷰 약속을 잡는 것도 하늘의 별 따기였고, 그나마 약속시간을 두 시간이나 넘겨 시작할 수 있었을 정도로 엄청 애를 먹였다). 그는 세 명의 부(副)총주방장을 비롯해 각국에서 온 260여 명의 내로라하는 전문 셰프를 포함해 400여 명을 지휘해 ‘알 마하라’ 등 6개 레스토랑에서 내는 각종 요리를 빚어낸다. 종류만 해도 양식의 대표격인 프랑스·이탈리아 요리와 컨템퍼러리한 유럽식 요리, 시 푸드(sea food)에다 아시아 요리(한·중·일식을 비롯해 인도네시아·태국 요리 등)로 나눠 무려 1000여 가지나 된다. 그것도 분기별로 바뀐다. 창의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작업이다. 통속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그야말로 ‘맛의 마술사’다.

“하지만 요즘 웬만해선 직접 손을 써가며 요리를 하지 않습니다. 어떤 재료에다 어떤 재료를 쓰면 어떤 맛이 나고, 무슨 맛을 끌어다 어떻게 붙이면 무슨 맛이 나는지 하는 경지는 이미 넘었으니까요. 색깔과 분위기 연출도 마찬가지고요. 주로 입으로 요리를 한다고나 할까요. 게다가 셰프들이 워낙 도사들이라 척하면 삼척이고 툭하면 호박 떨어지는 줄 알거든요.”

그에겐 레시피(recipe·요리법)가 따로 필요 없다는 얘기다. 그래서 그의 요리는 하나의 ‘작품’이다. 그가 직접 만든 요리는 한 끼(메인+3, 4가지 보조 요리)에 최소 500만원 한다. 가격이 그 정도는 돼야 소매를 걷어붙이고, 또 그가 손을 대면 최소한 그 정도 가격은 보장된다. 그렇다고 가격만 맞는다고 무조건 하지는 않는다. 유명 국가의 원수급이 아니면 ‘NO’다. 할리우드 스타나 유명 운동선수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한국인으로서 세계 요리계의 우뚝하고도 당당한 별이 된 그이지만 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난 그는 동해 북평고를 다닐 때만 해도 신부(神父)가 되는 게 꿈이었다. 독실한 가톨릭신자인 부모의 영향 때문이었다. 하지만 90년 대학입시를 앞두고 그의 꿈은 높디높은 벽에 부닥치고 말았다. 그가 독자이자 장손인 까닭에 손(孫)이 끊기는 걸 걱정한 할머니가 완강하게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장 포기할 수는 없었다. 고민 끝에 부모한테 입시전형료로 받은 12만원을 가지고 가출해 상경했다. 일주일 만에 돈이 떨어지자 찾아간 곳이 바로 왕십리 식당. 스스로 돈을 벌어 기어코 신부가 되겠다는 작정에서였다. 하지만 7개월쯤 지나자 머리는 마음에 둔 신학대를 갈 수 없을 정도로 ‘빈 깡통’이 돼 버렸고, 군 입대 신체검사를 해야 해 귀가할 수밖에 없었다. “참 막막했습니다. 이젠 할머니가 아니라 제 스스로가 문제였으니까요.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신부가 되리란 희망을 접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자 문득 왕십리 주방장 아저씨의 말씀이 떠오르더라고요. 요리에 소질이 있는 것 같다는 말씀 말이에요. 그게 제 평생을 결정짓는 주문(呪文)이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여하튼 그래서 한 해 꿇어 2년제인 영동대 호텔조리학과에 들어갔고, 그로부터 지금의 제가 시작된 겁니다.”

이때부터 출발한 그의 ‘요리의 길’은 차라리 오기에 가까운, 지독한 열정과 성실의 연속이었다. 91년 입학만 해놓고 즉시 공군에 자원해 행정병으로 복무한 뒤 94년 1월 제대했는데, 바로 그날 용평스키장으로 달려가 두 달 반 동안 밤을 새워가며 현장실습으로 기초를 익힌 다음 복학하는 식이었다. 그가 95년 9월 첫 직장인 서울 리츠칼튼호텔에 취직할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 2학년 2학기 때인 그해 6월 칼튼호텔로 현장실습을 갔다가 서울국제요리대회에 출전하는 주방과장을 돕기 위해 2주 동안 회사 라커에서 자면서 심부름하는 등 노력한 덕분이었다. 동기 가운데 호텔에 취직한 것은 그 혼자였다. 어렵사리 얻은 직장이기도 했지만 “일단 잡았다 하면 끝장을 보고야 마는 성정”이라 죽을 둥 살 둥 열심히 했다. 그러면서도 새벽시간을 이용해 학원을 다니며 영어를 익혔다. ‘더 넓고 높은 세상’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마침내 문이 열렸다. 당시 총주방장이던 프랑스인 장 폴 라켕의 추천으로 그는 2001년 3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리츠 칼튼으로 옮기는 데 성공했다. 당시 직급은 세컨드 쿡(second cook). 하지만 3개월 만에 다시 퍼스트 쿡(first cook)으로, 이어 이듬해 하프 문 베이 칼튼에서 수 셰프(sous chef)로 네 계단 상승하는 등 남들은 10년 걸릴 일을 단 2년여 만에 해냈다. 2003년엔 미국요리사협회가 선정하는 ‘젊은 요리사 톱10’에 뽑히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비결이란 게 뭐 있겠어요? 남들보다 두 시간 먼저 출근하고 여섯 시간 늦게 퇴근했죠. 전 한 가지라도 빨리 배우기 위한 것이었는데 도움을 받는 쪽에선 기특하게 여긴 거죠. 그때 얻은 별명이 ‘독종’이에요.”

하프 문 베이 당시 그에겐 스타 단골이 많았다. 영화 007의 주인공이던 피어스 브로스넌, 아널드 슈워제네거, 가수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마돈나 등. 특히 스트라이샌드는 자신의 개인요리사가 돼줄 것을 제안하는가 하면, 마돈나는 그가 만든 음식을 가리키며 “섹스보다 낫다(This food is better than sex)”고 찬사를 쏟아놓기도 했다. 고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과 현 대통령인 조지 부시도 이따금 그를 찾는 멤버들이었다.

그가 다시 한국을 찾은 것은 2005년 쉐라톤 워커힐 옆에 새로 오픈하는 W호텔(당시 6성급 호텔이라며 요란했다!)의 부 총주방장으로서였다. 호텔 일을 시작한 지 10년 만이지만 금의환향하는 기분보다는 정체돼 있는 국내 호텔요리에 뭔가 자극과 새 바람을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일종의 사명감에서였다. 1년간 노력 끝에 자리가 잡히자 다시 중국 톈진의 쉐라톤호텔 총주방장으로, 다시 두바이의 6성급 페어먼트호텔 수석주방장으로 자리를 옮겨 경험을 쌓았다.

“이때쯤엔 어느 정도 세계적 수준에 올랐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정말 자타가 공인하는 봉우리가 남아 있었어요. 바로 버즈 알 아랍 말이에요.”

그래서 앞뒤도 안 보고 도전했다. 지원자는 그를 포함해 모두 6명. 이탈리아·프랑스·미국 등 요리 대국 출신들로 이미 톱 클래스였다. 사흘간의 테스트에 경쟁자들은 30가지 요리를 선뵐 때 그는 무려 50가지를 만들어 들이댔다. 여기엔 한국식 꼬리찜도 포함됐다. 결과는 물론 말하나마나 그가 낙점됐다. 그는 그날 “개인의 영광도 그렇지만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살렸다는 기쁨”에 아내를 부둥켜안고 얼마를 울다 웃다 했는지 모른다. 6개월 전 아시안 레스토랑을 오픈하면서 한식을 집어넣은 것도 그렇고, 국내외에서 한국인 후배요리사 21명을 스카우트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는 요즘도 오전 7시부터 밤 11시까지 하루 16시간씩 일한다. 미처 스트레스가 쌓일 짬도 없을 정도로 바삐 돌아친다. 그러면서도 한시도 공부하는 걸 잊지 않는다. 늘 새로운 컨셉트의 요리를 창조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국의 요리 관련 원서만 850여 권 있고, 유행하는 패션을 익히기 위해 수많은 잡지도 탐독한다. 또 툭하면 직접 먹어보기 위해 비행기 나들이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수입의 절반은 재투자된다. 물론 세계 200여 명의 일류 요리사들과 매일 e-메일을 주고받는 건 기본이다.

“요리는 모든 감각이 총동원되는 종합예술이에요. 하지만 요리엔 명장이나 대가가 있을 수 없어요. 늘 공부하지 않으면 금세 뒤처지는 게 이 세계예요.”

서구에서 셰프의 정년은 보통 55세다. 하지만 그는 앞으로 3~4년쯤만 더 할 생각이다. 달리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제이미 올리버(Jamie Oliver·영국 요리연구가로 BBC의 ‘Naked Chef’ 진행) 이상의 엔터테이너가 돼 한국 음식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 쉰 살쯤엔 프랑스의 ‘코르동 블뢰(Le Cordon Bleu)’나 미국의 CIA(The Culinary Institute of America)를 능가하는 세계 최고의 호텔요리 학교를 만들 계획이다. 과연 그의 진화는 어디까지일까?

이만훈 전문기자
1 Comments
dmsgmlek 2008.08.06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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