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site-verification: naverf83ad7df1bcc827c523456dbbc661233.html 추억의 저 멀리에......(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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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저 멀리에......(21)

fabiano 0 1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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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슬픈 지난날들(10) * *

나는 가난하다고 친구들이 업신여길까봐 어떤 일이든 자존심(自尊心)이 상하는 굴욕적(屈辱的)인 말이나 행동을 절대로 하지 않았다,
그 누구라도 아무 의미 없는 순수한 도움이 아니고 조금이라도 동정심(同情心) 때문에 도움을 주는 눈치만 보여도 그것이 무엇이든 단호(斷乎)하게 거절했다,
또한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그 누구에게도 힘든 내색을 절대 하지 않았다,

학교공부가 끝나면 으례히 용돈을 가진 친구들이 학교 앞 구멍가게로  우르르 몰려갔다.
 
지금도 그런 게 있는지는 몰라도 그때 당시 인기가 있던 것은 돈을 내고  상품을 붙여둔 전시판 밑에 미리 떼기 좋게 오려둔 딱지를 골라
 “또”자가 있는지 떼어보거나 상품을 싼 종이 속에  “또”자가  쓰인 걸 찾으면 다시 뽑을 수 있는 “또 뽑기”를 해서 운만 좋으면 몇 개라도 더 뽑을 수 있었다.
 
친구들이 사탕을 사먹을 때  그 자리에 함께  있게 되면 나는 그 친구들에게  한 번도 사주지 못하면서 마치 나누어 줄 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분위기가 싫어 슬그머니 그 자리를 피해 저만큼 먼저 가버리곤 했다.

생활이 아무리 어려웠어도 엄마가 점심에 먹을 도시락은 꼭 싸 주셨는데 일찍 끝난다거나 어떤 또 다른 핑계를 대고 그것을 가져가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되면 급우들과 함께 도시락을 펼쳐놓고 먹게 됐다.

쌀 한 톨 섞이지 않은 꽁보리밥이 식어서 떡처럼 한 덩어리로 굳어있어 먹기가 좀 그랬었다.
 
인정 많은 급우들이 우리 집 형편을 잘 알고 있을 턱이 없었지만,  맛이 없는 줄 잘 알면서 자기 엄마가 싸준 맛있는 반찬과 흰 쌀밥을 내밀며 꽁보리밥이 먹어보고 싶다고 몇 숟갈씩 바꿔 먹자고 했다.
 
나는 그런 순수하고 따듯한 급우들의 호의마저도 동정으로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 했었다.
  
물론 착한 급우들이 동정심으로 도시락을 바꿔 먹자고 하진 않았겠지만 급우들에게 불쌍하게 보일 것 같은 내 모습이 싫어서 아예 도시락을 싸가지 않았다.
 
점심시간에 급우들이 우루루 삼삼오오 모여 맛있는 반찬냄새를 풍기며 여기저기서 달그락 달그락  도시락 뚜껑 여는 소리가 시작되면 서둘러 운동장으로 나아가 친구들과 놀며 배고픈 점심시간을 보내곤 했다.

또한, 그 당시 심천엔 풍성하고 흥청대든 5일장이 섰는데 특히 장날이면 으례 아무 볼 일도 없으면서 친구들과 이것저것 흥미로운 장 구경을 하고 다녔다
  
그러다 친구가 부모님을 만나 맛있는 것을 사주시는걸 보면 아무리 배가 고프고 얻어먹고 싶지만 마음속 어디에선가 자그마한 자존심이 꾸역꾸역 기어 올라와 일부러 얼른 어떤 핑계를 대고 그 자리를 피해버리곤 했다.
 
이런 서푼어치 자존심 때문에 자격지심(自激之心)이 생겨 친구들과 어울리기가 싫어 혼자 노는 때가 더 많아졌다.
 
그렇게 변한 성격 때문인지 어쩌다  읽을거리로 책이 생기면 천천히 정독(精讀)을 하며 날이 새는 줄도 모르는 채,  그 내용에 빠져들곤 했다.

또, 엄마가 남의 품일을 나가게 되면 그 집으로 저녁을 먹으러 오라고 신신 당부를 하시고 일하러 가셨어도 밥을 얻어먹겠다고 그 집엘 들어가는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하고 처량하게 생각이되 절대로 그 집으로 밥을 먹으러 가지 않았다.
 
그런 쓸데없는 못된 나의 자존심 때문에 가뜩이나 힘드신 엄마가 더 힘들게 되셨다.
 
굶고 있는 나를 위해 별도로 한 그릇 챙겨 오시던가, 일 끝나고 피곤한 몸으로 뒤늦게 집으로 오셔서 번거롭게 내 밥을 다시 챙겨 주셔야 했다.
 
그 당시 내 생각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내가 그 집에 무슨 일이라도 좀 거들어주었거나  내 스스로  판단해 밥을 먹어도 좋다는 조그마한 명분이라도 있어야 그 집으로 밥을 먹으러 갔다.

심지어는 그렇게 허물없이 자주 가던 고모네 집조차 잘 가지 않았다.
 
고모님은 먹는 것도 변변찮은 나를 챙겨주시려고 집안행사로 귀한 음식을 만들거나 함께 밥을 먹어야 될 일이 생기면 동생들을 시켜 아무리 오라고 해도 내 스스로가 마음속에 정해둔 그 잣대에 맞지 않으면 절대 가지 않았다.

나는 심각한 자기모순(自己矛盾)에 빠져 고민을 했다.

나 때문에 고생하시는 엄마를 생각한다면 보잘것없는 자존심을 내새울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생각과 같이 행동을 하지 못하고 정반대의 행동을 하곤 하는 나 자신이 한없이 밉기도 했다.
  
나의 이런 버릇은 성년이 되고 현재까지도 별로 변하질 않았다.
 
친구나 그 누구도 상대편이 한턱 내겠다고 미리 이야길 했어도 막상 내가 그 계산을 다하지는 않더라도  그날 내 몫만큼이라도 계산할 수 있는  약간의 돈이라도 있어야 약속을 한다.
 
막상 돈이 없으면 식사시간이 아닌 다른 시간으로 약속 시간을 변경하거나 아예 어떤 핑계를 대고 그 약속을 취소해 버리는 일이 많았다.
지금 돌이켜 보면 아마도 그 시절에 현재 나의 모든 성격과 인격이 형성 됐던 것 같다.

이렇게 성격이 차츰 변해져서 예전처럼 남들과 잘 어울리지도 않았고 활달한 성격도 점점 없어지고 말수가 적어져 꼭 필요한 말 외엔 잘 하지 않는 에고이스트(egoist)가 되어갔다.
 
가난하다고 남이 나를 업신여긴다는 자격지심이 생겨 절대로 그 누구에게도 쓸데없는 부탁을 하거나 남의 신세를 지는 일은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상대가 잘못하고 있는 것도 그냥 두고 보지 않는 성격이 됐다.

이런 버릇은 성년(成年)이 돼서도 큰 문제가 됐다.

아부도 못하는 성격에다 내 스스로 판단해 이것이 옳은 일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문제 제기를 하는 바람에 상사에게 찍혀 고전을 면치 못했고 제때 진급도 하지 못했다.
 
그런 성격 탓에 쉽게 직장생활에 적응이 잘 안 되고 상사와의 충돌이 잦아졌고 환멸을 빨리 느껴 직장생활을 오래 하지 못하고 그만두는 원인이 됐다.
 
직장 구하기도 만만치 않았지만 이 세상엔 내 취향에 잘 맞는 직장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 이유때문인지 몰라도 일찌감치 사업을 시작했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조그만 틈만 보이면 감언이설(甘言利說)의 꼬임에 속아 사기를 당해 수렁에  빠지기 일쑤였다.
 
정에 약한 성격 탓인지 누굴 믿기 시작하면 주변에서 그 사람의 단점을 조언하며 경계할 것을 미리 알려주어도 나는 끝까지 신뢰를 보냈다.
  
상대편은 나의 그런 점을 교묘히 이용해 사기를 쳤고 그럴 때마다 아주 큰 피해를 보고  거덜이 나곤했다.

다시는 사람을 그토록 믿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내 천성이 모질지 못한 탓인지 바보라서 그런지 그런 일들은 자꾸만 반복이 됐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아주 가까운 사람들이 그런 짓을 하는데 더 큰 충격에 빠져 버렸고 정말 인생에 환멸을 느낄 정도였다.
  
친한 친구나 측근으로부터 막대한 피해를 입은 온 집안 식구가 피해망상에 걸리다시피 됐고 특히 집사람은 사업과 연관된 친구라며 소개를 하면 무조건 경계부터 할 정도가 돼버렸다.

그 후로도 수없는 시행착오와 실패를 거듭하는 사업 때문에 덩달아 식구들은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많이 하기도 했다.
 
그 때문에 당분간 사업을 접고 다시 직장생활로 회귀(回歸) 하면서 국내의 좋은 조건을  다 뿌리치고  머리도 식힐 겸 해외로 장기 취업의 길을 떠나게 됐고 전화위복(轉禍爲福)인지 그 바람에 좋은 경험을 많이 쌓아 현재 하고 있는 사업에도 많은 도움이 됐다.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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