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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연재] 근대화 혁명가 朴正熙의 생애 (9권8장)

fabiano 0 2272  
[연재] 근대화 혁명가 朴正熙의 생애 (9권8장)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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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키지 못하는 날에는 다 죽어야 한다』
 
越南 패망과 긴급조치 9호 시대 개막

『우리가 살다가 이 땅에 묻혀야 하고 길이길이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서 지켜 가도록 해야 할 소중한 땅이다. 영원히 영원히 이 세상이 끝나는 그날까지 지켜 가야 한다. 저 무지막지한 붉은 오랑캐들에게 더럽혀서는 결코 안 된다. 지키지 못하는 날에는 다 죽어야 한다. 죽음을 각오한다면 결코 못 지킬 리 없으리라』(1975년 4월30일 朴正熙 日記에서)
趙甲濟 月刊朝鮮 편집위원 (mongol@chosun.com
『朴정권이 폭력적으로 쓰러지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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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대통령은 월남 패망의 가장 큰 원인은 사대근성과 국론분열이라고 생각했다. 1975년 해군기동훈련을 참관하면서 주먹을 불끈 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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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년 1월1일자 동아일보는 金大中씨와 金泳三 신민당 총재의 인터뷰 기사를 같은 크기로 나란히 실었다. 金大中씨는 강성재 기자와 한 인터뷰에서 『유신체제를 고집하는 現정부의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고 말했다.
 
  『오늘은 국민적 민주혁명을 성취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과제가 주어진 시대라고 본다. 작금 우리 국민은 신문을 거꾸로 볼 줄 아는 슬기마저 터득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金泳三 총재의 신민당이 『헌정 회복이란 목표를 정한 것은 옳은 일이다』라고 평가한 뒤 『정권교체라는 정당의 본래적 의미에 투쟁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金泳三 총재는 崔時仲 기자와 한 인터뷰에서 『올해는 기필코 유신헌법의 개헌을 이뤄야 한다』고 말했다. 金大中씨가 신중한 표현을 쓴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는 직설적으로 朴정권을 비판했다.
 
  『朴정권이 비극적으로나 폭력적으로 쓰러지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은 모든 국민의 비극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朴대통령이 스스로 개헌을 하고 下野를 하도록 촉구할 것이며, 이를 위해 신민당은 모든 민주세력들의 선두에 설 것이다. 朴대통령은 자신을 위해서도 개헌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金총재는 金大中씨와의 관계를 「동지적 라이벌」이라고 표현하면서 『언제나 대승적 차원의 利害가 우선될 것』이라고 말했다. 金총재는 『정부 측에서 내 주변 인사들이 자금 지원을 하지 못하도록 각서를 받는 등 나를 질식시켜 항복을 받으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무렵 朴정권은 정보부를 동원하여 정권에 가장 비판적이던 동아일보에 대한 광고탄압을 진행하고 있었다. 1974년 12월 중순부터 광고주들에게 압력을 넣어 동아일보에 광고를 내지 못하게 하더니 12월26일자에는 8면 중 3개 면의 광고란이 백지로 발행되었다. 분노한 시민들이 작은 돈으로 광고를 내주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신민당은 1975년 1월14일 이 사태에 대한 진상조사 보고를 듣고는 각 지구당에 성금 및 광고보내기 운동을 벌이도록 지시했다.
 
  30년 전의 이런 기사를 읽어 보니 유신시대가 언론의 암흑기였다는 표현이 얼마나 과장인지 알 수 있었고, 당시 야당과 언론이 朴정권과 맞서 용감하게 싸웠음을 새삼 실감했다. 거대 야당인 한나라당이 요사이 左派정권이 낸 위헌적인 언론규제법을 통과시켜 주고, 정권과 상생한다면서 對北정책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과 대조적이었다. 金大中씨의 당시 말대로 정당의 본래 모습은 정권을 차지하는 것인데 한나라당은 국가가 위기에 처했어도 그런 야성을 잃고서 웰빙黨으로 하루하루를 즐기면서 지내고 있다.
 
 
  1514973138356015.gif완공·착공·추진·확장
 
  1975년 1월1일에서 5일까지 朴대통령은 연초 휴가를 부산 해운대와 제주도에서 보냈다. 1월4일 남제주군 신례1리 마을을 시찰한 朴대통령은 마을사람들이 自力으로 포장한 아스팔트길의 공사비를 계산해 보더니 『어떻게 정부 공사비보다 적게 먹혔는가』라고 물었다. 대통령은 『이렇게 된 것은 새마을운동의 정신력 때문이다』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朴대통령은 해운대 극동호텔과 제주도 KAL호텔에서 휴식하면서 1월14일로 예정된 연두기자회견을 준비했다.
 
  1월10일 朴대통령은 고향인 구미대교의 준공식에 참석했다가 공단건설 현장을 둘러보았다. 金載圭 건설부 장관과 志晩군이 동행했다. 이날 朴대통령은 감기에 걸려 그 뒤 며칠간 고생했다. 연두기자회견 하루 전인 13일엔 업무를 보지 않고 수도통합병원 分院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1월14일 중앙청에서 열린 대통령 기자회견은 2시간40분 걸렸다. 朴대통령은 연두기자회견을 가장 중시하여 국민들에게 국정의 지표와 방향을 아주 자세하게, 쉽게 설명하는 기회로 삼았다. 이날 朴대통령은 야당과 재야 세력이 요구하는 유신헌법 개헌문제에 대한 소신피력에 48분을 썼다.
 
  朴대통령은 전해의 경제성장률이 8.3%로서 석유파동을 겪고 있는 세계 각국 중 월등한 성적이라고 자랑하면서도 도매물가상승률이 44.6%였다고 보고했다. 그 가운데 37.2%가 해외요인에 기인한 것이라고 했다. 경상수지 적자도 18억 달러로 늘어났다. 대통령은 그럼에도 유신체제의 命運을 걸고 추진하는 중화학공업 건설은 계속하겠다는 결의를 밝혔다.
 
  그는 『올해 수출은 중화학공업 제품이 45%, 경공업 제품이 55%에 달해 선진국형으로 바뀌기 시작할 것이다』면서 『우리 경제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중화학공업 건설은 올해에도 계속 강력히 밀고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철강 부문에서는 포항제철을 年産 260만t 규모로 확장하기 위한 공사를 추진하고, 비철금속 부문에서는 온산에 年産 8만t 규모의 아연제련소를 착공하며, 造船 부문에서는 울산 현대조선소가 年産 200만t 규모의 조선소를 완공하고, 옥포 및 죽도 조선소가 착공된다. 기계공업 부문에서는 창원 공업기지에 6개 부문 27개 대단위 공장을 유치하기로 했고, 구미 전자공업단지에 현재 22개 공장이 가동하고 있는데 올해 중에 21개 공장을 추가로 가동시킬 예정이며, 전자제품의 수출목표액이 7억8000만 달러로 책정되었다. 석유화학 분야에서는 여천지구에서 33만t짜리 메탄올 공장이 완공되며, 33만t 규모의 납사분해센터를 금년에 착공하고, 36만t 규모의 영남화학비료공장을 완공하며, 암모니아 기준 600만t 규모의 제7 비료공장을 추진한다.
 
  완공과 착공, 그리고 추진이란 말이 반복되는 중화학공업 건설상황을 이야기할 때 대통령의 금속성 목소리엔 윤기가 돌았다. 1년 전 석유 값이 넉 달 사이에 네 배로 뛰는 비상사태를 맞았을 때 중화학공업 강행을 결단한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1514973138356015.gif환상적 민주주의자들을 비판함
 
  朴대통령은 이날 연두기자회견에서 약 50분을 유신체제 옹호에 썼다.
 
  <요즈음 정부에 대해서 늘 반대하는 일부 사람들 중에, 언필칭 민주주의가 어떻고 자유가 어떻고, 이런 소리를 많이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 사람들 얘기를 들으면 민주주의니 자유니 하는 것은 그 사람들의 하나의 특권물이고 마치 자기들의 독점물같이 떠들고 있고, 現정부에 앉아 있는 대통령이나 장관이나 이런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뭔지 자유가 뭔지 전혀 모르는 무지막지한 사람들이 앉아서 정치를 하고 있는 것같이 선동을 하고 있는데, 그 사람들은 요즈음 이렇게 얘기하더군요. 언론의 자유가 없는 現정부는 『독재정권』이다. 심지어 최근에 와서는 별의별 소리를 다 합니다.
 
  『정권 내놓고 물러가라』, 『대통령도 그만두고 물러가라』 이런 소리가 함부로 막 나오고 또 몇몇 신문에 대문짝처럼 이것이 보도가 되어서 국민들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 이상한 것은 이 사람들이 이런 소리를 막 떠들고 신문에 쓰면서도 우리나라에는 언론의 자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언론의 자유가 없는 나라에서 어떻게 정부를 이렇게 비난하고 비방을 하고, 이런 소리를 신문에 막 쓰고 할 수가 있느냐, 이것입니다.(中略)
 
  만약, 美 합중국이 남북으로라든지 동서로라든지 국토가 분단되어 가지고 그 한쪽에 공산 정권이 서서 미국보다도 더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미국을 뒤집어 엎어 적화 통일을 하려고 자주 도전을 해 오고, 간첩을 보내고 테러 분자를 보내고, 심지어 땅굴을 파고 두더지 모양으로 기어 들어오고, 또 그 옆에 있는 캐나다가 공산주의 국가고 또 남쪽에 있는 멕시코가 공산주의 국가고 그 가운데 둘러싸인 미국이 주위로부터 그런 압력과 위협을 받고 있다, 그랬을 때에 미국 정부는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이고 미국 국민들이 과연 오늘날과 같은 그런 자유를 누릴 수 있겠느냐…, 못할 것입니다. 요즈음 한국의 일부 인사들 중에는 자기는 두 동강이 난 분단된 남한 땅에 살고 있으면서 머리와 생각은 미국이나 서구라파에 가 있어 가지고 그곳에 대한 환상만 자꾸 생각하고 있단 말이에요. 이것을 우리는 소위 환상적 민주주의론자라고 얘기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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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연두기자회견에서 朴대통령은 민주화 운동가들을 환상가들이라고 비판했다.

 
  1514973138356015.gif金鍾泌의 국민투표 건의
 
  1975년 1월, 朴正熙 대통령은 金泳三의 신민당을 중심으로 하여 언론계, 종교계, 학생들이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벌이고 있는 유신헌법 개정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 해 전 4월의 학생시위에 대해서 긴급조치로 대응한 이후 8·15 陸英修 여사 피살사건 직후에 한두 달 정도 조용했을 뿐 反유신 운동은 하나의 흐름을 확실히 형성하고 있었다. 투쟁노선으로 선명해진 야당과 언론자유수호운동을 벌이던 신문이 여론을 주도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긴급조치를 남발하는 방식으로써는 문제 해결이 안 된다는 판단을 한 사람이 金鍾泌 총리였다. 당시 金총리는 라이벌이던 李厚洛 정보부장이 물러난 이후 申稙秀 후임부장과 잘 지내면서 오랜만에 실세총리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을 때였다. 金총리는 마음에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유신체제를 옹호하는 연설이나 발언을 많이 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비판도 많이 받았다.
 
  金총리는 대통령을 찾아갔다.
 
  『드골 대통령이 했듯이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를 하여 정면돌파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국민투표에 지면 물러나겠다고 하시지요』
 
  『임자가 너무 약해서 흔들리니까 이 사람 저 사람이 모두 덤비는 거야. 그렇게 마음이 약해서 어디 써먹겠어』
 
  『이것이 이기는 길입니다. 제가 무슨 다른 뜻이 있어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알아. 그럼 연구해 보자구』
 
  『그리고 이제는 저를 좀 놓아 주십시오. 건강이 도저히 말을 듣지 않습니다』
 
  金鍾泌 총리는 그때 持病인 허리 디스크가 도져 있었다.
 
  『말은 들었어. 허지만 별것 아니라고 그러더군. 싫어서 그런 게지』
 
  『아닙니다. 외부에 알려질까 봐 무리를 하고 있는 것이지 사실은 절단이 난 것 같습니다』
 
  『알았어. 나가 봐』
 
  그 며칠 후 朴대통령은 金총리를 불렀다.
 
  『임자, 생각해 보았어?』
 
  『무엇을 말입니까?』
 
  『국민투표 하자고 말하지 않았어?』
 
  『아, 네 그것 말씀입니까』
 
  『하지. 해 봐서 지지가 나오지 않으면 내가 물러나지. 나가면 될 것이 아닌가』
 
 
  1514973138356015.gif『60% 이상 안 나오면 下野』
 
  이렇게 해서 1975년 1월15일 오전 10시부터 4시간 동안 대통령이 주재하는 시국대책회의가 청와대 서도실에서 열렸다. 참석자는 대통령과 총리, 申稙秀 정보부장 이외에 朴璟遠 내무장관, 金正濂 비서실장, 金淇春 정보부 5국장, 金永光 정보부 판단기획국장, 鄭相千 정무2수석, 柳赫仁 정무1수석, 金聖鎭 공보수석비서관이었다. 이 회의는 국민투표 실시에 따른 상황점검을 했다. 정보부는 국민투표에서 이길 자신이 있다는 판단을 내놓았다.
 
  1월22일 오전 임시 국무회의가 청와대 대접견실에서 열려 국민투표실시 안건을 의결했다. 오전 10시 朴대통령은 청와대 새마을 상황실에서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따라서 나는 이번 국민투표를 비단 현행 헌법에 대한 贊反투표일 뿐 아니라, 나, 대통령에 대한 신임투표로 간주하고자 합니다. 국민 여러분, 나 개인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위해 이미 나의 모든 것을 다 바쳤습니다. 만일, 우리 국민 여러분이 유신체제의 역사적 당위성을 인정하지 않고 현행 헌법의 철폐를 원한다면 나는 그것을 대통령에 대한 불신임으로 간주하고 즉각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것입니다』
 
  이날 朴대통령은 투표에 관계하는 비서관들을 불러 점심 식사를 함께 했다.
 
  『오늘 공고한 국민투표에서 이길 것이라는 자신은 있는데, 결과는 끝나 봐야 알지. 나는 결심했네. 근소한 차이로 이기게 되면 下野할 작정이야. 우리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국민의 절대적 지지가 없으면 맥 빠져 일을 하지 못해요. 일부 사람들은 부결되기를 바라겠지만, 나는 그런 것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총 유권자의 60% 이상 찬성표가 안 나오면 내 스스로 청와대를 떠날 작정이니, 反체제 사람들 만나면 너무 초조해하지 말라고 이야기해 줘요』
 
  신민당과 민주회복국민회의는 즉각적으로 국민투표 전면 거부 결의를 했다. 국민투표를 4일 앞둔 2월8일 尹潽善 前 대통령과 金泳三 총재, 金大中씨는 국민행동강령을 발표, 투표거부를 종용했다. 신문들은 언론자유수호 운동을 벌이고 있을 때여서 야당과 在野의 투표거부운동을 적극적으로 보도했다. 朴정권下의 모든 행정기관은 국민투표에 동원되었다.
 
 
  1514973138356015.gif『남침하려거든 정정당당하게 해야』
 
  1975년 2월12일 유신헌법에 대한 贊反을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朴대통령은 비서진들을 불러 점심 식사를 함께 했다.
 
  『지금 심정은 지극히 담담하지만 국민투표가 어찌 되어 가는지 궁금하구먼. 현재 상황이 어떻게 돼 가고 있어?』
 
  관계 비서관이 보고했다.
 
  『지난번 선거 때보다 투표율이 높습니다』
 
  『잘됐구먼. 외국에서는 투표율이 낮으면 야당에게 유리하다고 하지만, 우리 국민은 현명해서 가부간에 의사 표시를 다 하는 민족이야』
 
  2월12일의 국민투표율은 79.8%, 유신헌법 지지율은 73%였다. 官權이 동원된 것은 사실이지만 금품 공세는 없었다. 야당이 투표거부운동을 벌이고 신문이 비판적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음에도 朴대통령과 유신헌법 지지율은 높았다. 朴정권은 형식상 유신헌법의 정통성을 확보한 셈이었다. 이때부터 朴대통령은 공세로 전환한다. 월남사태의 악화가 朴대통령을 돕게 된다. 1년간 계속된 유신체제에 대한 도전은 이제 썰물期로 바뀐다.
 
  1975년 3월20일 본관 식당에서 朴대통령은 비서진을 불러 점심 식사를 같이 했다.
 
  이날 중부전선 철원 북방에서 북한이 판 제2땅굴을 또 발견했다는 공식 발표가 있었다.
 
  『철원에서 또 땅굴이 발견됐다면서? 아무리 공산주의라 해도 하는 식이 원시적이고 서툴러 같은 한민족으로서 국제적으로 망신스러운 생각이 들어. 남침을 하려거든 당당하게 할 것이지 그런 짓은 왜 해? 수천 년 전부터 해 온 땅굴작전에 아직도 미련이 남아서…. 외국인들이 이것을 보고 원시적인 싸움밖에 모르는 저능아라 할 것 같아.
 
  나는 그들이 변칙적인 공격을 해 온다 해도 정규전으로 대응할 것이야. 정 그렇게 기습을 하고 싶으면 내게 와서 작전을 물어보면 한 수 가르쳐 줄 텐데, 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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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3월 駐越한국군 사령부가 철수할 때의 환송식. 안경 낀 사람이 柳陽洙 대사, 그 오른쪽이 李世鎬 사령관.

 
  1514973138356015.gif金日成, 中共 방문
 
  1975년 2월12일 국민투표에서 유신헌법 유지에 대한 찬성이 70%를 넘자 朴正熙 대통령은 그 여세를 몰아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를 입체적으로 취해 간다. 이때 월남의 패망 과정이 겹친다. 월남이 미군 철수 이후의 내부 분열로 망해 가는 과정이 언론을 통해서 매일 중계방송하듯이 소개되면서 야당·在野·학생·종교계에서 추진하던 유신헌법 개정운동은 動力을 잃고 만다. 2월15일 朴대통령은 긴급조치 1호 및 4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던 反정부 인사들을 석방했다.
 
  4월에 들어가면 거의 모든 연설에서 朴대통령은 유신조치를 합리화하는 사례로 월남사태를 들었다. 4월10일 해군사관학교 졸업식 유시에서 朴대통령은 『지금 월남에서는 男負女戴(남부여대)한 피란민의 행렬이 문자 그대로 아비규환을 이루고 있다. 6·25동란을 체험한 우리 국민들에게는 그 참상이 결코 對岸(대안)의 화재거나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북한은 1971년 선거를 보고 다음 선거 때는 극심한 분열과 혼란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그때 무력남침을 하려고 준비했을 것이다』면서 『유신체제를 갖추지 않았더라면 어떤 결과를 초래했을 것인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4월12일 「예비군의 날」 7주년 담화문에서 朴대통령은 『우리는 지금 일대 국난에 처해 있다』고 규정했다.
 
  4월18일 金日成은 14년 만에 처음으로 中共을 공식 방문했다. 8일간에 걸친 방문이 시작되는 날 中共이 지원한 크메르 루즈 공산세력은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을 점령했다. 金日成은 毛澤東 주석과 周恩來 수상을 만나게 된다. 환영 만찬에서 金日成은 『敵들이 전쟁을 도발하면 우리는 전쟁으로 응수할 것이고 敵을 섬멸할 것이다. 이 전쟁에서 사라지는 것은 휴전선이고 얻는 것은 조국통일이 될 것이다』고 호언했다.
 
  金日成은 중공 지도부에 대하여 『남한 해방에 자신이 있다』면서 지원을 요청했다. 周恩來는 이 제의를 거부했다. 그는 직설적으로 金日成을 반박하지 않고 한반도의 안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金日成은 체면을 구기지 않기 위해서 그 뒤에는 남침 말을 꺼내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에 소련도 북한에 대해서 『우리는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만 지원할 것이다』고 통보하여 전쟁 기도를 事前에 봉쇄했다고 한다.
 
  4월28일 북한과 中共의 공동성명에 대해서 정부 대변인인 李源京 문공부장관은 담화문을 통해서 『북괴와 中共이 한반도 赤化를 논의하고 공동투쟁을 다짐했다는 것을 주시하겠다』고 말했다.
 
 
  1514973138356015.gif서울 死守 선언
 
  4월29일 朴正熙 대통령은 텔레비전과 라디오가 전국에 중계하는 가운데 「국가안보와 시국에 관한 특별 담화」를 발표했다. 사이공이 월맹군에 포위되고 탄손누트 공항이 포격을 받고 있으며 駐越한국대사관이 문을 닫고 교민들이 철수선을 타고 귀환 중인 시점에서 나온 朴대통령의 담화는 국민들에게 안보 위기감을 실감시켰다. 내용도 비장했다.
 
  『우리에게 어떤 약점이 생기거나 우리가 약하다고 그들이 보았을 때는 지금까지 체결한 협정이니 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휴지처럼 내동댕이치고 武力을 가지고 덤벼드는 것이 바로 공산주의자들입니다.
 
  兵力이나 장비가 우세했던 월남은 집안싸움만 하다가 패전을 당한 것입니다. 만약에 앞으로 북한 공산집단이 전쟁을 도발해 온다면, 우리가 사는 首都 서울은 절대로 철수를 해서는 안 됩니다. 全시민이 이 자리에 남아서 死守해야 합니다.
 
  정부도 650만 시민 여러분들과 같이 死守를 할 것입니다. 전방은 우리 군인들이 일보도 양보하지 않고 국토를 死守할 것이고, 서울은 우리 시민들이 死守해야 할 것이고, 후방은 후방에 사는 국민들이 제각기 내 고장, 내 마을, 내 가정을 死守해야 합니다. 겁부터 집어먹고 나만 살겠다고 보따리를 싸 가지고 얌체없는 행위를 하는 국민들이 있다면 이 전쟁에서 우리는 이길 수 없습니다. 그 사람 자신도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중대한 시국을 에누리 없이 정확하게 인식해야 하겠습니다.
 
  과장할 필요도 과소평가할 필요도 없습니다. 60만 국군, 주한미군, 270만 향토예비군, 3500만 국민들이 있는데 왜 우리가 나라를 지키지 못하겠는가, 지키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월남 패망은 朴정권을 민주화 세력의 도전으로부터 구해 낼 뿐 아니라 그 뒤 4년간 정국을 안정시킨다. 월남 패망 과정을 추적해 본다.
 
 
  1514973138356015.gif미국의 反戰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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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이 망하기 석 달 전 티우 대통령(左)과 李大鎔 공사. 두 사람은 미국에서 군사교육을 함께 받았다.

  1973년 1월24일 키신저 안보보좌관은 백악관에서 월남휴전협정을 보고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이 협정은 관련 당사자들의 권위와 자존심을 지켜 줄 것이고 인도지나의 상처를 치유함과 더불어 미국의 상처를 치유하게 될 것이다』
 
  키신저는 나중에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런 요지의 고백을 한다.
 
  『내가 이 말을 할 때, 나는 워터게이트 사건이 미국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희망을 망치게 될 것이고, 월맹이 평화협정을 새로운 攻勢로 가는 휴식기로 사용할 것이란 것을 몰랐다. 미국의 反문화·反戰운동가들은 우리가 자유민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1945년 이후의 외교정책을 부패한 사회의 오만이라고 몰아세웠다. 3代에 걸친 미국 정부가 막으려고 했던 인도지나 赤化는 이들에게는 바람직한 국가적 스트레스 해소였다. 문제는 이런 여론이 언론과 미국 의회를 흔들어 대어 월남에 대한 방위공약을 실천할 수 없게 했다는 점이다』
 
  1968년부터 미국과 월맹 사이에서 시작된 파리평화협상은 월남의 티우 정부를 회담 당사자 자격에서 제외했다. 미국과 월맹은 침략피해자의 운명을 당사자의 참여 없이 결정하게 된 것이다. 이는 처음부터 월맹의 함정에 빠진 회담이었다. 월맹은 4년간 줄기차게 월남赤化에 대한 방해물의 제거를 시도했다. 그들이 미국에 제시한 뒤 양보하지 않은 조건은 「駐越미군의 철수, 미국의 괴뢰인 구엔 반 티우 대통령의 교체, 그런 뒤에 左右聯政을 수립하여 베트콩과 협상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월남 정부에 대해 자살하라는 처방에 불과했다.
 
  1973년 10월 월맹은 닉슨 대통령이 아홉 달 전에 제안한 휴전안을 거의 그대로 수용한다는 발표를 했다. 대통령 선거 직전이었다. 닉슨 행정부로서는 받지 않을 수 없는 逆제의였다. 그 내용은 「티우 월남 정부의 존속, 駐越미군의 철수, 휴전, 월맹군의 월남 침투 중지, 포로 교환, 정치협상 계속」이었다. 형식상으로는 월맹 측이 대폭 양보한 모습이었다. 미국의 여론은 닉슨이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방향으로 돌아갔다.
 
  키신저와 닉슨은 越盟의 이런 제안을 받아들이더라도 군사적 강제수단을 유지하지 않으면 월맹이 협정을 지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駐越미군은 철수를 개시하여 한때 50만 명에 달하던 병력이 3만으로 줄었고, 육상전투에는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 닉슨의 안보보좌관 키신저는 미국이 월남 정부에 군사·경제원조를 계속하고, 월맹이 협정을 위반하여 월남을 침공할 때는 海空軍力으로 응징할 경우 월남에서 군사적 균형은 유지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1514973138356015.gif朴대통령의 예언: 『1년도 어렵다』
 
  朴正熙 대통령의 판단은 달랐다. 1972년 10월21일 駐韓미국대사 하비브가 키신저와 만나고 와서 朴대통령에게 협정안을 보고하자 그는 반론을 제기했다. 이미 월남으로 침투해 있던 월맹정규군의 철수에 대한 규정이 없다는 점을 대통령은 맨 먼저 문제 삼았다. 당시 약 14만 명의 월맹군이 월남에 들어와 베트콩으로 위장하여 싸우고 있었다. 미국과 세계의 많은 언론은 이들이 自生的인 反독재 투쟁조직이라고 오보했다. 월남 침투 월맹군에 대해서는 잔류를 허용하고 駐越미군은 철수시키고, 휴전협정에 대한 국제감시는 불가능한 이런 협정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朴대통령은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越南戰 참전국 元首로서 발언권을 행사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비슷한 처지의 한국 상황과 대비하여 보고 있었다. 朴대통령은 이런 협정을 맺으면 티우 정부와 월남 국민들의 사기가 떨어질 것이고,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의 막대한 희생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며 월남 정부는 1년을 지탱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했다.
 
  朴대통령은 나흘 뒤엔 駐越한국대사 柳陽洙씨를 불러 歸任하면 티우 대통령을 만나 자신의 걱정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티우 대통령도 미국의 키신저가 들고 온 협정안을 거부했다. 1972년 10월22일 대통령궁에서 있었던 회담에서 티우 대통령은 키신저를 향해서 『귀하는 월남을 팔아넘길 작정인가』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키신저는 급했다. 11월7일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에서 닉슨은 反戰평화운동세력의 지지를 받고 있던 민주당 조지 맥거번을 꺾기 위해 월남휴전협정을 맺고 싶어 했다. 이런 타이밍을 계산하여 월맹이 양보하는 척하면서 함정을 깐 휴전안을 제의했던 것이다.
 
  柳陽洙 대사를 만난 티우 대통령은 키신저와 만나 나눈 대화를 전해 주었다. 티우는 월남 내에 침투한 월맹군을 철수시키지 않고 휴전하는 것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그는 또 1954년의 제네바협정의 재확인을 요구했다. 그래야 앞으로 월맹이 침략할 때 국제여론에 고발할 수 있다. 티우는 공산주의자들과 어떤 형태의 연립정부도 반대한다고 했다. 월맹 측은 중앙정부에서 마을단위까지 티우 정부와 베트콩 사이의 연립을 주장하였으니 이는 左右합작으로써 월남 정부를 허수아비로 만들려는 고전적인 술책이었다.
 
  키신저는 월남 정부를 압박하여 字句 수정 정도만 한 뒤 10월26일에 협정안을 발표하고 31일 파리에서 조인할 계획이었으나 티우의 거부로 霧散(무산)되었다. 키신저에게 티우는 거의 막말 수준의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는 공산당과 직접 대화하지 않고 귀하가 중계를 했는데 귀하는 누구 편인가. 왜 적에게 호의적이고 우방을 희생시키려 드는가. 왜 월남의 외국 군대는 60일 이내에 철수한다고 해 놓고 들어와 있는 월맹군에 대해서는 철수를 요구하지 않는가』
 
  小國이 자신을 도와준 大國의 요구를 거절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李承晩 대통령은 1953년 휴전협정 때 미국이 서둘러 협정을 맺고 한국에서 물러나려 한다고 판단하여 北進통일 선언과 反共포로 석방으로써 미국 정부를 압박하였다. 미국은 李承晩 정부를 달래기 위하여 韓美상호방위조약, 국군현대화 계획, 주한미군 유지 등을 약속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한반도 평화와 한국 번영의 울타리가 되었다. 티우 대통령은 그러나 닉슨을 상대로 그런 게임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李承晩만큼 유능하지 못해서라기보다는 미국의 여론과 언론이 反戰, 反티우로 돌아서 있어 미국 안에서 지지세력을 동원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1514973138356015.gif美 의회, 越南지원 금지안 통과시켜
 
  닉슨은 티우에 대해서 월맹이 협정을 위반하여 침공하면 미국은 군사력을 동원하여 응징할 것이고 경제·군사적 원조를 계속할 것임을 문서로 보증하겠다고 설득했다. 그래도 티우가 동의하지 않자 1973년 1월16일 닉슨은 티우 대통령에게 최후통첩을 보낸다. 그는 이 편지에서, 티우 정부가 휴전협정안에 동의하지 않으면 미국과 월맹이 조인을 강행할 것이며 자신은 『월남 정부가 평화를 방해하고 있다』고 美 국민들에게 설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위협했다.
 
  1월21일 티우는 결국 굴복한다. 그는 닉슨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에서 「미국이 사이공 정부를 월남의 정통정부로 인정한다는 것, 월맹은 월남에 병력을 잔류시킬 권리가 없다는 것을 일방적으로 聲明(성명)해 줄 것」을 요청했고 미국은 이를 받아들였다. 휴전협정은 1월23일 파리에서 가조인되었다. 이 협정은 이때부터 휴지 조각이 되었다. 휴전협정 이후 1975년 4월30일 사이공이 공산군에 떨어질 때까지 월남 내의 전투는 더 치열하게 계속되었다.
 
  파리휴전협정은 월맹 협상전술의 완벽한 승리였다. 그들은 戰場에서 얻을 수 없었던 것을 협상 테이블에서 얻었다. 월맹은 미국 여론을 反戰, 反티우로 돌려놓기 위해서 전투를 하고 협상을 했다. 미국 여론이 한번 돌아가 버리니 월맹의 월남적화 전략을 결정적으로 도와주는 것은 미국의 언론과 의회였다.
 
  월맹이 월남을 赤化하기 위해서 반드시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닉슨 대통령이 티우에게 약속했던 군사적·경제적 원조 및 협정 위반時의 군사적 응징조치 약속이었다. 국가원수의 이런 약속은 조약에 준하는 효력을 갖는데 美 의회가 월맹이 할 일을 대신해 준다.
 
  1973년 6월 미국 의회는 美 군사력을 인도지나의 육상이나 상공에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켜 닉슨 대통령의 발목을 묶어 버렸다. 월남에 대한 군사원조액도 의회에 의해 깎여 나갔다.
 
  1974년 8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중도사임한 닉슨을 이어 포드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에도 의회와 언론의 反戰행태는 계속되었다.
 
  휴전협정을 어겨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다는 자신을 가진 월맹은 월남 내의 공세를 강화하여 협정 이후 20개월 사이 2만6000명의 월남 군인이 戰死했다. 휴전협정 이후 1년 반 사이 월맹은 13만 명의 월맹정규군을 월남으로 침투시키고 결전에 대비한 도로망 정비, 보급품 쌓아두기를 계속했다. 휴전협정이 금하고 있는 탱크, 장갑차, 로켓포, 장거리포, 對空砲까지도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키신저는 회고록(「再生의 시기」)에서 이렇게 요약했다.
 
  <월맹군의 침투와 협정 위반이 계속되는 동안 미국은 월남의 목을 죄고 자신의 응징능력을 마비시켜 갔다. 이 비극은 월맹정규군이 월남을 침공하는 사이 미국은 국론이 분열하여 이를 방관하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미국 CIA는 1974년 5월23일자 「국가정보평가서」에서 「월남군은 주도권을 회복할 수 없을 것이다. 미국의 해·공군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으면 월남군이 버티기 어려울 것이다. 미국의 대규모 지원만이 공산군의 공세를 저지하는 최소한의 조건이다」라고 예측했다.
 
  월맹은 이런 사태를 지켜보면서 1975년의 작전을 준비해 갔다. 월맹 지휘부는 자신들이 월남에 대한 총공세를 시작할 경우 미국이 약속대로 월남을 돕기 위해 해공군력을 동원할 것이냐의 여부를 놓고 고심했다. 이들은 미국이 개입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월맹공산당 서기장 레 두안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월맹군 사령관 반 틴 둥의 회고록).
 
  『미국 행정부의 내부 갈등과 정당 사이의 분열이 깊어지고 있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나라 전체를 혼란에 빠뜨렸다. 사이공 괴뢰정권에 대한 미국의 원조는 줄고 있으며 미국은 사이공 정권의 파멸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월맹은 1976년을 決戰의 해로 정하고 1975년 攻勢로써 미국의 의지를 시험하기로 했다.
 
 
  1514973138356015.gif反戰 여론에 춤추는 美 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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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맹 국방장관 지압은 미국의 反戰여론을 友軍으로 삼았다.

  1975년 월맹군은 푸옥롱省의 省都인 푸옥빈을 점령했다. 월남전 사상 省都가 공산군에게 점령되고도 탈환하지 못한 경우는 이것이 처음이었다. 하노이의 월맹 지휘부는 미국이 이에 어떻게 대응하는가를 보고 다음 단계의 작전을 전개하기로 했다. 2년 전의 의회 결의로 인해 포드 행정부는 이런 중대한 협정 위반행위에 대해서도 군사력을 사용할 수 없었다. 답답한 키신저는 월맹 상공에 대한 정찰비행을 강화하고 필리핀 수빅만을 출항하여 인도양으로 향하게 되어 있는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를 월맹의 통킹만으로 접근시켜 월맹 측에 경고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월맹이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중대한 협정 위반을 한 월맹은 오히려 미국 측이 휴전협정을 위반하여 정찰비행을 강화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여기에 미국의 언론과 의회가 편승하여 포드 행정부에 대해 해명을 요구했다. 의회와 언론은 더 큰 협정위반자인 월맹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않고 자신의 정부에 덤벼들었다. 미국 국방장관이 나서서 변명해야 할 판이었다. 美 국방부는 의회로부터 국방예산 심의를 받아야 할 시점에 말썽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했다. 엔터프라이즈호가 수빅만을 출항하자마자 하노이는 또다시 미국이 침략의도를 드러내고 있다고 외쳤다. 美 국방성은 엔터프라이즈호의 통킹만 접근계획을 취소했다.
 
  이런 사태를 지켜보던 하노이의 월맹 지휘부는 미국의 포드 대통령이 월남 방어 의지를 실천하기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했다. 총리 팜 반 동은 『우리가 미국에 뇌물을 주어서 개입하라고 해도 하지 않을 것이다』고 농담을 했다고 한다.
 
  포드 대통령과 키신저 국무장관은 월남을 구해 보려고 했다. 그들은 탄약이 떨어져 가는 월남 정부에 대해서 3억 달러의 긴급지원을 하려고 美 의회에 승인을 요청했다. 공화당과 민주당은 움직이지 않았다. 포드 대통령이 공산주의자들에게 너무 부드럽게 대한다고 비난해 오던 反共의 보루 헨리 잭슨 상원의원도 『인도지나의 문제는 3억 달러의 무기구입비로 해결되지 않는다』고 거부했다.
 
  티우 대통령은 이때 전략적 부대 배치 전환을 단행한다. 중부고원 지대를 지키던 정예 공수부대들을 해안의 다낭기지 부근으로 옮기도록 한 것이다. 방어력을 집중시키기 위해서 戰線을 축소하기 위한 전략적 후퇴였다. 이것이 월맹 지휘부에 나쁜 신호를 보냈다. 하노이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다음해로 예정했던 사이공 진격을 이 기회에 해치우기로 결단했다. 참모총장 반 틴 둥이 월남으로 내려와 월맹군 사령관을 맡았다.
 
 
  1514973138356015.gif전략적 후퇴가 붕괴로
 
  이 침략행위를 덮기 위해서 월맹 정부는 전형적인 위장 평화공세에 나선다. 그들은 정치협상을 제안한 것이다. 그 내용은 「미국의 개입을 중단시키고 파리협정을 실천하기 위한 새 정부를 사이공에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키신저는 그제야 이 제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3년 전 그는 파리협상의 상대자인 레둑토가 표정도 바꾸지 않고 「티우 암살」을 제안했던 것을 기억했다고 한다. 정규군을 동원하여 월남을 침공함으로써 파리휴전협정을 휴지 조각으로 만든 월맹이 「휴전협정을 실천할 수 있도록 티우 정부를 교체하자」는 취지의 제안을 해도 미국의 언론은 「온건한 제안」이라고 환영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1975년 3월6일자 사설에서 포드 대통령이 신청한 3억 달러의 긴급지원에 반대했을 뿐 아니라 이미 통과된 對월남 원조액의 삭감을 주장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구엔 반 티우 대통령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지 못하도록, 또 그가 타협하고 양보하지 않을 수 없도록 군사지원을 줄여야 한다>
 
  미국의 敵이자 협정 위반자인 월맹에는 침묵하고 우방이자 피해자인 월남에 대해서는 잔인하게 대한 것이 당시 언론과 의회였다. 대중정치시스템에선 여론이 「反戰평화」로 돌아 버리니 언론과 의회도 휩쓸려 들고 행정부도 발이 묶여 버린 것이다. 월맹은 이때 미국 내의 언론과 反戰단체, 그리고 의회를 자신들의 편으로 조종하고 있었던 셈이다. 월맹은 월남 내에서는 월맹정규군과 베트콩, 그리고 순진한 민주투사들을 조종하고 있었다. 티우와 포드 대통령은 이런 월맹 전략에 의해 여론과 언론과 의회에서 정치적으로 고립되었다.
 
  월맹을 북한의 金正日 정권, 월남의 티우 정권을 한국의 보수세력, 그리고 당시 反戰무드에 조종당하던 미국의 언론과 의회를 지금 反美·親北 바람에 나부끼는 한국의 언론과 국회로 놓고 비교하면 여러 시나리오를 쓸 수 있을 것이다.
 
  1975년 3월 월맹정규군이 탱크와 대포를 앞세워 월남의 중앙고원을 공격하자 티우 월남 대통령은 측근인 트란 반 람을 워싱턴으로 보내 긴급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답이라도 하듯이 민주당 상원의원총회는 3월12일 월남에 대한 어떤 추가지원도 반대한다는 결의를 했다. 실망한 티우 대통령은 중앙고원 방어부대와 공수부대를 후방으로 철수하여 다낭 근방에 포진하도록 지시했다.
 
  이 철수 부대가 쓸 수 있는 도로는 루트 7B 하나뿐이었다. 도로의 정비상태가 매우 불량했다. 이 도로로 약 6만의 군인들과 약 40만 명의 민간인들이 쏟아져 들어와 거대한 人波의 강을 만들었다. 당시 월남군인 가족들은 부대 근방에서 숙식하고 있었다. 이 군인가족들도 군인들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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