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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저 멀리에.... (20)

fabiano 0 1132  

* * 슬픈 지난날들(9) * *

본채를 뜯어간 넓다란 자리엔 덩그러니 폐허처럼  빈 집터만 남았고 아랫 채 디딜방앗간으로 살림이랄 것도 없는 것들을 대충 정리해 옮기고 이불보퉁이와 간단한 옷 괘짝만 좁은 단칸방으로 옮겨 놓았다.
 
꼬맹이인 나도 이 황당한 상황을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었는데  엄마와 할머니는 찢어지는 심정을 억누르시며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크셨으며 무슨 말로 어찌 그 표현을 다 할 수 있었으리오...
 
며칠 후, 아래채 단칸방으로 쫓겨난 충격과  슬픔을 억제하고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또다시 한 번 어이없고  황당한 모습을 또 보아야 했다.
 
누군가 허물어진 집터를 파헤쳐 평평하게 만들어 이미 밭이랑을 만들어 두었고 경계를 따라  서 있는 감나무 세 그루와 사립문 옆에 높다랗게 자란 포플러나무 윗둥 가지를 싹둑 잘라놓은 토막들이 아무렇게나 팽개쳐 진채,  나동그라진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또, 저만큼 우리 집터와 붙어있는 천수답 도랑둑에 고목처럼 자란 고염나무가지도  마치 가로수처럼 가지치기를 해 잔가지가 모두 잘린 채, 덩그러니 흉물스런 모습을 하고 서 있는 게 아닌가?
 
잔가지를 모두 잘린 채 시체처럼 몸통만 빈 집터에 덩그러니 누워있는 감나무를 애처롭게 초점 잃은 눈으로 쳐다보며 나는 회상에 잠겼다.

그 감나무는 나의 유일한 놀이 터였다.
시원한 그늘에다 돗자리를 펴고 앉아 놀기도 하고 늘어진 가지에 새끼줄로 그네를 만들어 두고  가끔씩 놀러오는 친구들과 아기를 돌보러 온 예쁘장한 고종 사촌 동생과 재미있게 타고 놀기도 했다.
 
하도 나무를 오르내려 나무껍질이 반질반질 윤기가 날 정도였고  감나무 꼭대기의 잔 가지까지 올라가 홍시도 따먹고 가지사이에 걸터앉아 책을 보며놀기도 했던 여러 가지 즐거운 추억과 정이 듬뿍 든 그런 나무였다.
 
된서리 맞은 감으로 곶감을 만들면 쉽게 물러서 곶감 만들기가 힘이 드신다며 초가을 감잎이 단풍이 시작되고 무서리가 내리면 곶감용으로 쓸 감을 따로 땄다.
 
홍시를 만들 감은 된 서리를 몇 번 맞힌 뒤에 감을 따 항아리에  땡감 한 채 넣고 짚 한 채  깔기를 반복해두고는 한겨울 귀한 손님이 오시거나  어떤 특별한 날이 되면 잘 익은 홍시를 별미로 꺼내먹곤 했다.
 
고염도 된서리를 몇 번 맞히고 나무밑에 멍석을 펴고 고염을 털어 흙이 묻지 않도록 잘 손질해서 항아리에 담아두면 푹 익어서 달콤한 물이 고이고 당도가 높아 많이 먹으면 속이 다려 고생을 할 정도로 한겨울의 맛이 좋은 별미였다.

엄마에게 왜, 이 지경으로까지 참담한 상황이 됐는지를 물어보니 한동안 말씀을 하지 않으시다가 나의 거듭된 재촉을 받고 모든 것을 체념 하신 듯 말씀해 주셨다.
 
“너도 이젠 집안일을 대충이라도 알 것은 알아야 되겠구나...”
하시며 지금살고 있던 집터와 그리고 우리 집 터와 물려있는 밭과 천수답이 모두 남의 소유가 됐고 이제부터 손바닥만하게 줄어버린 이 집터도 텃도지를 내고 살아야 한다고 하셨다.
 
그뿐만이 아니란다. 우리소유로 남은 땅은 전댕이를 지나 이사 올 때 큰고모 댁으로부터 샀다는 척박한 400평짜리 황토밭만 남았다고 했다.
 
갑자기 몰락한 우리 집의 처지를 불쌍하게 생각했든지 셋째고모네 소유로 제방을 쌓기 전에 개간을 했던  200여평의 살미기 강변의 모래땅은 그대로 사용해도 좋다고 셋째 고모부님이 허락하셨다 했다.
 
꼬맹이인 내가 생각해도 현실이 너무 비참하고 암담했다. 이제부터 우리 식구는 어떻게 살아야 된단 말인가?
 
며칠 후, 이웃에 사는 친구아버님이 오셔서 전에 살던 집터를 1/3정도로 줄여서 나지막하게 토담을 새로 쌓고 텅 빈 꿀꿀이 집을 옮기고  재래식 화장실도 다시 지었다.

그 당시 졸지에  단칸방으로 쫓겨나듯 옮겨 앉은 우리 집 형편은 말이 아니였다.
 
할머니는 먼저 하늘나라로 보낸 두 아들을 가슴에 한으로 묻고 설음에 찌든 세월을 보내시다  막내 아들만이라도 전쟁 통에 죽지 않고 무사히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하신 것을 조상님들과  천지신명님의 보살핌이 있으셨다며 무척 기뻐하시고 고마워하셨다.

모든 시름 다 털고 결혼까지 시켜서 행복의 문을 막 들어서나 했었는데  어떤 잘못으로 그  아들이 가산을 모두 탕진해 집안을 몰락시키고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이 훌쩍 떠나 버렸으니...
그런 아들이 다시 돌아오길 무작정 기다리시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할머니가 되어버렸다.
 
우리 엄마도 졸지에 할머니와 별반 다름없는 가련한 처지가 되었다.
남편을 잃은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집안 살림까지 거덜이나  손바닥만한 척박한 밭떼기 하나에다  철없는 꼬맹이와 연로한 시어머니를 부양해야하는 가장(家長)의 무거운 책무(責務)까지 떠안은 불쌍한 여인이 된 것이다.

이런 집안 사정을 알게 된 꼬맹이는 일찍 철이 들게 되었나 보다. 
아무리 배가고프고 먹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이 많이 있어도 엄마에게 절대로 무얼 사달라고 조르거나  무엇이 하고 싶다고 말 해본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어지간한일은 스스로 해결했고 이루지 못 할 일은 아예 포기 하는 쪽으로 성격이 변했다.
 심지어는 공부하는데 꼭 필요한 참고서나 학습장이 갖고 싶어도 엄마가 힘들어 하실까봐 사달라고 말하지 않아 우리 집엔 책이라고는 교과서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 교과서조차도 세살 위의 고종형이 쓰던 책을 물려받은 것이 대부분이고 교과서가 새로 개편이 되어 내용이 달라져야 비로소 개편된 교과서만 새 것으로 살 수 있었다. 그것도 음악 미술 실과같은 교과서는 그나마도 살수 없었고...

그 당시 친구들 집에 놀러가면 참고서와 여러가지 책을  많이 가진 친구를 제일 부러워했다.
그 당시 내 소원이 이담에 커서 돈 많이 벌면 꼭 커다란 책방을 내서 실컷 책을 읽어보는 것이 소원이었을 정도였다.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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