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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월간중앙 3월호] 단독공개, 대통령의 흑백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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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대통령이 동해안 태풍 피해 현장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에 당시 처음 개발되던 대관령 목장에서 즉석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있다. [김종신 전 청와대 비서관 제공]


[단독공개 사진 보기]


정희 논란이 한창이다. 최근 개봉된 10·26 사건을 다룬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이 이 논란에 불을 붙였다. <월간중앙>은 이 시점에 박정희 전 대통령의 면모를 잘 아는 김종신 전 청와대비서관이 소장한 박 대통령의 사진 일부를 공개한다.

인간은 누구나 양면성이 있다. 따라서 한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여러 각도에서의 증언과 조망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김종신(75) 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생전에 가장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이다. 덕분에 그는 “반드시 거쳐야 할 산맥”으로 여기며 박정희 전기를 7권이나 썼다. 재임 시절 그는 박 대통령을 독대해 어린 날부터 만주군과 한국군 시절, 대통령 시절 등 일대기를 구술받았다.

김씨는 1960년대 초기에는 청와대를 출입하는 기자로서, 중반 이후에는 청와대 비서관으로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박정희를 지켜보며 이들 전기를 완성했다. 때문에 그는 박 대통령의 식습관부터 술자리 버릇, 걸음새, 말투, 성격, 잘 쓰는 동작 등 세세한 부분까지 기억하고 있다.

그런 만큼 김종신씨가 박 대통령의 사진 수백 장을 보관하고 있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기자는 최근 두 번에 걸쳐 그의 부산 자택을 방문해 소장 사실을 확인했다. 인터뷰나 정식 취재는 아니었다. 취재 목적이라면 만나지 않겠다는 것이 그의 완강한 고집이었기 때문이다.

그냥 저녁식사를 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생전 모습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를 갖기로 했다. 그러나 입담이 왕성한 김씨는 한번 입을 열자 말문이 쉬 닫히지 않았다. 저녁 7시 무렵 저녁식사와 함께 시작된 이야기는 새벽 1시를 넘겨서야 끝날 정도였다. 이 두 번에 걸친 1박2일의 방문에서 그는 박 대통령의 미공개 사진을 일부 공개하겠다고 운을 뗐다. 딱 이번뿐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그러나 최근 개봉된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이 돌발변수가 됐다. 손자와 함께 이 영화를 봤다는 김씨는 갑자기 박 대통령과 관련된 인터뷰와 사진 공개를 거부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현재 시점은 박정희를 깎아내리고 공격하는 것이 대세다. 박 대통령의 과실은 인정한다. 나도 장기집권으로 가는 박정희를 말리지 못한 채 사표를 던지고 청와대를 떠난 사람이다. 그러나 사실을 왜곡하면서까지 박정희를 헐뜯는 것은 참을 수 없다.” 그의 울분은 좀처럼 가라앉을 기세가 아니었다.

“이 시점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제대로 받아들일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 시절 상황에 대한 자료와 사실을 전해도 왜곡될 것이 뻔하다. 이 열병과 같은 시기가 지나면 박정희는 재평가받을 것이다. 시간이 더 흐르면 박 대통령을 균형 잡힌 시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지금 내가 인터뷰를 할 수 없는 이유다.”

집요하게 설득해도 막무가내였다. 일생의 존경 대상이던 존재가 일순간 우스갯거리로 전락해버린 데 대한 분노처럼 여겨졌다. 설 무렵, 인사차 다시 전화를 했다. 김씨는 사진 일부 공개는 약속이니 내놓겠지만, 인터뷰는 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계속 설득하고 질문을 계속하자 대답을 피하지는 않았다.

서울로 올라와 전화로 인터뷰 요청을 계속했다. 화가 조금 가라앉은 듯했지만, 그렇다고 인터뷰 거부 의사를 번복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음 내용은 전화로 이루어진 대화 내용과 두 차례에 걸친 가정방문 당시 일부 메모했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은 너무 비겁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이 왜 감정을 자극했습니까?

“택(턱)도 없는 내용입디다. 제가 박 대통령을 유별나게 잘 알고 있습니다. 비서관을 떠나 개인적으로 그 양반과 친했습니다. 그전에 박 대통령을 소재로 한 <효자동 이발사>도 봤습니다. 그 이발사도 나하고 친했습니다. 그는 외국에도, 지방순시 때도 항상 ‘박 대통령’을 따라다녔습니다. 대통령이 주무시고 나오면 이 이발사가 무조건 머리를 만집니다. 그런데 무슨 영화를 그렇게 만드는 겁니까?”

대화는 <그때 그 사람들>에 관해서는 시작도 못한 채 <효자동 이발사>로 빠져버렸다. 오히려 다행이다 싶었는데, 그는 말을 이어갔다.

“항상 수행하는데 영화처럼 아들이 그렇게 되었다면 무슨 말을 못했겠습니까? 정보부에서 초등학교 다니는 어린아들에게 전기고문을 했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정보부를 욕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런 턱도 없는 소리가 어디 있습니까? 박 대통령을 완전히 우스갯거리로 만든다는 의도를 느꼈습니다.”

여자 스캔들 들으면 "사내자식이 치사하게 그런것에 신경쓰냐"

-<그때 그 사람들>도 비슷한 의도를 드러낸 것이라고 보십니까?

“일본 사무라이 말에 ‘헤스노시다와 진카쿠나이(배꼽 밑 일에는 인격이 없다)’라는 것이 있습니다. 박 대통령은 일본 군대에서 교육받은 사람입니다. 사실 박 대통령도 여자관계를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어요. 여자 스캔들을 들으면 오히려 말하는 이에게 사내자식이 치사하게 그런 것에 신경 쓰냐며 무시했어요. 그래도 이 영화는 심했어요. 풀장에서 여자들이 젖가슴을 내놓고 수영하는 장면…. 무슨 김정일의 기쁨조를 연상하게 하는데,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엔카·일본말 대화·여자 주무르기…영화내용 가당찮아

-영화라는 장르가 갖는 허구성을 전제하고 이해할 수는 없습니까?

“그러면 아예 그렇게 가야죠. 실명은 아니지만 누구인지 다 알도록 돼 있는 드라마를 만들어 놓고 ‘영화이니…’ 운운하는 것은 변명에 불과합니다. 박 대통령은 인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대통령이 이야기하면서 여자들을 주무르고, 정보부장이 누워서 맞담배를 피우는 장면이 나오는데, 한심한 풍자예요. 박 대통령의 청와대를 형편없는 무리로 왜곡하는 것이지요. 심수봉이 일본 엔카를 계속하던데 가당치도 않은 얘기입니다. 비서실장과 정보부장이 일본군 출신인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말로 대화하지는 않았습니다. 대통령은 일본말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박 대통령은 일본 사람들을 '왜놈'이라고 불렀어요. 그것 말고 다른 내용은 틀림없는 것 같습디다.”

"왜놈들 하도 심하게 굴어 긴 칼 차러 만주군관학교 갔지"

-말이 나온 김에 여쭙겠습니다. 일제 강점기 박 대통령은 왜 소학교 교사를 하다 만주군관학교로 갔답니까? 이게 현재 친일 행적의 쟁점입니다.

“당시 독립운동 하려고 갔다는 둥 여러 설이 있어 내가 직접 물어봤어요. 박 대통령은 ‘왜놈들이 하도 심하게 굴어 내가 긴 칼 차러 갔지’하고 말했습니다. 그게 솔직한 답변이었습니다. 독립운동 하러 간 것이 아니라 출세해 일본인의 괴롭힘에서 벗어나고 싶었다는 뜻입니다. 중국 장제스(蔣介石)도 일본 육사 나오지 않았습니까? 독립군 지청천 장군도 일본 육사 출신입니다. 당시 일본 육사는 도쿄(東京)제대보다 교수진이 우수한 최고 교육기관이었습니다. 일본 육사 나왔다고 다 친일파로 몰 수는 없습니다.”

-박지만 씨가 이 영화를 상대로 소송을 했는데요.

“아들로서는 당연합니다. 부모를 인격적으로 저급하게 묘사했는데 자식으로서 나서야 하지 않습니까? 차라리 등장인물을 박 대통령이라고, 정보부의 아무개 실장이라고 노골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면서 정치·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디큐멘터리를 만들어야죠! 그 영화 참 비겁합디다. 사람들 관심 끌어 흥행하려는….”

-TV드라마 <영웅시대>도 즐겨 보신다지요?

“그 드라마도 박 대통령을 잘 몰라요. 박 대통령은 공적인 자리에서는 하대(下待)를 하지 않았습니다. ‘임자’라고 부르거나 높임말을 하지. 욕도 안 해요. 또 나(나이) 많은 사람 보고 ‘당신’이라고 부르지도 않아요. 드라마에서는 차지철이 대통령 옆에서 살다시피 하는데, 그것도 틀렸어요. 어쩌다 한번 대통령 집무실에 올라오는 수준이었어요.”

광화문 시멘트 복원은 나무가 귀해 아낀다고 그런것

-박 대통령이 쓴 광화문 현판을 교체하는 것은 어떻게 보십니까?

“이탈리아 로마에 가면 시저가 브루투스의 칼을 맞은 계단이 2,000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있어요. 역사는 좋든 나쁘든 그냥 보존하는 것이 최고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글을 썼다면, 그 옆에 박정희가 현판 글씨를 썼다고 설명해 놓으면 되지 떼어내는 게 능사입니까? 박 대통령은 문화유산에 대해 관심이 많은 어른이었어요. 강릉 오죽헌이니 광화문이니 현충사니 전국 각지의 문화유산을 복원했는데, 시멘트를 쓴 것은 안목이 없어서가 아니고 당시 산림녹화사업을 하느라 나무가 귀해서 나무 아낀다고 시멘트로 한 거예요. 그분은 또 이순신 장군을 유년시절부터 존경해 관련 서적을 많이 읽었습니다. 내가 왜 우리 할아버지 김유신 장군은 좋아하지 않느냐고 물으니 그냥 웃더군요. 노산 이은상 씨가 이순신 장군 전문가여서 박 대통령은 그분을 통해 이순신 복원사업을 많이 했습니다.”

인권탄압은 암소길러 송아지 낳을 때까지 기다리자던 것

-박 대통령이 인권을 탄압한 것은 사실 아닙니까?

“박정희는 사람을 아끼는 사람입니다. 5·16 당시에도 사람 하나 죽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유신 시절 박정희의 생각은 더 잘살 때까지 조금 참자는 것이었습니다. 박 대통령 말을 빌리면 당시 민주인사들은 암소를 자꾸 잡아먹자고 하는데(재벌을 쪼개 집중된 부를 노동자에게도 나누라고 주장하는데), 박 대통령 생각은 암소를 더 길러 송아지까지 낳아 크거든 잡아먹자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배고픔에서 벗어나야 민주주의가 가능하지 않으냐는 것이지요. 그 시절 노동자를 탄압했지요. 김형욱 같은 정보부가 과잉충성을 벌이느라 그런 측면도 많아요. 물론 이런 일들은 다 박 대통령 책임입니다. 이런 일을 내가 뭐라고 말하지는 못하겠습니다.”

-박정희의 장기집권은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사실 박 대통령은 장기집권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굳이 박 대통령이 한 말을 옮겨 변명하자면 선거를 하려면 자금이 필요하고, 돈을 구하려면 나쁜 짓을 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기업들에서 부정한 자금을 걷어야 하는데, 이러면 부정이 싹틉니다. 위에서 부정을 하면 아래까지 퍼집니다. 박대통령은 이런 것을 아는 분입니다.”

-그렇다고 선거를 폐기한 것은 비민주적 처사 아닙니까?

“어쨌든 그분은 당분간 선거를 하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모든 부정 비리의 온상으로 봤으니 그런 결정을 내린 거죠. 대신 그에게는 경제를 건설해야 한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신이 나왔습니다. 1970년대 초반 박정희는 김종필씨에게 권력을 넘기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잘 압니다. 육 여사가 사망하고 남북관계도 있고, 또 김종필씨 개인사정도 있고 해서 무산되었습니다. 이후 1970년대 후반에는 최규하씨에게 권력을 넘겨주려고 했습니다.”

청와대 출입기자들마저 박정희를 '빨갱이'라고 칭했다

-박정희 관련 책을 여러 권 집필하셨는데, 계기가 있습니까?

“1960년대 초반 청와대 출입기자로 기자실에 들어가니 기자들이 박정희는 빨갱이라고 하더군요. 박정희를 소련식으로 ‘박코프’, 유달영 씨는 ‘유달로프’, 유진오 씨는 ‘유진스키’라고 불렀어요. 나는 박 대통령을 잘 알았기 때문에 이런 말이 마땅찮아 책을 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내가 신문기자로서 박 대통령을 잘 아는 것이 큰 재산이었습니다. 그래서 박정희 본인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첫번째로 쓴 책이 <0시의 횃불>입니다. 이후 후속편을 계속 썼는데, 한꺼번에 시간을 빼앗기가 미안해 서면으로 궁금한 것을 질문하기도 했습니다. 하도 자주 질문하니, 대통령이 나중에는 시간을 정하지 말고 아무때고 사람이 없을 때 집무실로 찾아와 물으라고 하더군요. 이렇게 하면서 그분의 생에 대해서는 내가 누구보다 많이 알게 된 것입니다.”

-박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언제였습니까?

“박정희 소장이 1958년 부산에 있는 군수사령관으로 부임했을 때였습니다. 당시 나는 <부산일보>에서 군을 출입하고 있었습니다. 처음 보니 미남자는 아니지만 다부지게 생겼더군요. 대단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신문기자들은 버르장머리가 없었어요. 점퍼때기를 걸치고 장군한테도 거들먹거리는 것이 기자 ‘곤조(근성)’였는데, 나는 박 장군에게만은 예의바르게 대했지요. 박 장군이 그때 나를 잘 보았고 박 장군도 예의바른 사람이어서 내 마음에도 쏙 들더군요.”

-기자로서는 행운이었다고 여겨집니다. 최고 통치자와 친분을 맺고 신뢰한다는 것 말입니다.

“행운인지 불행인지…. 이후 박정희는 나에게 터놓고 군대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내가 육군 소대장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터여서 서로 통하는 게 있었지요. 3·15 부정선거, 4·19혁명 무렵에도 박정희와 나는 줄곧 만났어요. 당시 박정희 장군은 군의 하극상 등 한국군 내부에 대한 불만 등을 거리낌없이 나에게 털어놓았어요. 지나고 보니 그런 불만들이 5·16의 시초가 된 것 같아요.”

-박대통령과 헤어진 것은 어떤 일 때문이었습니까?

“나는 공무원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박 대통령을 만나면 거침없이 말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1970년대 중반 청와대 암행 사정반의 활동에 문제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직언으로 사정비서관이 크게 혼나고 나는 그 고변자로 찍혔지요. 또 여러 가지 일로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밉보이는 일을 많이 했던 터여서 각하에게 사표를 던지고 청와대를 나와버렸어요.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박정희가 부정축재했다면 그 무덤에 침을 뱉겠다

-박 대통령을 잘 모르는 젊은 세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당시 청와대 직원들 사이에는 결의가 있었어요. 후손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했느냐고 물으면 박정희 대통령을 모시고 조국 근대화를 위해 일하고 일하고 또 일했다고 말할 수 있도록 합시다. 박 대통령은 간단한 사람이었어요. 복잡한 문제도 어느것이 나라를 위한 것이냐고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고 항상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을 이어갔다.

“나도 박 대통령의 과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깔아뭉개서는 안 됩니다. 박 대통령이 일을 많이 했다는 것은 인정해야지. 박 대통령의 위대한 점은 결코 부패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부정축재하지 않았어요. 박대통령이 후임 전두환·노태우처럼 뒷돈을 챙겼다면 나는 그 무덤에 침을 뱉을 것입니다. 내가 이토록 평생 존경하지 않을 것입니다.”


과거사 규명 문제로 박정희 전 대통령은 당분간 강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우리 주변을 맴돌 것이다. ‘죽은 박정희가 산 노무현을 이긴다’ 운운하는 말도 끊임없이 나돌 것이다.

그리고 그 화살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지금 정치무대에 있는 딸 박근혜 한나라당 총재를 향하게 될 것이다. 그 딸이 화살에 나가떨어질지, 아니면 더 강한 철의 여인으로 회생할지는 모르지만 간단없는 이슈로 우리의 이목을 집중시킬 것이다.

박정희 평가는 극과 극이다. 어느 한 축만 붙들고 그를 읽고 평한다면 오류를 피할 길이 없다. 김종신 전 비서관이 말하는 요지도 바로 그것. 그는 인터뷰를 맺으면서 “내 평생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을 하나 꼽으라면 단연코 박정희 한 사람뿐입니다. 내 눈이 비뚤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내가 살아온 인생을 걸고 말합니다”라고 힘을 주었다.

박정희를 상품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함께 웃고 울었던 현대사의 가장 치열했던 부분은 비극이나 희극의 대상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를 들여다보는 거울로 삼아야 함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이번 과거사 규명에서 박정희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의 뇌리에 날아와 박힐까?

월간중앙 최영재 기자


*사진 제공자 김종신(金鐘信)은...

1930년 경남 사천 출생
부산상업학교, 동아대 법학과 졸업
육군 소위로 한국전쟁 참전 뒤 대위로 제대
<부산일보> <한국문화방송> 기자
<부산일보> 편집부국장
청와대 사회·언론 담당 비서관
부산문화방송 사장
한국방송협회 부회장
한국방송윤리위원회 부회장 등 역임




2005.02.19 08:58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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