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祖國近代化와 경부고속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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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통령은 목표 지향적 정책선택과 강력한 추진력을 바탕으로 정책을 집행해 나갔다. 즉 그는 공업화를 통한 고도경제성장을 목표로 공업우선, 성장위주의 개발정책을 추구하였으며 이를 위해 외자도입과 수출주도정책을 펴 나갔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는 불굴의 투지와 불퇴전의 용기를 보여주어 사생일여의 무사적 사생관을 보여주는 추진력을 발휘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목표 지향적 정책 선택은 그의 우선 순위에 대한 투철한 감각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는 첫째가 경제, 그 다음은 자주국방(반공)이라는 슬로건을 주장했던 것이다. 때문에 그는 자립경제를 이룩하면 한국적 민주주의가 이룩된다는 신념을 가졌고, 이러한 정책이 60 . 70년대 한국의 근대화를 이끌게 된 것은 다름 아닌 그의 탁월한 리더십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그는 자기 희생을 통한 영도력을 발휘하였으며 우선순위를 정해 놓고 남이 뭐라 하든 옳다고 판단되면 밀어붙이는 추진력을 바탕으로 능력의 조직화를 꾀했던 것이다. 이러한 우선 순위에 대한 투철한 감각은 철저한 실용주의를 바탕으로 한 태도였으며 부국강병의 확립을 통해서만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존중의 길도 확립된다는 그의 확고한 의지의 표현이었다고 보여진다.

박정희 대통령은 현장지도 및 행정조직의 체계적 운용을 통해 ‘현장정치’를 하였다. 즉 그는 각종 국가정책들의 집행과정을 직접 관장함으로써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의 유기적 시스템을 운영해 나갔다. 또한 그는 정책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행정안정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일관성있는 정책을 집행함으로써 실용주의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즉 박정희 대통령은 전국의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며 확인행정을 통해 국가재건에 힘썼던 것이다. 그는 사무실에 앉아 보고를 받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국민속에 뛰어 들어 국민과 함께 호흡하면서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어루만지며 일하는 현장에서 국민들과 함께 어울리기를 좋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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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은 능력과 능률본위의 인사정책을 취하였다. 즉 충성심을 바탕으로 하는 인사정책이기는 하였지만 그는 당사자의 개인능력과 국정수행의 효율성을 바탕으로 인사정책을 펴 나갔다.

박정희 대통령은 행정가형 리더십이 발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박정희 대통령은 빈곤으로 부터의 해방과 공산침략으로부터의 방어라는 실질위주의 정책을 펴 나갓다. 또한 그의 정치행태는 혁신주도적인 성향을 띠었다고 할 수 있다. 즉 근대화와 공업화를 통해 한국의 경제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유교적 전통문화와 공업화를 적절히 융합하고 조화시킨 지도력이 돋보이는 변혁적인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박대통령은 그의 신념대로 조국근대화를 이룩하였으며, 미래정보사회를 대비하여 과학기술원의 설립 및 총무처내의 전산화 실시를 결정하는 등 일련의 조처를 통해 미래사회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정신문화의 창달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호국유산을 정비하였다.
또한 「우리도 하면 된다」,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자」는 비전을 제시하여, 국민적 에너지를 하나로 모아 통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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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은 한낱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는 대세 편승형의 지도자는 아니었다. 당시 야당들의 집요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과감하게 밀고 나가는 자신감은 각 사업의 성공적 추진 등을 가능하게 한 동인이었다.

따라서 박정희 대통령과 같은 강한 신념과 개성을 가진 지도자가 없었다면, 한국의 한강의 기적을 이룬 경제발전은 불가능 했을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대세편승형의 지도자가 아니라 대세주도형의 지도자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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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은 64년 12월 6일부터 15일까지 에르하르트 서독 수상과의 회담 때문에 서독을 공식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박대통령은 쭉 뻗은, 시속 160Km로 달리는 독일의 고속도로-아우토반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러한 박정희에게 에르하르트 수상은 분단국가일수록 경제개발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듣게 된다. 수상의 말에 귀를 귀울였던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에도 경제개발의 기초로서 고속도로건설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에 대한 구상을 시작했다.

독일에서 돌아온 박정희 대통령은 고속도로 건설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각 나라의 고속도로에 대한 기록도 검토하고, 전문가들로부터 보고서를 받는 등 열심이었다. 고속도로 공부에 박차를 가했다.

2년여 동안의 연구를 끝내고 박정희 대통령은 1967년 4월 29일 드디어 자신의 계획을 공표했다. 그의 이같은 발표는 당연히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살기도 힘든 형편에 고속도로라니... 하지만 패기만만한 40대의 젊은 대통령은 그의 의지를 꺾지 않았고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건설 계획 발표가 있은 다음 8개월 정도 흐른 후 비로소 착공됐다. 드디어 건설 계획 조사단이 1967년 12월 15일 발족함으로써 세계의 건설사에 또 하나의 신기원을 이룩하며 착공 2년 5개월만에 준공을 본 경부고속도로의 막이 올랐다.

하지만 시공 전부터 여러 가지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먼저 떠오른 것이 공사비였다. 그 당시 경제사정으로는 장기간의 공사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대통령은 '선 개통 후 보완'이라는 정책을 택하고 공사를 결정하게 되었다. 단기간의 공사를 계획으로 약 300억 정도의 예산을 세웠다.

그 다음 제기된 문제는 노선을 확정짓는 것이었다. 그들은 우선 정밀 답사를 필수로 공사를 시작했다. 그 외에 해당지역의 땅값, 예정노선의 전답 분포 상황, 사들여야 될 땅의 평수 등의 문제에도 신중을 기했다. 땅값의 폭등을 우려한 결과였다. 그래서 당시에는 땅값을 염려한 나머지, 일부러 그릇된 예상노선을 공식 발표하기도 했다.

건설 계획 수립 당시에는 서울-부산간의 주요 도시를 경유한다는 계획 아래 공사비, 통행료, 유지비를 절감할 수 있도록 하였고, 최종적인 노선 결정으로 서울-대전 구간은 1968년 1월에 확정되었다. 대구-부산 구간은 경주-언양 경유로 하느냐의 의견이 엇갈리다가 1968년 4월 25일에 현 노선으로 결정되었다.
1968년 2월 1일, 많은 우여곡절 끝에 경부고속도로를 위한 첫 삽질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대한 야당의 비난은 처음부터 끊이지 않았고, 드디어는 1968년 5월 2일 제65회 국회본회의 제13차 회의에서 비난의 발언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겉치레를 위한 고속도로 건설'이라는 것이었다. 이외에도 각계 각층으로부터 항의가 빗발쳤고, 그 와중에 외로운 공사는 계속되었다.

착공일은 구간별로 다르게 지정되었다. 4개구단으로 나누어 착공이 되었는데, 공사의 난이도에 따라 제1차 착공은 67년 11월부터 시작된 서울-수원-오산간이었고, 그해 4월 3일에는 오산-천안-대전 구간이, 68년 9월 11에는 대구-경주-부산간의 공사가 착공되었다. 그리고 가장 난공사구간을 많이 포함하는 대전-대구 구간은 69년 1월 4일에야 착공할 수 있었다.

68년 12월 30일, 공사를 착공한지 10개월만에 서울에서 수원-오산까지의 구간이 준공되었는데 이때부터 박정희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를 당초 예상한 시기보다 일찍 완공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각계 각층의 반응은 여전히 회의적이었고 비판적이었다. 그러한 반응을 뒤로하고 열의를 보인 끝에 드디어 경부고속도로의 완성을 보였다.

민족의 대동맥을 뚫는다는 일념으로 시작된 경부고속도로 건설 공사를 강행한지 2년 반만인, 애당초 세운 공사기간보다도 6개월 앞당겨 경부고속도로는 개통되었다. 서울-수원간은 68년 12월 21일에, 수원-오산간은 12월 30일에, 오산-천안간은 69년 9월 29일에, 그리고 12월 10일에 천안-대전간이 완공되었고, 대구-대전간은 그 뒤 20일 후인 12월 29일에야 개통되었다.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도로였다. 바로 1970년 7월 7일이었다. 혼자만의 외로운 결단과 이에 대한 집념, 그리고 목표의식이 투철한 사명감의 결과였다.

하지만 이러한 박정희 대통령의 결실에도 불구하고 진행 당시에는 1969년 9월에 3선 개헌안이 전격적으로 변칙 통과된데다 1971년의 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점이어서 건설자체가 정치 공사라고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박대통령은 그러한 반대여론을 무시하고 특유의 오기로 밀어붙여 마침내 완성한 것이다.

"경부고속도로는 조국 근대화의 길이며 국토통일의 길이다."

추풍령 고개에 세워진 준공기념탑에 박정희 대통령이 친필휘호를 쓴 것이다. 그만큼 박정희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에 애착을 두었고 큰 의의를 두었다.

애당초 3백억 원으로 추진되었던 총 공사비도 4백29억 원으로 초과되기도 했고, 이러한 재정적인 부족으로 인한 부실공사 때문에 훗날 이를 보수하기 위해 또다시 많은 돈이 투자되기도 했다.
하지만 나라의 산업화와 국민적 자신감을 고양하는데 기여가 대단히 컸고, 1968년 개통된 경인고속도로에 이어 우리 나라에서는 두번째로 건설된 고속도로이며 전국을 일일생활권으로 묶은, 한반도의 대동맥이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또한 생활권의 일일화로 온 국민의 의식수준도 크게 향상되었고 레저생활의 범위도 넓어졌다. 또한 부수적으로 자동차 산업이 급속도로 발달하여 해마다 수출의 양이 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428Km의 경부고속도로는 외국의 도움없이 순수노력으로 이룩했다는 사실에 민족적인 긍지의 원천이며 자랑거리가 되기도 하는 현존하는 역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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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고속도로에 대한 박대통령의 집념은 조국근대화와 맞물려 직접 챙기고 공사를 독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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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통령이 직접 스케치한 고속도로 구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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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의 도로는 비포장 도로여서 자욱한 먼지로 범벅이 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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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8.12.    천안-신사리간  경부고속도로 건설 현장.      천안삼거리 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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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삼거리 부근.   196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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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단 시일내에 공사를 완공하기 위하여 軍 건설 공병단의 중장비도 동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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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통령과 현대건설의 정주영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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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7.7. 경부고속도로 완공 테이프를 자르는 박대통령 내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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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의 고속도로 인터체인지.



경부고속도로 준공식<서울-부산>  대한 뉴우스.

경부고속도로-위성영상으로 제작한 3D 동영상입니다.-Click하세요

1.경부고속도로 전면 개통 (1970년07월07일)
1968년 2월1일에 기공하여, 1970년 7월7일에 완공된 기점은 서울시 강남구 압구정동, 종점은 부산시 동래구 구서동이다. 서울 - 수원 - 오산 - 천안 - 대전 - 영동 - 황간 - 김천 - 구미 - 왜관 - 대구 - 영천 - 경주 - 언양 - 양산 - 부산 등 주요 지역을 연결, 전국을 일일생활권으로 묶고 있다. 총건설비로 4백21억1백만원이 소요됐다. 주요 사업량은 토공량(土工量) 약 6천만m3, 교량 325개소(총연장 18.5km), 터널6개소(총연장 4.1km) 등이며 도로건설에 동원된 연인원은 약 9백만명에 달한다. 서울~부산간 전 노선의 교차시설은 모두 입체교차로로 되어 있고, 이를 통해서만 출입이 가능하도록 되어있다. 건설 당시에는 19개의 교차로가 설치되었으나, 개통 이후에 28개소로 확충되었다.


2.경부고속도로건설
고속도로 건설계획은 1967년 4월 박대통령이 제6대 대통령 선거공약으로 그 계획을 공표하고 나서부터였다.그 당시 우리나라 실정으로 고속도로건설이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형편이었다. 국내는 물론 국외에서도 부정 또는 회의적인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특히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까지의 우리나라 교통문제를 조사한 IBRD 조사단도 교통 및 수송난을 고속도로망으로 해결해야 된다는 건의는 물론 방향조차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1967년 11월 7일 건설부장관에게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지시한 후 본인 스스로가 진두지휘하기 시작했다. 국토개발계획을 비롯해 각 노선과 단면도의 비교검토 및 건설비 산출, 용지매수에 따르는 자료 등을 직접 지휘하였다.
용지매입을 위해 박 대통령은 혼자서 극비작전을 수행했다. 포병장교 출신인 박 대통령은 지도를 직접 읽으며 노선 2__3개를 구상했다. 박 대통령은 1차로 기공할 서울__수원간 후보노선을 그려본 뒤 극비리에 시중은행장 2명을 불러 용지의 시가감정을 부탁했다.

가장 큰 문제점은 공사비였고 박대통령이 노심초사한 문제도 바로 그것이다. 박대통령은 ‘국가기간고속도로건설계획조사단’을 1967년 12월 15일 발족시키고 관련자료 검토와 분석을 거쳐 3백억원 선이면 무리가 따르더라도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박대통령은 건설비를 산출하는데 있어 건설부와 서울시, 군공병, 그리고 H건설회사 등에 각기 소요 건설비를 예상해 보도록 했던 것인데 서울∼부산간을 450㎞로 예상, 24m의 고속도로를 건설한다는 전제 아래 산출된 건설비 소요액은 건설부 기술진이 600억원, 서울시가 180억원, 민간건설회사가 280억원이 들 것으로 내놓았다. 이에 따라 당초 공사착공시는 정부는 민간건설업자의 산출액이 가장 적절하리라는 판단 아래 280억원에 20억을 더한 300억원을 건설비로 잡고 여기에 부대비 등이 1할 정도는 들어갈 것으로 예상, 결국 경부고속도로의 건설비는 330억원으로 책정된 것 같다.

요지는 부족한 예산을 어떻게 적절히 쓰느냐였다. 박 대통령은 4백 28Km를 3백억원에 건설하겠다는 각오였다. 선진국에 비하면 기적같은 일이다.

1968년 2월 1일 서울 서초 원지동에서 서울-부산고속도로 건설공사의 첫 발파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이어 4월 3일 오산-대전간 공구(1백 6.6㎞), 9월 11일에는 대구~부산간(1백23㎞), 마지막 난공사 공구인 대전~대구간(1백 52㎞)은 1969년 1월 13일에 착공되었다. 재원확보 다음의 난제는 건설장비의 도입 문제였다. 정부는 비상조치로서 미ㆍ영ㆍ불ㆍ스웨덴 등의 유명업체와 협의하여 건설회사부담의 상업차관으로 도입하였다.

가장 난공사였던 대전~대구간은 전 노선의 약 3분의 1인 1백 52㎞이지만 토목공사는 전체의 약 47%, 절토량은 약 50%, 장대교는 17개소로 60%, 그리고 터널은 전체의 90%가 이 구간에 몰려있었으니 얼마나 많은 난관을 겪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당재터널 공사가 가장 난공사로서 13회에 걸친 낙반 사고와 많은 인명피해를 내면서 공기에 차질을 빚었었다.

서울~부산 천리간에 거창한 공사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 박대통령은 헬리콥터- 지프를 타고 수없이 현장을 시찰했다 지금도 남아있는 박대통령 친필의 ‘고속도로 구상도’, ‘서울~부산선 축선 확정도’, ‘용지 매수계획에 관한 노트’, ‘감독반 구성에 관한 지시’, ‘공정계획표’, ‘연도 조경을 지시한 메모’ 등은 박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건설 시초부터 완성까지 시종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가를 알게 해 준다. 착공한지 2년 5개월만에 당초 3백 30억원으로 예상했던 공사비는 설계변경과 물가상승 등으로 4백 29억원, 공사에 동원된 연인원 약 9백만명 및 장비 1백 65만대가 투입된 총 연장 4백 28㎞의 단군이래 최대토목공사인 서울~부산간 고속도로가 1970년 7월 7일 드디어 개통되었다.


70년대 우리경제가 눈부신 발전을 하는데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은 견인차 역할을 했다.70년 80억달러에 불과하던 국내 총생산은 99년 4,067억달러에 달했으며 연간 2조9,000억원의 물류비용 절감효과를가져왔다.경부고속도로 개통은 또 자동차시대를 개막,1일 생활권시대를 실현시켰으며 지역개발과 경제개발의 촉진제가 됐다.한편으론 대도시 집중을 가시화시키고 차량의 기하급수적 증가를 가져오기도 했다. 경부고속도로는 교통ㆍ경제ㆍ사회ㆍ문화ㆍ군사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새로운 일대도약의 전기를 마련했고 전국을 하루생활권으로 묶음으로써 국토 및 국민생활의 균형적 발전을 이룩했다고 볼수있다

11 Comments
은하수 2005.11.01 09:48  
좋은자료 많이 담아두셨네요^^
fabiano 2005.11.01 10:14  
자료 수집하느라 많은 시간이 소요되네요. 이 게시물에 나오는 중장비는 제가 그때 직접 조종한 Scraper라는 장비입니다.
존경 2006.06.06 10:12  
박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는군요.
fabiano 2006.06.06 15:32  
그분은 나라를 잘살게 하려는 욕심이 앞섰던 것으로 개인의 사리사욕은 전혀 없었던 분으로 평가합니다.
sixtail 2009.10.09 00:54  
정말 좋은 자료들 많이 수집하셨네요~어릴적 여동생이 7살때 우리나라 대통령이 누군지 묻더군요~ 박정희 대통령이라고 하자 "그럼 부산의 대통령은 누구고 서울의 대통령은 누구냐"고 묻던기억이~ㅎㅎ그런데 2년후에 막내동생이 7살이 되자 똑같은 질문을 제게 했답니다."큰누나야~ 우리나라 대통령은 누군데?" "응? 박정희 대통령~""그라믄 부산 대통령은 누군데?"하던기억이 ㅎㅎㅎㅎ그래서 전 박정희 대통령~하면 어린시절 너무나 귀여웠던 제 동생들이 생각나곤 합니다.아침마다 들려오던 새마을 운동 노래소리도 들리는것 같구요~
fabiano 2009.10.09 04:55  
초대 대통령부터 현재까지 역대 대통령과 함께 살아 온 세월동안  박대통령이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그렇게도 지지리도 못살았던 그 세월을 살아 왔고 직접 경부고속도로건설에 참여했고 중동건설에도 첨여했는데 진정, 사심없이 국가와 민족을 위한 대통령이었습니다. 흠이 없지 않으나 진정, 이 나라를 오늘의 대한민국의 초석을 닦았던 분입니다. 재미있는 추억의 멘트가 좋습니다. 멋진 sixtail님의 긴 댓글에 감사를 드리고요.  =^.^=
샬닛 2012.02.27 14:47  
경부고속도로가 없었으면 지금의 대한민국이 없었을 지언데 김대중은 저당시 경부고속도로 반대한다고 도로에 드러눕고 깽판쳤다고 하네요. 명불허전 전라도 홍어답더군요.
fabiano 2012.02.28 09:27  
그것도 가면 쓰고 누워서... 왜, 당당하게 반대하지 않고? 자기가 한 말을 몇번이나 번복하고... 당시, 박대통령이 하는 일은 거의, 반대했습니다.
thhgrand 2015.04.07 17:13  
그 분의 확고한 신념과 열정으로 지금의 번영이 이루어 졌지요. 민주주의를 앞세워 그 분의 경제정책을 건건이 반대하던 소위 민주세력들의 방해를 굳은 신념으로 이겨낸 박 대통령께 경의를 드립니다. 1963년에 쓴 '국가와 혁명과 나'라는 저서에 그 분의 계획이 잘 나타나 있지요. 그 당시로서는 전부 꿈같은 계획이였으니 비웃었겠지요. 그러나 지금에 와서보면 대부분 이루어젔습니다. 이 책의 285쪽에'췌론할 바 없이 진정한 민주주의는 무엇보다도 먼저 건전한 경제적 토대 위에 확립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진정한 민주주의에의 길 또한 이러한 힘드는 역경을 거처야만 비로서 되어진다는 것도 사회진화법칙의 한 원리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분의 확고한 신념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지요. 이 분과 한 시대를 같이 했다는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fabiano 2015.04.08 09:56  
당시의 상황을 몸소 겪었던 우리 세대들은 박정희 대통령의 신념과 열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었고 국민들은 그분을 믿고 존경했습니다. 비록, 독재였지만 남북 분단상황과 부패한 정치풍토에서는 그 길이 최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어줍지 않은 민주주의라는 미명아래, 중구난방 국론분열을 획책하고 선동, 모략, 도발을 일삼는 친종북 떨거지들은 박정희대통령 시대엔 있을 수 없던 것으로 이것은 강력한 반공, 멸공정신의 신념으로 정치를 이끌어 간 그분의 국민과 조국을 위한 독재였습니다. 오늘날의 친종북 떼거리들이 활보하는 현실이 기가 막힙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박정희대통령의 리더쉽과 조국을 위한 선견지명이 못내 그립습니다.
fabiano 2015.04.08 10:04  
이 사진중, #10, 11, 12번 사진은 제가 당시, 천안-신사리간 경부고속도로 건설 공사에 참여한 것으로 토공장비인 스크레이퍼(621 모델)를 조종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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