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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1.31. 천안 열차충돌 참사

fabiano 4 2202  

아비규환의 그 현장

천안 열차충돌 참사, 눈물 없인 못 보게 한 일들

1월 31일 상오 11시 57분, 천안역 남쪽 861m 지점 일봉산 기슭에서 빚어진 참극은 한 말로 목불인견(目不忍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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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가난이여!』

사고직후 현장에 나와 시종 핏발선 눈을 부라리며 시체 인양작업을 지켜보고 있던 노신사 정길식(57·천안시 사직동)씨는 

북받치는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하늘도 무심하다』고 뇌까렸다.

 

이날 처절하게 숨져간 희생자들은 대부분 찢어질 듯 가난한 사람들. 2등간이 3등을 덮친 모습을『숫말이 암말을 덮쳤다』고들 비꼬았다.

『청룡호 기관사를 능지처참하라!』는 아우성이 곳곳에서 일기도 했으나 정길식씨의 분노의 향방은 달랐다.「

왜 사고가 나야했을까? 왜 불쌍한 사람만 죽었을까?」그래서 하늘을 원망했다.

 

「디젤」기관차가 석탄기관차를 내쫓고「칙칙폭」이 회상의 유물로 사라졌을 때, 모두들『이젠 사고없는 여행을 할 수 있게 됐다』고 좋아했다. 그래서 비행기 다음으로 기차를 가장 안전한 여행수단으로 꼽던 여객들. 불과 1개월 전 수동식「포인트」가 자동식으로 바뀌었을 때 여객들은 기차의 안전도를 한층 더 신뢰해보려 했었다.

 

그러나 참사현장에서는『석탄으로 달릴 땐 도리어 사고가 적었다』고들 투덜댔다. 

정원 70명도 안되는 객차 안에 140여명을 고리짝처럼 구겨 넣은 얌체당국, 좌석마다 3명씩 앉고도 입석승객들 때문에 

변소길도 드나들 수 없었던 사고직전.『

이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을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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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 속에 피맺힌 울부짖음은 일봉산에 3시간 동안이나 메아리쳤다. 

사고 10분 후 현장에 달려간 천안역원들과 1백여 경찰관들도 이 비극 앞에 넋을 잃고 어쩔 줄을 몰랐다. 

무거운 차체와 의자선반 등에 짓눌린 10여명의 목숨이 눈앞에서 숨져가도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던 현장.

 

전상진(35·천안시 영성동 109)씨는 박살이 난 객차에 끼인 팔과 다리를 자신의 손으로 잘라내고 살아났다. 

2등객차와 3등객차 난간에 서있던 전씨는 왼쪽 난간으로 내리려는 순간 바로 뒤에서 청룡호가 달려드는 것을 보았다. 

다시 난간으로 오르려는 순간「쾅」하며 왼쪽 팔과 오른쪽 다리가 두 객차 사이에 끼었다.

『사람살려달라』고 고함을 쳤다. 옆에 있던 승객이 손칼을 건네주었다. 

전씨는 왼쪽 팔과 오른쪽 다리를 자기 손으로 잘라낸 뒤 정신을 잃었다.

의식을 되찾은 전씨는『가난한 가족들에게 행상으로 모은 돈을 전해주려고 죽을 힘을 다했었다』고 했다. 

이 아수라장 속에서도 도둑은 들끓었다. 부상자 중에는 시계와 보따리를 날치기 당한 사람이 부지기수.

 

그러나 사고현장을 지나다 뛰어들어 12명을 구해낸 장동순(42·천안경찰서 수사과) 순경은 왼쪽 팔이 끊긴 채, 

차창에 바른 발이 걸려『살려달라』고 외치는 정상진(45·천안시 사직동·미곡상)씨를 극적으로 끌어내 입원시키고 

정씨가 가지고 있던 24만원을 은행에 예금시켜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이날 응급치료에 나선 의사들을 가장 울린 사연은 어느 여교사의 죽음. 

5명의 의사들이 이 여교사를 살리기 위해 수술을 준비하는 동안 유길자(31) 교사는 숨져갔다. 

부상자들의 틈에 끼어「물」만 찾던 유교사의 유품은 경남도위가 발행한 15138 국민학교 교사증 뿐, 

유교사는『제자들이 보고싶다』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

밀양국민교 교사인 유교사는 1월 25일 전주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린 지 1주일 만에 참변을 당한 것. 

이날 같은 좌석에 앉았던 신랑 이규진(37·김제금성여중교사)씨도 함께 숨졌다. 

이들 부부는 부인 유교사가 서울시 교육위원회에서 실시한 중등교사임용시험에 합격했다는 통지를 받고 

신원조회겸 상경길에 올랐던 것이다.


<박상곤(朴尙琨) 기자>


[ 선데이서울 69년 2/9 제2권 제6호 통권 제2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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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9. 1.31. <경향신문> 천안역 열차 사고.


12개나 되는 천안역의 입환선(열차를 조성하거나 해방하기 위해 나란히 설치된 선로)에 

앞서 온 열차를 넣지 않고 왜 경부 본선에서 기다리게 했는지도 의문이었습니다. 

갓길에 차를 대지 않고 고속도로 한가운데 정차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셈이지요. 

선로변환기가 폭설에 얼어붙어 그랬다고 했는데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입니다. 

자동폐색신호기 역시 사고 직전 해인 1968년 10월에 처음으로 영등포~대전 구간에 

설치된 것이어서 기관사들이 익숙지 못했다고 하네요. 


당시 경향신문 사설은 “청룡호에 주 원인이 있다고는 하겠으나 만성적인 

열차의 연발연착, 새시설장치에 대한 훈련부족, 지시계통의 불철처 등이 

겹쳐서 일으킨 사고”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사고는 해방 후 7번째로 큰 피해자를 낸 사고였다고 합니다. 

이 사고 책임을 지고 서울철도국 운전사령과 청룡호 기관사는 대법원에서 금고 2년형을, 

소정리역 역무원은 금고 1년6개월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사고가 단지 이 실무자들의 잘못 때문이었을까요? 

사고에 대한 불철저한 반성은 또 다른 사고를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생명보다 성과와 효율을 중시하는 문화는 언제건 다시 인재로 돌아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 사실을 너무나도 뼈저리게 잘 알고 있습니다.


4 Comments
fabiano 2005.10.29 10:18  
이 시절, 필자는 경부고속도로 천안 건설현장에 있었고 월차 휴가를 받아 심천의 노모께 갔는데 그날, 사고열차 직전의 열차에 탑승하여....지금도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합니다.
함박웃음 2005.10.29 10:31  
정말 큰일 날뻔 하셨군요. 잊혀진 사건이지만 피해자들에겐 생생한 악몽이겠지요? 객차가 그렇게 서로 덮치다니, 참 끔찍한 일입니다
장용 2012.02.22 05:28  
저희 아버님께서 그때 돌아가셨어요. 사진 감사합니다
fabiano 2012.02.22 09:46  
아, 그랬습니까? 명복을 빕니다. 약관의 나이였던 그 시절이 어느 덧 40여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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