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site-verification: naverf83ad7df1bcc827c523456dbbc661233.html 추억의 저멀리에(11)...
홈 > 블로그 > 내 블로그 > 이야기
내 블로그

추억의 저멀리에(11)...

fabiano 6 1342  

* *  슬픈 지난날들 (1) *  *

트럭운전석옆. 엄마 무릎 위에 앉아 지독한 차멀미와 씨름하며 차창을 스치는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지방의 을씨년스런
봄 풍경에 눈을 빼앗긴채, 뽀얀 흙먼지를 날리며 울퉁불퉁한 비포장길의 요동치는 흔들림에 쬐그만 몸을 맡기고 
새로운 세상이 기다리는 이삿길이 꼬맹이에겐 그저 마냥 즐겁고 신기하기만 했다.
 

때는 내가 막 열살이 시작되던 해의 이월 말쯤 봄날이었을께다.
내가 그 시기를 잘 기억하는 것은 청성에서 2학년을 마치고 3학년 새책을 타가지고 전학을 왔는데 심천초등학교에는 교과서 지급이
늦어져 유일하게 새 교과서로 공부하는 나를 급우들이 무척 부러워 하던 기억이 나기 때문이다.
  

낯선 종착지인 전댕이 글까에 트럭은 멈췄고 마중 나오신 친척들이 힘을 합해 싣고온 이삿짐을 푸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꼬맹이인 내가 할 일은 별로 없었다.

어른들이 분주히 이삿짐을 나르는동안 나도 거들만한 일을 찾아 도우려 했지만 걸리적거리며 방해가 된대서 멀찍히 떨어져서
새집 구경을 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다.

큰 길가에서 전댕이로 들어가는 두번째 집이자, 끝집이 우리 집이었고 그 구조는길 옆끝으로 사립문이 나있고 담장대신 길을 따라
동향집에  나즈막한 여물칸을 시작으로 그옆이 소외양간, 헛간 다음이 디딜방앗간이 딸린 네칸짜리의 꽤 큰 아랫채가 있었다.


1515072254308202.jpg

사진출처 : 우리 세상

 디딜방앗간을 경계로 윗집과 흙담장을 따라서 두어평은 됨직한 양지바른 담장밑에 아담한 화단이 있었고 그 화단엔
하이얀 꽃이 핀 딸기밭과 방앗간쪽 약간 그늘진 곳엔 흔히 난초라고 불리던 상사초가 일찍 싹이돋아 자라고 있었다.
 
아랫채가 북풍을 막아주어 따뜻한 정남향의 햇살을 받아 보기좋게 자란 화단 앞엔 납작납작한 돌을 깔아
흙이 튀어오르지 못하게 만든 정갈한 장독대위에  커다란 항아리를 기준으로 서너줄이 올망졸망 놓여 있었다.

30평은 됨직한 본채는 남향집으로 넓다란 부엌에 부엌에서 마루로 향한 쪽문에 큰 방이 나란히 두개있고
안방 뒤엔 좁고 긴 광에 그옆으로 또 골방이 있는 시골집치고는 그 규모가 제법 큰 신식 시골 초가집이었다.

전 주인이 이곳에서 주막집을 했었는지 안방 뒤의 광바닥에는  막걸리 저장용으로 커다란 항아리가 둘씩이나
나란히 묻혀 있었고 그 술을 따뜻하게 덥히기위해  아궁이를 따로 만들고 구들을 놓아 불을 지필수 있게 만들어 두었다.
 
이백여평은 됨직한 직사각형의 집터 뒤켠엔 울타리를 따라 커다란 먹감나무가 있었고 십여미터 떨어진 구석 경계에
작은 텃밭을 끼고 월하 감나무가  건너편 경계울타리엔 먹감나무와 재래식 화장실과 꿀꿀이집이 있었다.
 
우리 집이 전댕이로 이사온 계기는 625전쟁이 끝나고 휴전협정으로 장기복무하신 작은 아버지가 제대하신 그 해에
무슨 일인지 잘은 몰라도 수백년을 살던 곳을 떠나 이사를하게 됐는데, 아마도 전댕이에 첫째 고모님과
셋째 고모님이 사신 관계로 할머니와 작은 아버님이 외로우셔서 그런 선택을 하셨는지도 모른다.

농사꺼리로는 첫해부터 우리집터와 붙어있어 텃밭이나 다름없는 3~400평의 밭과 작은 개울을끼고 두어마지기는
됨직한 천수답, 전댕이를지나 400여평의 밭과 좀 떨어진곳에 500 여평의밭에 보리 농사와 콩,고추,조 고구마 등을 심어
제법 풍요로운 수확을 하게됬고 특히 6*25 로 자식을 둘씩이나 잃으시고 밤낮없이 막내아들 안위가 걱정되셔서
정한수를 떠놓고 무사귀환을 비시던 할머니가 제일 좋아 하셨다.

더우기, 딸이 두분이나 계신곳으로 이사를 오셨으니 그 기쁨이 대단 했을것이다.

그 당시는 온 나라가 전쟁에 휘말려 누구랄것없이 고달픈 삶을 살때였지만 우리집은 더 비참해서 얼굴조차 기억이 안나는
우리 아버지와 둘째 작은아버지를 잃고 할아버님은 홧병인지는 잘 몰라도 한창 전쟁중에 병환이 나셨고 전쟁이 발발하자
할아버지의 성화로 우리 모자와 두분 고모님 이렇게 네 식구는 대구로 피난을 떠났으나 병중이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병수발때문에  피난도 못가셨고 전쟁통에 적절한 약재를 구할수 없어 변변한 치료도 제대로 못해보고 전쟁중에
돌아가셔서 작은 아버님이 제대하시기 전엔 집안의 할머니, 어머니, 제대 직전에 보은으로 시집간
막내 고모와 꼬맹이인 나만 있어서

농사일이고 모든 집안일을 여자분들이 해결해야하는 고달픈 삶을 사셔야 했으니....

모처럼 막내아들이 무사히 제대해 농사일이며 집안 일을 맡아 하시니 할머니께서 얼마나 흐뭇하고 행복했으리...

전쟁통에 혼기를 놓친 작은 아버님은 고향 이웃집 어떤 아저씨의 중매로 이듬 해, 늦가을 대전으로 장가를
가시게 됐고 이때가 전쟁으로 시달림받은 수년래에 우리집으로선 가장 기쁘고 행복한 날이었을 것같다.   

6 Comments
피케노 2008.01.13 08:13  
비극의 세월도 겪어셧네요....생각하기도 싫은 시절이지요.....
fabiano 2008.01.13 09:16  
이 게시물은 친구녀석의 글인데 수정보완하여 올린 것입니다. 국민학교 시절에 만났는데 부친께서는 아주 일찍 돌아가시고 홀어머니와 함께 꽤 고생을 했지요. 지금은 서울에서 잘살고 있습니다.
리버룸 2008.01.13 20:38  
저는 파비아노님 이야긴 줄 알고 열심히 읽으며 '동생도 없으시구나'했는데, 친구 야그네요...^^"맨날 추억에 사네"라는 대문 글이 처음 봤을때,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fabiano 2008.01.13 21:05  
녀석이 지하고 불알친구입니다. 고생도 많이 했고...아래 주소에 가보시죠...http://sim1000.net/bbs/view.php?&bbs_id=5a&page=&doc_num=1327&PHPSESSID=481a43c3a2d46fe7088ceca50796751d
흰구름 2008.01.28 11:24  
리버룸처럼 본인의 글로 알았는 데.... 허나, 어려운 시절 지내오면서...지금 애들은 6.25라는 말 모르지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TV가 어느 틈에 '한국전쟁'이라고 부르고 있지요....  보리개떡, 사금팽이로 만든 놀잇감, 엿, 성냥통, 제일 무서웠던 전염병....
fabiano 2008.01.28 11:46  
그 시절엔 너,나 할것없이 대개 비스므리한 생활환경이어서 우리 세대들은 공감하실 것입니다..... ^-^a
Category
State
  • 현재 접속자 78 명
  • 오늘 방문자 594 명
  • 어제 방문자 1,445 명
  • 최대 방문자 14,296 명
  • 전체 방문자 1,315,066 명
  • 전체 게시물 10,948 개
  • 전체 댓글수 35,460 개
  • 전체 회원수 71 명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