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site-verification: naverf83ad7df1bcc827c523456dbbc661233.html 최은희 77년 파란만장한 `여자인생` 풀 고백
홈 > 블로그 > 내 블로그 > 이야기
내 블로그

최은희 77년 파란만장한 `여자인생` 풀 고백

fabiano 10 1190  

여성중앙 영화보다 영화 같은 삶을 담아낸 『최은희의 고백』(랜덤하우스)의 출간 소식을 듣고 만난 최은희씨(77)는 ‘보수적 여성’에 속했다. “연구생(극단 단원)이던 시절, 유부남 선배들이 치근덕댈 때면 참기 힘들어 배우를 그만두고 싶었다”는 말을 했고, “배우가 안 됐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 것 같냐”는 물음에는 “일부종사하며 좋은 아내가 됐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운명의 파도는 배우 최은희를 많이도 흔들었다.

1515071099648572.JPG 신상옥 감독과의 만남은 간통 혐의 1호란 죄목이 걸렸고, 당시 정서상 아이를 낳지 못해 입양으로 ‘속죄’를 했다. 남편 신 감독이 후배 오수미와 외도로 두 자식을 얻자 ‘너는 내 운명’이라던 신 감독과 결혼 생활 22년 만에 종지부를 찍기도 했다. 이어지는 납북과 운명적인 재결합…. 신 감독이 세상을 뜬 지 1년 반이 지난 지금, 최씨의 오른쪽 가운뎃손가락에는 재혼 때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남편과 나눈 18K 금가락지가 끼워져 있다.

*** “내 삶은 하나님이 시나리오를 써 준, 운명적인 것이었죠”

두 번의 이혼, 납북과 망명 등 영화 같은 삶을 살아오셨죠. 돌이켜 보면 행복했던 것 같습니까

내 삶은 운명적으로 하나님이 시나리오를 써 줬단 생각이 들어요. 파도를 넘고, 비바람을 피하고 나니 아름다운 추억이 되더군요. 돌이켜 보면 그래도 행복한 삶을 걸어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서전을 쓰면서, 어느 시기로 가장 돌아가고 싶던가요

10대, 한창 배우 일을 시작할 때죠. 영화를 통해 수많은 인생을 살아 봤지만, 정작 내가 원했던 건 못 해 본 거 같아서요. 내가 욕심이 많아요. 피아노를 치고, 가야금을 타고, 춤도 춰 보고 싶네요. 요즘 후배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 뭔지 아세요? 연기자는 도둑질 빼놓고는 다 해 봐야 한다는 거예요.
다른 인생을 선택할 기회가 주어지면 어떤 삶을 선택할 것 같습니까 시집가서 좋은 아내가 됐을 겁니다.

좋은 아내가 아니었던가요

내 팔자가 그게 못 됐죠. 팔자가 팔자인지라 파란만장하게 살았으니까요.

첫 결혼은 아이 딸린 남자였고, 두 번째 신 감독과의 만남은 ‘간통 혐의 1호’란 죄목이 붙었습니다. 둘 다 평범한 결혼이 아니어서 억울하진 않습니까

(최씨의 굴곡 많은 인생사를 미리 짚고 넘어가자. 극단 연구생이던 최씨는 열여덟 살에 30대의 카메라맨 김모씨를 만났다. 김씨는 한 번의 이혼 경력과 아이가 있는 유부남이었다. 책에서 최씨는 “김씨가 내게 지나칠 정도로 많이 다가왔고, 그걸 거절할 수 없었다”며 결혼의 배경을 전하고 있다. 두 사람은 정작 혼인 신고를 하지 않았고 5년 뒤 최은희는 신 감독과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게 된다. 당시 김씨의 고소로 둘의 만남은 ‘간통 혐의 1호’로 지목되면서 잡지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그런 곡절을 딛고 1954년 두 사람은 서울 신당동 허름한 여인숙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달콤한 연인이자 영화 동지였던 둘의 결혼 생활은 신 감독이 후배 오수미와 외도를 하고 두 자녀를 낳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1976년 22년 만에 부부 관계를 정리하게 된다. 그로부터 2년 뒤 홍콩에서 최씨가 납북되고, 5년 뒤 신 감독이 납북되면서 재회한다. ‘질긴 인연’이란 표현 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오수미는 지난 92년 하와이에서 비운의 교통사고로 명을 달리했다.)
신 감독과는 재결합했으니, 세 번 결혼한 셈이죠(웃음). 요즘은 흠이 아니지만, 당시엔 한 번 시집가서 못 살고 나오면 ‘못된 여자’로 낙인 찍혔죠. 이혼하면 바깥출입을 못할 정도로요. 그런데 요즘은 그게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니까, 세상이 많이 달라졌죠.

***“간통 혐의 1호, 신 감독과 오수미의 외도… 그녀도 여자고 나도 여자니까요”

신 감독과 만나면서 간통 혐의로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렸죠. 세간의 시선이 두려웠을 텐데, 어떻게 대처하셨는지요

사실 간통으로 피소할 건은 아니었죠. 첫 남편과 혼인 신고도 안 했고, 그 남자 역시 문제가 많았어요. 사회에서 망신을 주자, 그런 심정으로 고소했을 겁니다. 일부종사 못한 점에 대해선 할 말이 없지만, (그 남자에게) 할 도리는 다했다고 생각해요.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신 감독이 좋았던 이유는 뭘까요

난 이름을 알릴 때고, 그는 신인 감독이었는데, 한마디로 멋쟁이였어요. 그때는 호감이 있어도 여자들이 먼저 프러포즈를 하는 시대가 아니었지요. 자존심도 상하고(웃음). 신 감독이 적극적으로 대시해 와서 연결된 거죠.

요즘도 감독 여배우 스캔들이 있고, 결혼하는 커플도 있는데, 감독과 여배우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당시 날 보고 ‘한국의 잉그리드 버그만’이란 말이 돌았죠(버그만은 가정을 버리고 이탈리아 유부남 영화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와 사랑에 빠졌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 경우는, 감독이나 배우라고 해서 연정을 느끼는 성격은 아니었죠. 친구나 친척 같은 느낌이 많았죠.

여담입니다만, 신 감독님 외에도 유혹하는 남자들이 많았죠

연구생(극단원)일 때 유부남 선배들이 치근대면 괘씸하고 존경할 수 없었죠. 처녀 시절부터 ‘부적절한 관계’엔 강한 거부를 했던 셈입니다. 그런 선배들 보기 싫어서 연예계를 떠날 생각도 했으니까요.

신 감독을 두고 영화 쪽엔 천재, 세상일엔 어린애였다는 말이 있는데요

호호. 맞습니다. 삶 자체가 영화였는데, 그러다 보니 가정을 등한시한 점이 있었죠. 결혼 초엔 둘 다 일에 미쳐 있던 터라 특별히 어려운 점은 없었죠. 탈북 뒤에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 3년 정도 가정 살림이란 걸 했지요. 당시 아이 넷이 모여 살면서, 생애 처음으로 주부이자 가장으로 살았죠. 그때가 신혼이었던 셈이죠(입양한 딸 명희씨는 결혼했고 아들 정균씨는 영화감독의 길을 걷고 있다. 신 감독과 배우 오수미 사이에 태어난 아들 상균씨는 미국에서 경찰이 됐고, 연극 활동을 하던 딸 승리씨는 지난해 결혼했다).

책에서 영화 동지인 부부 관계는 그만큼 ‘밀도’가 진했다고 썼는데, 신 감독은 왜 외도를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굳이 연예계라서 그런 일이 생겼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나쁜 남자는 상습적으로 그럴 거고, 우연히 부닥치는 경우도 있을 거고요. 신 감독은 후자겠지만, 어떤 이유든, 외도는 용납이 안 되는 거였죠.

책에서 신 감독의 두 아이를 낳은 오수미씨를 예전에 용서했다,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현실로 받아들이는데 어떤 노력이 필요했습니까

용서가 안 됐죠. 그러다 둘째마저 낳았으니 이혼을 결심한 거죠. 애를 못 낳은 사람이 둘 사이에 끼어서 부모 역할을 막는 건 아닌 것 같았어요. 오수미씨 역시 그러고 싶어서 그랬겠어요. 인연은 모진 거죠. 미국까지 건너와서 신 감독을 찾았다는 얘기를 듣고, 같은 여자로서 동정이 가더군요. 그래도 이건 분명합니다. 선후배 관계에서 그런 불미스런 일은 일어나지 말아야죠. 내가 가톨릭 신자인데, 오수미씨에 대한 기도를 빼놓지 않고 있어요. 그녀도 여자고, 나도 여자인 거죠.

1515071103695017.JPG

두 아이를 입양하고 키우면서 고민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그게 모진 팔자 탓이죠. 서른이 넘었는데 아기가 안 생기니까, 초조하고 조바심이 났죠. 신 감독과 상의한 결과, 처음엔 달가워하지 않다가 나중에 동의를 했어요. 당시 사회 분위기엔 입양을 비밀로 해야 했는데, 그걸 알리겠다는 기자가 있어서 막으려고 애를 쓰기도 했지요. 자기 배로 낳은 아이나 기른 아이나 모성은 똑같습니다.

스타 배우로서 많은 걸 누리셨는데, 그래도 못 이뤄 아쉬운 게 있나요

출산을 못한 거죠(잠시 침묵). 어머니가 제게 늘 하신 말씀이 있어요. 여자로서 한 세상 태어났으면 자식을 내야 한다는 말이었죠. 만약 입양을 안 했다면, 그 아이들이 없다면, 지금 배우 최은희는 이 세상에 없을 겁니다. 바로 신 감독 뒤를 따라갔을 거예요.

최은희의 파란만장한 역사에는 두 차례 납북이 있다. 한국전쟁 당시 예술인 신분으로 포로가 됐고, 두 번째 납북은 1978년 1월이었다. 당시 홍콩 여행 중이던 최은희가 바닷가를 보려고 항구에 정박 중인 보트에 탔다. 이때 보트 항해사가 시동을 걸더니 이런 뜻밖의 말을 했다. “최 선생, 지금 우리는 김일성 장군님의 품으로 갑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북한 땅으로 납치된 최은희를 남포항까지 나와 마중했다. 첫 대면한 김 위원장은 “최 선생 보기에 내가 어떻습니까. 난쟁이 똥자루 같지 않습네까”라며 껄껄 웃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5년 뒤. 최은희는 김정일이 베푸는 연회장에서 뜻밖에도 신상옥 감독과 재회한다. 당시 신 감독이 납북된 것을 두고, 최은희를 만나기 위한 신 감독의 자진 월북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한 기자는 이런 해석을 내린 적이 있다. 어쨌거나 김정일 위원장은 최은희와 신 감독의 재회를 이뤄 준 ‘은인’이라는 것이다. 최씨는 북에서 만 8년을 지냈고, 신 감독과 재회한 후 3년 동안 초인적으로 영화 17편을 제작한 뒤 탈출했다.

북에서의 9년을 정리한다면요

아무리 힘들고 캄캄했어도 지나고 나면 추억이 되는 것 아니겠어요. 북에서 최고 대접을 받았지만, 배고프고 자유가 없는 인민을 보면 가슴이 아팠죠. 영화광인 김 위원장이 우리를 납치한 것도 이해가 돼요. 탈출 이후 암살 지시가 있었다는 말이 돌았지만, 아마 김 위원장 역시 짧은 시간 많은 일을 해주고(3년 동안 17편의 영화를 제작했던) 큰 무대에서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기 위해 탈출한 것을 이해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김정일 위원장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나를 데려가 막 대했다면 인간 취급을 안 했을 텐데, ‘최 선생’이란 호칭으로 깍듯하게 대하고, 영화 팬으로서 내 영화를 인정해 준 부분은 고맙죠. 특히 신 감독과 재회하게 해준 ‘깜짝쇼’를 생각하면 ‘납치에 대한 분노’가 사그라들어요.

최근 정상회담을 보면서 감회가 새로웠을 것 같은데요

큰 감흥은 없어요. 나와 신 감독은 김대중 대통령 이전에 김 위원장의 마중과 예우를 받은 사람이니까요(웃음). 그녀의 말처럼, 세월은 망각을 낳고 추억만을 남긴 듯했다.

***“(주름살 보이니) 클로즈업 말아 주세요. 여배우도 인간인데, 그건 싫어요”

요즘 아침에 일어나면 어떻게 보내시는지요

매일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6시 뉴스를 보고, 실내 자전거를 타고 간단한 체조를 합니다. 아침은 빵 한 조각과 커피를 마셔요. 한식은 속을 무겁게 해서요. 신 감독의 식습관을 닮아 식사는 아주 빨리 하는 편이죠.

영화는 자주 보십니까

신 감독이 저세상으로 떠나면서 극장을 못 찾고 있지요. 집에서 가끔 DVD를 보는 정도죠. 요즘 극장엔 어른들이 볼 만한 영화가 드물어 아쉽지요.

마지막 영화를 만든다면 어떤 주제가 될 것 같습니까

인간의 내면을 적나라하게 파고드는 영화가 되겠죠. 소재가 어떤 것이든 깊이가 있는….
영화 출연 제의는 안 들어오나요 최근에 하나 들어왔는데, 내 이미지와 맞지 않아 못했죠. 지금 나이에 주인공 시켜 달라, 젊은 역할을 달라, 그런 과욕을 부릴 수 없겠죠. 단역이라도 내 이미지에 손상이 안 되는 역할이면 오케이입니다.

모든 영화에 애착이 가겠습니다만, 그래도 한 작품을 꼽는다면요

‘성춘향’은 총천연색으로 찍은 시네마스코프라 애착이 깊어요. 봄 장면을 찍는데, 촬영 당시가 겨울이었어요. 입김이 나오니까, 궁여지책으로 얼음을 물고 대사를 치느라 배탈이 날 정도였죠. 그래도 입김이 나오니까, 신 감독이 숨 쉬지 말고 대사를 하라고 다그쳤어요. 그러고 보면, 신 감독이 파쇼였죠(웃음).

라이벌로 생각한 여배우는 없나요

전혀요. 곁눈 안 팔고 황소처럼 묵묵히 내 일만 했어요. 그러다 보니 최은희란 이름 석 자를 알렸는데, 경쟁심이 없어서 출세를 못한 것도 같네요(웃음).

여담입니다만, 돈은 좀 모으셨습니까

호호. 신상옥 감독 작품집(자서전)을 읽으면 그런 말 안 나올 걸요. 현대사와 굴곡을 함께 한 영화인의 삶이잖아요. 영화 열정은 넘쳤지만, 반면 돈은 항상 쪼들렸지요. 곡절 많은 시대를 관통하며 영화를 사랑했던 것만으로도 재조명받아야 되는 거죠. 신상옥최은희기념사업회는 그 연장선상에 있어요. 요즘 젊은이들은 그런 것에 너무 무관심해요.

꽃다운 미모로 당대를 풍미하다 얼굴에 생긴 주름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카메라(사진) 나오는 건 이걸로 끝이란 생각이 들죠(웃음). 사진 찍을 때 클로즈업 하지 말아요. (주름진 게) 티 나니까요. 여배우도 인간인데, 그건 싫어요.

어떤 여자로 기억되고 싶습니까

(이 질문을 하면서 배우가 아닌 여자란 단서를 붙였다) 모든 고난을 용케 이겨내고 억세게 살아온, 후배나 동료에게 뒤로 손가락질은 안 받는 배우로 살려고 노력했던 최은희였다고요. 남은 생은 정말 멋지게 마무리하려고 ‘연구’ 중입니다.

“부끄럽고 망설였지만, 여자로서 치부까지 담았다”는 자서전을 출간한 최씨를 만나 배우 아닌 ‘여자’ 최은희의 일생을 들여다봤다.



팟찌기사 더 보기





▶ [J-HOT] 고유가 시대 정유업체는 왜 끙끙 앓나

▶ [J-HOT] 배우 최은희 77년 파란만장한 '여자인생' 풀 고백

▶ [J-HOT] 월급쟁이 의사 1인당 의료수익 '월 5천만원'

▶ [J-HOT] "미납된 전화요금 내라" 전화 받으면…

▶ [J-HOT] "자밀라 방송서 옷 벗었냐" '미수다' 퇴출 위기 논란

10 Comments
어여쁜 나 2016.06.01 18:05  
최은희선생님, 부디 건강하세요~!!!!
fabiano 2016.06.02 13:05  
한국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최은희여사님의 건강을 빕니다.
어여쁜 나 2016.08.21 20:10  
당연하죠~!!!! *^^******
fabiano 2016.08.24 09:18  
얼마 전, 홀로 쓸쓸히 여생을 보내고 있다는 뉴스.다소, 씁쓸한 마음입니다.
어여쁜 나 2016.08.26 21:14  
그리고 이번 9월에 고 신상옥감독과 최은희 선생님부부가 북한에 납치되어서부터 탈출때까지의 일생을 그린 영화 연인과 독재자가 개봉된다고합니다~!!!! 시간되시면 꼭 보십시오~!!!!!
fabiano 2016.08.27 09:55  
뉴스를 접해서 알고 있습니다.대전까지 가야 하니... 시골사는 다소간의 비애가...
어여쁜 나 2016.12.27 11:43  
최은희선생님이 납북되기전의 북한영화에 나온 여배우들의 용모들을 보면 한마디로 처참했죠~!!! 오죽했겠으면 김정일이 최은희선생님을 데려오라고 말을 했겠나요? ㅡㅡ;;;;;; 그래서 결국에는 납치를 당해서 8년넘게 억류생활을 했으니깐요~!!!!
fabiano 2016.12.27 12:14  
인물이 뛰어나지 않아도 연기파들은 많아요. 영화에서 인물도 중요하지만 연기를 더 잘해야...
어여쁜 나 2017.03.24 19:45  
1982년생 개띠인 제가봐도 옛날식 미녀들이 훨씬 더 돋보이고 보기가 좋습니다~!!!! 요새미녀들을 보면 다시한번 말씀을 드리겠지만 성형미녀들이 너무많아서 정말싫어요~!!!!
fabiano 2017.03.28 22:35  
me too...
Category
State
  • 현재 접속자 73 명
  • 오늘 방문자 1,304 명
  • 어제 방문자 1,592 명
  • 최대 방문자 14,296 명
  • 전체 방문자 1,314,331 명
  • 전체 게시물 10,948 개
  • 전체 댓글수 35,460 개
  • 전체 회원수 71 명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