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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원고지시대 작가들] 時의 자유정신 김수영… 분신으로 살아온 여동생 수명

fabiano 2 1608  
[원고지시대 작가들] 時의 자유정신 김수영… 분신으로 살아온 여동생 수명씨

[2007.05.20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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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명씨는 1955년 창간된 월간 '현대문학'에 입사, 초대 편집장 오영수씨에 이어 2대 편집장을 20년 가까이 지냈다. 문예지로서는 국내 최초의, 그리고 최장기 여성편집장이었다.

필화사건으로 유명한 남정현의 '분지'도 그의 손을 거쳐갔다. 1969년 2월 그는 '분지' 원고를 받아 교정을 본 뒤 '현대문학' 3월호에 실었다. 김씨는 주간인 조연현과 함께 중앙정보부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

"잊히지 않는 기억이지요. 남산 밑 명보극장 근처의 안가에서 며칠동안 조사를 받았는데, 수사관이 그러더군요. 이까짓 잡지사 기자를 왜 하느냐고요. 그러면서 차라리 같이 일하면 어떻겠냐고 농담까지 하더군요. 아침에 소환되면 진을 다 빼놓고 한밤중에 내보냈는데 그게 다 전략이었지요. 몸이 녹초가 되었으니 다른 곳에 가서 조사받은 내용을 털어놓을 새가 없이 귀가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어요."

김씨를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1960년대 문단에서 잉그리드 버그만으로 불릴 만큼 빼어난 미모와 지적 매력이다. 칠순을 넘긴 나이지만 화장기 없는 얼굴에서 젊었을 적 미모를 어림하기란 어렵지 않다. 내로라하는 문인들이 연정을 품었고 그 앞에서 얼굴을 붉혔다. 오빠의 전화를 받고 달려간 곳은 당시 숱한 문인의 사랑방이었던 광화문통 아리스 다방이었다. 박용래 전봉건 김종삼 유정 안동림 이호철 유종호 최인훈 박재삼 이병주 고은 염무웅 김치수…. 삼삼오오 진을 치고 앉았다가 기지개를 켜며 건너간 곳은 맞은 편 골목의 단층 기와집이 처마에 처마를 맞대고 있는 허름한 대포집이었다.

"내가 치기가 없어요. 오빠랑 함께 술좌석에 앉아있다가도 밤 11시가 되면 어김없이 일어났지요. 오빠는 고지식하다고 지청구를 날렸지요. 그때는 도봉산 기슭에 집이 있었는데 돈암동까지 가야 시외버스를 탈 수 있었지요. 집에 도착하면 통행금지 사이렌이 울더군요. 그래도 힘든줄 모르고 시외에서 시내로 꼬박꼬박 출퇴근을 했지요."

요즘엔 동년배 문인들의 부고가 자주 들려온다며 소설가 이호철씨와 1년에 한 두 차례 만날 뿐 문단 사람들과는 거의 접촉이 없다고 귀띔했다. "최근 결심한 게 하나 있는데 조카들에게 유언을 할까봐요. 내가 죽거든 분골해 김수영 시비가 세워진 잔디밭에 뿌리라고 말이죠. 시비 뒤쪽 어디쯤. 그거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풀도 잘 자랄거고요."

평생 독신으로 살아온 그에게 김수영은 혈육 이상의 절대적인 존재인 것이다.

정철훈 전문기자
 


자신을 활활 태운 오빠는…”

[2007.05.20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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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6월15일은 한국 현대문학사에 비극의 먹구름이 낀 날이다. 당대는 물론 오늘날에도 현대시의 전위로 평가받는 시인 김수영씨가 귀갓길에 서울 공덕동에서 버스에 치여 쓰러진 것이 이날 자정께였다. 1921년생 동갑내기인 소설가 이병주와 광화문의 한 술집에서 언쟁을 벌이다 자기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온 길이었다. 김수영은 적십자병원으로 실려가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다음날 아침 8시 눈을 감았다.

39주기를 한달 앞둔 지난 16일 고인의 여동생 수명(73)씨와 함께 서울 도봉산국립공원내 '김수영 시비(詩碑)'를 찾았다. 비가 부슬부슬 뿌리고 있었다. 김수영 시인이 '움직이는 비애'라고 규정한 비였다. "비가 오고 있다/여보/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비' 첫 연)

그동안 언론에 등장하길 꺼리던 수명씨가 거센 빗줄기에 우산을 받쳐 쓴 채 오빠의 시비를 둘러본 데는 그만의 '움직이는 비애'가 작용했을 터였다. "오빠는 불이었어요. 자신을 활활 태웠으니까요. 그냥 시를 쓴 게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시에게 제물로 바쳤지요."

김수영의 시는 러닝셔츠 차림으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그의 사진처럼, 시란 아름다울 필요가 없다고 작정한듯 '간단한 복장'만으로도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있다. 지나칠 만큼 진실과 정직을 시어로 삼았던 그는 타계하기 두달 전인 1968년 4월13일, 부산에서 열린 문학세미나에서 '시여, 침을 뱉어라'라는 발제하에 이렇게 일갈했다.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도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나가는 것이다."

'시여, 침을 뱉어라'의 명령형 종결 어미가 향하고 있는 곳은 자신의 얼굴이었다. "오빠가 가장 증오한 것은 우리 사회의 후진성과 허위의식이었지만 그것을 증오하고 비판하는 자신조차 거기에 연루돼 있다는 사실을 냉철하게 인식하고 있었지요. 자신의 치부까지 시에 낱낱이 공개한 것은 그런 인식에 대한 반증이지요."

김수영의 문학정신은 자기 분열의 양상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그 전달 과정을 통해 자신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치열성에 있다. 술에 취하면 "난 거지로 살고 싶다"며 가족에게 땡깡을 부리거나, "알맹이는 이북으로 튀어버리고 이남엔 흑싸리 껍데기 개좆만 남았다"고 동료 문인들에게 호통을 치거나, "야, 너 딜레탕트지?"라며 이병주에게 시비를 걸었던 김수영.

그는 흔히 자유정신이란 말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4·19혁명과 연결시키기도 한다. 실제로 그는 작품을 통해 혁명을 소리높여 찬양했고, 감격에 찬 어조로 희망을, 역사의 승리를 노래했다.

1515070214607885.jpg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그 지긋지긋한 놈의 사진을 떼어서/조용히 개굴창에 넣고/썩어진 어제와 결별하자/그놈의 동상이 선 곳에는/민주주의 첫 기둥을 세우고/쓰러진 성스러운 학생의 웅장한/기념탑을 세우자/아아 어서어서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첫 연)

하지만 4·19묘역에 장식된 4·19 기념시 조형물에 김수영의 시가 없다는 것이야말로 시대의 모순이자 시대의 불온이 아닌가. 김수영에게 시가 천직이었다면 번역과 양계는 그의 생활이었다. 그는 속물이라고 욕을 먹어가면서도 도봉산 기슭 냇골 근처의 선산에서 닭을 키웠다.

"오빠는 마포 서강에 살때도 틈만 나면 번역거리를 보자기에 싸들고 어머니의 농장이 있는 도봉산 자락으로 왔어요. 오빠가 오면 내가 쓰던 서쪽 방을 비워주곤 했는데…. 도봉산이 훤히 보이는 증조부 산소 아래에 서재를 꾸며주려고 했는데…."

집필실 출입을 누구에게도 금하던 김수영이었지만 수명씨만은 예외였다. 오빠는 동생을 누구보다 신뢰했다. 번역을 그만두어 용돈이 궁할 때면 언제나 누이를 찾아갔다. 술 외상값을 약속한 날에도 찾아갔고 통금시간이 지나 여관에서 자고 숙비 때문에 전화를 걸었고 통금위반으로 즉결재판소에서 전화를 할 때도 있었다.

시비를 둘러보고 내려오던 길에 지금은 남의 땅이 되어버린 어머니의 농장터를 찾았다. 철공소로 변한 3000평 부지가 비를 맞고 있었다. "40주기를 맞는 내년에 민음사에서 육필 시집을 낼 계획입니다. 이미 원고를 넘긴 상태지요. 200편이 채 안되는 시편이지만 육필원고가 없는 것도 있어 아쉽네요."

육필 시집은 수명씨가 신문사나 출판사 캐비닛에 먼지를 둘러쓰고 들어 있던 원고들을 일일이 찾아내 보관하고 있었기에 빛을 볼 수 있었다. "이달말에 일본에서 김수영 시 전집이 나올 예정이에요. 과거에 '달나라 장난'이라는 시집이 일어로 번역된 적은 있었으나 전집은 처음이지요. 김수영 같은 시인은 아마 나오지 않을거예요. 유일한 시인이죠."

수명씨와 헤어질 즈음, 빗줄기는 더욱 거세졌다. 우산을 펼 때 김수영의 시가 후두둑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발목까지/발밑까지 눕는다/바람보다 늦게 누워도/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바람보다 늦게 울어도/바람보다 먼저 웃는다/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풀'일부)

글·사진=정철훈 전문기자 chjung@kmib.co.kr
2 Comments
리버룸 2008.01.19 23:36  
저도 좋아서 퍼왔는데, 이분께 時를 詩로 고쳐달라고 말씀 좀 해보시지요.
fabiano 2008.01.19 23:53  
時의 자유정신...굳이 詩라야 됩니까? 김수영의 詩에 대한 느낌에 100% 찬성은 아니지만 時代에 대한 그의 울분괴 비애감이 있었던 그 시대에 대한 자유정신을 말한다면 時도 타당할 듯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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