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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시절의 가수 지망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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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청소년들의 장래희망중 가수를 비롯한 연예인은 인기종목이다. 그러나 30년 전만 하더라도 가수가 된다는 것은 가문의 수치로 취급되어 가수지망생들은 형극의 길을 걸어야 했다. 호적을 파가라는 협박, 부모와 연을 끊으라는 선언 등 가족들의 냉대가 가수지망생들이 첫 번째로 겪어야 했던 시련이었다. 그래도 광대의 끼는 타고나는 것이어서 이런 ‘왕따’도 가수지망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1960년대 가장 선망하던 연예인은 배우였고 그 다음은 가수였다. 당시 인기가수의 노래를 따라부르며 적어도 동네의 가수대접을 받던 젊은이들은 슬슬 ‘가슴에 바람이 들어가면서’ 자신도 음반만 취입하면 가수가 될 것처럼 느껴지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는 가수가 되기 위한 여러 경로가 공식적으로 열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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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등용문 중 하나였던 방송사 노래자랑대회

가장 일반적이고 역사가 오래된 방식은 음반사가 신인가수를 발굴하기 위해 실시하는 콩쿨대회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일제시대에는 음반사들이 자사의 홍보와 신인가수 확보를 위해 신인가수선발 콩쿨대회를 앞다투어 열었다. <타향살이>로 유명한 고복수는 1934년(23세) 콜럼비아레코드사가 주최한 전국신인선발대회에서 2위를 차지한 이후 가수활동을 시작했다. <찔레꽃>으로 유명한 여자가수 백난아는 1941년(15세) 태평레코드사가 주최한 ‘레코드예술상’ 회령대회에서 1등을 하면서 15세의 나이로 태평레코드사의 전속가수로 출발하여 <찔레꽃>과 <아리랑 낭랑> 등을 히트시켰다

가수등용문 중 하나였던 방송사 노래자랑대회
38년전의 상황이지만 그당시 가수들의 음반사와의 계약상황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현재의 가요계가 얼마나 전근대적 관행을 유지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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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박재란. 오아시스에서 취입했다

음반사나 방송국의 신인선발대회를 통한 방법은 실력은 공식적으로 인정받지만 바로 무대에 서서 인기를 누리며 가수로서의 생활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성공에 이르기까지 많은 난관을 거쳐야 했다. 이에 비해 미8군 무대를 통한 방법은 일반무대에서 인기를 얻는 가수가 바로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미8군쇼라는 확실한 무대가 있었고, 보수도 후하게 보장되며 음악역량도 쌓을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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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광음악학원에서 수강생을 지도하고 있는
작곡가 김우택

패티김은 ‘베니김쇼’에서, 최희준은 ‘쇼보트’에서 노래를 시작했으며 현미는 ‘스윙스타즈’에서 소속가수였던 현애, 현주와 현시스터즈라는 3인조 트리오로 노래를 시작했다. 펄시스터즈는 1967년 미8군 오디션에 구경갔다가 얼떨결에 참가한 테스트에 합격하여 베거스 버라이어티쇼에서 활약했다. 1960년대의 가수들 중 반 정도가 미8군 무대에서 음악을 시작하거나 기량을 쌓아 일반무대에 음반이나 방송을 통해 데뷔했다. 그런 점에서 미8군 무대는 음악학원이 등장하기 이전의 가장 전문적인 음악훈련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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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아마추어 톱싱거대회

1960년대에 가수가 되기 위해서는 결국 기성 작곡가들의 곡을 받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위 작곡가에 의한 ‘픽업’ 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했는데, 이런 작곡가들은 방송사의 악단장을 하거나, 음반사에 전속 작곡가로 소속되거나 혹은 음악학원을 운영하면서 가수지망생들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런 작곡가들에게 픽업되기 가장 쉬운 방법은 이들이 운영하는 음악학원에 수강생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거기서는 기초적인 음악수업을 받을 수 있었고 실력을 쌓으면 작곡가의 곡을 받을 수도 있었다.

1960년대 후반 당시 서울시내에는 수십 군데의 음악학원이 있었다. 1956년 설립된 종로2가의 세기음악학원(현재도 그 자리에 남아있다)과 1967년에 종로3가에 설립된 세광음악학원은 당시의 대규모 종합음악학원으로 명성을 누렸다. 음악학원은 규모가 작은 곳은 수십명, 큰 곳은 수백명의 수강생을 보유하고 있었다. 수강료는 기천원에서 만원까지였고 처음에는 기초반에서 기본적인 것을 배운 다음 연구반에 올라가 전문적인 창법이나 이론을 배우고 나서 작곡가에게 개인지도를 받게 된다. 그다음 작곡가에게 곡을 받아 취입을 하고 가수활동에 돌입하게 된다. 그런데 음반사에 전속가수로 레코드를 취입하는 경우는 음반사가 마련해준 스케쥴에 따라 움직이면 되지만 작곡가에게 개인적으로 곡을 받아 취입하는 경우는 가수가 많은 돈을 들여 직접 홍보를 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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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신인가수들의 음반취입은 지금처럼 자신의 곡만으로 독집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겨우 두 곡 정도를 받아 유명가수의 음반에 끼워넣거나 여러 가수들을 묶어서 한 음반에 수록하는 형태였다. 이때에 자신의 음반임을 증명해주는 것은 음반의 전면이나 후면에 자신의 사진이 실리는 것이었다. 앞면에 자신의 곡이 타이틀로 실릴 경우는 15~20만원(1971년 당시의 가격, 1970년 쌀 한가마니가 만원), 뒷면 타이틀일 때는 10~15만 원 정도를 내야 가능했다.

비용은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음반이 방송을 타기 위해 직접 방송사를 돌며 홍보를 해야했다. 이때 홍보란 PD들에게 봉투를 돌리는 일을 말한다. 5천원이나 만원을 넣은 봉투를 만들어 직접 방송사의 PD를 찾아가 90도로 인사를 하고 봉투를 전달했다. 이런 홍보비는 대개 한 번에 50만 원 정도 들었다. 작곡가의 권유로 지방홍보를 나서면 호텔에서 작곡가들의 술시중을 모두 들고 비용도 지불했으며, 역시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지방의 방송국 PD들에게 봉투를 돌렸다. 요즘에 볼 수 있는 가요계 비리의 뿌리는 이미 1960년대에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양심적인 작곡가들도 있었지만 돈을 밝히는 비양심적인 작곡가들은 세상물정 모르는 시골출신의 가수지망생에게 홍보를 해주겠다며 홍보비를 받아 착복하는 사례가 빈번하여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실제로 시골에서 논을 팔아 서울에 가수지망생으로 학원에서 수강하다가 음반취입과 홍보비로 여러 번의 돈을 어렵게 마련해 지불했으나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하자 그의 아버지가 분개하여 칼을 품에 넣고 작곡가를 찾아와 응징하려한 사건이 있기도 했다.

다른 분야에 비해 비교적 기여도가 낮았던 방송을 통한 등용문은 1964년 최초의 민방 TV인 TBC-TV가 개국하고 1969년 MBC-TV가 개국하면서 많은 오락프로가 생겨나면서 넓어지기 시작했다. 특히 주말에 대형 쇼프로의 편성경쟁이 벌어졌는데 TBC의 ‘쇼쇼쇼’에 대해 MBC가 ‘OB그랜드쇼’로 맞불을 놓으면서 TV에 신인의 수요가 늘어났다. PD들은 늘어나는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쓸 만한 물건을 건지기 위해 당시에 시내 중심가에 ‘음악감상실’이라는 새로운 업소의 형태로 급부상하던 아마추어들의 집결지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쎄시봉’이라는 대표적 음악감상실에 드나들던 ‘쇼쇼쇼’의 담당 PD 조용호는 평소 눈여겨보았던 조영남을 과감히 발탁하여 출연시켰다. 성악적 발성을 기본으로 하는 힘있는 목소리와 뛰어난 곡의 소화력 때문에 조영남은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었다. 조영남과 단짝을 이루며 당시에 가요계에서 신인상을 수상했던 최영희는 TBC-TV의 ‘청춘잼보리’ 출연을 계기로 이봉조의 곡을 받아 가수로 데뷔했다. 이런 여건 속에서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통기타가수들이 방송을 통해 스타가 되는 경우가 늘어났다. 김정호는 먼저 스타가 된 어니언스의 주선으로 TBC의 패티김의 스페셜프로에 조용필과 함께 출연하여 대단한 반응을 불러일으킨 이후 가수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통기타가수들은 이전까지의 가수지망생들과는 달리 가수가 되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더 많은 대중앞에서 부를 기회가 생긴 것에 만족했다. 더 중요한 것은 스스로 외국곡을 번안해 부르거나 드물게 작곡해서 불렀기 때문에 이전까지 비리의 근원이었던 작곡가의 종속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더욱 유리한 점은 이전의 가수들은 화려한 의상을 입고 제대로 된 악단의 반주를 동반하느라 비용이 많이 들었다. 하지만 통기타가수들은 그저 수수한 평소의 옷차림에 통기타 하나 달랑 들면 그만이라 저비용에 높은 기동성을 보유하여 다른 가수집단보다 훨씬 출연에 용이하면서도 비리에 물들 염려도 적었다.

이런 여러가지의 가수등용문은 시대에 따라 부침을 달리했다. 미8군 무대는 1970년대 들어서면서 거의 사라졌고 음반사 콩쿨은 방송사의 신인선발로 대체되어갔다. 작곡가들의 위세는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음반기획사들이 생겨나면서 줄어들었다. 음악학원의 숫자가 줄어듬에 비례하여 실용음악학과가 대학에 생기면서 대중음악 교육이 대학으로 일부 넘어가는 현상도 생겼다. 음반사와 작곡가들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방송의 역할이 커지면서 방송에 출연정도가 가수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제 인터넷과 위성방송의 시대를 맞이하여 통신회사가 가수를 좌지우지하는 시대가 되지 않을까?


                                                                        김형찬 _ 대중음악연구가

3 Comments
어여쁜 나 2017.02.02 01:04  
이란이나 사우디아라비아 아프가니스탄 예멘등 극단적인 보수무슬림국가들일 경우 연예인이 된다는것은 그야말로 목숨거는것과 다를바없이 여길정도이니 짐작이 가죠~!!!! 특히 여성들일경우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종교지도자들의 협박에 시달려 결국 유럽권이나 미국으로 망명하는경우가 부지기수라네요? ㅡㅡ;;;;
fabiano 2017.02.02 09:04  
시대와 환경에 따라 좌우된 지난 과거의 일...제대로 세상의 일을 잘 아는 ...  (^.^)
어여쁜 나 2017.02.07 17:10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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