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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의 아버지 리승만의 성장기와 옥중활약

fabiano 0 992  

대한민국을 건국한 리승만박사는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능안골에서 조선왕조 태종의 맏아들 양녕대군의 15대손 리경선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리경선은 유학을 공부한 선비였고 어머니 김해 김씨는 학식이 풍부한 훈장 김창은의 외동딸로 당시에는 드물게 한문교육을 받은 여성이었다. 어머니가 꿈에 용을 보고 낳은 아이라 하여 어렸을 때 이름은 승룡(承龍)이라고 하였다.

 

1515068532617632.JPG 5대를 외아들로 이어온 집안이라 부모님은 특별한 기대를 가지고 승룡이 세살 때 교육환경을 위해 서울로 이사를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양녕대군의 사당인 지덕사가 있는 도동에 정착한 후로 승룡은 봉사손(奉祀孫)인 리근수옹이 세운 도동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며 근처의 우수현과 남산의 글자를 따서 호를 우남(雩南)으로 이름을 승만이라 하였다.

 

19세기를 4분한 마지막 분기에 이르러 한반도에는 제국주의의 파도가 크게 밀어 닥치고 있었다. 1876년에는 일본의 강압으로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어 한국에 대한 일본인의 무도한 행위가 해마다 늘어가 어린 승만은 1882년 6월에는 임오룬란을, 1884년 10월에는 갑신정변의 난리를 목격하였다. 그리고 승만은 당시 청운의 뜻을 품은 젊은이들에게 오직 하나의 방도인 과거에 응시 하였으나 제도상의 무리로 실패하였으며 1894년에는 갑오경장으로 이것도 폐지되고 말았다. 이러한 생활 가운데 승만은 16세 때 그 당시 풍습에 따라 어른들의 중매로 박춘겸의 딸이며 나이가 동갑인 박씨와 결혼을 하였다.

 

청년 리승만은 어느덧 개화의 물결에 당면하게 되었고 1895년 4월 서당 친구인 신긍우 형제의 권고로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리승만은 영문부에 적을 두고 신학문을 배웠으며 8월에는 배재학당 초급 영어반에서 영어를 가르치게 되었다. 그는 1897년 7월 8일, 정부의 대신과 서재필, 미국 공사, 선교사 및 영어학교 학생 등 600여명이 참석한 배재학당 방학식에서 학생대표로 '한국의 독립'이라는 제목의 영어 연설을 하여 좋은 평을 받았다.

 

서재필은 일찌기 갑신정변의 실패로 미국에 망명하였으나, 1896년 1월에 귀국하였으며, 4월에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5월부터 배재학당에서 특별 강연을 하게 되자 학생들은 그의 개화 사상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하여 리승만을 비롯한 학생들은 협성회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학생단체를 조직하여 토론회를 가지고 [협성회보]를 발행하였다. 리승만은 이 회의 간부와 회장직을 맡아 활약하였으며 논설을 집필하였다. 그러나 이 회보가 정부의 부패를 공격하고 정치의 개혁과 외세의 배제를 주장하게 되자 정부와 학교의 간섭이 심해져서 리승만을 비롯한 회원들은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회보의 이름을 [매일신문]이라 고쳐, 1898년 4월 9일부터 배재학당과 무관하게 우리나라 최초의 일간지로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에 그는 [제국신문] 창간에 참여하여 민족적 자주정신의 배양과 한글 전용에 의한 일반 대중의 지식 계발을 사시(社是)로 개화기 민중계몽의 선봉이 되었다. 이와같이 리승만은 자신이 새로운 지식을 얻는것과 동시에 그것으로 일반 국민을 계몽해야 하는 개화기의 무거운 책임을 진 선구자 였다. 그리하여 붓을 들어 나라를 구하기 위한 정치를 논하고 열국의 침략을 국민 앞에 일일이 고발하면서 그의 현실 정치에 대한 적극적 참여는 당연한 것이 되었다.

 

이러한 리승만의 정치활동은 1896년에 시작한 독립협회로 하여금 1898년 3월부터 민중을 모아 만민공동회를 열게 하여 외세 배격으로 국권을 수호하며 정치를 개혁하려는 구국운동으로 전개 되었다. 그는 이 회에서 총대의원으로 크게 활약하며 많은 성과를 거두었으나 정부내 수구파(守舊派)의 모략과 일본측의 농간으로 탄압을 받아 1898년 12월에 강제로 해산을 당하였다. 그리고 반정부 혐의로 체포되었던 리승만은 탈옥에 실패하여 호되고 잔인한 고문을 당하였다.

 

1515068532728499.JPG 이로부터 그는 무거운 형틀을 쓰고 사형의 날만을 기다리는 죽음과의 엄숙한 대면속에서 기독교의 깊은 신앙에 도달하였다. 그 후 리승만은 종신 징역의 판결을 받아 유기감방으로 옮겨지고 간수장의 호의와 미국 선교사들이 차입해 주는 영문잡지나 서적을 통해 영어를 더욱 익히고 세계정세를 파악하는 한편 여러가지 제약을 받으면서도 옥중의 전도와 교육 및 도서실의 설치등 적극적인 계몽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1900년에는 [중동전기본말(中東戰記本末)]을 순 국문으로 번역하고 1901년 초부터 1903년 4월까지는 "데국신문"의 논설을 집필하였으며 [신학월보]에 옥중기를 실었다.

 

1904년 2월에 러시아와 일본간에 전쟁이 일어나자 리승만은 조국의 앞날을 염려한 나머지 그때에 집필하던 영한사전을 중지하고 독립을 회복하는 방안을 국민에게 널리 알리고자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이 저술은 그 당시 일본의 감시로 국내에서 발간할 수가 없어 결국 1910년에 미국에서 출판되었는데, 그의 애국 애족하는 자주독립의 정신과 자유평등의 민권 사상이 조국 근대화의 이론과 함께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이미 이 시기에 앞으로 새롭게 세워져야 할 우리 나라의 이상적 모습을 생각하고 이것을 저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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