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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은 따로 없어, 북한이 바로 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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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연쇄인터뷰-3] 북한 지하교회 여성신도 김희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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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서울 모처에서 만난 김희진(가명·27세·2003년 탈북)씨는 얼마 전 북한을 탈출해 현재 중국에 있는 가족들의 안전을 고려, 얼굴과 자세한 인적 사항과 관련된 내용을 공개하지 않는 조건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프리존뉴스
북한은 김일성과 김정일을 '태양신'(神)으로 떠받드는 전 세계 최악의 ‘신정’(神政)국가다. 한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북한의 기독교인들은 김정일 정권에 의해 모진 박해를 받아왔다.

그러다보니 북한은 지난 2003년 이래 5년 연속 기독교 박해국가 1위로 꼽혔다. 국제선교 단체인 ‘오픈도어즈’(Open Doors)는 최근 전 세계 기독교인들의 법적 지위와 실제 상황의 차이 등 각종 변수를 중심으로 기독교 박해국가 리스트 50개국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북한과 사우디아라비아는 5년째 부동의 1, 2위를 지켰으며 이란·소말리아·몰디브·예멘·부탄·베트남·라오스·아프가니스탄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이외에도 북한은 최근 기독인권 운동단체인 ‘인터내셔널 크리스천 컨선’(ICC)이 지목한 기독교 박해국 10개국에서도 1위를 차지해 지구상에서 가장 기독교 복음을 거부하고 있는 곳으로 드러났다.

북한의 김씨왕조는 기독교를 체제위협 요소로 간주하고 기독교인들을 반체제 인사 및 불순분자라는 혐의를 적용해 3대까지 체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오픈도어즈는 지난해 기독교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체포,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총살 또는 매질로 최소 20여명 이상의 기독교인들이 죽은 사실을 확인하기도 했다.

생지옥이나 다름없는 북한 수용소에는 1만명이 넘는 기독교인들이 수용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다른 수감자들보다 더욱 비인간적인 취급을 당해 극심한 고문에 노출돼 있으며, 임신한 기독교인 여성들의 경우 강제 낙태를 당하고 있다.

<프리존뉴스>는 이 같은 북한의 심각한 기독교도 탄압을 인지하고 수소문 끝에 말로만 듣던 북한의 지하교회 여성 신자를 만났다.

25일 서울 모처에서 만난 김희진(가명·27세·2003년 탈북)씨는 얼마 전 북한을 탈출해 현재 중국에 있는 가족들의 안전을 고려, 얼굴과 자세한 인적 사항과 관련된 내용을 공개하지 않는 조건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프) 북한에는 종교의 자유가 없는데 어떻게 기독교를 믿게 됐는지?

(김) 할아버지와 할머니 모두 일제 때부터 교인이셨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만나게 된 동기가 기독교도였기 때문이라 들었다. 김일성이 북한의 실권을 잡으면서 우리 집안사람들은 반동으로 몰렸고 함께 하나님을 믿었던 이웃들과 같이 평안도 오지로 추방당했다. 이처럼 가족들이 모두 교인이다 보니 나도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만나게 됐다.

(프) 가족이외에 함께 예배를 본 사람들은 없었는지 궁금하다.

(김) 함께 평안도로 추방당했던 할아버지·할머니의 지인들이 있었다. 이들 모두 우리 집 근처에 살고 있었는데 이 분들이 다 모이면 보통 7~10명이었다. 예배를 이끈 것은 주로 우리 할머니였다. 우리 집은 당시 철도역 근교에 있었기 때문에 사방이 개활지였다. 언제 보위부 요원들이 들이닥칠지 몰랐기 때문에 동생과 나는 어른들이 예배를 보는 동안 망을 봤다.

(프) 예배를 드리려면 성경책이 필요했을 텐데?

(김) 할머니가 일제 강점기부터 가지고 있었던 한자로 된 성경책을 사용했다. 할머니는 이 성경을 한글로 번역해 가족들에게 읽어 주셨다.

(프) 일주일에 몇 번이나 예배를 드렸나?

(김) 예배는 대개 어른들의 일이 모두 끝난 저녁에 드렸다.

(프) 비밀예배가 북한 당국에 의해 발각된 것은 언제였는지?

(김) 김일성이 죽기 전 해인 93년 가을이었다. 예배 보러 온 이웃 아저씨가 우리 집으로 들어오는 것을 낯선 사람이 지켜보다 갔다는 적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 사실을 어른들에게 전했더니 그 아저씨도 누가 나를 따라오는 것 같았다고 하는 게 아닌가. 얼마 후 아버지에게도 잘 모르는 당 간부들이 자꾸 아는 척을 하고 이것저것 묻더라며 수상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서 같은 해 10월로 기억되는데 어느 날 학교 갔다 집에 와 보니 집안이 온통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옷가지 등이 여기저기 내팽개쳐져 있었고 방바닥은 온통 발자국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가족들이 모두 울고 있었다. 다음날 할머니와 언니·오빠들이 차례로 보위부에 가서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그런데 지금생각해 보니 아버지의 그날 행동이 예전 같지 않았다. 그날따라 아버지 행동이 참 이상했다. 아침에 학교를 가는데 길 앞까지 나를 배웅해 주셨다. 그리고 나를 꼭 껴안아 주셨다. 그리고는 내게 잘 다녀오라는 말을 남기셨다. 아버지가 나를 무척 사랑해주셨다는 건 알았지만 그게 아버지와의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프) 이후 아버지의 소식을 듣지는 못했는지?

(김) 수용소로 끌려갔다는 정도만 알고 있다. 그 이후의 아버지 소식은 모른다.

(프) 그 이후 가족들은 어떻게 됐나?

(김) 할머니는 아버지가 끌려간 후 보위부 요원들에게 뺨을 맞는 등 모진 고초를 겪으셨다. 그리고 나서 정확히 보름 만에 조용히 돌아가셨다. 돌아가시는 그날도 할머니는 밭에 나가 일하셨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땅에 묻어놓은 성경책을 우리더러 몰래 태우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다. 성경책이 없어도 하나님을 진심으로 영접하면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셨다.

할머니는 또 “김일성-김정일이 정권을 잡기 전 북한은 기독교가 번성한 곳이었다”며 “지금은 힘들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믿음을 잃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1년 뒤 다시금 함경도 산간 오지로 추방됐다.

(프) 추방지에서의 생활은 어땠는지?

(김) 아버지가 함께 살 때는 그래도 직물업을 해서 먹고사는 것은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함경도로 추방당한 시기가 ‘고난의 행군’ 때와 시기가 맞아 떨어져 모진 고생을 했다. 우리 가족 모두 판자로 만든 집에서 시래기 등을 넣은 죽을 먹고 살았다. 난 이게 제대로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눈물 참 많이 흘렸다.

(프) 탈북과정이 궁금하다.

(김) 중국에 살던 조선족 출신의 친척 목사님이 2003년 사람을 보내 우리 가족들을 도와줬다. 처음에는 보위부 사람인 줄 알고 그냥 모른 척 했다. 그런데도 계속 우리 집을 찾아와 안부를 물어보고 도와주려 했다. 어머니가 그 사람을 “한번 믿어보자”고 했다. 이후 그 사람이 가져온 휴대폰을 통해 중국에 있는 조선족 목사님과 통화를 했다. 목사님은 우리 가족에게 북한에 있지 말고 중국 국경지역하고 멀지도 않으니 탈북하라고 했다.

(프) 그래서 어떻게 했나?

(김) 당시 어머니가 심한 영양실조 상태였다. 우리 형제들은 어머니를 북한에 혼자 내버려두고 탈북을 할 수 없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그런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목사님이 “평생 그곳에서 살 수는 없다. 너희들은 아직 나이가 젊으니 탈북해서 좋은 세상에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이에 나는 오빠와 어머니를 두고 언니와 함께 국경을 넘었다.

(프) 중국에서의 생활은 어땠나?

(김) 중국 공안을 피해 몰래 언니와 함께 교회를 다녔다. 교회에 걸려있는 커다란 십자가가 보이고 찬송가가 울려 퍼지는데 두고 온 가족들 생각이 나 눈물이 쏟아졌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세상이 이렇게 다를 수도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국과 지옥이 따로 있는게 아니었다. 북한이 바로 지옥이었다.

(프) 탈북 후 남한 행 도중 언니가 중국 공안에 붙잡힌 것으로 알고 있는데?

(김) 나하고 언니, 그리고 누군지 모르는 탈북 소년 한명과 안내인이 함께 중국과 몽골 국경(사막지대)을 넘는 도중 매복한 중국 공안에 발각됐다. 그래서 모두 흩어져 도망쳤다. 나는 도망치다가 모래에 구덩이를 파 몸을 숨겼다. 그리고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렸다.

아침에 구덩이에 나와 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중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어서 나 혼자 국경을 넘어 몽골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몽골군에게 붙잡혀, 이후 한국으로 들어왔다. 언니 소식은 한국에 들어와 알게 됐는데 그때 중국 공안에 붙들려 북송됐다고 들었다. 지금 언니는 북한의 강제 수용소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프) 북한에 있는 어머니와 오빠 소식이 궁금하다.

(김) 어머니와 오빠는 탈출을 도와주신 목사님의 도움으로 현재 중국에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자세하게 말할 수 없다. 미안하다.

(프) 남한에서의 생활은 어떤가?

(김) 북한에 있을 때는 하나님을 믿었다는 이유로 ‘새끼반동’이라고 놀림을 받았다. 그런데 남한에 와보니 우선 내 마음대로 교회에 나가 성경책도 볼 수 있고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게 너무 좋다. 대학을 다니면서 친구도 많이 사귀었다. 남한 생활은 너무 행복하다. 그런데 가족들 생각만하면 서글프다. 나만 혼자 행복한 게 아닌가 하고 자책감이 들 때가 많다.

(프) 남한 기독교계에는 김정일 정권을 옹호하는 목회자들이 있다. 이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김) 그 사람들 북한에 가면 하루도 못산다. 북한에 칠골교회와 봉수교회가 있다는 사실을 중국에 가서야 처음 알았다. 그 만큼 북한 사회는 반(反)기독교적이다. 그 사람들이 진정으로 북한 사람들을 위한다면 김정일 정권이 하루라도 빨리 무너져야 한다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믿을 수 있는 자유가 뭔지 모르는 사람들은 북한에 가면 알게 될 것이다. 지옥은 죽어서만 가는게 아니다. 생(生)지옥이 있는데 그곳은 바로 북한이다.

(프) 앞으로의 계획은?

(김) 지금 일반대학을 다니고 있는데 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원에 진학해 신학을 공부하고 싶다. 그리고 통일이 되면 북한에 가서 선교를 하고 싶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내게 준 사명이라 생각한다. 그 때까지 열심히 공부할 생각이다.

김필재 기자 (spooner1@freezonenews.com)
 
4 Comments
어여쁜 나 2016.12.23 12:34  
북한에서 존재하고 있는 지하교회들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논란이 있겠지만 제가 다니는 교회서도 북한선교를 하는 교회인지라 지하교회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고 그러거든요?
fabiano 2016.12.23 16:44  
공산사회주의는 종교를 아편, 마약 정도로 취급한다. 고로, 북한에서종교는 존재할 수 없으며 대외적으로 눈가림식으로만 있다.
어여쁜 나 2017.03.05 21:07  
물론 북한에서 살다온 탈북민들중에서 자기네나라에서 지하교회라는 존재조차 아주모르는분들도 적지않게 계시고 심지어 탈북해서 대한민국에 와서야 교회라는 존재를 처음으로 알게된분들도 적지않았거든요? ㅡㅡ;;;;;;
어여쁜 나 2017.03.06 12:20  
이것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지말아주세요~!!!! 탈북자들마다 성격이 다르니깐요~!!!!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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