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site-verification: naverf83ad7df1bcc827c523456dbbc661233.html 박정희(朴正熙) 이야기(1)
홈 > 블로그 > 내 블로그 > 이야기
내 블로그

박정희(朴正熙) 이야기(1)

fabiano 0 1295  
●구한말 사진 속에서 걸어나온 사람이…                

작은 키에 볼품없는 체구, 마르고 거무튀튀한 얼굴엔 세월의 고난이 짙게 드리워 있다. 흰 바지 저고리를 입었다면 영락없이 구한말 시대의 사람이다. 현대적인 모습이라곤 찾아볼수 없는, 모진 역사의 핍박과 가난에 찌든 구한말 그 시절 그 풍경 속에서 걸어나온 모습, 그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세련미라곤 찾아볼 수 없고, 노래를 불러도 <황성옛터> 같은 옛시절의 애잔한 정서 속을 맴돌 뿐이다. 그럴 것이다. 1917년생, 박정희 시대의 그들은 식민지 출생이다. 태어날 때부터 조국이 없었다. 바로 이들 식민지 세대가 해방 이후 조국을 위해 한맺힌 열망을 쏟아낸 것이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개발연대였다.

불가사의가 여기에 있다. 진취적인 기상과 달리 저렇게 구시대적인 모습의 인물이 어찌하여 빈곤의 농업국을 근대산업국으로 변모시키는 질풍노도의 숨가쁜 신시대 행진을 이끌었으며, 돈도 없이 자원도 없이 약육강식의 냉엄한 국제질서 속에서 불쌍하게 버려져 있던 조국을 어찌하여 당당히 일으켜 세웠는지가 경이롭기만 하다.

박정희, 그와 동시대에 살았었음을 느끼는 것은 그의 굽히지 않는 허리, 다리를 쭉쭉 곧게 내뻗는 걸음걸이, 그리고 가끔 먼산을 바라보고 무엇인가를 숙고하는 고독한 모습이 주는 영감(靈感)과의 만남이다. 그리고 그 시대에 땀 흘렸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 시대를 함께 호흡하고 있고, 한강의 기적은 앞강물로 일부 흘러가 버렸으되 또 일부는 지금도 흐르고 있어 뒷강물로 이어지고 있다. 단절은 없다. 역사에는 단절이란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는 나날이 새롭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또 내일이 다르다. 그러나 어제 없는 오늘이 없듯이, 항상 새로움은 과거로부터 나온다는 것이 역사 경험에서 얻어진 교훈이다. 그것은 어느 민족이나 정치 집단이 과거사를 부정하고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하다 못해 ‘빨리빨리’가 과거 군사독재의 산물이고 병폐라고 청산을 주장해 오더니, 경부고속도로를 닦았던 30여년 전의 ‘빨리빨리’가 인터넷이라는 정보고속도로 시대에 한국을 디지털왕국으로 만들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을 것이다. ‘빨리빨리’가 무조건 좋다는 것은 아니로되 고칠 것은 고쳐가면서 후세대는 선세대의 성과를 이어받아 역사를 발전시키는 데 임무가 있음에도, 그런데 아직도 일부 지식층과 정치 세력은 과거를 깡그리 부정하는 자학사관(自虐史觀)에 매몰되어 있으니 문제라는 것이다.

●필리핀으로 간 <육사 교장의 편지>

아마 인터넷 서핑을 하면서 <육사 교장의 편지> 글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을 눈물짓게 했다. 특히 10대, 20대들이 받은 충격은 크고 놀라웠다. 단순하고 즉흥적인 오락성을 선호하는 그들이 돌연 역사 앞에 숙연한 모습을 보이면서 ‘박정희’를 다시 배우고자 하는 열망을 인터넷에 뜨겁게 토해내고 있다.
그런가 하면 박정희를 반대하는 이른바 반박론자(反朴論者)들의 주장이 맞서 있음도 사실이다. 특히 <육사 교장의 편지>에 대해서 논리정연하게 오류를 지적하는 글도 나돌고 있다. 그것은 5.16후 미국에 간 박정희를 케네디가 만나주지 않았다는 것, 미국이 원조를 중단했다는 것, 그리고 당시 우리 국민소득의 액수와 유엔 회원국 가운데 맨 꽁무니에서 몇번째라는 숫자가 틀린다는 것이다. 이런 오류를 지적하면서 “거짓의 눈물을 뿌리지 말라” “거짓의 역사를 가르치지 말라”며 <육사 교장의 편지>가 담고 있는 내용 전체를 거짓으로 매도하고 있다.

예컨대 대학 논술고사에 “<육사 교장의 편지>가 지니는 역사적 의의를 말하라” “그때 대통령과 광부, 간호원들이 애국가를 부르며 흘렸던 눈물이 한국 경제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논술하라” 이런 문제가 출제된다면 무어라고 쓰겠는가? 위와 같은 오류를 끄집어내어 청산되어야 할 새빨간 거짓의 역사라고 할 것인가?

얼마 전, 필리핀 유학생 출신 한국 젊은이의 글이 필리핀 유력 일간지 <마닐라 타임스>에 소개되어 눈길을 끌었다. 이 젊은이는 한국의 박대통령이 서독에 가서 우리 광부, 간호원들과 울었던 일화를 소개하면서 “필리핀의 진짜 문제는 부정부패가 아니라 애국심의 부족이다”라고 따끔하게 충고하고 있는데, 이 글이 많은 필리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고 있다고 신문들은 전하고 있다.
여기서도 보면 “대통령과 광부, 간호원들의 눈물에 감동한 독일 정부가 차관을 제공하게 됐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광부, 간호원들의 임금을 담보로 차관을 제공키로 했던 사실과 차이가 나는 오류는 발견되고 있다. 그렇다고 이를 빌미로 이 젊은이의 글이 거짓이라고, 필리핀이 속은 것이라고 매도하겠는가?

반세기 전의 필리핀과 한국은 오늘과 딴판이다.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가는 부국이었다. 6.25때 미국 다음으로 가장 먼저 전투병력을 보내주었고, 서울의 장충체육관과 미국대사관, 문화관광부 건물을 지은 것도 필리핀 건설회사들이었다.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만한 기술도 없었고, 돈도 물론 외국에서 빌어야 했다. 본 적도 없는 커다란 조개껍질을 엎어놓은 듯한 신공법의 장충체육관이 완공되었을 때는 박정희 의장(당시)이 축사를 할 정도로 우리에게는 대단한 경사였던 것이다.

강자의 우월감, 약자의 열등감은 국가간에도 바를 바 없다. 1960년대 중반, 박정희 대통령은 동남아 순방외교를 할 때 필리핀에 가려 했지만 그쪽이 묵살하는 바람에 성사되지 못했었다. 그 이후 마닐라에서 베트남참전국회담이 열렸을 때는 한국 대통령에게 배정된 방이 미국무장관의 방보다도 작았다. 당시 필리핀 대통령 마르코스가 밉다기보다 국력의 차이, 힘없는 나라가 겪는 설움이 그러했다.

필리핀 기업이 지은 장충체육관, 거기서 벌어진 프로복싱 김기수 세계타이틀 도전 경기의 챔피언 개런티 5만불을 정부에서 지불보증해 주었야 했으니, 그렇게 기막히게 살던 시절에 외국에 팔려나가 노동을 하는 광부, 간호원들과의 만남에 어찌 눈물이 안 날 수 있겠는가. 국무총리 공관에서 연탄을 때던 시절이었으니 말해 무엇하랴.

그러던 두 나라가 반세기 후에 뒤바뀌어, “필리핀인들이여, 당신들은 과연 조국을 위해 울어본 적이 있는가?”라고 한국 젊은이는 충고하고 있다. 독일에서 뿌린 한국인들의 눈물, 즉 <육사 교장의 편지> 부분이 필리핀 사람들을 일깨우고 있음을 보노라니 역사 순환의 도도한 흐름이 이 시대 우리들의 가슴 속을 교훈으로 꽉 채워 관통하는 느낌이다.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안목, 정치적 편견과 아집, 비타협적 맹목성이 역사를 오도해선 결코 안될 일이다. <육사 교장의 편지>에 대해 반박론자들의 주장이 그렇게 자신있다면 독일에, 그리고 필리핀에 그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건 아니다. 우물 안 개구리들의 선전 선동일 따름인 것이다. 문제는 과거를 무조건 부정하는 정치 논리다.

●박정희와 노무현 두 모습

금년 4월 노무현 대통령이 독일에 갔었다. 독일 하면 떠오르는 것이 광부와 간호원, 그리고 경제개발의 소중한 종잣돈을 빌려준 고마운 나라다. 그런데 독일 정치인들을 만나고 우리 동포들도 만나면서 노무현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인연을 말하지 않았다. 독일 방문 전후해서 청와대 브리핑이나 국내 신문기사, 어느 누구의 기고문에서도 독일 방문을 이야기하면서 우리 광부의 ‘광’자도 꺼내지 않은 것으로 보아 노무현 대통령은 광부와 간호원 얘기를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음이 확실해 보인다.
국가 원수가 외국을 방문하면 그 나라와의 과거 인연을 덕담으로 말하고 그곳의 우리 동포들이 어떻게 사는지 살피고, 적어도 독일에서라면 “과거에 여러분들이 고생해 주신 덕에 우리나라가 이만큼 컸습니다”라고 우리 교민들에게 감사와 위로, 격려를 해주는 게 도리일 텐데, 노무현 대통령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다.

광부와 간호원들은 1963년부터 77년까지 약 2만명이 가서 계약기간이 끝나 고국에 돌아온 사람은 8천명이고, 미국과 캐나다, 스위스 등 제3국으로 간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인원이 현지에 남아 있다고 전한다. 현재 독일 교민 3만5천명 중의 제1세대로 황혼기를 맞고 있고, 물론 세상을 뜬 분들도 있다. 알다시피 이들은 거의 지독한 내핍으로 견디며 봉급을 본국에 송금했고, 그것이 국가 1년 총수출액의 36%에 해당할 만큼 크게 국가경제에 기여했다. 어느 신문에 보니 지금 우리나라에 와 있는 몽골인 근로자의 경우 그들 1만5천명이 본국에 송금하는 돈이 몽골 GDP의 10%를 차지한다고 하니, 우리 광부와 간호원들이 그러했음을 실감케 된다.

독일의 광부 간호원 출신 교민들은 성공한 사람도 적지 않지만 수입을 거의 고국 가족에게 부쳤기 때문에 지금도 어렵게 사는 분들이 꽤 있다고 한다. 그래도 단 하나, 그들의 고생이 고국 대한민국을 일으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는 보람 하나 갖고 일평생을 살아왔는데, 노무현 대통령 생각은 그게 아니었으니 “그 사람 한국 대통령 맞아?”라고 묻고 싶었을 것이다.

게다가 노무현 대통령은 특별기에 145명을 태우고 각종 음식 재료를 80여개의 가방에 채워갖고 가서는 하루 묵을 호텔 치장을 하는 것까지 씀씀이가 중동 산유국 왕자들 같았다고 그곳 신문에까지 화제가 될 만큼 굉장했었던 모양이다. 대통령 하루 외유 비용이 많을 때는 수십억이라고 하니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그러고 보면 박정희 대통령은 참 불쌍했다. 그 당시 독일에 가는 일행 36명의 일주일 비용 6만불을 정부 예비비에서 대체해야 했고, 비행기값도 없어서 서독 정부가 항공료를 대주어 루프트한자 여객기를 타고 외국인 여행객들과 함께 그들이 들르는 곳 다 들르면서 지구 반바퀴를 돌아서 가야 했다.

그때 광부, 간호원들과의 만남을 육영수 여사는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고대하던 우리의 광부들과 간호 학생들을 만나는 날이었다. … 웃음을 주고 위로를 주겠다고 그렇게도 마음 속에 단단히 생각했던 나의 계획은 엉뚱하게도 그들을 대하는 순간 검은 눈동자와 황색 피부의 낯익은 우리 젊은이들이 환성 속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아프도록 가슴에 맺혀오는 무엇인가 뭉클한 감정이 솟아오르며, 시야가 뽀얗게 흐려지는 것이었다. 분별없이 마구 흘러내리는 눈물을 들킬세라 참고 참았으나 걷잡을 수 없는 격정은 애국가의 울려퍼지는 소리를 핑계 삼아 나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흐느끼게 하고 말았다. 그곳에 모인 간호 학생들을 눈이 빨갛게 되도록 울렸고 또 모든 사람의 가슴을 두드린 그 순간을 나는 지금도 또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朴木月 지음 <陸英修 女史>에서)

●눈물의 역사를 잊어서는 안되는 이유

우리 광부들이 대통령에게서 받은 선물은 파고다 담배 5백갑, 한 사람 앞에 한갑씩이었다.
담배 한갑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터이다. 60년대 초반 전라남도의 경우, 도청 공식집계에 의하면 절량(絶糧) 농가가 16만4천호에 95만명이 대책없이 굶주리고 있었고, 부황증 때문에 제대로 걷지 못하는 이들이 면사무소 앞에 모여들고 병원 앞에는 피를 팔려는 젊은이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고 신문은 전하고 있다. 전남에서만도 1백만이 굶주리고 있는데, 그런 나라의 대통령이 외국에 나가 동포들과 함께 애국가를 부를 때 그 심정이 어떠했는지를 <육사 교장의 편지>는 참 아프게 짚어내고 있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도 자기의 10대 시절 청와대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었다.
“60년대 가뭄이 심했던 어느 날, 아버지께서 지방 순시를 다녀오신 후 저녁식사에 온 가족이 모여 앉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식사를 하지 못하셨습니다. 어머니께서 왜 식사를 안하시냐고 물으시니까 한참동안 천장만 바라보시다가 말씀하셨습니다. 지방에 가서 만난 아이들이 얼굴에 온통 버짐이 피어 있었고, 빡빡 깎은 머리마다 기계충이 옮아 있었고, 그 아이들의 어머니들은 먹지 못해서 얼굴과 손발이 퉁퉁 부어 있었다고 하시고는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버리셨습니다. 나가시는 뒷모습에서 아버지 어깨는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저희 식구들은 그날 아무도 저녁밥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 아이들의 맑은 눈동자 속에 배어 있는 배고픔과 삶에 찌든 아이들 어머니의 슬픈 눈동자를 아버지께선 외면하지 못하셨을 겁니다. 아마 돌아가실 때까지 외면하지 못하셨을 겁니다.”(2004년 3월30일 TV방송연설)

이 말을 하면서 그는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그것은 그의 눈물이 아니었다. 우리 모두의, 부모님들의 애옥살이, 배고픔, 모진 비바람, 가슴에 맺힌 그 세월의 설움이 녹아 내리는 눈물이었다.
눈물은 강하다. 눈물은 모진 결심을 낳고 강한 힘을 용솟음치게 한다. 그리하여 기쁨을 가져올 때 비로소 눈물은 보석처럼 빛난다. 눈물의 과거는 그래서 결코 잊어서도, 청산해서도 안될 일이다.

지금, 가난뱅이 시절이 언제였던가 싶게 세월이 좋아지긴 했다. 우리나라가 커지긴 커진 모양이나 그렇다 해도, 그리고 1만불의 늪에 빠져 질퍽거리기가 언젯적부터인데 그렇다 해도, 노무현 대통령 팔자가 노들강변 봄버들처럼 휘늘어진 모양이긴 하나 그렇다 해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지난날을 망각하거나 부정하는 모습으로는 국민 앞에, 역사 앞에 진실해 보일 수가 없다.

독일이 어떤 나라인가. 10년 먹을 것을 벌어놓지 않으면 땡전 한푼 쓰지 않는다는 지독한 나라라고 하지 않던가. “야, 한국, 너희가 언제부터 잘 살았어?”라고 말하듯 한국 대통령의 화려한 외유를 비꼬는 신문기사를 보고 우리 교민들의 마음이 오죽했을 것인가. 물론 그곳 교민사회도 국내처럼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파벌이 대립과 갈등을 보인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광부와 간호원을 ‘외면’한 것은 “저 사람 대통령 맞아?”라는 말이 나올 만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과거보다는 미래를 중시해서인지 한국인 인기 스포츠 스타들을 만났다. 분데스리가의 차두리 선수와 또 그곳 프로 아이스하키팀에서 활약하는 현종범 선수들이다. 그런데 대통령을 만나고 바로 귀국한 현종범 선수는 자기의 부친이 파독 광부였다고 밝히면서 박정희 대통령과 악수했던 부친의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말했다.
“30년 전(40년 전의 착오) 박정희 대통령이 탄광에서 일하셨던 아버지와 악수를 하신 적이 있어요. 당시 아버지는 광부 복장에 숫검댕이 손이었죠. 30년이 흐른 지금, 전 말쑥한 정장 차림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잘 키워 주신 부모님에게 정말 감사하다고 생각했어요”(2005년 4월17일 연합뉴스)

●이런 젊은이들이 있어 미래가 밝다

앞의 필리핀 유학생과 현종범 선수는 20대들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이상한’ 독일 방문에 견주면 우리 젊은이들은 훨씬 건강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음에 안도하게 된다. 과거의 가난이 부끄럽지 않다는, 눈물의 역사를 잊지 않고 자랑스레 간직하겠다는 이 젊은이들의 긍지에 바로 역사의 희망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외국에 나갈 때마다 수행원과 기자들에게 분수에 맞게 행동할 것, 나라 체면 깎이는 일을 하지 말 것을 마치 선생이 학생들에게 가르치듯 당부하곤 했다. 너무나 가난했기에 돈을 빌려달라고 구걸하면서 설움도 많이 겪었지만 그는 무척 자존심이 강했다. 60년대에 남의 나라 비행기를 빌려 타고 미국, 독일, 동남아 등지를 몇번 다니고 나서는 “국민이 밥술이나 먹게 되기 전에는 외국에 나가지 않겠다”고 혀를 깨물 듯 다짐을 하고, 경제개발 열차에 국가적 역량을 쏟아붓고 70년대를 무섭게 무섭게 질주해 갔다. 결국 태극 마크가 달린 국적기를 한번도 타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지만, 그래도 “괜찮아”라고 말할 사람이 바로 박정희라는 지도자다.

흔한 말로, 박정희가 밥솥에 맛있는 밥을 지어놓고 먹어보지도 못한 채 가니까, 뜬금없이 전두환이 나타나 다 먹어버리고 노태우가 누룽지마저 긁어 먹는 바람에 화가 난 김영삼이 밥솥을 내던져 망가뜨려 버렸으며, 김대중이 부랴부랴 신용카드를 긁어 밥솥을 다시 마련해 놓았더니 이번에는 노무현이 코드를 잘못 꽂는 바람에 다시 망쳐버렸다나 뭐라나, 이런 유머가 시사하듯이 박정희 대통령은 개발연대의 성과물에 자신이 참여하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그래도 자기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스스로 운명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성싶다. 그렇다. 목수는 자기 집을 짓지 않는다.

다 괜찮은데, 참 흐뭇한 일이 있으니 바로 필리핀 유학생이나 아이스하키 선수 같은 젊은이들이다. 역사에 긍지를 갖고 있는 젊은이들을 그는 참 기뻐할 것이다.

그가 멋적게 웃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역시 세련미가 없다. 시골 읍내 국밥집에서 막걸리나 마실 사람이다. 촌티 나는 그런 사람이 어찌하여 미래를 꿰뜷어보고 나라를 지휘해 갔는지 불가사의하기만 하다. (*) 

                                                                                  

                                                                                    글쓴이 : 김인만 ( kim1143 )
 
0 Comments
Hot

인기 이왕 산 김에 한 20년 더 살자구?

댓글 0 | 조회 1,471
Category
State
  • 현재 접속자 49 명
  • 오늘 방문자 564 명
  • 어제 방문자 1,445 명
  • 최대 방문자 14,296 명
  • 전체 방문자 1,328,982 명
  • 전체 게시물 10,948 개
  • 전체 댓글수 35,462 개
  • 전체 회원수 72 명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