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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시상영극장

fabiano 0 1258  

작은 영사 사고가 났다. 낯선 기자의 출현에 영사 기사님이 잠깐 실수를 한 모양이다. 옛날 같으면 휘파람도 불고 시끄러웠을 테지만 관객이라야 고작 한두 명뿐이니 조용하다. 하루 종일 20명이 채 안 되는 손님들은 휴게실 TV 앞에 몰려있거나,할 일 없이 만화책만 뒤적거리거나,텅 빈 휴게실에서 혼자 바둑을 두거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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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영화보는 곳'이라는 등식은 철 지난 에로물에 점령당한 2본 동시 상영관에서는 깨진 지 오래됐다.
 범일동 '친구의 거리'에 나란히 있는 삼일극장과 삼성극장. 국제고무 삼화고무에서 일하던 여공들이 일요일이면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밀고 당기기도 했다는 곳.

명절이면 시내 개봉관보다 손님이 북적거렸다는 곳. 그 곳에서 화려했던 기억은 삐걱거리는 의자처럼 낡아버렸다. 그곳에서 시간은 멈추거나 뒷걸음질치거나 했다. 삼일극장 2층 숙녀화장실 앞은 속이 터져 흉물로 변한 긴의자들로 막혀 있고, 삼성극장 화장실에서 큰 일이라도 볼라치면 물 한동이를 부어야 했다. 비가 오면 스크린에서도,천장에서도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그렇게 복도에 고인 물엔 절정에 오른 여인네의 나신이 투영됐다.
 
구포에서 빈 택시로 달려왔다는 한영태(59)씨. 삼성극장 사장인 그는 3년 전부터 택시를 몬다. 36년 동안 선전·영업부장으로 청춘을 바쳤던 극장을 지난 97년 인수했다. 수십년을 동고동락한 직원들 월급이라도 벌어줄 요량이었지만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적자에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다. 며칠 전 건물주인에게 더 이상 못하겠노라고 최후통첩을 했다. 그가 손을 떼면 극장이 문닫을 것은 알지만….
 
1962년 10월 1일 문을 연 삼성극장은 그렇게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60년도 더 된 바로 옆 삼일극장도 늦어도 내년이면 문을 닫아야 한다. KTX 철도건널목 입체화 지하차도 공사로 이미 보상협의가 진행 중이기 때문.
타의로 철거되지 않더라도 오래된 극장들은 자본의 논리를 앞세운 멀티플렉스의 등장으로 이미 사망선고를 받은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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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네이버 30갤러리 줌인70)



대형찜질방의 등장과 함께 동네목욕탕이 사라져가는 것처럼. 악순환이다. 관객이 들지 않으니 에어컨도 난방도 틀 생각도 못하고,그렇게 덥고 추운 곳에 관객이 들 리 만무하다. 3천원의 싼 값으로 하루를 때우려는 막차인생들을 제외하고는. 영화가 끝나면 관객을 몰아내는 멀티플렉스와 달리 무시로 극장을 드나들어도 누구하나 제지하는 이 없지만,그들 외엔 좀처럼 동시상영관의 문을 넘으려 하지 않는다.
 
서면시장의 롯데극장. 태화 중앙 북성 코리아 강남 엔젤 고려 등등 서면에 있던 10여곳의 극장 중에서 유일하게 남은 단관극장이다. 그나마 신작프로를 틀지만,하루 6회 중 마지막회는 상영하지 못하는 경우가 90%를 넘는다. 정정규(67) 사장은 "가는 데까지 가다 안 되면 손 드는 수 밖에 없다"고 낮게 말했다.
 
제10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쓰리 타임즈'가 예매 직후 13분40초 만에 완전 매진됐다. 6일 부산국제영화제가 화려한 축포를 쏘는 동안 오래된 극장들은 뒷문으로 씁쓸히 퇴장하고 있었다. 부산 극장사의 한 부분도 그렇게 스러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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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지역 영화관의 역사

부산지역 영화관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916년 당시 초량천변에 세워졌던 초량좌극장을 만날 수 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영화관이 선보였지만 조선인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는 없었다. 1930년대에 소화관(동아극장)과 32년 부산극장이 차례로 개관,지금의 PIFF광장을 형성하게 됐다.
 
50년대에는 현대극장을 시작으로 국제극장 제일극장 대영극장 동보극장이 들어서면서 대형 영화관 시대를 열었다. 60년대에는 동명극장 부영극장 국도극장 대한극장이 문을 열었다. 70년대에는 서면 동래 영도 사상 등지로 영화관이 확대되면서 명보 천보 동성 보영 천일 구포 극장 등이 뒤를 이었다.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반까지 대형극장이 60군데에 이르기도 했다.
 
80년대로 접어들면서 재개봉관들은 주로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서민층에 의존하게 됐다. 각 지역별로 학생들을 위한 단체관람도 불황극복의 한 방편이었다. 그러나 우후죽순으로 들어서는 소극장과 비디오극장에 밀리더니 90년대 들어서는 자취를 감추게 됐다. 요즘의 복합상영관이 대세를 이루면서 재개봉관은 사실상 영화관으로서의 생명을 다하게 됐다.
 한국영화자료연구원 홍영철 원장은 "삼일,삼성극장은 재개봉관이었지만 당시 한 푼이 아쉬웠던 노동자 학생 서민들에겐 영화에 대한 욕구를 채울 수 있었던 정겨운 공간이었다"고 말했다.
 
(2005.10.7 부산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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