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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지도..... 그리고 HID 이야

fabiano 0 1314  

1
작년봄이후......
난지도가 루어낚시터로 각광을 받기 시작하면서.....
한창 씨즌때 주말이면 엄청난 루어인이 난지도에 몰려든다.......

지금에야....
대호방조제가 만들어지고 그주변이 개발되면서....
주민들이 육지 사람들에게 많이 동화되어 외지사람들을 대하는 모습이 많이 부드러워 졌지만......

전에는 해마다 해수욕철이면 끊임없는 외지인들과 갈등으로 크고 작은 사고가
연중행사처럼 되었던때가 있을 만큼 외지인에 대해서 호의적이질 못했었다.........

지금도 간혹 난지도를 들고나면서......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느낌을 경험한 사람이 아주 없지는 아닌 줄 안다......

내가 난지도를 처음 접한때가 고등학교 1학년때였고.....
난지도에서 경제적인 면을 떠나서 생활의 일부분으로 수용하기 시작한때가
91년도 부터니 난지도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면서 혹여 생길수있는.....

난지도 주민들에 대한 편견과 오해가 있다면 이해할수있는 여유를 가질수있도록 돕고자해서.......
직접보고 들은 것들에 약간의 흥미를 더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2
일상적인 생활에 어떤변화나 자극없이......
집과 학교 그리고 성당이 생활의 반경이던 정말 완벽한 촌놈한테 아주 획기적인......나이들어 생각해도 강렬하게 각인된 두가지 사건을 접하게 되는데.....

년도가 정확치 않지만.....70년대를 전후로 기억 되는데.....

무덥고 지루한 여름 어느날.....
집 앞에 있던 초등학교에 새빨간 티를 단체로 입은 건장한 청년 2-30명정도가...
소위 말하는 떡이 되어서 학교에 수용되었다......

요즘 말로 인천에서 활동하고 있던 깍두기들이 단체로 난지도 해수욕장에 수련 왔다가.....
어떤이유로 주민들과 시비기 붙어 2박3에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지금에야 난지도가 배편 상황도 좋고 대호방조제가 건설되면서 배를 마음대로 접안 할 수있지만.....
당시에는 난지도가 당진보다는 인천생활권 이어서 인천에서 이틀에 한번씩 여객선이 마을 앞에 정박해 있으면 .......
소위...뎀마라고 부르던 무동력선으로 노를 저어서 실어다 주어야 했었다....

난지도에서 가까이있는 삼길포 포구도 당시에는 접안 시설이없었고.......
대산읍에서 부터는 길도 없을 때여서 삼길포 사람들은 산길로 20여리를 걸어 다닐때니......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날고 긴다는 조직원들도 마을사람들과의 전쟁에서 이길 방법이 없었을게다......

엄청난 전쟁을 치른후....
당진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아야 하는데......
당진읍내 의료시설이라곤 소규모 의원뿐이니 입원 치료는 할수없고.....
경찰조사는 받아야하니.....방학중인 학교에 수용하여 치료하면서 경찰 조사를 받아야 했었다.......


후에 들은 얘기지만......

난지도에는 난지도에서 지금 당진화력발전소가있는 교로리까지 헤엄쳐나와서 술마시고 헤엄쳐 돌아가고.......
소주병도 맨손.....엄지 중지 검지로 잡아당기면 병마개가 따진다는.....
엄청난 얘기도 들었지만........

이얘기를 직접 내눈으로 확인하기는 그후로 20년이 훨씬 지난 90년대 중반이였다.......


3
두번째 사건을 이야기 하기전에.........

당진에 살았던 박서방이란 분에 대해서 잠깐 언급하고 넘어가야겠다.....

박서방이란 기골이 장대한 노인이 성당에서 운영하던 고아원 쪽방에서 혼자 외로이 살고 있었는데......
이분에 대해서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다만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이분이 아주 부자집 외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렸을때 보약을 너무 많이 먹여서....
머리는 우둔해지고 힘은 엄청난 괴력을 소유케 됐다는거다......

박서방이 소유한 재산이라곤 무협지에 나올법한 좀 무시무시한 도끼 한자루가 유일했는데......
여관이나 식당같은곳에 장작을 뽀개주고 밥을 얻어먹곤 품삯으로 엿을 한움큼 받아와서 하루종일 우물거리고 있었다........

박서방이 일거리가 없을때는 성당마당 느티나무 그늘아래서 꼬마애들이든 누구나에게 자기가 젊었을때 힘자랑 하고 다닐때 얘기하는게 유일한 소일거리였다.......

그중 박서방한테 직접들은 일화 하나......

왜정시대때 당진에 처음 전기가설 작업을 할때.......
전봇대를 세우는데 장정 열명이서 낑낑 대더란다.....자기가 보기에 힘쓰는게 하도 가소로와서.......
모두 비키라하곤 혼자서 전봇대릉 번쩍 들어서 세웠단다......
당시 전봇대가 어떤 모양이고 어느 정도의 무게였는지 알 수 없지만 그분이 황당한 거짓말을 할 정도로 영특하지 못한건 사실이다.........

4
70년도를 전후해서 당진성당에 조모 신부님이 부임해 왔는데......
이 신부님은 자칭 깡패신부로써 조그만 당진읍내에 재임하는동안 크고 작은일이 끊이질 않았다.......

박정희 집권시절 평화구현 사제단을 중심으로 신부들이 시국에 대해 많이 염려했는데....
조신부님은 평화구현 사제단이 구성되기 전에도 이쪽방향에 만감했던분이라...
운동으로 인하여 도피중인 분이나 언론사에 재직중 고초를 겪었던 분들이 당진성당에 모여들곤해서......
그분이 재직하는 동안내내 당진경찰서 정보형사들이 성당에 상주 하다시피했다......

성당 업무도 모든것이 자기 성격대로 처리하는 분이어서......
지금까지 선하고 부드러운 분들만 모셨던 시골사람들에게 여러가지로 획기적인 인상을 남기신 분이다......

신부님에게는 4형제가 있었는데......
위로 형님되시는 분도 신부직을 수행하고 계셨고 누이 한 분도 수녀로 활동중이었는데......
막내동생만 군에서 제대후 신부님을 따라다니는 무직자였다....
신부동생 형신부 못지 않은 한성질 하는사람으로......

어느날 저녁늦게 군청 앞마당에서 흑인 미군병사 5명을 XX내는 사고를 치고 만다.........

 

5
미군들을 XX낸 사건이후..........
신부동생에게는 금족령이 떨어졌다.
당시 시대 상황으로 미군에 대한 우리 입장이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와 비교 할수 없을때여서..........

그래도 신부님이 여러 가지로 힘을 쓰고 당시에 주일이면 오전10시 미사후에
미군 카톨릭 신자를 위해서 미군부대에서 주일마다 미사를 거행했었는데 이것도 큰 작용했을줄 안다........

미군사건 이외에도  종종 동생에 대한 금족령이 내려지곤 했는데..........

동생분이 삽교출신으로 예산농전을 졸업했는데.....소위 학생주먹으로 명성이 자자했던모양이다
그 분말로는 삽교에서 예산까지 기차로 통학을 했는데 차비를 내 본적이없고
그 구간에서는 어느 누구도 대들지 못하는 황제였단다........

천안쪽에서도 이 구간 만큼은 자기를 건드리지 않았단다.......
당시에 농전에도 교복을 호크 채우는 옷을 입었는데 학교에서 자꾸 사양해도 규율부장을 시키는 바람에 전교생 앞에서 훈교 비슷한 말을 해야 할 경우가 딱 한번 단상에 오르느라 호크를 채워봤단다.......

이 양반이 군에서 제대한 년도를 정확히 알수는 없지만............제대후
성당으로 학생시절에 같이 주먹썻던 친구들인지 아니면 다른 쪽에서 볼 일이 있던건지..........
아뭇튼 점잖은쪽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들랑거렸고 신부님은 그게 신경쓰여 마찰을 빚곤했었다........

금족령 후.........
신부동생은 무료할 때면 나와 성당주변에 살고있는 친구들을 
불러 놓고는........
닭싸움이나 중간 손가락 구부리고 밀기 등을 시키는데......그 고통이란.........

그러던 어느날..........
박서방이 어슬렁어슬렁 성당 느티나무 밑으로 올라와 앉아 쉬고있었다.

평소에 무료했던 신부동생............
어린 우리들을 괴롭히는것도 지겨웠던지 박서방을 상대로 힘겨루기에 들어간다...........
신부 동생이 박서방보구 영감이 도끼 좋은거 있다던데 그거 얼마나 좋은거냐?  구경좀 해보구 누가 도끼질 잘하나 내기하자고 하니.........

박서방 왈..........
신부동생보구 도끼 가지고 있냐구 물었다......
신부동생, 영감 도끼로 도끼질하면 되지 했더니만......한마디로 그것 안된단다......그 도낀 자기외는 절대로 사용할 수 없단다.......

그럼 우리 한번 팔씨름으로 박서방이 얼마나 센가 보자구해서.........
느티나무밑에 사각으로 깎아놓은 커다란 돌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천하에 박서방과 신부동생이 팔씨름으로 맞붙었는데........

정말 이결과를 안믿을 사람도 있겠지만............

박서방...신부동생.... 둘다 손목이 빠지고나서야 떨어지고 말았다............

 

6
73년인가,74년인가...
1년반 서울 유학동안 극도로 쇠약해진 몸으로 서울생활을
견디지못하고 ...........
1년을 휴학하기로 하고 이불 보따리를 싸들고 나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정확히 5년 전부터 증상이 없어졌지만.........
천성적으로 약해서 지긋지긋 하게 나를 괴롭히던 위장병하며....
.각기병 ,축농증......그리고 내성이 약해선지 당시에 유행 돌림병이 있으면 한번도 거른적없이........

지금에야 위장약이 많이개발되어 치료약도 많지만........
당시에는 성가병원에서 조제해주는 약이 별효과도 없었고.....
국내에서 신제품으로 발매하던 타가메트라는 약이 있었는데.......
시골에서 매번 약값을 보내는것도 무리가 있었다...........

학교를 휴학하고 내려오니 성당 주임신부님은 매일 성당에 나와 복사하는 아이들 관리와 성당 잡일을 시키셨는데.............
며칠 안있어 서울교구 소속 친구로 부터 연락이 왔다..............
친구놈 왈......자기가 난지도에 친구가 있어 난지도에 들어갈 예정이니 나보고 시간내서 섬에 들어오란다.........

내고향이 바닷가라고는 하지만 나는 그때까지 해수욕장이란 곳은 가본적이없었고........
겨우 당진주변에 뻘밭에가서 고동이나 주어다가 삶아 먹는 정도였고......
해수욕장 이라는 이미지는 아주 어렸을 때 우리집이 등기소 옆에 있었는데 등기소 소장 고향이 대천이어서 그집 우리또래 아이들이 대천 해수욕장에 
다녀 와서는 ..........
배며 등짝에 멋진 보디페인트 하고 와서는 동네 친구들 모두 불러놓고 자랑하면 몹시 부러워하던..............

난지도를 꼭가고 싶은데..........
휴학할 때도 자기와 상의 한마디없이 혼자 결정했다고 몹시 못마땅해하는
신부님한테 허락을 받기가 몹시난감했다.........
혼자 끙끙 앓다가 우연잖게 신부님 동생한테 내마음을 얘기하게 됐는데.........
정말 기대도 안했는데.......자기가 보내주겠단다......그때 그 ......황홀감......!!!!

그러고는 나보고 내일 일찍 운동화도 필요없이 슬리퍼만 신고 일찍 차부로 나오란다.....물론 신부님한텐 비밀로.....
그러고나서 난지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는데 이건 완전히 난지도
사람이다...........
내가 난지도 가봤냐니깐.......그런건 알 필요없단다

어쩠건 들뜬 마음으로 아침일찍 차부에 나가봤더니............
커다란 곤로에 석유 한통 그리고 쌀 반가마를 나한테 안기더니 교로리(현 당진화력) 차표까지 끊어준다.......
그러면서 하는말이 이것만 있으면 한달이고 두달이고 지낼수있으니 네가 꼭 돌아오고 싶을때까지 놀다 오란다.........

신부님한테 허락도 없이 떠나는 것이 두렵기도 했지만.......그래 일단 떠나고보자..................

교로리에 도착해서 난지도 배타는곳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그곳에서 2킬로
정도 떨어진 현 당진화력 배수구 앞이란다..........
아~~~고난의 길..........햇빛은 사정없이 내리쬐는데..........
쌀이며 석유며 곤로를 정확히 세 번에 걸쳐 나르다보니 오전 썰물이 시작되면서 난지도행 통통배는 이미 떠나버렸다...............

그때는 대호방조제 건설 전이여서 선박 접안시설이 없어 하루에 만조시간에만 난지도에서 배를 대주었다..........
그러니 다음 배를 타려면 꼬박 12시간을 기다려야만했다..........
근처에는 사람이 쉴 수 있는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  한 여름날 12시간의
고행은 나를 반쯤은 죽이고도 남았다...............
 


7
한 여름날 뙤약볓아래서.......
물 한모금 먹을곳 없이 참고 참다가가 도저히 견딜수없으면 왕복 4킬로를
걸어야했고........
ㅎㅎㅎ.....
그까짓 쌀반가마와 석유곤로 석유한통이 뭐라고 그걸 그래도 지켜보겠다고..........

어쨌거나..........
긴긴 여름 한 낮이 다  끝나가고 해가 난지도 산꼭대기에 걸첬을때 쯤 저멀리서 통통배가 교로리를 향해서 헉헉거리며 기어오고 있었다......
그때....내기분과 생각은  정말로 고생끝이고 행복 시작인 줄 알았는데.............

배가 도착할 때쯤.....물때표를 정확히 알고있는 현지민들이 시간되어서 몇몇분 도착하였고.......
그 분들과 배에 올라타 난지도를 향해서 출발할 때 그 상쾌함이란...........
그러나.....날아갈듯한 상쾌함은 불과 30분안에 끝나고 말았으니...............

난지도를 반쯤갔을때......선장이 하는말 오늘은 시간이 늦어서 해수욕장쪽에는 배를 댈 수없으니 마을에 내려서 해수욕장까지 걸어서 가야된단다...........
멀리 바다에서 바라 본 난지도는  별로 크게 보이지도 않고 해수욕장 위치도 마을 근처려니 생각하고 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고 빨리 친구 만날 생각에 들떠있었는데..........

난지도에 도착하고 약간의 시간을 지체했을 때는 이미 어두워지기 시작했었다..........
선장에게 해수욕장 가는길을 물었더니 저 앞에 보이는 산을 넘으면 해수욕장이 나온단다.........
어수룩할 때 앞에 보이는 산은 그리 멀어 보이지는 않아 보였고.... 해서 우선 쌀을 어깨에 짊어지고 출발했는데.......
아~~~~ 하느님 맙소사...........

지금에야 난지도에 차도 다니고 길도 넓게 포장되있지만..........
당시에는 좁은 소로길에 자갈길이였고 해수욕장 향하는길이 비비 돌고도는길이였고.........
몇 걸음 걷지않아 땀은 비오듯 쏱아지고 슬리퍼 신은 발은 땀으로 쭉쭉 미끄러지지...........
쉬며....후회하며.....쉬며....후회하며........마치 박서방이 면천에 돼지 메고갔을 때 그기분으로.......
그러면서 해수욕장에 도착했을때는 깜깜 한밤중이었다...........

그렇게 늦게 도착한 해수욕장에서 친구 찾는 일은 아주 간단했다
해수욕장이라고 해봐야......주변에 건물이라곤 닭장처럼 길게 지어놓은
하얀집이라는 민박집 달랑 한 채에....... 그앞에 텐트 서너개 처져있는게 해수욕장 모습 전부였으니.............
친구놈은 그 중에 2-3인용 당시유행하던  흰색 페인트 칠한 것을 군용A텐트를 쳐 놓았었다

친구녀석은 내가 짊어지고온 쌀에 양에 놀래고..........
마을에 곤로와 석유 한통을 또 가지러 가야한다는 말에 기절초풍을 하고말았다.........
하얀집 민박 주인인 털보아저씨한테 마을에서 해수욕장까지에 거리가 도대체 얼마냐고 물었더니......십리가 넘는길이란다........

아주늦은 저녁을 얻어먹고 잠시 휴식후에 친구와 나는 다시 마을로 돌아가.........
나는 곤로를 짊어지고 친구는 석유통을 안고서 해수욕장에 돌아왔을 때는 새벽하늘이 먼동이 틀 때 쯤이였고.............
친구 녀석은 석유통에서 석유가 흘러 배부분이 석유통과 마찰로 인해 배껍질이 홀랑 벗겨지고 말았다........
그래서 그 친구는 바닷물속에 들어가면 쓰라리다며 그 친구가 머물러 있던 일주일 내내 바닷물속에  한번도 못들어가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쏘사랑  <난지우럭>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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