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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明星皇后(러시아 자료)

fabiano 9 1383  
요즘 TV 사극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명성황후의 최후와 관련된 제정 러시아 외무성 대외정책문서국 자료가 전 모스크바대학 박종효 교수에 의해 발굴되어 요지 다음과 같은 사건의 진상이 확실하게 밝혀지고 있다.

이 보고서는 당시 서울 주재 러시아 대리공사 베베르(веберки)가 외상 로바노프-로스토브스키(лобаов-ростобскийд)에게 보낸 보고서로서 그 당시 현장에 있었던 고종황제와 조선군 부령 李學均, 정령 玄興澤, 러시아인 건축기사 세레딘-사바틴, 가톨릭 프랑스인 서울주교 구스타프 뮤텔(Gustave Mutel) 등의 증언서와 황제의 서명 없이 일본이 강압적으로 발표한 왕후 폐위칙서, 대원군의 성명서, 서울의 각국 외교관들이 일본공사에게 항의하며 나눈 대담록, 고종황제에게 보낸 일본왕의 칙서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보고서를 읽은 러시아의 니콜라이 Ⅱ세 황제는 "천인공노할 사건이니 좀더 자세히 보고하라"고 친필로 지시한 기록이 남아있으며, 두만강 국경과 인접해 있는 러시아 극동 아무르 군관구사령관에게 산하 부대를 비상대기시키라고 명령했다는 기록도 첨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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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황후, 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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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황후(민비)로 추정되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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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인 화가가 그린 고종과 명성황후 민비.


세레딘 사바틴의 증언서 일부를 살펴보자.

새벽 5시경에 춘생문에서 큰 구호소리와 함성이 들렸다.
사전에 행동을 모의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몇 분 후에 추성문 쪽에서 총성이 들리고, 잠시 후 담을 넘은 일본인 폭도들이 궁궐경비병에게 발포하자, 경비병은 무기와 군복상의를 벗어 던지고 초소를 떠나 어디론가 달아나 버렸다.
추성문 쪽의 총성을 신호로 춘생문 쪽에서도 일본인 폭도들과 조선군 훈련대가 난입하기 시작했으며, 광화문에서는 일본인 폭도 5-6명이 사다리를 타고 담을 넘었다.
이들은 경비병에게 몇 발의 총을 발사해 도주시키고, 일본인교관에게 훈련받은 조선군 훈련대가 궁궐 안으로 쳐들어오도록 대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궁궐 경비병은 총인원 1,500명에 장교가 40명이었으나 5시 10분 경에 남아있는 사병은 250-300명뿐이었다.
다이 장군은 제1방어선인 경복궁 외곽 문에서 후퇴해 남은 경비병을 겨우 집합시켜 제2방어선으로 북쪽 왕가의 출입문에 배치했다.
경비병은 왼쪽 길에 서서 방위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춘생문으로 난입한 일본인 폭도와 조선군 훈련대가 왕가로 출입하는 북쪽 작은문(이학균 부령이 수비한 춘생문에서 가까운 문) 틈으로 경비병을 향해 한번에 30-40발씩 3번 집중사격을 했다.
폭도들은 많은 경비병을 살해하려는 의도가 없는 듯 머리 위로 높이 총을 발사했다.
다이(Dye, W.M.,) 장군(미국인. 을미사변 때 왕궁을 수비했던 외국인 지휘관)과 나도 추성문을 통해 난입한 폭도들이 발사하는 총의 사격권에 들어 있었으나, 나는 오른쪽 문(3개 중 중간문), 다이 장군은 왼쪽의 神武門(추성문에서 가까운 문)의 담벽에 몸을 숨겨 무사했다.
다만 내 앞에서 궁궐경비병 한 사람이 총상을 입었다. 그러나 남아 있던 궁궐경비병들은 난입자들이 첫 집중사격을 한 뒤, 한 발도 응사하지 않고 총과 군복상의를 벗어 던지고 어디론가 도주해 버렸다.
난입자들은 추성문에서 두 방향으로 밀어닥쳤다. 한 무리는 다이 장군이 지키고 있는 문 쪽으로 가고, 또 다른 무리는 내가 서있는 문으로 달려들었다.
폭도들은 다이 장군을 붙잡고 유럽인 경비원 숙소 쪽으로 갔으며, 나를 잡은 일단의 폭도는 왕의 침전이 있는 곤령합과 왕후의 침전인 옥호루 쪽의 담 안으로 들어섰다.
막 유럽풍의 양옥(외국인 접견실)을 지날 무렵 여러 발의 총성이 들렸다. 별안간 총소리를 듣고 놀란 환관, 벼슬아치, 궁노, 폭도 등 300여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이 일시에 뒤로 밀어닥쳤다.
6-70보 가량 떠밀려가다가 왕가에까지(곤령합과 옥호루는 별채였으나 정원으로 연결됨) 진입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목재로 건축한 어떤 작은 별채에 부딪쳤다. 나는 무리와 함께 밀려가지 않으려고 본능적으로 판자에 매달렸다.
떼를 지어 밀려오던 환관과 벼슬아치, 궁노들은 내 곁을 지나 정원으로 들어가 숨어버렸다.
나만 혼자 그곳에 남게 되어 왕후의 처소에서 벌어진 만행을 목격하게 되었다.
사복을 입은 일본인 폭도 5명이 긴 칼을 들고 마치 누군가를 찾는 듯 앞뒤로 뛰어다니고 있었으며 그 외에도 일본인 폭도 20-25명이 단검을 들고 있었다.
출입문 2개는 각각 일본군 2명과 장교 1명 도합 5명이 차렷 자세로 서서 지키고 있었다.
조선군 훈련대 소대는 왕후의 침전 옥호루를 약간 등진 채 세워 총 자세로 정렬해 있었다.
이 소대 옆에는 풍채가 당당하고 양복을 잘 입은 한 일본인이 유럽식 긴 칼(일본도를 일컬은 듯)을 빼어 오른 손에 들고 있었다.
이 자가 일본인 폭도들의 지휘자인 듯 싶었다. 나는 이 자에게 다가가 영어로 'Good morning'하고 인사했다.
일본인 두목은 대답 대신 무서운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면서 영어로 질문을 했다.
문: 성명을 말하라. 답: 세레딘-사바틴입니다.
문: 직업은 무엇인가? 답: 건축가입니다. 그리고 나는 뜻밖에 사람들에게 밀려 이곳에 들어오게 되었으니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는 생명은 보장해 주겠으니 그곳에서 움직이지 말고 있으라고 했다. 나는 내친 김에 군인 한두 명을 붙여 호위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왕후 처소 옥호루에 있던 일본말을 잘 하는 조선군 두 명을 불러 나를 보호해 주라고 명령했다. 나는 이제 살 수 있게 됐다고 안심하고 왕후침전에서 일본인 폭도들이 자행하는 만행을 자세히 보았다.
일본인 폭도들은 10-12명의 궁녀들을 왕후의 침전에서 2m가 넘는 창 밖의 뜰에 내던졌다. 놀랍게도 궁녀들은 한 사람도 달아나거나 소리지르거나 신음소리를 내지 않았다.
머리채를 잡혔을 때도 창 밖으로 던져졌을 때도 시종일관 묵묵히 침묵을 지키며 무서운 고통을 참고 있었다. 궁녀들은 옥호루에 있었으며, 뜰에 내쳐진 궁녀들은 전원이 사망한 것으로 보였으나 확실히 알 수는 없었다.
이런 추측을 한 이유는 내가 조선 여성의 고매한 殉節정신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일본인 폭도들은 두 명의 궁녀 머리채를 잡고 끌고 와 내가 서 있던 곳에서 겨우 5-6보 떨어진 곳에 던지고 갔으나, 궁녀들이 살아서 호흡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내 앞에 버려진 궁녀들은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머리채를 잡혀 露臺 위에서 뜰로 내던져질 때도 앞서 말한 궁녀들과 똑같이 반항하거나 울부짖거나 신음소리를 내지 않았다.
한 궁녀는 넘어져 눈을 뜨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칼을 든 일본인 폭도 5명(3명은 사복, 2명은 양복 착용)이 붉게 달아오른 흥분한 얼굴로 눈에 살기를 띤 채 야수처럼 왕후 처소 이곳저곳을 뒤지며 왕후를 찾고 있었다.
나는 폭도들의 만행을 피해 옥호루 밖으로 내보내졌다. 광화문까지 오는데도 많은 일본군을 보았다.


세레딘-사바틴이 옥호루에서 떠난 이후 상황은 한 무명 尙宮이 증언하고 있다.

일본 폭도들은 왕후와 궁녀들이 있는 방 쪽으로 난입해 왔다. 이때 궁내부 대신 李耕稙이 일본 폭도들에게 왕후가 있는 방 앞에서 양팔을 들어 가로막고 궁녀들뿐이니 들어가지 말라고 만류했다.
이 순간 일본인 폭도들은 칼로 이경직 대신의 양팔을 내리쳤고 그는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쓸어졌다.
일본인 폭도들은 괴성을 지르며 방안에 난입해 왕비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왕후와 궁녀들은 왕후가 이곳에 있지 않다고 대답했다.
왕후는 갑자기 회랑(복도)을 따라 급히 달아났다. 그 뒤를 한 일본인 폭도가 쫓아가 왕후를 잡고 마루바닥에 넘어뜨린 후 왕후의 가슴을 세 번 발로 짓밟고, 칼로 찔러 시해했다.
나이 많은 한 상궁이 수건을 꺼내 왕후의 얼굴을 덮어주었다.
그 후 얼마 지나 일본인 폭도들은 왕후의 시신을 가까운 숲 속으로 運柩해 갔다.
더 이상 나는 아무 것도 보지 못했으나, 궁궐의 宦官을 통해서 일본인 폭도들이 왕후의 시신을 화장하는 것을 목격했다는 말을 들었다.


시신을 운구하여 화장했다는 현홍택 정령은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일본인 폭도들은 왕후의 은신처를 말하라고 사정없이 나를 때렸으나, 끝내 모른다고 했다.
폭도들은 고종이 계시는 곤령합으로 나를 끌고 가 왕후가 있는 곳을 말하라고 했다.
모른다고 하자 폭도들은 閣監廳으로 다시 나를 끌고 가서 왕후가 계신 곳을 자백하라고 또 때렸다. 이때 갑자기 곤령합에서 여러 발의 총성이 들렸다.
나를 잡고 있던 일본인 폭도들은 곤령합으로 급히 뛰어갔다.
나는 곤령합에서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궁금해 그리로 가 보았다.
거기에는 왕후가 피살된 채 누워 계셨다. 나는 주위에 일본인 폭도들이 아직 있었기 때문에 다시 돌아서 나왔다.
그 후 왕후의 시신을 동쪽 정원에서 화장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급히 그 곳으로 달려가 보았다.
그 곳에 있는 시신의 의복이 여자 옷인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였다.


시해 이후 경과 미우라는 황후를 시해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시신에 석유를 뿌려 불살랐으며, 그러고 나서도 시해된 황후가 궁궐을 탈출한 것처럼 위장하여, 廢庶人 조칙을 내리도록 압력을 가했던 것이다.
고종은 "짐에게 서명을 강요하느니 차라리 짐의 두 팔을 자르라"고 소리쳤지만 결국 조칙을 내리게 되었는데, 아관파천 이후 1897년 10월 12일에 대한제국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면서 閔妃를 明星皇后로 격상시키고 1개월 후에 국장을 치르게 된다.
세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본인의 만행을 확인한 당시 서울주재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서울주재 외교대표단의 회합을 주선하고,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에게 항의하여 마침내 일본공사가 조선 국모 시해사건의 주모자였음을 밝혀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국제적인 여론이 비등하자 일본은 미우라를 해임하고 대신 고무라(小村)를 辦理公使로 임명하였으며, 미우라 등 관련자 48명을 히로시마(廣島)감옥에 구치하고 취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을미사변은 미우라 취임 이전에 이미 사전 계획되었던 만행이었으므로 이는 눈가림에 불과한 거짓 작태였다.
결국 증거불충분(히로시마 법정의 판결문 요지: 아이라야마가 근정전 앞에서 궁내부 대신 李耕稙을 죽인 사건이 충분히 입증되지 않은 것처럼, 이 사건도 피고인 몇몇이 미우라와 그 일당이 계획한 범죄를 수행한 것이라고 간주하기에 충분하지만, 명백한 증거는 없다.
피고인 시바로시, 오사키 마사키치, 요시다 한지, 마에다 순조, 히라야마 카추쿠마, 히라이시 요시타로에 대해서는 그들이 이 사건에서 어떠한 역할을 맡았는지를 판단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없다)을 이유로 범인들을 전원 석방시키는 짓거리로 끝났다.
그러나 공소장에는 "히라야마(평상암언) 등 13인이 민비를 살해했다고 자백했다", 그리고 "궁녀들이 서로 자신이 민비라고 하는 바람에 이들의 옷을 벗기고 유방을 살펴 당시 민비 나이인 44세 가량의 여자를 칼로 살해하고 이를 제지하던 궁내부 대신 李耕稷을 총과 칼로 살해했다"는 진술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당시 고종의 典醫였던 카나다 선교사 Oliver R. Avison이 그의 80회 생일인 1940년에 기록한 『舊韓末秘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도 보인다.

황후가 진실로 자객들의 총탄에 시해된 후 시신이 궁궐 내 가까운 숲으로 옮겨져 옷에 석유를 뿌려 태워 재로 화하게 한 것이 밝혀졌다. 이 때문에 황후의 생사를 쉽게 단정할 수 없었고, 아울러 황후가 화를 모면하여 어느 私家에 피신하고 계시리라는 희망도 가졌던 것이다.
황후의 측근들은 황후가 생존하고 있다고 믿게끔 속였던 것이나 황후를 보았다는 사람은 실제로 없었다.
숲에서 타다 남은 뼈 조각과 시해가 있었던 날 황후가 입고 계시던 옷의 몇 조각이 한 더미의 잿 속에서 발견되어 황후의 죽음이 확실해졌던 것이다.
뼈를 그러모아 관에 넣고 명당자리를 찾아 능을 마련할 때까지 수개월 동안 모시기 위해 궁궐 내에 새 건물을 짓고 유해를 모셨다.
이 기간동안 황제께서는 매일 이곳을 찾아 의식을 행하였으며, 임명된 승려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다.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생과 포수 그리고 농민 등이 합세한 의병이 여러 곳에서 일어나 친일관리와 일본군 그리고 일본인 거류지 등을 공격대상으로 삼았으며 특히 삼남일대에서 격렬한 전투를 전개하였으니 이를 을미의병이라 칭한다.
을미의병은 남한산성(金河洛 의병장 등)을 점령하여 서울 진격을 계획하였고, 춘천(柳麟錫), 충주(李康秊), 강릉(閔龍鎬), 함흥(崔文煥), 안동(金道鉉), 대구(許蔿), 진주(盧應奎), 광주(奇宇萬), 홍주(金福漢), 의주(趙尙學) 등 전국 각지에서 많은 의병진을 결성하여 항전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아관파천 후 친일 내각이 퇴각하였으며, 단발령이 철폐되고, 정부의 의병 해산 선유 등의 영향을 받아 을미의병은 1896년 10월경 종결되고 만다.

9 Comments
김바사 2007.07.08 16:07  
잘 보았습니다. 실은 저도 예전에 이 글을 접한 적이 있습니다. 사바틴이 후에 러시아 공사관에 이 사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올린 글을 읽은적도 있는데 민비나 그 인척에 대한 사바틴의 눈길이 별로 따사롭지 않았습니다.민비가 일본에 대하여 과도하게 이권을 무시했다는 시각을 갖고 있더군요....또한...당시 조선 선비들의 시각도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차거운 면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민비는 영민한 분이나 그 분이 민중의 사랑을 받았다고 까지는 보여지지 않습니다.
김바사 2007.07.08 16:13  
이게 아쉬운 거죠....고종도, 민비도, 대원군도 친일파나 친러파 대신들도 민중의 사랑을 받지 못했고...순종도 마의태자가 아니었다는 것....죽음 마져도 그들만의 리그였다는 생각이 듭니다.여하튼 뭔가 국민과 권력자간에 갭이 너무 깊었던 것으로 봅니다.
fabiano 2007.07.08 16:24  
역사적인 사안에 대하여 상당히 박학다재한 김바사님에게 우선 짝짝짝...우리 역사가 시작되면서 거의 외세에 당하다보니 순종과 굴종 그리고 여러가지 모순적인 사고력이 우리 민족에게 끼친 영향이 민족의 근성이 되고 안좋은 결과를 잉태케 했슴을 봅니다. 역사의 모순을 지금까지 끌어 안고 살아왔고..현재의 모습도 거기에 따른 것에 다름아니니..아, 골이 아픕니다.
푸른깃발 2007.07.20 05:31  
자료로 퍼 갑니다.
fabiano 2007.07.20 05:35  
좋은 자료입니다.
돌풀 2007.07.25 18:35  
그렇습니다. 정말 좋은 자료입니다. 모셔갑니다.
fabiano 2007.07.25 19:17  
,·´″`°³оΟ☆
슬프다 2012.11.09 22:02  
잘 보았습니다.김진명이라는 싸이코소설가와 그 추종자들이 명성왕후를 두번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는걸 오늘 인터넷에서 알게되어, 오래전부터 그랬더군요. 오래전에 본 러시아공사 베베르보고서를 찾던중 여기서 보게되었습니다.왜놈들도 나쁜놈들이지만, 한국인이라는 훈련대와 대원군과 김홍집, 박영효등 친일개화파들과 김진명과 그 추종자들이 더 나쁘네요.그런 자들을 보면 암담해집니다.
fabiano 2012.11.09 22:40  
명성왕후에 대하여 관심이 높군요. 이에 대한 大邱大學校出版部,1986    저자 Oliver R. Avison 의 서적이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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