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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해부] 6·25는 없다 빈 칸 6·15가 메워

fabiano 1 1484  

월간중앙요즘 교과서에는 6·25가 없다. 통일시대를 살아가야 할 청소년들이 북한에 대한 반감을 가질 수 있다는 우려에서 6·25에 대한 직접적 서술이나 구체적 내용을 교과서에서 빼버렸기 때문이다. 분단의 원인 설명이 생략된 절름발이 통일교육 현장을 취재했다.
6·25전쟁 수업요? 요즘은 거의 안 해요. 일단 교과서에서 다루지 않으니까요. 또 예전에는 6월이면 늘 하던 반공포스터그리기대회나 웅변대회 등 6·25 관련 행사도 다 없어졌고요. 대신 요즘은 현충일이나 6·15를 즈음해 통일글짓기대회나 포스터그리기대회 등 민족공동체 의식 함양 행사를 하죠.”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 만난 이 모 교사의 말이다. 요즘 초등학생들은 6·25에 대해 어떻게, 얼마나 알고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대뜸 “대부분 잘 모른다. 일부는 임진왜란과 6·25도 구분하지 못한다”며 그 이유로 “요즘은 교과서에 6·25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교과서에 나오지 않으니 전적으로 교사들의 재량에 맡겨졌죠. 나이가 드신 선생님은 통일을 다루는 단원에서 분단의 원인을 설명하며 6·25 관련 이야기를 하기도 하죠. 하지만 젊은 선생님들은 자신도 6·25를 잘 모르고, 또 관심도 없으니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죠.”

6월의 학교 풍경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6월이면 으레 반공글짓기대회·웅변대회·포스터그리기대회 등이 열렸지만, 요즘에는 6·15남북정상회담 기념 행사가 열린다. 행사 이름도 한민족공동체의식함양 글짓기대회·말하기대회 등이다.

분단의 원인 설명 생략된 통일교육

6·25는 학교 행사 일정표에서뿐만 아니라 교과서에서도 ‘거의’ 사라졌다. ‘거의’ 사라졌다는 표현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전 교과에 걸쳐 6·25를 거의 언급하지 않을뿐더러 언급하더라도 자세한 원인이나 배경설명 없이 한 줄로 지나가듯 언급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반공교육이 통일·안보교육으로, 또 통일·안보교육이 통일교육으로 바뀌면서 생긴 변화다.

학교 현장의 통일교육은 도덕 교과 담당 교사들이 “정체성의 혼란을 느낀다”고 토로할 정도로 최근 10년 사이 급격히 바뀌었다. 그 결과는 <월간중앙> 설문조사에서 나타난 초등학생들의 ‘6·25 문맹’이다.

현장 교사들은 “똑같은 설문조사를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해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초등학교에서뿐만 아니라 중학교와 고등학교 전반에 걸쳐 6·25를 우리 현대사의 한 부분으로 제대로 교육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남과 북으로 갈라져 살고 있지만, 우리는 한 겨레입니다. 우리는 통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현재 초등학교 교육과정에서 통일교육이 처음 시작되는 초등학교 2학년 <바른생활> 교과서 ‘우리는 한 겨레’라는 단원의 첫 구절이다.

한반도 지도 위에서 남북의 어린이가 함께 뛰노는 삽화로 처리된 이 단원은 함께 생각하고, 이야기할 주제로 ▷남과 북이 나뉘어 우리가 겪는 어려움 ▷통일을 이루기 위해 우리 국민이 하고 있는 노력 ▷통일이 되면 좋은 점 등을 제시한다. 단원 전체에 걸쳐 분단의 원인이나 과정에 대한 설명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 같은 구성은 2학년 교과서뿐만이 아니다. 현재 7차 교육과정에서는 2학년부터 6학년까지 학년마다 도덕 교과에서 통일에 관한 교육을 한 단원씩 실시하지만, 전 학년에 걸쳐 분단의 원인이나 과정을 설명하는 대목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6·25에 관한 언급이 처음 등장하는 것도 5학년 도덕과 보조교재인 <생활의 길잡이>에서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6·25로 인한 피해 상황을 학생들이 기술하도록 할 뿐 6·25의 발발 원인이나 전개 과정 등에 대한 설명은 없다.

초등학교 통일교육과정에서 6·25에 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은 전쟁의 원인과 전개 과정을 설명하다 보면 불가피하게 전쟁 책임론을 거론할 수밖에 없고, 그럴 경우 학생들이 북한에 대해 적개심을 갖게 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또 남북화해시대에 북한을 자극할 만한 내용을 교과서에 기술할 필요가 있느냐는 점도 고려했다.

대신 오늘의 통일교육은 학생들의 구체적 일상의 삶 속에서 통일을 바라보고 준비하도록 하는‘생활문화적 접근으로서의 통일교육’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정서적으로 학생들이 북한에 대해 마음의 문을 열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 이 같은 변화는 도덕 교과서에서뿐만이 아니다. 으레 6·25를 소재로 한 글이 한두 편씩 실리게 마련이었던 초등학교 국어과 교과서에서도 6·25는 사라졌다.

이에 대해 이재기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초등학교 국어교육과정 연구원은 “국어교육과정의 경우 원칙적으로 가치관 교육은 하지 않는다”며 “어떤 소재든 학습목표를 달성하는 데 가장 적합한 것을 고르는 것이 우선”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는 사견임을 전제로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6·25를 소재로 한 글이 없어진 것에 대해 “가치판단의 혼란기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고 말을 이었다.

반공 이데올로기를 교육하던 시절에는 6·25의 처참함을 보여주고 북한을 헐뜯는 글을 의도적으로 많이 다뤘지만, 통일지향적으로 교육목표가 바뀌면서 굳이 6·25를 소재로 한 글을 사용하지 않게 된 것 같다는 설명이다. “6·25의 경우 가치판단의 문제가 개입되기 때문에 관련 소재의 글을 다루는 것 역시 조심스럽지 않겠느냐”고 이 연구원은 덧붙였다.

6·25의 원인과 과정 6학년 때 첫 기술

초등학생들이 6·25의 발발 원인과 과정에 대해 처음 배우는 것은 6학년 1학기 사회과 ‘대한민국의 수립과 발전’ 단원에서다. 대한민국 수립의 역사를 다룬 이 단원에서 6·25는 2쪽에 걸쳐 전개 과정을 서술한다.

6·25 관련 내용을 제대로 서술하지 않기는 고등학교 교과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고등학교 1학년 도덕 교과서 머리말을 보면 ‘민족 통일문제와 통일 한국의 모습’이라는 단원과 관련해 학습목표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우리는 국가·민족이 당면하고 있는 가장 큰 과제 중 하나인 민족 분단의 역사와 실정, 분단 이후 남북한에 나타난 사회·문화의 차이점, 그리고 민족 분단을 극복하려는 과정에서 나타난 장애 요인과 극복 방향에 대해서 공부한다.”

이와 함께 교과서는 ‘민족 분단과 남북한 사회 현실’이라는 소단원 아래 민족 분단의 과정을 ‘분단의 원인과 과정’과 ‘분단의 고착화 과정’으로 나눠 기술했다. ‘분단의 원인과 과정’에서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정세 변화를, ‘분단의 고착화 과정’에서는 광복 후 남북한의 단독정권이 수립되는 과정을 10쪽에 걸쳐 상세하게 서술했다. 여기에서 소개하는 6·25를 잠시 옮겨 보자.

“이렇게 하여 한반도는 정치적으로 남과 북이 분단되고 말았으며, 분단 이후 1950년에 발발한 6·25전쟁을 통하여 38도선이 휴전선으로 대체되면서 분단이 더욱 고착화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것이 전부다. 그러면서 바로 다음으로 넘어간다.

“지금까지 한반도가 통일된 정부를 구성하지 못하고 6·25전쟁으로 인해 분단이 고착되는 과정에 대하여 공부하였다. 그렇다면, 민족적 위기 상황에서 야기된 반탁과 찬탁 세력 간의 국론 분열은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었는가? 만약, 당시 남북 협상이 성공했다면 분단을 피할 수 있었을까?”

이런 질문으로 단원을 끝맺는다. 분단의 원인과 고착화 과정에서 6·25가 갖는 함의는 무시한 채 분단의 원인을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외세의 탓으로 돌리는 듯한 서술이다.

이와 관련해 7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도덕 지도서 집필 과정에 참여했던 한국교육과정평가원 황인표 연구원은 “6·25의 원인 규명을 집필하는 부분에서 내용 서술을 어떻게 할지를 둘러싸고 많이 조심스러웠다”고 말한다.

“현재 고등학교 1학년 도덕 교과서를 집필한 것이 2000년 말에서 2001년 초인데, 당시 평가원 분위기는 6·25 관련 서술과 관련해 통일운동 차원에서 북한과 남한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누가 침공했느니, 전쟁이 누구의 탓이니 하고 네 탓 내 탓을 가르는 소모적 공방을 기술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는 또 전쟁 발발 원인을 모호하게 기술한 것과 관련해 “남침이냐 북침이냐를 명확히 기술하는 것에 부담을 느꼈던 것이 사실”이라고 털어놓았다. 전교조 측 인사가 집필위원에 포함돼 있지는 않았지만, 전교조 측의 입장이나 민주화세력의 대북관을 무시할 수 없었다는 설명이다.

그는 “전쟁 발발 원인과 같이 논란이 될 수 있는 표현을 가능한 한 자제하자는 분위기였다”며 “그런 과정에서 애초 ‘북한의 침입에 의한 6·25로 인해 민족상잔이 일어났다’는 선에서 기술하려고 했던 것이 6·25에 대한 원인 규명이나 폐해에 관한 구체적 사실 나열을 뺀 채 ‘1950년에 발발한 6·25전쟁을 통해…’라는 현재의 기술로 바뀌었다”고 집필 당시 상황을 전했다.

그는 “가르치는 교사든 배우는 학생이든 관심을 갖지 않으면 교과서에 6·25 관련 내용이 있는지조차 모르게 은근슬쩍 서술한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6·25 말하면 반통일 세력?

이 같은 변화를 느끼는 것은 집필진뿐만이 아니다. 현장의 교사들 역시 “통일 관련 단원을 설명할 때면 세상이 바뀌었음을 느낀다”고 말한다. 북한에 대한 비판적 설명을 하면 반통일 세력으로 오인당한다는 것이다.

한 현장 교사는 “6·25를 누가 왜 일으켰는지 설명하면 반공교육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 요즘의 세태”라고 말한다.

왜 교과서에 6·25를 어떻게 서술할 것인지를 놓고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 물음 속에 우리 사회가 북한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또 통일정책을 어떻게 추진해야 할지에 관한 의미가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교과서 속 6·25 관련 서술은 지난 50여 년간 정부의 대북정책에 따라 수시로 변해 왔다. 1963년부터 1973년까지의 2차 교육과정에서 사용했던 <바른생활> 교과서를 보면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매 학년 학기별로 6·25와 관련한 내용이 3~4개씩 등장한다. 대부분 공산군의 만행과 잔인성을 부각시키는 내용이다.

국군의 무용담을 기술한 ‘피 묻은 태극기’(4학년), 공산군의 만행과 공산당의 거짓 선전 기술을 소개한 ‘창복 아저씨의 다리’(5학년), 전쟁 발발 원인을 기술한 ‘태극기 휘날리는 백마고지’(5학년) 등이 그 예다. 당시까지 학교교육에서 북한은 대결 상대였고, 교육목표도 북한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하는 것이었다. 북한은 ‘북한 괴뢰집단’ 내지 ‘꼭두각시’라는 명칭으로 기술됐다.

1973년부터 1981년까지 시행된 3차 교육과정 역시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계기로 ‘북한 괴뢰집단’으로 표현하던 북한의 명칭이 ‘북한 공산집단’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여전히 6·25에 대한 기술은 북한 공산집단이 저지른 죄악상과 북한동포의 참상을 알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굳건히 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김일성 우상화와 공산체제에 대한 내용은 여전히 비판적으로 기술했다.

북한에 대한 비판 수위가 낮아지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들어서다. 정부는 북한을 대화의 상대, 즉 같이 살아가야 할 민족공동체로 규정하고 정부 차원에서 관계개선 노력을 기울이면서 학교교육에서도 반공교육의 호칭을 통일안보교육으로 바꿨다. 또한 북한에 대한 지나친 비판은 통일 의지를 키우는 데 장애가 된다는 입장을 수용해 교과서에서 북한 비판의 강도를 낮췄다.

그 결과 4차 교육과정(1981~87)에서는 6·25와 관련한 교육과정이 학 학년에 1~2개 수준으로 줄어들었으며, 내용도 북한 공산군의 만행이나 죄악상을 폭로하는 북한에 대한 비판적 이야기보다 전쟁의 참혹상 및 6·25의 과정과 결과와 전쟁으로 인한 민족의 비극을 제시하는 데 초점을 맞추게 된다.

반공교육이 획기적으로 변화를 맞이한 것은 5차 교육과정(1988~92) 때다. 가장 큰 변화는 북한에 대한 호칭의 변화다. 4차 교육과정까지 ‘북한 공산집단’으로 기술했던 북한에 대한 호칭이 ‘북한’으로 바뀌었다. 북한을 남한과 대등한 관계로 보고 대결의 상대가 아니라 대화의 상대로 교육한다는 방침에서다.

이념교육과 별개인 역사의 한 부분

이에 따라 6·25의 참혹함을 소개해 북한에 대한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불러 일으키는 감정적 내용도 대폭 삭제됐다. 4차 교육과정까지 북한 공산당의 만행을 소개한다는 취지에서 상세하게 기술했던 이승복 어린이 이야기가 5차 교육과정에서는 ‘통일봉’으로 바뀐 것이 대표적 예다.

4~6차 교육과정 도덕과 편수관이었던 한명희 용인대 겸임교수는 “이승복 어린이는 지나치게 북한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한다는 비판이 있었으나 교과서에서 완전히 삭제할 경우 이승복 어린이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말이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을 수용한 것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어 조카와 삼촌이 등산하는 과정에서 이승복 기념관을 내려다보며 이승복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 간단히 설명하는 내용(‘통일봉’)으로 바꾸었다”고 설명한다.

1990년의 독일 통일과 1991년 소련 해체 등 국제정세의 변화는 통일교육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냉전 체제가 무너지면서 반공교육의 명분과 필요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 같은 추세에 따라 1993년부터 1997년까지 실시된 제6차 교육과정에서는 북한을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고 같이 살아가야 할 동반자적 관계로 서술한다. 6·25에 대한 직접적 언급이 사라졌으며, 민족 화해협력 차원에서 민족의 동질성 회복을 위한 노력 및 북한의 실상과 통일 의지를 강조하는 교육이 본격화한 것도 이때부터다.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 이후 편찬한 제7차 교육과정의 고등학교 도덕 교과서에는 “김일성 주석의 돌연 사망으로…”라고 ‘김일성 주석’이라는 호칭을 인용부호 없이 기술하고 있다. 현장 교사들이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말하는 대목이다.

한명희 교수는 “교과서에서 지난 10년을 제외하고는 6·25를 ‘반공교육’과 직결해 6·25에 대한 이성적 접근보다 적개심을 고취하기 위한 감정적 소재로 이용했던 것이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통일운동세력의 6·25에 대한 이 같은 알레르기 반응에는 이승만 정권 및 이후 정권을 잡았던 일련의 군사정권이 6·25를 정권 강화의 도구로 이용했던 것에 대한 반작용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과거 우리 사회에서 6·25는 ‘반공교육’과 동일어로 인식됐다. 1980년대 후반 수정주의에 의해 북침 가능성이 제기되기 전까지 우리 사회에서 6·25의 발발 원인과 과정에 대한 연구는 지식인 사이에서도 금기였다. 6·25와 관련한 연구와 서술의 독점권은 정권이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교과서는 6·25를 전후해 자행된 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한 줄도 다루지 않은 채 북한 공산군의 만행만 강조해 기술했다. 오늘날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6·25가 퇴출당한 것은 과거 극단적으로 치우쳤던 반공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의 일종의 부메랑인 셈이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교사는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6·25 관련 내용이 사라진 것에 대해 “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한다. 공산주의가 몰락한 지금 이념교육을 할 필요가 없을뿐더러 굳이 어린 학생들에게 6·25를 가르쳐 북한에 대한 적개심을 갖게 할 필요가 있느냐는 반문이었다.

문제는 과거 반공교육에서 반대쪽 극단으로 치달은 통일지상주의 교육 역시 또 다른 절름발이 교육을 양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6·25가 남긴 깊은 음영 알고 지나가야

6·25가 정확히 몇 년도에 일어났는지를 모르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6·25가 일본과 싸운 전쟁으로 아는 초등학생이 20%에 달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 6·25 문맹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6·25에 대한 지식이 없다 보니 38선과 휴전선을 구분하지 못하는 학생도 절반가량 된다.

이에 대해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어떤 역사적 사건이든 세월이 지나면 잊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면서도 “6·25를 공교육에서 가르치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과거처럼 6·25를 반공교육과 연관지어 교육할 필요는 없지만, 대한민국 역사의 중요한 사건인 만큼 공교육에서 가르쳐야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이야기 아니냐는 것이다. 그래야 300만 명이 희생된 민족상잔에 대한 반성도 있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반문이다.

한명희 교수는 “최근 북한의 현실을 이해시키기 위한 교육으로 북한의 민주화 실태나 인권문제를 거론하면 이는 북한을 비방해 통일의지를 꺾어 놓는 반통일교육이라고 비판하는 세력이 있는 것이 사실인데, 통일을 위해서는 북한의 장단점을 꾸밈없이 알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의 단점을 지적하고 6·25를 가르쳐야 한다는 의견을 반통일교육이라고 오도하는 것 자체가 반통일적 사고라는 지적이다. 6·25가 우리 민족의 최대 비극인 동시에 남북 간 갈등을 극복하는 데 가장 큰 장애요소로 작용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럴수록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이다.

“민족을 자유민주주의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민족과 자유민주주의는 모두 중요한 것이지 어느 한쪽이 더 중요하다고 우열을 가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지난해 38선에서의 충돌과 전쟁의 형성을 다룬 <한국전쟁>을 출간한 정병준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는 “5,000년 우리 역사에서 300만 명이 희생된 전쟁은 6·25가 처음”이라며 “대량살육의 시기이자 광기의 시대였던 6·25는 한국 역사에서 가장 불행한 부분”이라고 말한다.

공식적으로는 200명이, 비공식적으로는 2,0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광주민주화운동이 우리 사회를 20년간 흔들었던 만큼 300만 명이 희생된 6·25가 우리 사회에 길고 짙은 음영을 드리운 것은 당연하지 않으냐는 말이다. 그는 “이념논쟁을 떠나 6·25를 잘 기억하고, 거기서 교훈을 찾는 것이 300만 명의 핏값을 갚는 길”이라고 덧붙였다. 잘 기억하는 것의 첫걸음은 6·25를 생략이나 왜곡 없이 ‘제대로’ 아는 것이라는 게 그의 말이다.

7차 교육과정 초등학교 도덕·사회 교과서 속 통일교육과 6·25 관련 기술
“6학년 교과서에 처음으로 ‘북한의 남한 무력침공’ 언급”

지금은 남과 북으로 갈라져 살고 있지만, 우리는 한 겨레입니다. 우리는 통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 함께 생각하고, 이야기하여 봅시다.
- 남과 북으로 나누어져서 우리가 겪는 어려움은 무엇일까요?
- 통일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 국민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요?
- 통일이 되면 어떤 점이 좋을까요?
(초등학교 2학년 2학기 <바른생활> ‘6. 우리는 한 겨레’ 중에서)

남한과 북한은 원래 한 나라였습니다. 지금은 분단되어 가족들이 서로 만나지 못하여 가슴 아파하고 있습니다. 21세기에는 이런 불행이 말끔히 씻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북한이 함께 어우러져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통일을 이루기 위해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초등학교 3학년 2학기 <도덕> ‘5. 우리의 소원’ 중에서)

분단 50여 년 만에 열린 남북정상회담은 민족의 화해와 협력, 그리고 통일의 희망을 싹 트이었습니다. 평화통일은 우리 민족의 마음을 이어 주고, 민족의 긍지와 자존심을 되살려 주는 주춧돌입니다. 또, 평화통일을 이루면 우리는 번영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선택활동(1) 식량난을 겪고 있는 북한을 돕기 위한 방안을 모둠별로 찾아 발표해 봅시다.
(초등학교 5학년 <도덕> ‘9. 한 마음으로 평화통일을’ 중에서)

우리 민족은 남북으로 분단되어 많은 시련과 고통을 겪어 왔습니다. 우리 민족이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평화통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 남북한이 하나의 철도와 도로망으로 연결되면 우리 나라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 생각하여 발표해 봅시다.
- 경의선과 남북한 도로 복원이 통일을 앞당기는 데에 어떤 효과가 있는지 알아봅시다.
(초등학교 6학년 <도덕> ‘8. 평화통일의 길’ 중에서)

남한의 대한민국 정부는 민주주의 국가로의 발전을 꾀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남한과 다른 이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갈등과 반목이 깊어갔다. 그러던 중 북한은 남한을 무력으로 공산화하기 위해 6·25전쟁을 일으켰다.

<6·25 전쟁의 전개 과정>
1950년 6월25일, 북한은 남한을 무력으로 통일하기 위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우리 국군은 북한 공산군의 침략에 맞서 용감히 싸웠으나 공산군의 대규모 남침에 일시 후퇴하였다.

유엔은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북한 공산군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유엔군을 우리나라에 파견하였다. 그해 9월, 유엔의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북한군은 38도선 이북으로 퇴각하였다.

이때에 국군은 북한 공산군을 무찌르기 위하여 압록강까지 진격했으나, 중국군의 개입으로 다시 밀려 후퇴하게 되었다. 서로 밀고 밀리던 남과 북은 결국 1953년 7월에 휴전을 하였고 남북이 분단된 채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초등학교 6학년 1학기 <사회> ‘대한민국의 수립과 발전’ 중에서)


전교조와 6·25
6·15 공동선언에 통일교육 해답 … “분단 원인 물으면 외세 탓으로”

“통일교육시대에 굳이 6·25를 들먹이며 북한이 남한을 쳐들어 왔느니 하는 이념교육을 할 필요가 있습니까?”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6·25와 관련한 내용이 거의 삭제된 것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전교조 측의 답변이다.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을 기치로 내건 전교조는 통일교육을 민족교육의 일환으로 간주한다. 전교조가 말하는 통일교육은 외세에 반대하여, 민족 대단결을 통해 우리 역사의 주인으로 살아온 민족의 문화와 역사를 학습하고 교육하는 것이다. 전교조는 이에 “우리 시대의 통일교육과 교사들의 통일 실천활동에 대한 해답은 6·15공동선언에 담겨 있다”고 말한다. 전교조가 6·15 남북 공동수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하고 또 중요시하는 이유다.

때문에 전교조는 통일교육 관련 계기수업으로 6·25대신 6·15 수업을 한다. 박태동 전교조 통일위원회 정책국장은 “(6·25를 강조하는) 기존의 통일교육은 흑백논리나 이데올로기적 사고에 치우쳐 통일에 대한 합리적 사고나 적극적인 통일 의지를 길러주는 데 미흡한 감이 있다”고 그 이유를 설명한다. 6·25 대신 이산가족문제 등 분단으로 인해 우리 민족이 겪는 고통이나 어려움을 강조해 학생들에게 통일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데 수업의 주안점을 둔다는 말이다.

전교조 통일관은 ‘6·15 남북공동수업안’ 전교조 측 자료에 잘 드러난다. 전교조가 ‘2007년 6·15 남북공동수업안’으로 배포한 동영상 자료에 따르면 “통일의 필요성을 설명하다 보면 학생들이 왜 분단됐는지 분단의 배경을 물을 수 있다”며 “이때 주의할 점은 분단의 이유가 우리가 원해서가 아니라 외세에 의해 강요된 것을 이해시키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분단의 배경 설명은 과거에는 남과 북이 싸우기도 했지만, 6·15남북공동선언 등의 예가 있듯 이제는 화해하고 하나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식으로 처리한다. 대신 강조하는 것이 6·15남북공동성명이다. 학생들에게 6·15남북공동성명 전문을 읽히고, 이를 바탕으로 가로 넣기 퀴즈도 풀게 한다.

한편, 지난해 전교조 부산지부는 북한의 <현대조선역사>를 베낀 강의자료인 교사연수자료집 <통일학교>로 2005년 세 차례 통일학교 세미나를 열었던 것이 알려져 물의를 빚었다.

논란이 된 <통일학교>는 92쪽에 걸쳐 제1강 일제시대의 해방투쟁, 제2강 해방 이후 이북의 현대사, 제2강 북·미 핵 대결에서 드러난 이북의 새로운 사상은 무엇인가 등 세 부분으로 이뤄졌다. 문제는 1~2강 내용이 북한의 <현대조선역사>를 거의 그대로 발췌 수록했던 것.

‘조선인민’ ‘조선전쟁’ ‘미 제국주의’ 등 남쪽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생소한 용어들이 그대로 등장할 뿐만 아니라, 내용도 국군이 1950년 6월23일 밤 10시부터 다음날까지 북한에 700여 발의 105mm 곡사포와 81mm 박격포를 일방적으로 발사해 6·25를 일으켰다는 등 남쪽에서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것이 많았다. 3강은 북한에 호의적인 학자의 논문이나 북한 쪽 언론 보도 내용을 인용했다.

당시 전교조 부산지부는 “한반도 현대사에 대한 남·북의 인식차이가 너무 크다고 판단해 북한은 현대사를 어떻게 설명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주변에서 구한 자료로 만든 자료집”이라고 해명했다. 북한에 다녀온 부산지역 일부 교사들 모임에서 이용됐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전교조 부산지부가 지난해 1월 홈페이지에 ‘2006년 겨울 부산지부 연수’ 자료집에 포함된 2005년 사업평가서에는 “<통일학교>에는 통일선봉대 활동을 했던 교사들이 주로 참여했다”며 “이들을 조직해 내고 함께할 수 있는 틀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고 적은 것으로 밝혀져 논란이 됐다.

전교조 이민숙 대변인은 당시 “(<통일학교> 자료집은) 북한의 역사책 내용을 발췌 인용한 것일 뿐, 전교조의 주장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북한 교과서 속 6·25
조선침략전쟁 일으킨 미제, 인민 앞에 무릎 꿇다?

우리 학생들이 임진왜란과 6·25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을 때 북한 학생들은 6·25를 어떻게 배우고 있을까?

한 탈북자는 “하나원에서 6·25가 김일성이 일으킨 전쟁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고 말한다. 북한에서는 6·25를 미제가 도발한 ‘조선침략전쟁’이자 미제에 대항한 ‘조국해방전쟁’으로 가르치기 때문이다.

북한은 마치 우리가 1960년대 도덕 교과서뿐만 아니라 국어·역사 교과서 등 전 과목을 6·25 관련 이야기로 채웠던 것처럼 소학교와 중학교의 전 과목 교과서를 일제와 미제의 악행 이야기로 채워넣고 있다.

북한의 소학교 교과목은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대원수님의 어린시절>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장군의 어린시절>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 어머님의 어린시절> <사회주의 도덕> <수학> <국어> <위생> <음악> 등이다. 이 중에서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대원수님의 어린시절>은 교과서 한 권 전체가 김일성의 항일투쟁 이야기를 통해 일제에 대한 반감을,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원수님의 어린시절>은 한 권 전체가 김정일의 어린시절 이야기를 통해 6·25 전란 중의 미제의 악행을 고발하는 내용으로 구성됐다.

예를 들어 소학교 3학년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원수님의 어린시절>의 제1과 ‘붉은별’은 “1950년 6월25일 미제 침략자들과 그 앞잡이 놈들은 우리나라에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행복이 넘치던 조국땅 우에 커다란 위험이 닥쳐왔습니다”로 시작한다.

북한의 교과서에서 6·25는 미제가 일으킨 전쟁이며, 남한은 어디까지나 미제에 의해 고통받은 불쌍한 남녘 동포로 그려진다.

북한의 6·25관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2003년에 출판된 중학교 6학년 <미제와 일제의 조선침략죄행(1930~90년대)> 교과서다. 이 책의 ‘제2장 미제의 남조선 강점과 조선침략전쟁 도발, 일본군국주의의 조선전쟁 가담’에서 북한은 “1950년 1월 미 륙군 장관 로이얄놈이 남조선에 기어들어 괴뢰군의 ‘북벌’계획을 ‘지도’하였다.

2월에는 맥아더놈이 리승만 역도와 괴뢰군 참모총장놈을 미 ‘극동사령부’에 불러다가 북반부를 침공할 데 대한 구체적인 지시를 주었다. 미제는 1950년 6월9일과 11일, 13일에는 ‘특별사찰경비령’ ‘비상경계령’ ‘준비상계령’을 선포하면서 38연선과 남조선 전역에 삼엄한 전쟁 분위기를 조성했다. (중략) 이처럼 미제는 면밀한 계획과 준비에 기초하여 1950년 6월25일에 우리 공화국을 반대하는 침략전쟁을 도발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은 또 정전협정과 관련해 “미제는 전선에서 이루지 못한 침략 야망을 담판의 방법으로 실현해 보려는 망상 밑에 파렴치한 군사외교 책동도 벌리였다. 전선에서 패전에 패전을 거듭한 미제는 ‘강대국’의 체면도 집어던지고 할 수 없이 1951년 6월에 정전 담판을 우리 측에 제기해 왔다. 미제는 담판에서 실패하게 되자 원자탄위협과 최후 발악적대규모공세를 감했하였다. (중략) 이렇게 되자 미제는 할 수 없이 1953년 7월27일 우리 인민 앞에 무릎을 꿇고 정전협정에 도장을 찍고 말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글 오효림_월간중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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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mments
fabiano 2007.06.26 14:34  
6.25 피난시절,누구나 할 것없이 질곡스런 고통을 당했는데 먹거리가 없던 우리에게 미군부대에서 버리는 소위, 꿀꿀이죽과 돼지사료인 밀기울,보리개떡을 먹어 본 전교조 관계자 분, 있습니까? 어려운 시련의 세월을 겪어 이 정도 나라가 이루어졌는데 당신들은 미사여구와 현학적인 언어의 말장난으로 후대를 이끌어 가야 할 세대들에게 이미 쓸모없는 공산사회 사상을 심어 반미, 친북적인 사고를 조장하는가? 이는 반드시 조국의 이름으로 단죄해야 할 반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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