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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종군여기자 마가렛 히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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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종군여기자 마가렛 히긴스
[국정브리핑 2005-06-27 15:12]
여성으로 첫 퓰리처상을 수상한 바 있는 마가렛 히긴스. 그녀는 6.25당시 종군기자로 몸을 사리지 않는 열정적인 취재로 신문독자들에게 한국전을 생생하게 소개한 바 있다. 6.25전쟁 55주년을 맞아 전투복이 잘 어울리는 여자, 히긴스를 다시 한번 조명해 본다.


최초의 여성 퓰리처 상 수상자

1951년 여름, 마가렛 히긴스(Marguerite Higgins, 1920-1966)란 젊은 여기자가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그녀의 수상은 미국은 물론 세계 언론의 관심을 끌었다. <뉴욕 헤럴드 트리뷴>지 소속 기자였던 그녀가 한국전쟁 전선에서 겪은 모험들은 당시 하나의 전설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1951년 ‘한국전쟁(War in Korea)’이란 책을 출판하여 대단한 인기를 끌었으며, 미국 각지를 순회하며 한국전쟁에 관한 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브닝드레스 보다 미군 전투복이 더 어울리는 여자" "화장품 대신 진흙과 먼지를 바른 여자" 남자보다 더 용감한 아름다운 여자". 당시 미국 언론들이 그녀에 관한 묘사는 바로 그녀의 명성을 증명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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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스는 1951년 ‘한국전쟁(War in Korea)’이란 책을 출판했다.
그녀는 홀홀단신의 몸으로 한국전쟁의 전선에 나서 미군병사들의 존경을 받은 유일한 여기자였다(한 미국 병사는 이렇게 그녀를 칭찬하기도 했다. "당신은 내가 형제로 삼고 싶은 아가씨요") 또한 그녀는 자존심이 상한 남성 동료기자들에게 그녀를 따라잡으려면 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였다. 그녀의 집요함과 탁월한 기사는 놀라운 것이었다. (한 남성 기자는 이렇게 고백했다. "그녀는 아주 용감하든가 혹은 그저 멍청하든가 둘 중의 하나이다. 그녀의 무모함을 뒤쫓느라 다른 기자들도 모두 힘들어 하고 있다.")

한국전쟁과 히긴스

1950년 6월25일 매기 히긴스는 북한 공산집단의 남침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틀 후인 6월27일, 도쿄 특파원이었던 그녀는 한국의 김포공항에 도착한다. 도쿄에 부임한지 엿새 만에 그녀는 한국 땅을 밟고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히긴스가 3명의 남성기자들과 함께 한국에 도착했을 때 불시에 기습을 당한 미 군사고문단들은 후퇴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울 거리는 피난 물결로 아수라장이었다. 이런 와중에도 그녀가 만난 한국군 장성은 "사태가 우리에게 유리하게 되어가고 있다"는 실제 상황과 동떨어진 발언을 한다.

그녀가 한국에 도착한 다음날 새벽 서울과 한국의 남부지역을 잇는 유일한 다리였던 한강인도교가 폭파된다. 한국군이 북한군의 남침을 지연시키기 위하여 예고 없이 다리를 폭파해 버린 것이다. 다리를 건너던 수많은 군인들과 피난민들이 죽거나 부상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그녀는 나룻배를 타고 구사일생으로 한강을 건너 피난행렬에 동참할 수 있었다.

맥아더와 히긴스

한강다리 폭파소식을 뉴욕으로 송고할 수 없었던 그녀는 미 군용기편으로 도쿄로 날아가 기사를 보내고 다음날인 6월29일 태평양지역 미군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와 함께 전쟁터로 돌아온다. 히긴스와 맥아더 장군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날 맥아더 장군이 반나절 동안 한국전선을 시찰하고 도쿄로 다시 돌아가려고 비행장에 도착했을 때 그는 히긴스를 다시 만났다. 그녀는 공항 활주로에서 기사를 쓰고 있던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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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긴스와 멕아더 장군.
맥아더는 그녀에게 다가가서 도쿄에 가려면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히긴스는 맥아더로부터 이러한 호의 이외에 단독 인터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트루만 대통령에게 미 지상군을 파견해주도록 건의할 생각"이라는 특종을 낚은 것이다.
특종 보도 다음날 그녀는 다시 전쟁터인 한국으로 날아왔다. 수원 비행장에서 만난 미군 대령과의 대화 한 토막은 그녀가 얼마나 직업정신에 투철한 언론인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보세요, 젊은 여기자. 도쿄로 돌아가세요. 이곳은 위험한 전쟁터입니다(Young lady, go back to Tokyo! There may be trouble).” “위험한 전쟁터가 아니라면 제가 여기 오지 않았을 겁니다. 위험한 것이 뉴스이며, 나의 임무는 바로 뉴스를 수집하는 일입니다(I wouldn't be here if there were no trouble. Trouble is news, and the gathering of news is my job).”
매기는 뉴욕의 편집실에 긴장감 넘치는 체험 리포트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그 중 하나는 이렇게 시작한다. "기자들이 포함된 미군 정찰대는 오늘 오후 적진 안으로 13킬로미터를 침투했다. 지프는 총알보다 빨리 튕겨져 날아갔다. 우리가 탄 차의 오른쪽 뒷바퀴도 총탄을 맞고 찢어져 버렸다."

미군병사들의 아름다운 연인

한국 전쟁터의 짙은 먼지 속에서도 마가렛 히긴스는 여전히 예뻐 보였다. 그녀는 일부러 매력적으로 보이려고 노력하지는 않았다. 전선에서의 그녀의 복장은 한 벌의 군용 셔츠, 너덜너덜한 범포바지, 그리고 때에 찌든 몇 켤레의 테니스 신발이 전부였다. 양말도 신지 않았다. 그녀의 가방에는 타자기와 손수건, 칫솔, 립스틱 등이 들어 있었다. 한 미군 병사는 자신의 놀라움을 이렇게 표현했다. "매기는 다른 여자가 화장하는 것처럼 먼지를 바르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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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복이 잘 어울렸던 히긴스는 화장품 대신 진흙과 먼지를 바르고 다녔다.
어느 날 그녀가 오랜만에 한적한 강에서 때를 씻고 목욕을 하고 나서 나오려고 할 때, 미군 한 명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당황한 그녀는 이렇게 물었다. "어머, 당신 같은 인간들이 이 부근에 더 숨어있어요?" 병사는 엄지손가락으로 어깨너머 뒤쪽을 가리켰다. "몇 명 더 있어요. 다른 녀석들은 망원경을 가지러 갔지요."
이 경우를 제외하면, 매기는 처음부터 자신을 특별대우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이 곳 대구에서처럼 장교들과 사병들이 아침에 일어나 보면 매기가 자신들 사이에 드러누워 자고 있었다. 매기는 밤  늦게 돌아와 "몸 구석구석에 좀약을 뿌린" 뒤에 잠들어 있는 남자들 사이에 끼어들었던 것이다. 시카고의 <데일리 뉴스>지 소속 키즈 비취 기자는 이렇게 우스개 소리를 했다. "뻔뻔스런 놈팽이가 아니라도 매기와 같이 잤다고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은 많았다."

당시 한국에 배치된 미 8군사령관이었던 월튼 M. 워커 장군은 전쟁터는 여자가 머무를 곳이 못된다고 선언하고 (특히 여성을 위한 편의시설이 전혀 없기 때문에) 매기를 한국에서 추방해 버렸다. 매기는 즉시 맥아더를 찾아갔다. 자신은 여자가 아니라 기자로서 전쟁에 참가했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었다. 편의시설로 따지자면 "한국에서는 아무데서나 덤불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당돌함에 감명을 받은 맥아더는 그녀를 다시 전선으로 보냈다. '한국전쟁'에서 매기는 워커 장군을 "짜리몽땅하고 볼품없는 몸에다가 얼굴은 흡사 불독같은 표정이었으며, 늘 삐딱한 태도를 보이는 인간"이라고 묘사했다.

매기는 24시간 내내 잠도 자지 않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기사를 타이핑하는 일이 잦았다. 이런 그녀의 지구력은 피곤에 지친 다른 남자 동료들을 놀라게 했다. <라이프>지 사진기자 칼 마이던스는 그녀가 약한 모습을 보인 적이 딱 한번 있었다고 주장한다. 어느날 그녀는 마이던스와 함께 차를 타고 아주 울퉁불퉁한 길을 달리고 있었다. 매기는 손으로 가슴을 꼭 감싸고 등을 웅크렸다. "왜 그래? 배가 아파?"라고 한 사람이 물었다. "아냐. 어제 밤에 브래지어를 잃어버렸어. 이놈의 길이 내 몸을 찢어버릴 것 같아서 그래." 이것이 매기의 대답이었다.

히긴스와 비거트

히긴스에 관한 전설 가운데 가장 흥미진진한 것은 <트리뷴>지의 동료기자 호머 비거트와 한국에서 모질게 싸웠던 이야기이다. 비거트는 노련한 만능 리포터였는데, 그 역시 한국전쟁 전선에 투입되었다. 두 사람은 <트리뷴>지의 1면을 서로 차지하려고 조금의 양보도 없이 싸웠다. <타임>지 기자 톰 램버트는 이렇게 말한다. "호머가 매기를, 혹은 매기가 호머를 죽여버렸다면 기자들 간의 경쟁관계도, 한국전 보도도 시시해졌을 것이다."
비거트도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매기는 5번째 상륙선 편대와 함께 상륙하는 데 성공했다. 그녀는 몇 시간동안 해군 보병들과 함께 유탄발사기와 기관총의 빗발치는 세례를 받았고, 덕택에 아주 긴장감 넘치는 기사를 쓸 수 있었다.
매기를 따라잡으려고 노력하던 비거트도 결국 퓰리처 상을 받았다.

히긴스의 일생

마가렛 히긴스는 섬세하면서도 강인한 여성이었다. 이러한 그녀의 성품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1차 대전 때 조종사로 참전하기도 했던 그녀의 부친은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던 사업가였다. 그는 젊은 프랑스 여성과 결혼하였고, 매기는 1920년 9월 3일 홍콩에서 태어났다. 12살이 될 때까지 매기는 불어와 중국어만을 할 줄 알았다. 그 후 그녀는 프랑스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캘리포니아와 뉴욕의 대학에서 1942년까지 공부했다. 대학 시절 그녀는 대학생 통신원 신분으로 <뉴욕 헤럴드 트리뷴>지에 기고하기 시작했고, 그 후에는 화재피해 전문 리포터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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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긴스 묘지.
1944년 그녀는 <트리뷴>지 런던 지국으로 발령받았고, 미군이 독일 튀링엔 주의 부헨발트를 점령할 때 처음으로 전쟁기사를 쓰게 되었다. 한 명의 동료와 함께 기자로서는 최초로 다하우에 진입한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을 받았다.
1947년, 매기는 <트리뷴>지의 베를린 지국장을 맡게 되었다. 미 점령군 사령관 루셔스 D. 클레이와 그녀는 잘 아는 사이였다. 이 막역한 사이 덕택에 그녀는 항상 가장 빠르게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다. 때로 매정한 성미를 보여 그녀는 몇 명의 동료기자들과 적대관계에 빠지기도 했다.

서독의 첫 대통령 호이스가 처음으로 만찬을 개최했을 때 매기는 초대를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만찬장에 나타나 수위를 째려보며 "나는 여자가 아닙니다"라고 주장했다. 이 후 그녀는 당연한 듯이 만찬장에 매번 참석했다.
그녀는 여가시간을 활용하려고 가로수 광고를 보고 바이얼린을 하나 구입했다. 그녀는 춤도 출 줄 알았는데, 특히 캐스터네츠를 들고 스페인식 춤을 잘 추었다. 세련된 모임에 참석하여 아주 우아한 매력으로 남자들의 시선을 끄는 것도 좋아했다. 또한 그녀는 시속 85킬로미터 이하로 달리는 것을 지루하게 여기는 운전광이기도 했다.

베를린 시절 그녀와 함께 일했던 사람 가운데 유일한 증인으로 남은 <뉴스위크>지의 토니 하워드는 '즐거운 외침'이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은 일종의 실화소설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매기 히긴스와 토니 하워드, 그리고 "별로 여성스럽지 못한 여류기자들 여럿"('연합 프레스' 베를린 지부장 톰 리디의 말)의 특성들을 섞어 만든 인물이다.
한국 전쟁 후 히긴스는 새로운 분쟁지역으로 부각되었던 동남아시아로 눈을 돌렸다. 특히 그녀의 베트남 전쟁에 관한 심층 취재로 당시 미국 정부의 미움을 받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1965년 그녀는 라오스에서 풍토병을 얻게 되어 고생하다가, 1966년 1월 3일 45년 남짓한 길지 않은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유해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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