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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論] 러일전쟁 終戰 100주년에 보는 독도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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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日동맹과 英日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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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5월27일 東鄕 제독이 이끄는 일본 연합함대는 대한해협에서 러시아 발틱함대를 맞아 궤멸시켰다.>

금년은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을사보호조약 100주년, 일본의 식민 침탈에서 광복된 지 60주년, 韓日 국교 정상화 40주년이 되는 해다. 또 日帝가 시마네縣 告示를 통해 독도를 강탈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 역사적 의미와 교훈은 「亡國」이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100년 전 을사조약으로 우리나라는 망했다. 나라가 망한 것은 이완용 등 을사오적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반도를 놓고 일본과 러시아가 국운을 걸고 전쟁을 벌였는데도, 일본의 침략 야욕에 맞서 나라를 지키기 위한 전쟁은 엄두도 못 내는 나라라서 망한 것이다.
 
  금년 들어 駐韓 일본대사는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공언하고, 일본 안에서는 「竹島의 날」 조례를 제정했다. 한국 정부도 이에 대해 전례 없이 강경 대응을 했다.
 
  일본은 이에 대해 큰소리를 내지는 않지만 「당신들 마음대로 해보라. 우리는 우리 갈 길을 간다」는 태도를 명확히 했다. 일본이 그런 태도를 취할 수 있는 배경은 다음과 같다.
 
  첫째, 美日동맹의 강화다. 冷戰 종식 이후에도 일본은 北核 상황下에서 有事立法, 헌법의 확대해석, 자위대의 해외파병 등을 통해 미국과의 동맹을 지속적으로 강화했다. 일본은 지금 러일전쟁을 벌이기 직전 당시 세계 최강국이던 영국과 英日동맹(1902)을 맺었을 때와 같은 기분에 젖어 있을 것이다.
 
  둘째, 한국의 일본에 대한 기술종속의 항구화다. 작년의 對日赤字는 244억 달러였다. 이는 對日 기술의존의 결과이다. 이런 현실 앞에서 양국의 내셔널리즘이 충돌할 때, 일본이 양보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셋째, 일본 경제의 장기불황이다. 경제가 불황일 때 일본에서는 내셔널리즘이 고양되곤 했다. 1920년대 말, 세계대공황의 여파로 발생한 일본의 경제공황에 대한 應戰(응전)이 일본 내셔널리즘의 폭발과 15년 전쟁으로 이어진 만주침략이었다.

짓밟힌 中立선언

1904~1905년 러일전쟁의 기본성격은 한국에 대한 침략전쟁이었다. 전쟁은 1904년 2월9일 인천 앞바다에 있는 러시아 군함을 일본 함대가 기습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하루 전에 일본은 인천에 육군 4개 대대를 상륙시켰다. 그중 2개 대대는 서울을 제압하고 왕궁을 점령하여, 고종황제의 의지를 박탈했다. 한국 정부는 그 한 달 전에 中立을 선언했었지만, 일본의 무력은 여지없이 이를 짓밟았다. 한국의 중립을 지켜 줄 힘이나 우방이 한국에는 없었다.
 
  러시아에 대한 선전포고는 2월10일에 있었다. 인천에 일본군 1개 사단 1만4000명이 상륙한 것은 2월16일에서 27일 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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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23일 일본은 군사적 위압下에 韓日의정서를 강요했다. 한국의 국토와 인민을 일본의 전쟁수행 체제에 강제로 끌어넣고, 한국 황제의 의뢰로 일본이 한국을 위해 러시아와 싸우는 모양을 국제적인 눈앞에 갖추려 든 것이다.
 
  1905년 3월경 만주에서의 싸움이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5월의 동해 海戰에서 일본 해군은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격멸했다. 하지만 일본은 전쟁 수행 능력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1905년 9월5일 조인된 포츠머스 강화조약의 주안점은 일본의 한국지배에 대한 러시아의 승인이었다.
 
  미국이 카츠라-태프트 협약으로 일본의 한국에 대한 보호권 설정을 인정한 것은 그해 7월29일이었다. 英日동맹을 개정하면서 영국이 일본의 한국지배를 승인한 것은 8월12일이었다.
 
  한국을 침탈키 위한 두 강도의 싸움에서 일본이 이긴 것을 노대국 영국과 신흥대국 미국은 일찌감치 인정케 하는 외교술을 일본은 이때 이미 터득하고 있었다. 대한제국의 운명이 국제사회에서 결정된 것은 이때이다.
 
  일본 각의가 한국에 대한 보호권 확립의 실행을 결정한 것은 10월27일이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등박문)가 총칼의 위협下에 을사늑약 체결을 강요한 것은 11월17일 자정을 넘어서였다.
 
 
  1514966719950189.gif日, 러일전쟁 과정에서 獨島의 전략적 가치에 주목
 
  일본은 한 일본 어업가가 獨島에 독점적 어로권을 확보하기 위해 제출한 신청을 받아들여, 1905년 1월28일 내각회의에서 獨島를 無主地로 전제, 독도를 일본영토에 편입한다고 결정했다. 이때는 러일전쟁이 한참이던 때였다.
 
  일본軍 1만4000명, 러시아軍 5000명 이상이 전사한 후 旅順항을 내려다보는 203고지가 일본軍 손에 최종적으로 들어온 것은 1904년 12월5일이었다. 이어서 일본軍은 203고지 山頂에 탄착 관측소를 설치하고 항구를 향해 攻城砲(공성포)를 퍼붓기 시작했다.
 
  목표는 여순항內에 대피하고 있던 러시아 제1태평양 함대(여순함대)였다.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제독의 연합함대는 이때 여순 外港을 봉쇄하고 있었다. 일본軍이 여순함대를 격멸한 것은 12월16일이었다.
 
  이어 도고 제독은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迎擊(영격)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러시아는 1904년 4월 중순 발틱함대를 「제2 태평양 함대」로 개칭하고, 발틱海를 떠나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돌아 일본을 향해 항진하도록 했다.
 
  도고 제독은 함대를 정비하기 위해 규슈(九州) 서쪽의 사세보 기지로 이동시킨 후, 1904년 12월30일 戰況(전황) 보고를 위해 東京의 大본영에 나타났다. 일본인들이 사상 유례 없는 천재 작전참모라고 칭송하는 아키야마 사네유키(秋山眞之) 중좌가 동행했다.
 
  러일전쟁을 다룬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의 대하소설 「언덕 위의 구름」은 東京에 온 아키야마의 행적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1년 전에 결혼한 그에게는 東京 시내 아오야마(靑山)에 신부가 기다리는 새집이 있었다. 東京에 있는 동안 아키야마는 해군 軍令部(해군본부)에 매일같이 잠깐 얼굴을 비치고는 이내 집에 와서는 군복을 입은 채 벌렁 드러누워, 늘상 볶은 콩을 씹으며 바둑판처럼 구획된 판자 천장을 끝없이 응시하며, 작전구상에 골몰했다.
 
  戰史는 전하고 있다. 일본의 연합함대는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통과할 것으로 예상한 제주도 근해에서 시작하여 동해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까지, 全동해를 緯度(위도)·經度(경도) 각 10분씩 바둑판으로 세분한 지도책을 작성하고, 그 바둑칸 하나하나에 일련번호를 붙였다. 敵 함대를 발견했을 때 하나의 숫자를 대는 것만으로 위치 전달이 족했다(「日露戰爭全史」, 데니스 워너, 페기워너, 妹尾作太男·三谷庸雄역, 時事通信社).
 
  이 아이디어는 일본 각의가 獨島 귀속을 결정한 1905년의 1월 한 달을 東京 새집의 바둑판 천장을 바라보며 작전구상에 빠져 들었던 아키야마의 머리에서 나왔을 것이다.
 
  동해를 세분하는 작전지도를 만드는 과정에서 일본 해군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獨島의 존재에 눈이 갔을 것이고, 국가의 흥망이 걸린 大해전이 벌어질 전장 한복판에 있는 암초인 獨島의 전략 가치에 괄목했을 것이다.

러일전쟁 중 獨島에 무선기지 설치
1905년 5월 동해 海戰에 앞서 일본은 獨島에 망루를 세우고, 무선전신 기지를 설치했다. 한 어업가의 어로작업을 위해 전쟁 한복판에 있는 나라가 이 짓을 했을 것인가.
 
  일본 각의가 어민의 어로를 위해 獨島 영유를 결정했다는 1905년 1월 하순은, 陸戰에서는 만주 遼陽(요양)의 北西쪽 黑溝臺(흑구대) 부근에서 러시아軍 대병력과 일본軍 수개 사단이 혹한의 풍설 속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였다. 러시아軍의 反攻은 저지되었으나(1월27일), 일본군 1개 사단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5000여 명의 사상자와 동상자가 발생했다.
 
  만주 벌판의 전황은 電信을 통해 東京의 대본영으로 즉각 전달되고 있었다. 冬服이 무진장 아쉬웠고, 화약이 모자랐고, 戰費(전비)가 달렸다. 온 정부가 전쟁 뒷바라지에 매달려 있던 것이, 일본 각의가 獨島 귀속을 결정하던 1905년 1월29일 전후의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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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고 제독은 1905년 문제의 1월 한 달을 꼬박 東京에 머물면서 야마모토 곤베이(山本倦岳衛) 海軍相 등 해군 수뇌부와 작전계획을 세웠다.
 
  이때 결정된 대작전 원칙은 「함대의 전력을 조선해협(대한해협)에 두고 機(기)에 응해 행동할 것」이었다. 일본 해군은 東海에서 발틱함대와 결전을 치르기로 결정한 것이다. 발틱함대가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水路로는 사할린과 홋카이도(北海道) 사이의 소야(宗谷)해협, 북해도와 혼슈(本州) 사이의 쓰가루(律輕)해협 등 두 개의 수로가 더 있었다. 도고는 군함 29척, 수송선 40척, 승원 1만 명의 대함대가 이들 수로를 통과하는 것은 어렵고, 지구를 반 바퀴 도는 긴 항해에 지친 함대가 지름길인 東海 항로(대한해협)를 택할 것이라 보았다.
 
  앞의 작전지침 「함대의 전력을 조선 해협에 두고…」가 결정되었을 때 獨島의 운명도 결정되었다. 동해海戰을 앞둔 일본함대가 망루와 무선기지를 설치할 곳으로는 獨島만 한 곳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략이 풍부한 야마모토 곤베이 해군상은 해군 수뇌부의 작전의지에 맞춰, 閣議에서 「어로」 명분으로 獨島 귀속조치를 처리했을 것이다.
 
  東京을 떠난 도고 제독은 정비를 마친 연합함대를 끌고, 진해만으로 이동했다. 연합함대는 5월 말의 海戰 때까지 석 달 내내 함포사격 연습만 했다고 한다. 거제나 웅천이나 다대포의 우리 어민들은 생업을 닫고 밤낮 없이 천지가 진동하는 굉음에 떨었을 것이다.
 
  일본 연합함대와 발틱함대가 조우한 곳은 부산과 일본 야마구치縣의 서북 끝을 연결한 중간 지점쯤 된다.
 
  구축함 등을 빼고 主전력만 비교한다면 전함수에서는 8 對 4로 발틱함대가 우세했다. 순양함級에서는 20척 對 9척으로 일본이 우세했다. 비슷한 戰力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화력과 포격력에서 연합함대가 압도적이었다. 성능·기술을 계산하여 연합함대의 포격력이 발틱 함대의 17배였다는 분석도 있다(「日淸·日露戰爭」, 海野福壽, 集英社. 東京). 충분한 훈련으로 銳氣(예기)를 기르며 대기하고 있었던 연합함대에 비해 7개월에 걸친 긴긴 항해에서 대양의 황파에 시달린 발틱함대의 수병들은 지쳐 있었다.
 
  20시간 남짓한 海戰에서 발틱함대는 괴멸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 러시아의 함정은 순양함 한 척과 구축함 두 척뿐이었다.
 
  5월27일 오후 2시 조금 지나 시작된 동해海戰은 28일 아침, 獨島 근해에서 벌어졌다. 27척의 연합함대 함정들이 전함 두 척을 포함하는 다섯 척의 발틱 함대 함정을 원거리에서 포위했다. 러시아 함대에 백기가 올랐고 나포 절차가 진행되었다. 동해海戰은 獨島에서 끝났다.
 
  獨島가 동해海戰에서 저들에게 얼마나 유용하게 활용되었던가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獨島 문제는 러일전쟁 내셔널리즘과 연결
일본인들은 오늘날도 明治일본의 영광의 정점에 러일전쟁史를 두고 있다. 그들은 러일전쟁을 「민족 서사시」라 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만 해도 「明治天皇과 日露大戰爭」이란 영화는 20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고, 영화제작사는 일거에 재벌이 되었다. 소설가 시바 료타로는 러일전쟁 스토리를 엮은 「언덕 위의 구름」을 써서 일본 열도의 紙價(지가)를 올렸고, 국민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러일전쟁만큼 일본인들의 내셔널리즘에 불을 지피는 것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일본인들의 獨島에 대한 미련이 그들의 러일전쟁 내셔널리즘에 접합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러일전쟁 勝戰 100주년이 되는 해여서인지, 일본인들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 보면 러일전쟁은 한국 침략전쟁이었고, 대한제국의 주권을 강탈한 전쟁이었다. 일본인들의 속성으로 봐서, 우리가 일본을 극복할 수 있는 강한 나라를 만들기 전에는 獨島문제는 정리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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