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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좋은 글을 소개합니다

fabiano 0 1147  

김연광 월간조선편집장 의 글를 옮겨 싣습니다
 
高建(고건) 前 총리와 지난 설연휴 전에 대학로의 한정식 집에서 저녁을
함께 했습니다.
 
  高총리가 양주 「로얄 살루트」를 한 병 가지고 왔습니다.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 술을 반주로 마셨습니다.高총리는 『이게 정말 좋은 술』이라며,
朴正熙(박정희) 대통령과 얽힌 일화를 하나 얘기했습니다.
 
  高총리는 청와대 행정 首席(수석) 비서관으로 朴대통령의 마지막 날들을
지켜봤습니다.
 
  『朴대통령이 저녁을 같이 먹자고 수석들을 자주 부르셨어요.일주일에 한 번 꼴이 더 됐던것 같아.陸英修 여사 돌아가시고 나서 적적하신 거지.나오는 술은 딱 두 가지예요.한 번 막걸리가 나오면,다음에는 양주야.朴대통령은 막걸리에 맥주를 탄 「비탁」을 좋아하셨어요.聞慶에서 국민학교 교사하던 시절 모심기를 하면서 막걸리 한 말에 「기린 비어」 한 병을 섞은 걸 먹어봤는데,그 맛을 못 잊으신 거야.양주는 궁정동 만찬 술상에 올라서 유명해진 「시바스 리갈」이 나왔어요』

  
  궁정동 安家(안가)에서 朴대통령이 金載圭(김재규) 중정부장에게 시해되기 며칠 전에도 수석들과의 저녁자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날은 朴대통령께서 경호원을 부르더니 「내 침대 머리 맡에 양주가
한 병 있는데 가지고 오라」고 해요.경호원이 가져왔는데 바로 이 「로얄 살루트」야. 朴대통령이 혼자 좋은 술을 마셨다는 게 쑥스러우셨는지,「朴浚圭(박준규·당시 공화당 당의장 서리)가 미국 갔다 오면서 한 병 선물로 사왔어.잠 안 올 때 한 잔씩 아껴 먹었어」라고 해요.병을 들어보니 3분의 2쯤이 남아
있었어요.
그 자리에 10명쯤이 있었는데 한 잔씩 돌았어요.처음 먹어봤는데 술 맛이 기가 막혀. 다들 「한 잔은 더 마실 수 있겠구나」 군침을 삼켰어요.그런데 金桂元(김계원) 비서실장이 「각하, 남은 술은 침실에 갖다 두겠습니다」하고,술병을 빼앗아 경호원에게 건네줬어요. 朴대통령이 「어이」 하고 경호원을 한 번 부르기만 하고,「술병 여기에 놔둬라」는 말씀을 안 하시는 거야. 얼마나 야속하던지 말이야(웃음)』
 
                               
  高총리는 그로부터 3년 후 하버드 대학으로 연수를 가면서,정부의 고위관리가 열어 준 환송연에 참석했다고 합니다.그 자리에서 高총리는 다시 朴正熙 '대통령을 떠올렸다고 합니다.
 
  『환송연 술자리에 「로얄 살루트」가 나와서 깜짝 놀랐어요.그래서 두 번째로 이 술 맛을 본 거야.그 귀한 술을 막 마시는 거야.옆 자리에 앉은 여종업원들 한테도 한 잔씩 주고 말이야.한 병이 끝인 줄 알았는데 두 병이 더 나와…. 朴대통령 돌아가신 지 3년밖에 안 됐는데 많이 변한 거지』
 
  최근 들어 과거사 청산의 주요 표적으로 떠오르고 있는 朴대통령이 술자리의 화제가 됐습니다.『18년 동안 한국의 근대화를 이끈 사람을 이렇게 일방적으로 폄하해도 되느냐』, 『이것 저것 다해 봐야 어른이 되는 것 아니냐. 한국도
이렇게 성숙해 가는 것이다』
                            
  
  얘기가 엇갈렸습니다.어쨌든 우리는 朴대통령이 그렇게 아껴 마셨다는
「로얄 살루트」 한 병을 간단하게 비웠습니다.
  
중산층 누구나 「시바스 리갈」 한 병쯤은 부담없이 마실수 있는 시절이 왔습니다.그러나 朴正熙의 공과에 대한 논란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朴대통령이 쓴 광화문 현판을 떼내고, 「그때 그 사람」이라는 영화가 朴正熙의 시대를 조명한다고 떠들썩하지만,너무 감각적이고 표피적입니다.
  
 왜 朴正熙는 「1인 쿠데타」 유신으로 憲政을 파괴하고,독재자의 길을 갔을까요? 南美(남미)의 정치학자 길레르모 오도넬이 내놓은 「관료적 권위주의 이론」은 維新체제를 이해할 수 있는 탁월한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오도넬은 유신과 같은 관료적 권위주의의 출현을 「산업구조의 深化(심화)」에서 찾고 있습니다.
 
  <선진국에 원자재 수출을 하던 후진국들은 자립경제를 추구하면서,경공업 중심의 輸入代替(수입대체) 산업을 키운다.南美에서 이 시기는 대체로 포퓰리즘 정권의 전성기에 해당된다.다음 단계로 중간재와 기계설비의 對外의존을 극복하기 위해 중화학공업 투자가 시작된다.막대한 외자를 도입하기 위해 해외 자본과 국내자본,관료적 행정능력을 갖춘 軍이 손을 잡는다.이 3者 연합에 의한 쿠데타가 발생하고,관료적 권위주의 정권이 출연한다.民衆부분의 강력한 분배요구를 배제하지 못하면 산업구조의 고도화와 深化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維新 철권통치는 朴正熙 정부가 중화학공업 건설에 집중 투자했던 시기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과도한 중화학 공업 투자,2차 유류파동(1979년)으로 朴正熙 정권은 휘청거립니다.1979년 말에 발생한 釜馬(부마) 항쟁을 부가가치세 인상에 따른 중산층의 租稅抵抗(조세저항)이라는 측면에서 분석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중화학공업 건설을 통해 朴正熙는 대한민국 경제를 세계 자본주의체제에
단단하게 接木(접목)시켰습니다.요즈음 한국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하는 철강·전자·반도체·조선·해운·자동차 산업은 1970년대 朴正熙에 의해 씨앗이
뿌려진 산업들입니다.
                  
  
  朴대통령은 세계자본주의를 향해 경제를 열어젖히고,維新이라는 「공포의 광장」을 유지해야 하는 난해한 숙제를 떠안았습니다.
정권의 합법성을 상실한 그는 효율성을 극대화시켜 합법성 부족을 메우려 했지만,국민들은 「빵 그 이상」을 원했습니다.
 
  維新의 친위세력이 되어야 할 사람들까지 維新에 부정적이었습니다.
金載圭가 그랬고,全斗煥 보안사령관의 비서실장이었던 許和平(허화평) 대령도 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許和平씨의 이야기입니다.
 
  『3選 개헌에 대해서는 일부 수긍하는 영관급 장교들이 있었습니다.하지만 維新에 대해서는 「이건 절대 아니다」는 생각이 확고했습니다.우리가 10·26 이후의 권력 공백을 메우고 들어가 집권했지만,그건 10·26 사건 수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돌발적으로 발생한 일이었어요.維新체제를 유지해야 된다거나,연장해야 한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어요』
                    
  
  그만큼 維新체제의 기반은 취약했습니다.「인권외교」를 앞세운 카터 미국 대통령은 한국 정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민당 총재인 金泳三(김영삼)씨를 만났습니다.카터-金泳三 회동에 동석했던 朴浚圭 당시 공화당 의장서리의
회고입니다.
 
  『국회 귀빈식당 의원 휴게실에 칸막이를 해서,金泳三씨가 통역을 사이에
두고 카터 대통령과 앉고,내가 그 옆에 앉아서 얘기하는 희한한 광경이 벌어졌어요.金泳三씨가 나중에 뉴욕 타임스 기자에게 한 똑같은 얘기를 카터 대통령에게 하는 거야.「미국이 군사원조를 많이 해줬는데 원조만 해주고 한국 국민을 괴롭히는 독재정권을 방치하고 있다.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타도하지 않느냐」.朴정권 전복을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라는 거야.끝나고 나서 「정말 이래도 되는 거야」라고 했지만,金泳三씨는 아무 반응이 없었어』
 
  인권과 자유를 요구하는 미국과 국내 민주화 세력의 압박에 維新체제는
무너졌습니다.
 
 
  나탄 샤란스키는 자신의 저서 「민주주의 사례」에서 세계를 「자유 사회」와 「공포 사회」로 나누고 있습니다.그는 자유사회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다는 이유로 체포되거나 구금되지 않고,
육체적인 위해를 당하지 않는 사회가 자유사회다」
 
  이 기준에 따르면, 유신시절은 「공포 사회」였습니다.

  나탄 샤란스키는 舊소련 시절 소련의 인권운동가 안드레이 사하로프의 통역을 맡아 그와 서방 언론간의 비밀접촉을 도왔습니다.그리고 8년간 투옥됐습니다.
 
  샤란스키는 「자유 사회」의 사람들이 「도덕적 명료함」을 얼마나 강고하게 견지하느냐에 따라 「공포 사회」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갈파합니다.주장이 너무나 簡明(간명)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듭니다.우리는 그의 주장이 사실임을
維新시절 이미 실감했습니다.
 
  <도덕적 명료함은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출발점이다.도덕적 명료함을 잃게 되면,수백만 명의 인민을 살해한 독재자까지 평화와 인권을 얘기하는 상황이 온다.도덕적 명료함을 잃게 되면,악독한 독재자가 평화의 유력한 파트너로 보인다.이건 양과 늑대를 한 우리에 넣고,평화가 오기를 기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다.우리는 이런 오류를 거듭거듭 계속해 오고 있다>
 
  <우리가 공포 사회에 사는 사람들의 비참한 상황을 인도적으로 개선하는 데만 관심을 기울인다면,평화를 위한 우리의 갈망은 독재자의 무기가 돼 버린다.惡을 직시할 수 있는 도덕적 명료함을 가질 때 우리는 공포사회를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
 
                          

  미국을 향해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고 요구했던 이들이,『경제적 풍요를 위해 자유를 유보할 수 없다』고 절규했던 이들이 지금 金正日 앞에서 순한 양처럼 숨을 죽이고 있습니다.
 
  이들은 『金正日은 협상의 상대이기 때문에 절대로 화나게 해서는 안 된다』면서 북한 주민의 자유와 인권을 애써 외면하고 있습니다.宋斗律(송두율) 같은 「내재적 접근론자」들은 『金正日과 북한 주민은 일체화돼 있다』고 합니다.자신을 飢餓(기아)와 죽음으로 내모는 독재자와 일체감을 느끼는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다는 말입니까?
 
  민주화 세력은 도덕적으로는 파탄했습니다.
 
  인권 변호사였던 盧武鉉 대통령,민주화 운동을 훈장처럼 달고 사는 이들이 이제 대답해야 합니다.당신들은 자유의 편입니까,아니면 공포의 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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