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명을 죽였다 - 남경대학살사건
fabiano
History & Ph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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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01 21:46
남경대학살 [南京大虐殺]
1937년 12월 13~17일을 고비로 약 2개월간 당시 중국의 수도 난징에서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대학살 사건.
중일전쟁의 발단이 된 루거우차오[蘆溝橋] 사건 이후 반년 만에 중국의 수도 난징이 함락되었다.
일본 중지나방면군(中支那方面軍)의 사령관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 대장 휘하의 5만 여 일본군은 난징으로 진격하는
도중과 점령 후 중국인 포로와 일반시민을 대상으로 강간·학살·약탈을 자행했다.
학살의 방법은 기총에 의한 무차별 사격, 생매장, 휘발유를 뿌려 불태워 죽이는 등 잔인했다.
당시 일본 국내에서는 이 사실이 일반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외국인 생존자에 의해 곧바로 세계에 보도되었을 뿐 아니라 몇 가지 르포르타주나 보고서에 의해 점차 더 널리 전해졌다.
극동국제재판 판결에 따르면, 비전투원 1만 2,000명, 패잔병 2만 명, 포로 3만 명이 시내에서 살해되었고,
근교에 피난가 있던 시민 5만 7,000명 등 총 12만 9,000명이 살해되었다.
이것은 최소한의 숫자이며 실제로는 3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남경대학살사건 당시 100명을 죽였다는 이 기사는 1937년 12월 12일字, 東京日日新聞에서 대서특필 하였다.
군국제국주의의 일본은 이들을 영웅시하였다.
向井 106명, 野田 105명을 죽였다.
1947년 12월 18일. 戰犯 법정에 출두한 田中, 向井, 野田.(왼쪽에서)
처형 당일, 유서를 작성하고 담배를 피우고 있다.
1948년 1월 28일, 戰犯들이 처형장으로 향하고 있다.
마지막 흡연.
戰犯들이 처형장에서 만세 3창을 하고 있다.
총살된 戰犯들.
向井敏明(36세)野田毅(35세)田中軍吉(42세).
1937년 12월 13~17일을 고비로 약 2개월간 당시 중국의 수도 난징에서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대학살 사건.
중일전쟁의 발단이 된 루거우차오[蘆溝橋] 사건 이후 반년 만에 중국의 수도 난징이 함락되었다.
일본 중지나방면군(中支那方面軍)의 사령관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 대장 휘하의 5만 여 일본군은 난징으로 진격하는
도중과 점령 후 중국인 포로와 일반시민을 대상으로 강간·학살·약탈을 자행했다.
학살의 방법은 기총에 의한 무차별 사격, 생매장, 휘발유를 뿌려 불태워 죽이는 등 잔인했다.
당시 일본 국내에서는 이 사실이 일반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외국인 생존자에 의해 곧바로 세계에 보도되었을 뿐 아니라 몇 가지 르포르타주나 보고서에 의해 점차 더 널리 전해졌다.
극동국제재판 판결에 따르면, 비전투원 1만 2,000명, 패잔병 2만 명, 포로 3만 명이 시내에서 살해되었고,
근교에 피난가 있던 시민 5만 7,000명 등 총 12만 9,000명이 살해되었다.
이것은 최소한의 숫자이며 실제로는 3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남경대학살사건 당시 100명을 죽였다는 이 기사는 1937년 12월 12일字, 東京日日新聞에서 대서특필 하였다.
군국제국주의의 일본은 이들을 영웅시하였다.
向井 106명, 野田 105명을 죽였다.
1947년 12월 18일. 戰犯 법정에 출두한 田中, 向井, 野田.(왼쪽에서)
처형 당일, 유서를 작성하고 담배를 피우고 있다.
1948년 1월 28일, 戰犯들이 처형장으로 향하고 있다.
마지막 흡연.
戰犯들이 처형장에서 만세 3창을 하고 있다.
총살된 戰犯들.
向井敏明(36세)野田毅(35세)田中軍吉(42세).
난징대학살은 1937년 12월~1938년 1월 당시 중국의 수도 난징과 그 주변에서 일본의 중지(中支)
파견군 사령관 마쓰이 이와네 휘하의 일본군이 자행한 중국인 포로·일반시민 대학살 사건이다.
일본군은 난징으로 진격하던 중 약 30만 명을 살해했고 난징 점령 뒤에 약 4만 2000명을 살해했으며
아녀자 수천명을 무차별 강간 살해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