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셉 로버츠(Joseph N. Roberts)의 한국전쟁 사진첩
fabiano
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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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5 14:25
Korean War Photo Page photos by Joseph N. Roberts
In loving Memory of my Father...
아래 포스팅은 美 육군 제7보병사단 17연대 소속의 Joseph N. Roberts씨가 1952-1953년 한국전쟁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와 금화지구 전투에서 복무한 기록사진으로 그의 아들이 정리하여 웹사이트에 공개한 것이다.
사랑하는 아버지의 추억을 기억하며 올린 이 사진첩에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모습과 금화지구 전투의 사진이 있다.
아들의 말에 의하면 아버지인 Joseph N. Roberts씨는 유능한 저격수로서 한국전쟁 복무를 매우 자랑스러워 했다고 한다.
Joseph N. Roberts씨는 1931년에 출생하여 79세인 2010년에 사망하였다.
1950년 발발한 6·25전쟁 중 유엔군과 한국군이 사로잡은 북한군과 중공군 포로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거제도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하기로 결정한 데에는 섬이라는 지리적 조건으로 포로 관리에 인력과 경비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점,
급수가 용이하다는 점, 포로들이 먹을 식량을 재배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점 등이 고려되었다.
급수가 용이하다는 점, 포로들이 먹을 식량을 재배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점 등이 고려되었다.
포로 수용 규모는 처음에는 6만 명이었으나 나중에 22만 명으로 확대되었다.
1950년 11월부터 섬의 중심부인 일운면 고현리(지금의 거제시 고현동)를 중심으로 용산리·장평리·문동리·양정리·수월리·
제산리와 연초면의 임전리·송정리 그리고 동부면 저구리 일대의 총 1200만㎡ 부지에 수용소를 설치하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와 함께 부산에 있던 포로들을 이송하여 1951년 2월 말에 이미 5만 명의 포로를 수용하였고, 1951년 6월 말까지
북한군 15만 명, 중공군 2만 명과 의용군 그리고 여성 포로 300명 등을 포함하여 최대 17만 3000여 명의 포로를 수용하였다.
포로수용소는 한국군과 유엔군의 경비 하에 포로자치제로 운영되었는데, 포로 송환 문제를 놓고
북한으로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와 송환을 희망하는 친공포로로 갈려 대립하였으며 유혈사태를 빚기도 하였다.
일련의 이 사진 시리즈를 찍은 조셉 로버츠(Joseph N. Roberts).
거제도 포로수용소 경비업무를 담당했던 미 제7사단 17연대의 마스코트였던 한국 하우스보이.
친공포로들은 수용소 내부에 조직을 만들어 소요 및 폭동 사건을 일으켰으며, 1952년 5월 7일에는 친공포로들이 수용소장 프랜시스
도드(Francis Dodd) 준장을 납치하는 이른바 거제도포로소요사건을 일으켜 한달이 지난 6월 10일에야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유엔군 사령부가 반공포로와 친공포로를 분리 및 분산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1952년 8월까지 북한으로 송환을 희망하는
포로들은 거제도를 비롯하여 용초도·봉암도 등지로,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들은 제주·광주·논산·마산·영천·부산 등지로
이송되어 소규모로 분산되었다.
미 17보병연대 배속 한국군.
미 17보병연대 배속 한국군과 조셉 로버츠(Joseph N. Roberts).
미 17보병연대 배속 한국군.
미 17보병연대 배속 한국군.
이후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조인된 뒤 33일간에 걸쳐 거제도에 수용된 친공포로들이
모두 북한으로 송환됨에 따라 포로수용소도 폐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