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글] 수덕사, 수덕여관 관련 6 남녀 얘기
修德寺에 얽힌 세남자와 여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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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을 따라 뻗어 내린 태백산맥에서 말을 갈아타고 서해를 향하던
차령산맥이 잠시 쉬어가는 곳에 수덕사가 있고 수덕사 일주문 바로
왼쪽에 곧 쓰러질 것 같은 초가집 한 채가 수덕여관이다.
수덕사 원경과 일주문
한때는 이 나라의 내로라하는 시인, 화가, 묵객들이 드나들던
여관은 주인도 객도 떠나가고 곰팡이 냄새 나는 을씨년스러운
모습으로 나그네를 맞이한다.
수덕여관 현재 모습
이제 이 수덕사와 수덕여관에 관련된 세 여자와 세 남자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세 여자란
김일엽
나혜석
<?XML:NAMESPACE PREFIX = ST1 />박귀옥 (이응로 화백의 본부인)이고,
세남자란
송만공스님
이응로화백
김태신 (일당스님=김일엽과 일본인 사이에 난 사생아)을 말한다.
장면 # 1
수덕사 일주문 옆에 있는 초가집 한채는, 너무나도 유명한 당대에 쌍벽을
이룬 두 폐미니스트 김일엽스님과 나혜석의 전설같은 이야기가 서린 곳이다.
김일엽과 나헤석(상)
장면 #2
한국 최초의 신시 여류시인 김일엽은 "그처럼 꽃답던 사랑도 단지 하루의
먼지처럼" 털어 버리고 1928년 그의 나이 33살에 속세를 접고 수덕사견
성암에서 탄옹스님으로 부터 수계를 받고 불가에 귀의하자, '글 또한 망상의
근원이다'는 스승 만공선사의 질타를 받아들여 붓마저 꺾어버린다.
김일엽이 오르 내리던 견성암(현재 환희대)가는 길(上)
"청춘을 불사르고.."를 집필한 옛 견성암 (下지금은 헐리고 없다.)
견성암자리에 들어선 환희대(상)
김일엽의 생활을 지켜보고 보살핍을 받았던 견성암의 작은 불상(하)
장면 # 3
1934년 이혼 후 극도로 쇠약한데다, 어린 딸과 아들이 보고 싶어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있던 나혜석은 수덕사로 직행하지 않고 수덕사
일주문 바로 옆에 있는 수덕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장면 #4
김일엽이 암자에서 내려와 두 사람은 반갑게 회포를 풀었지만,
한 사람은 여성을 옥죄는 사회제도가 한없이 원망스러운 이혼녀이고, 또 한
사람은 그것을 초월한 여승이었으므로, 두 사람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지금의 수덕여관
"너처럼 중이 되겠다"는 나혜석의 부탁에 "너는 안 돼"라고 일엽이 만류했지만
"조실스님(만공)을 뵙도록 도와줘"라는
나혜석의 간청에 못 이겨 마지 못해 김일엽은 만공스님 면담을 주선한다.
장면 #5
몇 년 전 경성에서 속세를 접고 여승이 되겠다고 속내를 털어 놓는 김일엽에게
"현실 도피의 방법으로 종교를 선택해서는 안된다"라고
면박을 주던 나혜석이 이제는 처지가 바뀌어 같이 머리 깎고 중이 되겠다고
하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그만큼 이 땅에서 신여성으로 살아가기 힘들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장면 # 6
만공선사로부터 "임자는 중노릇을 할 사람이 아니야"라는 일언지하의 거절을
당한 나혜석은 포기하지 않고 수덕여관에 5년동안이나 머무르며
'중 시켜 달라'고 1인 시위 하면서 버티는 한편 붓가는 대로 그림을 그리며
찾아 오는 예술인과 소일한다.
장면 #7
어느 날. "엄마가 보고 싶어 현해탄을 건너 왔다"는 열네 살 앳된 소년이
수덕사로 김일엽스님을 찾아온다.
그 소년은 김일엽이 일본인 오다 세이죠와의 사이에 낳은 김일엽의
아들인 김태신이다.
모정에 목말라 있는 아들에게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불러라"
라고 냉정하게 말하는 김일엽을 보고,
“어쩜 저렇게도 천륜을 거역할 수 있을까?”라고 느낀 혜석은 모정에 굶주린
그 소년이 잠자리에 들 때 팔베개를 해주고 젖 무덤을 만지게 해준다.
수덕여관에 있던 송만공유묵(상)과 그가 세운 관음보살상(하)
나혜석 역시 모성애에 주려 있는 세 아이의 엄마다.
이러한 모습을 바라본 김일엽은 속세의 연민을 끊지 못하는 나혜석이
중노릇은 못 할 거라고 생각한다.
장면 # 8
김태신은 이 후에도 어머니 김일엽을 찾을 때마다 수덕여관에서 묵는데,
나혜석은 마치 자기자식을 대하듯 팔베개를 해주고 자신의 젖을
만지게 하는 등 모성에 굶주린 일엽의 아이를 보살핀다.
나혜석은 수덕여관에서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면서 김태신(후에 일당스님)에게
여러모로 영향을 끼치는데, 나혜석과 특별한 교분이 있는 청년화가 이응로도
자주 찾아와 이들과 함께 그림에 대한 이야기와 실습으로 시간을 보내고…….,
이러한 연유로 김태신도 후에 북한 김일성 종합대학에 걸려 있는 김일성주석의
초상화를 그릴 정도로 유명화가가 된다.
나혜석은 이곳에서 34년부터 43년까지 작품활동을 하며, 자유연애,
이혼고백장 발표, 최린을 상대로한 정조 유린 위자료청구소송 등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장면 #9
충남 홍성이 고향이고, 해강 김규진 문하에서 그림에 대한 열정에 불타고
있던 청년 이응노에게는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돌아온 나혜석은 둘도 없는
선배이자 스승을 만나려 자주 수덕여관을 들른다.
이응로와 김태신(상) 이응로가 새긴 수덕여관 간판(하)
그러다가 두 사람은 함께 이 산속 외진 곳에서 아예 같이 기숙한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누나 같은 스승이자 선배화가일 뿐 애정관계는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이응로에게 파리의 환상을 심어 준다.
장면 #10
누나처럼 선생님처럼 따뜻하게 대해주던 선배 화가 나혜석과의 인연으로
수덕여관에 정이 들어 버린 이응노는, 1944년 나혜석이 이곳을 떠나자
아예 수덕여관을 사들인 다음 부인인 박귀옥에게 운영을 맡기고,
6.25때에는 피난처로 사용하는 등…. 6년간 살면서 수덕사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화폭에 옮긴다.
장면 #11
나혜석으로부터 꿈에 그리던 파리 생활과 그림 이야기를 들은 이응노는
1958년 드디어 21세 연하의 연인 박인경과 함께 파리로 떠나 버린다.
홀로 남은 그의 본부인 박귀옥이 여관을 운영하나 글자 그대로 소박떼기
청상과부가 되어 버리고 만다.
머물다 미련 없이 떠나 버린 두 사람과는 달리, 박귀옥여사는 변치 않는
애정과 절개로 이국 땅의 남편을 그리며 수덕여관을 지킨다.
장면 #12
1967년 또다시 김태신이 어머니 김일엽 스님을 견성암으로 찾아온다.
일엽스님은 쪽 물감 만드는 일과 선수도 하는 것과의 유사성을 설명하면서
말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정갈하게 가꾼 쪽풀을 응달에다 말려 단지에 발효시키는데, 동짓달부터
다음해 5월까지 7백번 손을 써야한다.
699번 정성을 드렸다가도 단 한번 소흘이 하거나 부정을 타면 쪽이 죽어버린다
는 지극히 선적인 생명체다.”라고 한다.
수덕사 백련암뒤 관음바위와 관음보살상(하)
“발효하기 시작하면 목욕재계하고 조석으로 저어 줘어야 하는데,
젓는 동안 화엄경을 암송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