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거제도 포로수용소 - 그 시절의 山河와 일상 (4)
한국전쟁과 거제도 포로수용소 - 그 시절의 山河와 일상 (4)
아래 포스팅은 한국전쟁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美 육군 제556 중트럭 중대에서 복무한
Donald K. Grovom 일병이 찍은 것으로 보기 힘든 포로수용소의 폭동 장면과
그 시절, 거제도 山河와 사람들의 일상을 200여 매의 슬라이드에 담았다.
약 2개월 전에 M20WC51님은 이 포스팅을 필자에게 flickrMail로 알려 왔다.
그동안 당시, 상황을 파악하고 정확하지 않지만 사진의 배열을 나름대로 정리하였다.
Donald K. Grovom씨는 2011. 10. 15. 타계하였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Koje Island POW Camp, 1953: The photos of Pfc. Donald K. Grovom.
This is a large set of slides mainly taken on Koje (Geoje) Island, Korea.
There were large POW camps there, that were the site of constant agitation and fighting
by the North Korean and Chinese prisoners.
Pfc Grovom belonged the 556 Heavy Truck company stationed there.
His notes on the slides indicate that the prisoners seen here were "Anti-Red" prisoners,
who were actively resisting being repatriated to NK and Red China.
Notes on the slide boxes give the location of some of the other photos as Masan, and Chinhae, Korea.
Mr Grovom died Oct 15, 2011.
(1) 거제도.
(3) 거제도 포로수용소.
(4) US Army Q-623, 1953
(5) USS Chowanoc, 1953
(6) LST-1141, USS Stone County, 1953
(7)
(8)
(9)
(10)
(12)
(13) 美軍 556 중트럭 중대 모터풀. 1953
(1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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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사진설명은 없으나 이들은 중공군(中共軍)으로서 대만으로 가기 위한 반공포로로 보인다. (사진 18~21)
(19) 장개석 휘하의 중국 국민당 출신의 포로들은 중공이 아닌 대만으로 가기 원했다.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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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반공포로들이 태극기를 휘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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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전쟁 포로들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는 모습이다.
(33) FS 374 Loading POWs, 1953
(34)
(36) another camp.
(37) 1951년 6월까지 북한 공산군 포로 15만명과 중공군 포로 2만명 그리고 여성 포로 300명을 포함하여
최대 15만 3천명의 포로를 수용하였다.
그러나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와 친공포로 간에 유혈사태가 자주 발생하였으며
1952. 5. 7. 당시, 포로수용소장이었던 Francis Dodd 준장이 친공포로들에게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38) 5월 7일 제76포로수용소의 공산포로들은 수용소장인 Francis F.T.도드 준장을 납치하고, 그 석방 조건으로
포로들에 대한 처우 개선, 자유 의사에 의한 포로 송환 방침 철회, 포로의 심사 중지,
포로의 대표위원단 인정 등을 제시하였다
이 폭동은 낙동강 전선에서 미 1 기병사단에 항복했던 이학구가 주도했다.
(39)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만 1년만에 휴전회담이 시작되었고, 이 때 포로 교환 문제가 논의되었다.
북한은 포로 전원을 석방하라고 요구하였으며 유엔군의 포로 교환 방식이 서로 달라 입장차를 좁히지 못하였다.
(40)
1953년 2월에 부상당한 포로를 우선 교환하자는 유엔 측의 제안에 북한이 수용을 함으로써
《상병포로 교환에 관한 협정》에 북한, 중공, 유엔이 합의를 하였다.
이 협정에 따라, 4월 20일 부터 5월 3일까지 전쟁 발발 이후 처음으로 쌍방 간에 포로교환이 이루어졌다.
(41) 포로들은 반공(反共)포로와 공산포로로 나누어 대립하였는데, 분열의 원인은
1949년 제네바 협정에 따른 포로 자동송환이 아닌 자유송환을 유엔군측이 주장하면서부터였다.
(42)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1950 11. 27.부터 유엔군에 의해 거제도 일대에 총면적 12 ㎢ 규모의 수용소가 설치되었다.
(43) 리지웨이(Ridgway)의 뒤를 이어 새로 유엔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마크 클라크 대장은 이와 같은 사건을 막기 위하여
포로의 분산 수용을 결정하고 H. L. Boatner 준장을 포로수용소장으로 임명하였다.
6. 7-10일, 부산 포로수용소에서 공산포로들이 경비병에 반항하다가 1명이 피살된 사건을 계기로 재차 폭동을 일으켰다.
보트너(Boatner)는 1952년 6월 10일부터 포로를 분산 수용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105명의 반공포로들이
공산포로들에 의하여 살해된 사실이 드러났으며, 6월 10일 도드(F. Dodd) 소장은 구출되었다.
참고자료 1. 거제포로수용소 77구역.
거제포로수용소는 60, 70, 80, 90 단위의 숫자가 붙은 구역으로 나뉘었고,
1개의 단위구역(enclose)에는 6,000명을 수용하였다.
각 구역의 하부 구조로 수용동(compound)이 있었고, 전체 수용소는 4개의 구역과 28개의 수용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