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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不運한 시대의 가장 위대한 세대 1920년대생의 충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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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運한 시대의 가장 위대한 세대 1920년대생의 충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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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무엇을 해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네 스스로 살 궁리를 하라』
李根美   
  *이 기사는 1999년3월호 월간조선에 실렸던 것이다.
 
  식민지에서 태어나 해방 뒤 좌우익 이념투쟁을 거쳐 6·25 전쟁 때는 피로써 나라를 지켰다. 불사신처럼 일어나 밤낮 없이 일해 조국을 근대화시켰던 그들은 동년배인 3金씨의 그늘에 가려가지도 했지만 이제 평균수명을 넘기면서 『한국인은 팽이와 같아서 때려야 돌아간다』고 흥분하다가도 『그렇지만 한국은 괜찮은 나라다』고 말한다. 그들의 입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가 항상 붙어 다녔다.
 
  ●일제시대에의 향수는 질서와 正則(정칙)에 대한 동경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의무감이 먼저 간 사람들에 대한 부채가 되어 우리를 몰아세웠다
  ●나이를 먹으면 아무래도 아집과 고집이 생긴다
  ●요즘 어렵다고 자살하고 집 나가고 하는데 그렇게 의지가 약한 사람은 죽는 게 마땅하지
  ●초등학생들도 어렵다고 봐요. 네 다섯 살 되는 아이들을 잘 교육시키면 우리나라에 희망이 있을지 모르지
  ●체벌갖고 말이 많은데 맞을 일을 했으면 맞아야지
  ●내가 보기엔 마흔다섯 살 아래로는 다 정신 못 차리고 있는 것 같애
  ●나라가 외국에 빚진 돈이 많은데 우리한테까지 석달에 한번씩 버스비 3만원 주는데 그 정도면 됐어
  ●漢字 모르는 돌대가리들이 역사를 망칠 것이다
 
 
  현대사의 희생자들
 
  태어나자마자 식민치하였던 1920년대 사람들. 그들이 어언 70대가 되었다. 소년시절을 일제치하에서 보내고 20대에 극심한 좌우익 대립을 거쳐 한국전쟁에 참전(또는 참가)했으며 조국 근대화 현장의 한복판에서 열심히 일했던 그들은 한국 현대사의 살아있는 증인인 동시에 가장 불운한 세대라고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큰 희생을 치르면서 벅찬 감격과 보람, 그리고 실망과 배신을 껴안은 세대이기도 하다.
 
  1995년 인구주택 총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추계한 1999년 현재 70세에서 79세까지의 인구는 191만5868명으로 전 인구의 4.1%이다. 돌이켜보면 지금의 풍요는 이 4.1%의 사람들이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켰고 등골이 빠질 정도로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얻어진 소산이다. 하지만 그들은 조국으로부터 이렇다할 복지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핵가족을 부르짖는 사회풍토 때문에 자식에게도 내몰리는 이중의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들도 있다.
 
  1920년대에 출생한 사람들은 내 나라에 태어났건만 남의 나라의 지배를 받은 기구한 운명의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것은 生來的(생래적)인 것이어서 부자연스런 일이 아니었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이 있었지만 그 사실이 유년이었던 1920년대 사람들이 체감할 수 없는 상태였고 해방은 너무도 요원한 일로 여겨졌다. 1920년대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의식이 생기기 전까진 일본 지배체제가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상황에 대해 작가 韓雲史(한운사·76)씨는 이렇게 얘기한다.
  『그때는 정복당하고 있으면서도 서툰 짓만 안 하면 차라리 평화롭다고 생각했어요. 차라리 요즘이 마음에 평화가 없어요. 선진국으로 간다며 서양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모든 게 너무 바쁘게 돌아가고 있거든』
  요즘도 종종 친일파 논쟁이 있고 있는데, 韓雲史씨는 그에 관해 이렇게 얘기한다.
  『그건 모르고 하는 얘기지요. 우리 조상이 시원찮아서 그런 시대가 왔고 주어진 여건 하에서 말썽 피우지 않고 어떡하면 걔들(일본인)하고 비슷하게 살 수 있을까 생각하면 산 것을 친일파라고 몰아세우면 안되지. 그때는 한마디로 깜깜한 시대였어』
 
  질서와 正則에 대한 향수
 
  성인이 되어 점령당한 사람들과 태어나면서부터 일제치하였던 사람은 아무래도 그 의식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일제시대를 거친 사람들에 대해 흔히 식민지 근성이 있다, 일제시대에 대한 향수가 있다는 지적을 하곤 한다. 1920년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일제시대에의 향수라는 것에 대해 다른 해석을 내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대에 대한 향수는 일본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질서와 正則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20년대 사람들은 일제시대에 부정부패가 없었다는 것과 질서의식이 높았던 점, 거짓말이 통하지 않았던 점을 높이 산다. 그런 사회분위기 때문에 일제시대에는 變則(변칙)이나 편법이 통하지 않았다고 한다. 전 법무부장관 許亨九(허형구·73·변호사)씨는 일제시대 법조계 출신들은 대체로 깨끗했다고 증언한다.
  『판검사를 성직으로 생각했지요. 직업의식과 책임의식을 갖고 깨끗하게 사는 것을 본분이라고 여겼습니다』
 
  원자폭탄이 터질 때 일본 히로시마에서 유학중이었던 金學烈(김학열·72·서울 마포구)씨는 해방 후 일본에서 귀국한 사람들이 사기를 많이 당했다고 전한다.
  『해방 후에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거짓말하고 사기치는 사람이 많았어요. 일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회입니다. 거기서 살다와서 많이들 당했지요. 지금도 난장판이지만』
  일제시대 때는 특히 교육제도가 절도가 있었다는 것에 대해 회고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건양대 식품공학과 劉太鍾(유태종·75) 석좌교수는 당시 교육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일제시대 때 학교를 다니면서 근로봉사를 많이 했는데 체력단련에 도움이 되었지요. 학교에서 필수적으로 유도와 검도를 시켰지요. 방학 때도 의무적으로 운동을 하게 했는데 겨울 방학 때는 내의를 벗고 유도복 하나 입고 운동을 하려면 몹시 추웠죠. 그때는 운동하는 게 고통스러웠지만 운동을 하면서 체력도 기르고 정신력도 강해졌죠. 일본 사람들이 자기네 정신을 심기 위해 우리에게 운동을 시켰지만 결과적으로 우리들에게 도움이 되었지요. 지금 우리나라 교육도 좀더 강해질 필요가 있어요』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金時哲(김시철·70) 회장은 일제 때 배운 修身(수신)이라는 과목을 잊지 못한다.
  『공부를 잘하는 것보다는 먼저 인간이 되는 것을 학교에서 가르쳤는데, 이런 교육은 본받을만한 것이었지요』
  인터뷰를 하는 동안 우리나라의 혼란한 사회상이나 사라져가는 예의범절을 논할 때마다 1920년대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일본과 비교를 했는데 그들에게는 분명 질서와 正則에 대한 향수가 있었다.
 
  배고픔과 징병·징용에 대한 불안
 
  1920년대 사람들은 점점 의식이 자라면서, 특히 1941년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남의 나라 치하에 살고 있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 뼈저리게 느끼기 시작했다. 맨 먼저 찾아온 것은 배고픔의 고통이었다. 「비극은 없다」의 작가 洪性裕(홍성유·71·한국소설가협회회장) 씨는 1942년경이 가장 힘들었다고 회상한다.
  『그때 철저한 배급제도를 실시했는데 성인에게 하루 쌀 2홉3작을 주었어요. 그게 어느 정도 양인지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한 끼는 죽을 먹어야했지. 모든 음식점은 폐쇄되고 화신백화점에서만 카레라이스를 팔았는데 특권층이나 먹을 수 있었지. 나도 딱 한번 먹어봤어요』
 
  미8군에서 38년간 근무하고 정년퇴직한 李春宰(이춘재·71·서울 도봉구)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고기가 먹고싶어서 돼지를 밀도살하는 사람도 많았지. 그때는 흉악범죄는 없었고 도박이나 밀주사건이 큰 사건이었지』
  배고픔과 함께 찾아온 것이 바로 징용에 관한 공포였다. 남의 나라 전쟁에 끌려가 목숨을 잃거나 부역을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 당시 젊은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몸을 숨기기에 바빴고 피하지 못한 젊은이들은 결국 만주로 사할린으로 일본 본토로 끌려갔다.
 
  경기도 화성군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金榮厚(김영후·77)씨는 사할린 탄광으로 끌려가서 모진 고생을 했다.
  『내가 열여섯 살 때부터 고생을 얘길 써놨는데, 소설책 한 권이 넘어요. 사할린에 끌려가서 3년 3개월 동안 탄광에서 일하면서 고생한 얘기는 말로 할 수가 없어요. 사할린에서 나와서 한 달 반만에 해방되었지요. 나는 다행히 해방 전에 사할린에서 나왔지만 지금까지 사할린에 남아있는 분들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지요. 1920년대 사람들이 가장 고생을 많이 한 세대예요』
  金榮厚 씨는 그후에도 수없는 고생을 했다는데 그 얘기하려면 가슴이 막혀 말을 이을 수가 없다고 했다. 태평양 전쟁 막바지에 일본 당국이 젊은이를 색출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는데 해방이 조금만 더 늦어졌더라면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희생되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192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청년기에 이르러 조국이 해방되는 기쁨을 맛보았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그들이 기억하는 해방공간은 한마디로 무질서였다. 소설가 洪性裕씨는 당시를 이렇게 기억한다.
  『해방 이후 갑자기 무질서해졌는데 한 가지 예를 들면 가까운 뒷산의 나무를 땔감한다고 전부 베어버리는 거야. 日帝(일제)가 멀리 내다보고 조림사업을 해서 숲이 울창했었는데 해방되기 무섭게 나무들이 잘려나가는 걸 보고 안타까운 마음이 많이 들더군요』
 
  무정부 상태에서 극심한 左右翼(좌우익) 대립으로 혼란이 이어지자 1920년대 사람들에게 찾아온 것은 절망감이었다. 이 나라가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 혼돈과 불안의 연속이었다. 당시 20대였던 1920년대 사람들은 주체적인 입장이라기보다 수용자적인 입장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면서 절망을 안으로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대산건설 李鍾殷(이종은·71)씨는 이렇게 얘기한다.
  『나의 소년시절과 청년시절을 되돌아보면 요즘 젊은이들은 참으로 부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식민치하에서 10대를 보내고 혼란과 전쟁으로 20대를 다 보냈지요. 요즘 1人1技만 가지면 얼마든지 살 수 있는 세상이지만 예전에는 뭐든지 잘해도, 또 하고 싶은 의욕이 넘쳐도 생계유지를 하기가 힘들었어요』
 
  그런가 하면 해방공간은 내 나라를 찾았다는 희열 속에서 애국심을 고취한 시기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인 1947년 보스톤 마라톤 대회에 나가 1등을 차지, 코리아를 세계 만방에 떨친 徐潤福(서윤복·76·대한육상경기연맹 고문)씨는 李承晩 대통령이 청년들에게 나라를 알리라는 당부를 많이 했다고 전한다.
  『1945년 10월에 지금 동대문 운동장인 서울운동장에서 해방경축 체육대회가 있었어요. 이승만 박사가 개회식에 참석해서 이런 말을 해요. 「내가 해외에서 30년 동안 독립을 호소하고 다녔지만 코리아를 아는 나라가 없더라, 여기 모여있는 청년들아! 코리아 태극기를 세계에 휘날려 다오」 그때 내가 갈 길을 깨우쳤지. 조국을 위해 달려야겠다. 해방 후에 손기정 선생 지도를 받아서 보스톤에서 태극기를 휘날리면서 코리아를 알렸지』
 
  극심한 좌우익 대립의 회오리 가운데서도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1920년대 사람들은 자유당 정권이 부정부패로 물들어 결국 실패한 정권으로 끝났지만 李承晩 대통령만은 國父(국부)로 기억하고 있다. 찬반양론이 많지만 1920년대 사람들은 미국의 원조를 얻어내 우리나라의 기틀을 세웠다는 것에 대해 李承晩 대통령을 높게 평가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가슴 아픈 이별 경험
 
  1920년대 사람들의 정서 가운데 공통적인 것이 있다면 이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 누구라도 가족이든 친구든 아주 절친한 사람과의 가슴 아픈 이별 경험을 갖고 있다. 해방 이후 남한이 극도의 혼란을 겪는 동안 북한은 공산 체제를 착실히 다지고 있었는데, 일면 유산계급들은 북한 땅에서 발붙일 수 없어 속속 월남했다. 그들은 대부분 가족과 생이별을 한 수 가슴 한구석이 시커멓게 탄 채로 살아가고 있다.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金時哲 회장은 함경북도 성진(現 김책시)에서 1.4 후퇴 때 월남한 실향민이다.
  『북한군에 강제 입대 당했다가 바로 탈영해서 국군이 올라왔을 때 치안대원으로 활동했어요. 1.4 후퇴 때 남한으로 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죠. 가족 중에서 나만 내려왔는데 흥남부두에서 배를 탔죠. 정말 처절했어요. 부두에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았지만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젊은이들만 태웠어. 내가 타고 온 배가 거의 마지막 배였는데 지금도 배를 타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던 아낙네들과 아이들이 눈에 선합니다』
 
  이산 가족 문제는 남북이 분단된 지 50년이 넘은 지금까지 아무런 진척이 없어, 인생의 막바지에 다다른 1920년대 사람들을 애태우게 하는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월남한 사람이 아닌 경우에도 1920년대 사람들은 전쟁통에 가족과 또 친구들과 이별을 해야했다. 사랑하는 가족, 친구와 이별을 경험한 1920년대 사람들의 정서는 한마디로 체념이며 恨(한)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나라를 지켰다
 
  그들의 가슴 한구석에는 먼저간 사람들의 몫을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감이 늘 부채로 남아있다. 그 부채가 그들 삶의 원동력이, 때론 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으로 우리나라 청년들을 징용하려했을 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피했던 1920년대 사람들은 내 나라에서 전쟁이 나자 모두들 발벗고 戰場(전장)으로 달려나갔다. 피로써 나라를 지킨 일에 대한 그들의 자긍심을 대단히 높다.
 
  일본 유학을 다녀와 평안북도 도청 공무원을 지낸 金船山(김선산·76·인천광역시)씨는 북한 당국이 친일파라고 쫓아내 1948년 월남했다. 그는 1920년대 사람들의 활약상을 이렇게 얘기했다.
  『우리들이 없었으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지. 6·25 때 군대 안간 사람이 없었으니까. 모두들 나서서 나라를 지켰지. 포항전투에서 우리 부대원 150명 중에서 30명만 살아남았어요. 참 많이 죽었지. 우리가 내 나라를 지켰다고 자부합니다. 1920년대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라를 지킨 건 뽐낼만 한 일이지』
 
  1920년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무용담과 당시 고생담을 밤새도록 얘기할 수 있다. 4년 10개월간 육군에서 복무한 李善永(이선영·72·울산광역시) 씨는 1953년 7월에 있었던 중동부 전선 529 고지 전투를 결코 잊지 못한다.
  『529고지를 탈환당하면 32㎞를 무조건 후퇴해야 하기 때문에 양측이 엄청난 희생을 치렀지. 22연대는 전멸하고 우리 23연대가 탈환하러 갔는데 전투에 참여한 우리 중대원 172명 중에 남은 사람이 46명밖에 안되었어요. 나는 그때 트럭이 굴러서 반골뼈를 다쳤는데도 다리를 절면서 전투를 했다고. 529 고지를 적이 점령하고 있었는데 8부 능선에 시체가 널려 있었어. 근 한달을 산에서 개울물로 세수하고 주먹밥을 먹으면서 전투를 했는데 만날 밥이 남았어. 사람 숫자에 맞춰서 내일 먹을 주먹밥을 만들어 오는데 밤마다 사람들이 죽으니까 밥이 남았던 거지. 매일 병력을 보충받으면서 전투를 했지』
 
  1920년대 사람들은 戰場에서 동료를 많이 잃었는데 통계에서도 확실히 그 증거가 나타났다. 1920년대 출생자들이 40대였던 1970년도의 인구 통계를 살펴보면 1920년에서 1929년까지 총인구는 269만2000명(남 130만1000명, 여 139만1000명)이다. 1930년-1939년 출생자 총인구는 403만8000명(남201만3000명, 여 202만5000명)이다. 인구 통계가 피라미드형을 이룬다지만 1930년에 태어난 사람들과 비교를 하면 1920년대 사람들이 너무나 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전용사들의 넘치는 자긍심
 
  공무원 출신의 金鎭華(김진화·70·전북 군산시)씨는 6·25 하면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도 처절한 굶주림이 떠오른다고 전한다.
  『6·25 때 지뢰매설 작업을 주로 했는데 그때 굶주림이 얼마나 처절한 것인가 하는 걸 알았어요. 군인들이 하수도에 있는 밥찌꺼기를 훑어 먹었을 정도니까. 부산에서 근무할 때 한번은 누나가 면회를 왔는데 너무도 반가웠지만 지금 밥을 못 먹으면 안된다는 생각에서 끝까지 밥을 먹고 누나를 만나러 갔어요』
 
  소설가 洪性裕씨는 서울이 점령당하자 서울대학교에서 신문편집을 했다는 이유로 좌익학생들에게 쫓겨다녔는데 3개월 동안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나는 지금도 오이와 감자를 싫어해요. 숨어지낼 때 밤에 몰래 나와 오이와 감자를 캐서 3개월 동안 그것만 먹어서 물렸지』
  그는 敵(적) 치하가 끝나고 대구고 피난을 갔다가 자진입대 했다. 헌병사령부로 배치되었는데 그때 안 가본 곳이 없다고 한다.
  『전쟁에서 젊은이가 겪는 온갖 고초를 다 목격했지. 야전병원의 참상, 포로수용소, 공개적인 사형집행과 비공개적인 사형집행... 전쟁이 끝난 뒤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에서 쓴 게 바로 「비극은 없다」라는 장편입니다. 내가 전쟁을 통해 느낀 것은 전쟁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거지요』
 
  하지만 한국전쟁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은데 지금도 전국 5개 보훈병원에 한국전쟁 후유증으로 입원해있는 환자가 600여명에 이른다. 진료만 받고 가는 외래환자는 통계를 낼 수 없지만 입원환자보다 훨씬 많다고 한다.
  월남전 참전용사들 중에 外傷性(외상성) 신경증으로 정신적 고통을 겪는 사례가 종종 나타나곤 하는데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은 대개 넘치는 자긍심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 이유에 대해 6·25 참전전우회 石太鎭(석태진·72) 부회장은 이렇게 얘기한다.
  『인민군들이 쳐들어와서 무고한 양민을 죽이는 것을 목격했을 때 누구나 적개심에 불탔지요.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지. 더 못죽인 것이 원통하지. 인민군을 죽였다고 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낄 이유가 없지』
 
  전쟁에 참전하고 또 전쟁을 겪은 1920년대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일은 병역을 기피하는 것이다. 한국전쟁 때 미8군 소속이었던 李仲憲(이중헌·74·서울 구로구)씨는 친구 중에서 50%는 한국전쟁 중에 전사했을 것으로 추측했다.
  『병역 기피자들과 아들 군대 안보내는 사람들은 나쁜 사람이에요. 6·25 때 미국 대통령 아들도 참전했는데 하물며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병역을 기피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이런저런 구실 붙여서 군대 안가는 사람, 나쁩니다』
  실제로 한국전쟁 때 해외 21개국(의무 참전국 포함)에서 연인원 135만2000명이 참전하여 5만7000여명이 戰死(전사)했다.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
 
  피로서 나라를 지킨 1920년대 사람들은 전쟁에 대해 잘못된 견해를 밝히는 사람들에 대해 분노한다.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金時哲 회장은 강한 어조로 이렇게 얘기한다.
  『한국전쟁에 대해 北侵(북침)이다, 민족해방전쟁이다,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말도 안되는 소리지요. 전혀 이해가 안 가는 얘깁니다. 해방이 되고 5년 동안 북한에 살았는데, 전쟁이 발발하기 2년 전부터 戰雲(전운)이 감도는 걸 느낄 수 있었죠. 고등학교 교과과정에 군사훈련 학과를 개설해서 학교서 아예 군사훈련을 시켰어요. 전쟁 20일 전부터 밤마다 화물차가 남하하더라고.. 화물칸 하나에 탱크를 한 대씩 실었는데 텐트로 가렸지만 포신은 보였지. 낌새가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결국 전쟁이 터지더군, 북한 당국이 美 제국주의자들이 북침을 해서 민족해방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고 선전했지만 우리는 속셈을 알고 있었지』
 
  金時哲씨는 남한에 와서 형편없는 무기와 훈련이 안된 군인들을 보고 북한이 철저하게 준비하는 동안 남한이 무방비상태였음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울산광역시 李善永씨는 한국에 대해 北侵이라고 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얘기라고 한다.
  『내가 6·25 터지고 나서 직접 라디오 방송을 들은 사람인데, 라다오에서 휴가나간 군인들은 다 복귀하라고 방송하더라고. 침략하려는 나라가 군인들을 휴가보내고 빨리 돌아오라고 방송하겠어요?』
  직접 전쟁을 체험한 그들이 체질적으로 싫어하는 것은 親北(친북) 대학생들과 친북인사들의 북한에 관한 찬양발언이다. 죽음으로 이 나라를 지켰는데 대학생들이 북한을 찬양하는 대자보를 붙이고 데모했다는 소리를 들을 때면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다는 그들은 요즘 젊은이들의 희박한 국가관이 무엇보다도 걱정이라고 말한다.
 
  작가 韓雲史씨는 과거를 잘 모르거나 한국전쟁에 대해 잘못 해석하는 사람을 보면 『그때 몇 살이었는지 묻고 싶다』면서 『모든 선배들이 집념을 투신해 대한민국이 오늘날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이 이래봬도 괜찮은 나라』라고 힘주어 말했다.
 
  햇볕론은 신중하게 펼쳐라
 
  1920년대 사람들은 햇볕론의 취지에는 동감하지만 봇물처럼 이어지는 對北관련 사업과 금강산 관광에 대해서는 우려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金時哲 회장은 강경한 어조로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근본적으로 대북 정책에 불신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햇볕정책이 명분은 좋지만 실리는 못차리고 있습니다. 일방적으로 북한의 의도에 끌려다닌다는 느낌이 듭니다. 남북관계는 절대 대화로 되지 않아요. 통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햇볕정책의 원래 의도는 좋지요. 유화적으로 하면서 우리가 전쟁을 원치 않는다는 걸 보여줘야죠. 그러면서 실리를 챙겨야 합니다』
 
  그는 현대그룹 鄭周永(정주영) 명예회장이 老慾을 부리지 않기를 당부했다.
  『정주영 씨가 죽기 전에 뭔가를 이뤄야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현대측에 당부하고 싶은 것은 실향민을 상대로 돈벌려고 하지 말란 얘깁니다. 금강산 가는 게 어떻게 고향가는 길이에요? 내가 금강산에서 놀고 간 것을 알면 고향에 있는 친척들이나 친구들이 얼마나 실망하겠어요. 그건 죄짓는 일이에요. 지금 9억 달러를 제공한다 어쩐다 하는데 우리나라도 어려운데 과연 그 돈을 갖다줘야 하는지 묻도 싶네요. 여기서 소 보내고 트럭 보내면 다 어디로 갑니까. 위에서 잘먹고 인민군 비축식량이 되는 거지요. 러시아가 무너지고 쿠바까지 움직이고 있는데 북한이 저렇게 탄탄한 건 위에서는 호의호식하고 아래는 철저히 배급으로 통제하기 때문입니다. 소를 주니까 사료 달라는 나라가 바로 북한이에요. 지금 일어나는 일들이 분단을 연장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금강산 관광도 결국 개발만 해주고 빼앗기게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농사짓는 틈틈이 노인정에 나간다는 경기도 화성군의 金榮厚씨는 노인정에서 햇볕정책에 관한 비판이 많다고 전한다.
  『햇볕정책은 어림도 없는 일이라는 말들을 해요. 만날 간첩 내려보내고 잠수정 보내는데 내것 주고 좋은 소리 못 듣는 일만 한다고 하죠. 금강산 관광은 왜 가. 우리 노인정에서는 정주영씨가 북한의 유도작전에 넘어갔다, 이용당한다, 그런 얘기들을 해요. 금강산 가고 싶어하는 사람 하나도 없어요. 걸어서도 갈 거리를 公海(공해)상으로 빠져나가서 빙빙 돌아 그게 뭐야. 그리고 이런저런 눈치보면서 무슨 관광을 해』
 
  서울 마포구의 金學烈씨는 햇볕정책이 일리가 있지만 도를 넘으면 된다고 말한다.
  『지금 남한에 간첩이 우글우글해요. 북한을 돕는 것을 좋지만 결식아동 문제가 더 시급합니다. 내 자식이 우선이에요. 나는 해외에 나갔으면 나갔지 금강산에는 안갑니다』
  작가 韓雲史씨는 隱忍自重(은인자중)하면서 정을 베푸는 길밖에 없다며 북한을 꼼짝 못하게 하면서 베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밥 세끼 먹도록 만든 대통령
 
  1920년대 사람들이 가장 즐겁게 회고하는 일이 바로 朴正熙 대통령의 근대화 과정이다. 강력한 구심점을 중심으로 뭉쳤고, 열심히 일해서 조국 근대화에 일익을 담당했던 기억을 결코 잊지 못하는 것이다. 인터뷰에 응한 대다수가 朴正熙 대통령을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꼽았다. 독재와 정권 연장, 인권 탄압은 분명 잘못된 일이지만 그것도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의견이었다.
  작가 韓雲史씨는 朴正熙 소장이 군사혁명을 일으켰을 때 너무나도 나라꼴이 말이 아니어서 識者(식자)들이 청년장교에게 다분히 기대를 걸었다고 말한다. 지금도 귀에 쟁쟁한 「잘살아 보세」의 작사가가 바로 韓雲史씨이다.
  『1962년도에 5.16 1주년 기념예술제에서 부를 수 있는 가사를 하나 써달라고 부탁하더라고. 당시에 군사정권의 철학이 「청신한 기풍 진작하여 개혁을 이루자」 이런 내용이었는데, 보통 사람들이 그 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 그래서 국민들이 가장 원하는 게 잘 사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잘 살아보세」라는 가사를 지었지 나는 그 가사를 숙제로 던져주고 朴正熙가 과연 잘 하나 못하나 계속 감시했지』
 
  「군인이 되겠나」하는 걱정이 있었지만 「잘 살아보세」라는 각오 하에 뭉치자 한국사람의 질서가 잡히기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朴正熙 대통령 장례식에 때 내가 몹시 울었어』
  이렇게 말하면서 韓雲史씨는 잠시 동안 말을 잊지 못했다.
  『세계 역사 속에서도 그런 사람 드물어.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가난이 뼛골에 사무쳐 온 국민에게 세끼 밥을 먹도록 만들었지. 金鍾泌씨가 일본에서 들여온 청구권 자금이 밑천이 되어 아무 것도 없었던 우리나라를 변모시켰지. 여러 가지 문제도 있지만 엄청난 역사의 에너지를 저지시키지 않는 의미에서 그대로 밀고나가는 勢(세)가 있어야 한다고 봐』
 
  검사로 활동하면서 여러 정권을 거친 전 법무부장관 許亨九씨는 역대 대통령 중에서 朴正熙 대통령을 가장 높게 평가했다.
  『혁명정부에서 재판부를 구성할 때 혁명 검찰부 검찰관으로 동원됐었죠. 朴正熙 대통령은 생각이 곧고 오로지 국가와 민족만 생각할 뿐 사리사욕이 없었어요. 독재를 잘했다고 보진 않지만 당시 우리나라 형편으로는 개발독재가 필요했다고 봅니다. 앞으로도 그만한 분은 없을 겁니다』
 
  국민의 정부에 거는 기대
 
  1960년 설탕제조회사인 삼양사에 입사해 정년퇴직한 韓商燮(한상섭·72·울산광역시)씨는 이렇게 얘기한다.
  『내가 삼양사에 입사했을 때 당시 울산에 삼양사와 정유공장뿐이었지. 동양나이론 기동식 때 가서 朴正熙 대통령을 먼발치에서 본 적도 있어요. 하여간 허허벌판이었던 울산에 나날이 공장이 들어서더니 엄청나게 늘어나더군. 한마디로 기적이었지. 그런 거 보면 박대통령이 잘했다는 생각이 들지』
  소설가 洪性裕씨는 朴正熙 대통령이 더 강력하게 경제정책을 추진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때는 民度(민도)가 약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때 더 강하게 밀어붙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 예를 들어 고속도로를 4차선이 아니라 8차선으로 만들고 핵폐기장 같은 것도 미리 다 지어놓는 거지. 그런 생각이 드는 건 그 시절이 아니면 안 되는 일들이기 때문이지. 박대통령은 과학, 문화를 비롯해 뭐든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봐요』
 
  1971년부터 1978년까지 과기처장관을 지낸 崔亨燮(최형섭·79·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장)씨는 박대통령이 과학발전에 기여한 점을 높이 샀다.
  『李承晩 대통령은 과학발전을 이루진 못했지만 원자폭탄에 관심이 많았지요. 원자력연구소 설립에 특히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朴正熙 대통령은 공업발전에 관심이 많이 체계적으로 공업화를 했지요. 다른 대통령들은 입으로는 과학기술이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눈에 띄는 지원은 하지 않았어요. 개발도상국에서는 국가원수의 의지없이는 과학 기술이 발달하기 힘들죠』
  金大中 대통령도 과학기술의 중요성에 대한 언급을 했지만 좀더 지켜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1920년대 사람들에게는 朴正熙 대통령의 업적이 너무 깊이 각인된 나머지 그후의 대통령들은 거의 비교나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대체로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은 대통령 자격이 없는 사람, 金泳三 대통령은 무능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5,6共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자욱한 최루탄 가스이다. 민주화 운동에 대한 5,6공 정권은 늘 배후 불순세력을 운운했다. 1920년대 참전용사에게 문민정부 이전까지 격렬하게 이어졌던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시위에 대해 질문했을 때 예상과는 조금 다른 답변이 나왔다. 6·25 참전전우회 石太鎭 부회장은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다 배부른 수작들이었지. 老兵(노병)들이 38선을 지켜서 공산화를 방지하고 경제부흥을 이룩했으니까 그런 데모들도 한 거야. 배고프면 데모하라고 해도 못해. 5,6공은 정통성이 없으니까 학생들이 데모할 명분은 말들어준 거지. 민주화를 부르짖을 수 있었던 것도 다 선배들이 열심히 해서 배가 부르니까 가능했다는 것을 잊어선 안돼요』
 
  1920년대 사람들은 국민의 정부에 대해서 비교적 점수가 후한 편이다. 지금까지 너무 실망이 컸으므로 이번에 실패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다.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金時哲 회장의 진단을 이러하다.
  『방법은 서툴지만 잘하고 있다고 봐요. 실업자가 양산되는 폐해가 있지만 경쟁력을 높여야죠. 하지만 정치는 형편없는 수준이에요. 이건 어디까지나 여당이 책임져야 할 문제예요. 정치가 안정되어야 경제도 안정되고 정치가 달라져야 우리의 미래가 밝아질 겁니다』
  문민정부 때와 달라진 것을 발견할 수 없다, 호남편중 인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직은 초반이어서 평가할 수 없다는 얘기도 있었지만 예전보다 기대가 많이 된다는 것이 1920년대 사람들의 대체적인 의견이었다.
 
  3金씨에게 유감많은 70대
 
  통계청에서 매달 발표하는 경제활동인구 월보에 아예 70대는 집계가 되지 않는다. 60세 이상으로 뭉뚱그려서 발표되는데 1998년 12월 현재 60세 이상으로 경제활동 인구는 179만4000명으로 집계되었다. 이 인원 중에 70대 이상이 많지 않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교사 65세 정년조차 파괴된 지금 70대가 일할 수 있는 자리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있겠는가.
  지금 대다수의 1920년대 사람들은 현역에서 물러났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두자리. 대통령과 국무총리 직을 1920년대 사람이 차지하고 있다. 또 한사람의 김씨, 金泳三 전 대통령도 여전히 세를 과시하고 있다. 70대가 대부분의 현역에서 물러난 시점에 같은 70대가 나라를 이끌고 있는 것에 대해 좋은 생각도 가질 법하지만 뜻밖에도 3김씨에 대한 1920년대 사람들의 감정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다. 전 법무부장관 許亨九씨는 3김씨가 오랫동안 정치를 하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나라는 그 사람 아니면 안된다는 의식이 있지요. 미국은 누가 나오도 하는데 말이죠. 흔히 국민 수준을 넘어서는 정치 지도자는 없다고 하잖아요. 우리 국민의 정치 수준이 높아지면 훌륭한 대통령이 나오겠지요』
 
  경기도 화성군의 金榮厚씨는 시골노인들의 정서를 이렇게 대변한다.
  『3김씨가 정치를 너무 오래한다, 싫증난다고들 하지. 아무 때 먹어도 「김가」가 먹는다는 얘기가 있잖아요. 지루하게 끌어왔지 뭐』
  서울 마포구의 金學烈 씨는 3김씨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이를 먹으니까 건강도 그렇고 정신상태도 옛날만 못하다는 걸 느껴요. 나도 여러 단체 일을 맡아서 하고 있었는데 세대교체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자리를 다 내놨어요. 나이를 먹으면 아집과 고집이 생겨요』
  그런가하면 전북 군산의 金鎭華씨는 나이든 사람의 경험을 중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3김씨가 오래 정치한다는 말이 많지만 나이 때문에 뭘 못한다는 건 말이 안되는 소리지요. 정치는 워낙 나이든 사람이 하는 겁니다. 3김씨는 연륜이 깊고 근대사 전체를 경험했기 때문에 자격이 충분합니다』
  울산광역시 李善永씨는 3김씨가 합치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한다.
  『3김씨가 오래 정치를 하고 있는데 나는 그 사람들이 뭉치지 않은 게 안타까워요. 노태우 같은 사람은 대통령 할 사람이 아닌데...1987년도에 金大中씨와 金泳三씨가 마음을 합치지 못한 게 못마땅하지요. 3김씨가 때에 따라 둘씩 뭉치는데, 그것이 노련한 수인지는 모르겠으나 세사람이 마음을 합쳤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좋아지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朴正熙 능가하는 대통령 나오길
 
  1920년대 사람들은 나라가 잘 되려면 훌륭한 지도력을 갖춘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의견을 같이한다. 그들은 극도의 혼란기를 거친 후 리더십을 갖춘 지도자의 힘을 경험한 터라 우리나라의 발전을 위해 올바른 지도자가 나타나야 한다는 것에 대해 많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작가 韓雲史씨는 지도자는 인재등용을 잘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도자는 사소한데 신경쓰지 말고 워크숍하는 정신으로 유능한 사람을 제자리에 배치해 「책임있게 해봐라」하고 맡겨야지. 金泳三처럼 만사 그럴 필요없어. 골프치는 여유도 있어야지. 그리고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수백명씩 만나는 일도 할 필요없어. 대통령은 세계 속의 한국의 위치, 국가 성장 능률 체크, 전체적인 통괄이 중요하지 일일이 나서서 할 필요가 없다구』
 
  서울 마포구의 金學烈씨도 인재등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金泳三 대통령이 야당 때 같이 고생했던 사람을 기용해서 실책을 했는데 金大中 대통령도 그 전철을 밟고 있다면 안타까워 했다.
  『식견이 있고 경험이 풍부한 사람을 기용할 수 있는 포용력과 지식, 인격을 갖춘 사람이 지도자가 돼야지요』
  대산건설 李鍾殷 대표는 국민을 단결시킬 수 있는 강한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고 강조한다.
  『朴正熙 대통령 때 보릿고개를 넘길 수 있었던 건 구심점이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새마을운동이 구심점이 되어 모두 뭉쳤지. 지금은 대통령도 야당도 구심점이 못되고 제2건국운동도 취지는 좋지만 국민호응이 없잖아요. 무슨 운동이든지 실천과정에서 어느 정도 독재는 있어야 한다고 봐요. 나는 공권력이 무력하고 생각해요. 비판을 두려워하는지 너무 방임한다는 생각이 든다고』
  전 법무부장관 許亨九씨는 정치를 아는 것보다 다 중요한 것은 「기본을 갖추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기본이 바로 선 사람이 정치가로서의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1920년대 사람들이 훌륭한 지도자상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사리사욕이 없으며 국가와 만족을 위하는 지도자여야 한다는 점이다.
 
  1920년대 사람들의 특징이라면 자린고비를 능가할 정도로 절약한다는 점이다. 부친이 古稀(고희)를 넘긴 필자 친구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대부분 지독할 정도로 생필품과 전기를 아낀다고 말한다. 2년 전에 10억원 이상 가는 부동산을 대학에 기증한 할머니 다섯분을 취재한 적이 있는데, 70세를 넘긴 그분들은 검소하다 못해 궁색하게 살고 있었다.
  컴컴한 방안에서 인터뷰하는 동안 끝내 전깃불을 켜주지 않는 분도 있었고 작은 마당에 텃밭을 일구어 채소를 기르는 분도 있었다. 12억원이나 되는 부동산을 대학에 넘기고 12평짜리 아파트에서 옹색하게 사는 분도 있었는데 전자제품이라곤 냉장고 하나뿐이었다. 그분들이 한결같이 하는 얘기는 자신을 위해 돈 쓸 일이 없다는 것이다.
 
  IMF가 두렵지 않다
 
  절약생활이 몸에 밴 1920년대 사람들은 1MF를 맞아 온 나라가 벌집 쑤신 듯이 시끄러운 것에 대해 도무지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초등학교 교장 출신인 金學烈씨는 IMF 관리체제라고 기죽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요즘 어렵다고 자살하고 집나가고 하는 사람들 있는데 죽을 각오를 가지면 안되는 게 어디 있어요. 그렇게 의지가 약한 사람은 죽는 게 마땅하지. 우리가 옛날에 살던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얼마든지 먹고 살 수 있어요. 내가 답답한 거는 가난하게 자란 사람들이 자식들을 연약하게 키우는 일입니다.
  우리 70대는 소주값이 10원만 차이나도 싼 집으로 갑니다. 그런데 50대와 60대는 흥청망청해요. 가난하게 살다가 갑자기 돈이 생기니까 안하무인이 된 거지. 그게 바로 천민자본주의라고. 자식들한테 100만원짜리 수표를 줘서 방탕하게 하다니 말이 안되는 일이지요. 여성들도 50대가 비만증이 많아요. 함부로 먹어서 그렇지. 70대는 일제치하와 전쟁을 통해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귀한 게 무엇인지 알지요』
 
  경북 김천시청에 17년간 근무하다 퇴직한 全援玉(전원옥·여·70·경북김천시)씨는 전쟁 때를 생각하면 지금 어려움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요새 좀 어렵다고 죽을상을 하는데 그때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 옛날에는 200호가 사는 마음에 우물이 하나밖에 없었어요. 주부들이 물 길어 날라서 대가족 살림을 다 살았지. 요새 부인들이 너무 편하게 살고 아낄 줄 몰라. 우리 집이 낚시터 주변에 있는데 여자들이 음식을 계획성 없이 많이 해가지고 와서는 먹다가 남으면 그냥 버리고 가요. 아이들이 옷에다 용변을 보면 옷을 버리고 간다니까. 그런 여자들을 보면 장래가 어둡다는 생각이 들어요』
 
  대한어머니회에서 30년간 봉사활동을 한 韓燕錫(한연석·여·79·경기도 고양시)씨는 거품을 더 빼야 한다고 강조한다.
  『텔레비전 광고를 보면 사치품 선전이 너무 많아요. 요즘 어렵다 하면서도 갈수록 외제가 잘 팔린다는데, 언제부터 우리가 잘 살았다고...뭐하러들 그렇게 외국에 다니는지 모르겠어요. 우리나라같이 사계절이 뚜렷하고 산수경관이 좋은 데가 세계에 어디 있다고. 이래 가지고 우리 경제가 회복되겠나 근심이 돼요. 여자들이 근검절약해야 되는데 왜들 그렇게 사치를 하는지』
  韓燕錫씨는 아무리 경제가 어려워도 주부들이 이것만은 꼭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요즘 좀 어렵다고 집을 나가는 주부들이 많은데,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아이들을 두고 나가서는 안되죠. 자녀를 낳았으면 부모가 반드시 책임을 져야지요. 나는 남편이 사업에 실패해서 행상을 하면서 5남매를 키웠어요. 지금 어려움은 예전에 우리가 겪었던데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에요』
 
  경기도 화성의 金榮厚씨는 실업자들이 스스로 정신무장을 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요즘 사람들은 너무 편의주의에 빠졌어요. 내가 노력 안하고 남의 것을 뺏을 생각만 해. 우리는 초근목피로 살았어요. 지금은 호강이지 뭐. 실업자들이 우리 마을에 일하러 왔었는데 한나절도 못하고 다 달아났어요. 지금은 농사도 다 기계로 해서 어려운 것도 없어요. 실업자 대책을 세우라고 하는데 정부를 믿는 것도 한계가 있어요. 자발적으로 살 궁리를 해야지. 남을 믿지 말고 내가 하는 데까지 해야지 옛날에 어려웠다는 얘기하면 달갑지 않게들 여기는데 옛날에 어려웠던 일을 생각해야지』
  지금의 어려움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1920년대 사람들은 『국가가 무엇을 해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내가 스스로 살 궁리를 하라』고 충고한다.
 
  대한육상경기연맹 고문 徐潤福씨는 『요즘 운동선수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자칫하면 돈이 목표가 될 수 있다』며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하라』고 권한다.
  『코리아, 민족, 국가를 생각해야지. 그리고 모든 국민들이 스포츠 정신으로 살아야 돼요. 스포츠는 경쟁의 연속이고 지면 낙오자예요. 세계와 경쟁해서 이기려면 생산품 하나라도 정신을 심어서 값싸고 품질 좋게 만들어서 이겨야 해요. 질 수 없다는 정신으로 달려나가면 IMF도 극복할 수 있어요. 우리 민족은 화끈한 게 있어서 된다고. 어려울 때 금붙이 갖고 나와서 나라 구하는 거 봐. 세계에 어디 이런 민족이 있나』
 
  한글 전용은 안된다
 
  1920년대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반대하는 일이 바로 한글 전용이다. 그들이 일제치하에서 일본어 공부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한자를 익혔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말의 뿌리가 한자인데다 한자를 모르면 제대로 그 뜻을 알 수 없는 우리말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화 시대에 더 많은 언어를 익혀야 할 시점에 배우던 한자를 없애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작가 韓雲史씨는 한자교육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돌대가리들이 역사를 망친다』고 개탄했다.
  『일본 아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한자를 배운다고. 한자를 모르면 문화재를 어떻게 해석할 거야. 한글의 좋은 점은 알지만 전용을 해서는 안되지』
 
  소설가 洪性裕씨는 한글전용은 뒤떨어지는 판단이라고 진단한다.
  『오늘 출판사에 소설을 넘겼는데  髮(변발)이 뭐냐는 거야. 그러면서 만주풍 머리라고 풀어쓰겠다나. 우리 사무실 직원은 또 의안이 뭐냐고 물어요. 만날 국회에서 議案(의안)을 처리한다니까 가짜 눈 義眼(의안)을 알 턱이 없죠. 후배가 「사기」라는 책을 냈는데, 한글로 사기라고 제목을 달겠다. 무슨 사기치는 기술을 가르치는 책인 줄 알지 않겠어? 한글로 표기하겠다면 괄호 안에라도 史記라고 한자를 표기해야지. 만날 외국어를 배우자고 하는데, 있는 걸 왜 없애냔 말야. 우리 글의 뿌리가 한자인데 한자를 안 배우면 안되지』
 
  한글 전용에 대해서 경기도 고양시의 韓燕錫씨도 할 말이 많다고 한다.
  『동사무소에 가보면 남편 이름을 한자로 못쓰는 여자들이 있더라고. 한자를 모르면 동양 도덕을 어떻게 알겠어요. 그리고 요새 중국이나 일본 관광객들을 유치하려고 애쓰는데 그 사람들을 불러들이려면 한자를 써야지. 간판에도 한자를 넣어야지요. 우리말은 한자가 아니면 글이 안되게 되어 있어요. 빨리 한자를 복구시켜야 돼요』
  1991년부터 부천시청에서 개설한 한자 교양강좌의 교사로 자원봉사하고 있는 金船山씨는 한글 전용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한국 중국 일본은 한자문화권이에요. 지금 영어 배우자는 열풍이 불고 있는데, 영어만 해서는 안되지. 한자를 배우면 중국어와 일본어를 쉽게 배울 수 있어요. 한자를 어렵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가르치는데 초등학생들이 더 잘 익힙니다. 한자를 배우면서 아이들의 지식이 풍부해지고 머리도 좋아집니다』
 
  동방예의지국으로 돌아가라
 
  1920년대 사람들은 한글전용 외에도 못마땅 것이 많다. 그들이 가장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점은 동방예의지국인 우리나라에서 예의범절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점이다. 질서의식이 없는 것도 결국 남을 생각하는 예의가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경박하고 내용이 없는 대중매체가 요즘 아이들을 점점 호들갑스럽고 점잖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는 지적이다.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金時哲 회장은 우리사회 구성원의 의식수준이 바뀌어야 나라의 발전이 있을 거라고 안타까워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려운 과정을 겪다보니 자기 중심주의로 바뀌었어요. 그래서 자신과 자기 가족 외에 다른 건 눈에 안 보이는 거죠. 그러다 보니 상식이 통하지 않고 순리가 결여된 사회가 된 거죠. 제발 상식과 순리가 통해 질서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 질서가 바로잡하는 사회가 되어야 우리나라가 발전하게 될 겁니다』
 
  서울 구로구의 李仲憲씨 역시 의식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강조한다.
  『거리에 나가보면 담배꽁초가 너무 많아요. 작은 것을 무시하면 안되지요. 아무리 법을 만들면 뭐합니까.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들부터 법을 안 지키는데. 법 지키는 사람은 서민밖에 없어요. 봉급생활자들이 세금도 꼬박꼬박 잘 내잖아요. 하여튼 우리나라가 잘 되려면 의식구조를 바꿔야하는데 지금 초등학생들도 어렵다고 봐요. 지금 네다섯 되는 아이들을 잘 교육하면 희망이 있겠지』
  서해안 대부도로 가는 2차선 도로변에 산다는 金榮厚씨는 토요일과 공휴일에 도로가 꽉꽉 막히는 걸 볼 때마다 한심하다고 말한다.
  『트럭이 많이 다녀야 되는데, 맨 놀러다니는 차야. 제발 좀 젊은 사람들 의복차림새 좀 바꿔요. 의복이 그게 뭐야. 단정치 못하게 말야. 내가 수확한 포도를 도로변에서 파는데, 젊은 여자들이 술취해서 담배를 꼬나물고 사러 온다고. 손녀뻘인데. 차 타고 가다가 쓰레기를 아무 데나 휙 던져요. 왜 이렇게들 예의가 없고 몰염치한지 도대체 이해가 안가요』
 
  인천광역시 金船山씨도 요즘 젊은이들이 예의가 없다고 개탄한다.
  『전철 타보면 노인들이 앞에 서 있어도 젊은이들이 자는 척하면서 자리양보할 생각을 안해요. 이게 다 예절교육이 안되어있기 때문이지. 또 놀기만 하고 일할 생각을 안해. 선진국에서는 10대 때부터 자기 용돈을 스스로 벌어쓰잖아』
  소설가 洪性裕씨도 우리 사회에 예절의식과 공경심이 사라지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잘 아는 여학교 선생이 그만둬야겠다고 해요. 학생들이 쓰레기를 흘려서 치우라고 했더니 자기가 청소부인 줄 아느냐고 하더라는 거지. 그러니 누가 학교에 남고 싶겠어요. 체벌 갖고 말이 많은데 맞을 일을 했을 때는 맞아야지 체벌을 제한하는 건 잘못된 일입니다. 그리고 요즘 왜 그렇게 욕을 하는지 모르겠어. 우리가 자랄 때는 욕을 안했어요. 요즘 영화심의를 하고 있는데, 입에 담지 못할 욕이 많아. 왜 이렇게 만들었냐니까 현실이 그렇대. 이게 다 질서의식이 없어서지. 질서, 친절, 봉사를 잊지 말아야 해요』
 
  유교사상이 점점 사라지는 것이 안타깝다는 서울 도봉구의 李春宰씨는 어른을 공경하고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요즘 사람들은 고생 안하고 자라서 어른도 몰라보고 어려운 것도 모르지. 옛날에 먹을 게 없어서 굶었다고 하면 라면이라도 먹지 그러는 애들이 있다는데 굶어봐야 한다구. 그리고 너무 이기주의에 빠져 있어. 선진국을 따라가려면 예의, 도덕, 애국, 사랑을 잊으면 안되지』
  대산건설 李鍾殷 대표는 이렇게 평가한다.
  『민주주의가 뭡니까. 자기가 할 일을 하고 권리를 주장해야 하는데 우리 국민의 30-40%는 권리 주장만 하고 있어요 의무는 다하지 않고 권리만 주장하다보니 질서와 예의가 없어지는 겁니다. 그 30-40%는 대부분 젊은층입니다. 우리 민족은 팽이 같은 민족입니다. 때려야 돌아갑니다. 젊은이들이 나라를 사랑하고 강한 정신력을 갖고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法이 물렁물렁하다
 
  1920년대 사람들은 예의와 질서 의식이 없어진 것의 근본적인 원인은 부정부패와 입시 위주의 잘못된 교육이라고 지적한다. 윗물이 맑지 못하니 자연적으로 아랫물이 더럽고 입시 위주의 교육, 내 자식만 아는 이기주의적 발상이 우리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것이다. 전 법무부장관 許亨九 씨는 요즘 법조계 비리 사건이 자주 발생하는 것을 몹시 안타까워 한다.
  『해방 후에 대학교수도 직장이 없어 부두에서 노동을 했고 검찰 고위 간부 딸이 국제시장에서 양담배 장사를 했을 정도로 어려웠어요. 그래서 부정할 생각을 안했어요. 휴전 이후에 판.검사 집에 인사를 갔는데 너무 못살아. 물론 판.검사도 먹고 살아야지요. 월급 아껴 잘 살면 문제없지만 그렇지 않은데 잘 살면 곤란하지요. 판,검사는 직무에 관한한 깨끗해야 해요. 최후의 보루가 부패하면 어떻게 되겠어. 방법은 유치원 때부터 철저히 교육을 시키는 것밖에 없습니다. 교육이 百年大計(백년대계)입니다』
 
  서울 도봉구의 李春宰씨는 위에서 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국민 위해 일하고 뽑아놨는데 일은 안하고 싸우기나 하고 쓸데없이 外遊(외유)다니면서 국고를 축내고, 정말 한심합니다. 뉴스를 보면 만날 횡령 얘기야. 나는 미군부대에서 38년을 근무하고도 2억을 못채웠는데 몇 년만에 몇십억, 몇백억 번 사람이 있어요. 정신상태가 잘못되었어요. 위에서부터 먼저 사리사욕을 버려야 나라가 잘됩니다. 그리고 제발 무슨 일을 체계 있게 했으면 좋겠어요. 나라가 질서가 없고 체계가 없는데 국민이 무슨 본을 보겠어. 50년, 100년을 내다보고 일을 해야 하는데 도무지 계획성이 없어요』
  대산건설 대표 李鍾殷 씨는 강력한 법집행만이 부패를 없앨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舊態(구태)는 속상상 쉽게 사라지기가 힘든 겁니다. 구태를 없애기 위해서는 법을 강력하게 제정해야 해요. 마약밀수범은 사형을 시키거나 무기징역에 처하고 부실 건설업자는 과감히 면허를 취소해야 해요. 면허 취소해놓고도 다시 슬그머니 복원해주는 일이 허다한데 한번 잘못하면 다시 복원해주지 말고 영영 못하게 해야 합니다. 법이 너무 물렁물렁해요』
  국세청 공무원을 지낸 金鍾珠(김종주·71·전문법정관리인)씨도 강력한 법집행을 강조한다.
  『요즘 공무원 부패가 심각한데 공무원과 그 가족들이 스스로 검약하게 살아야 하고 특히 위에서 청렴하게 솔선수범해서 귀감이 되어야지요. 첫째 공무원들이 월급 갖고 살 수 있도록 보장을 해주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부정을 일으킨 공무원은 가차없이 중벌로 다스려 자손까지 공직을 못 갖도록 해야합니다』
 
  돈많다고 행복한 게 아냐
 
  1995년 인구주택 조사로 추론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2000년도 기준 예상 평균수명은 74.9세(남 71세, 여 78.6세)이다. 평균수명을 넘겼거나 평균수명에 근접한 1920년대 사람들은 老後(노후)를 무슨 생각으로 살고 있을까. 작가 韓雲史씨는 이렇게 얘기한다.
  『언제 죽어도 좋다, 인생은 언제까지 살만큼 값어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고, 명예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요즘 나의 마음이고 또 건강비결이지. 긍정할 것은 긍정하고 부정할 것은 부정하되 인간미를 밑바닥에 깔고 살면 다 통하는 게 인생이야. 돈 많이 가지고 사기당할 거 겁내고 사는 건 어리석은 일이야. 베풀면서 사는 것이 중요해』
  그러면서 젊은이들은 과거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한다.
  『나이 든 사람들은 자식들에게 돈 남겨서 타락시키지 말고 판단을 올바르게 할 수 있도록 의지를 길러줘야지. 70대가 젊은이들을 가르쳐야 하는데, 직무유기를 하면 안돼요』
 
  대산건설 대표 李鍾殷씨는 젊은이들에게 자신감을 회복하라고 전한다.
  『무슨 말이든지 말끝에 「같애요」를 붙이는 것 정말 못마땅합니다. 말에서부터 신념이 없으면 안되지. 「3D 현상」이라는 말을 듣고 몹시 개탄했어요. 장차 이 나라가 어떻게 될지 뼈가 사무칠 정도로 걱정됩니다. 어렵고 더럽고 힘든 일을 안 한다니 그게 무슨 얘기야. 우리 세대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해야 할 일은 밤을 새면서 했어. 3D 현상이 다 뭐야. 핑계지. 부모들 덕택에 어려운 것 모르고 살다보니 정신상태가 해이해졌어. 요즘 일자리가 없어서 난리라지만 3D 업종은 사람이 부족하다니 말이 되는 소리냐구. 젊은이들이 쓸데없는 서비스업에나 몰려가고 말야.
  북한은 나쁜 교육이든 어쨌든 자기네 정신으로 똘똘 뭉쳐 있는데 우리는 주입도 암기도 아무 것도 못하고 있다고. 내가 보기에 마흔다섯 살 아래는 다 정신 못차리고 있는 것 같애. 극도의 이기주의만 발달되어 있지. 제발 넓게 생각하고 신념을 가지세요』
 
  사람들은 인생의 목표를 여러가지로 세우지만 따지고 보면 그 목표가 결국은 돈과 맞닿아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돈을 벌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많은 사람들에게 전 법무부장관 許亨九씨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 살아보니 돈 많다고 행복한 게 아니야. 나는 예전에 사회사업을 하는 게 꿈이었는데 그런 일을 안할 바엔 돈은 그저 먹고 살 정도만 있으면 됩니다. 「성실은 능력을 보충한다. 성실하면 없던 능력이 생기고 성실하지 않으면 있던 능력도 달아난다」는 영국 격언을 젊은이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어요』
  인천광역시의 金船山씨는 젊은이들에게 『서로 믿고 서로 거짓말하지 말고 서로 노력하라』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말씀을 들려주고 싶다고 말한다.
 
  남은 것은 무엇인가
 
  인생의 황혼기를 맞은 그들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1920년대 사람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이 있다면 그건 단연코 자녀교육이다. 논 팔고 소 팔아서 어쨌든 자식은 대학공부까지 시켜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
4 Comments
어여쁜 나 2017.06.06 09:15  
평균수명이 길어진 지금 만70세가 넘은 사람들이 노인정에 가서는 이런일을 하죠~!!!! 첫째:여자들일 경우 밥하거나 빨래하고 반찬만들고 술시중드는거, 둘째:남자들일 경우 담배심부름 한다는거, 셋째:그런거 안하면 노인정에게 쫓겨난다는거~!!!! 모르셨죠? Fabiano님은 이제 만70세시니까 노인정에 가시면 완전 막내취급받으시겠어요?
fabiano 2017.06.08 21:45  
나는 노인정에 안갑니다.
어여쁜 나 2017.06.10 11:17  
하기야 요새 노인정에서는 만80세가 되어서야 어른대접을 받을정도이니 짐작이 갑니다~!!!!
fabiano 2017.06.11 22:42  
이 글의 주제에 대한 느낌의 댓글이 필요함. 나이의 작고 많음에 대한 것은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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