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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영화 인생, 한국의 '알프레도' 윤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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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영사기사 윤무영

[ 2007-02-13 오전 11:30: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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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천국이라는 영화는 영화 한 편 보는 즐거움이 세상 무엇보다도 아름답던 아련한 옛 추억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영화가 너무 좋아서 어린 토토는 성당으로 달려간다. 이탈리아 시칠리아 작은 섬의 낡은 영화관, 시네마 파라디소!

그 영화관 영사실은 비좁고 낡고 침침한언제 불이 날지 모르는 아주 위험한 곳이다. 하루 종일 구석진 곳에서 필름을 돌리는 영사기사 알프레도의 고독을 알 리가 없는 어린 토토는 어두운 영화관의 좌석 뒤편 방에서 스크린을 향해서 뿜어져 나오는 그 강렬한 빛이 너무나 좋아서 영사실을 내 집 드나들듯 한다.

영사기사 알프레도는 어린 토토에게 영화 일을 가르쳐 주고 때로는 아버지가 되어주고 인생에 대해 조언도 해준다. 영화를 매개로 둘만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아름다운 영화 ‘시네마 천국’.

무려 50년 동안을 영사기사로 일해오신 한국영화의 산 증인이며 영화를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한국의 알프레도 윤무영 선생을 12일 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났다.

(인터뷰 전문)

칠순의 노령에도 각종영화제와 기업체에서 봉사활동

▶ 올해가 칠순이신데 굉장히 젊으세요. 현역에서 그만두셨는데 요즘은 어떻게 지내세요?

- 퇴직한 지는 4년이 되었지만 지금도 각종영화제와 기업체에서 일을 하곤 합니다. 2004년에 허리우드 극장에서 한국영화 50년사 영화제를 할 때도 100여 편을 편집해서 상영했고요, 2005년도에는 부천영화제에서 10일간 필름을 돌렸어요. 그리고 기업체라든가 여러 단체에서 연락이 오면 봉사활동으로 가서 필름을 돌려주곤 합니다.

▶ 쉴 시간도 없으시네요. 이 일을 하신지 벌써 50년이 되셨어요. 어떻게 이 일을 하시게 되었는지요?

- 그때가 1957년도 19살 때네요. 6.25 전쟁 나고 피난 시절에 무조건 부산으로 내려갔는데, 모두 다 어려울 때라 먹고 살기 위한 수단으로 안 해본 것이 없었어요. 예를 들어 길거리의 아이스크림 장사라던가, 구두 닦기라던가, 신문팔이라던가, 그러다 어느 날 극장 매점원을 뽑는다고 해서 입사를 했지요. 그러다 영사실에 있는 형을 알게 되고 그 일이 굉장히 돈도 많이 벌 것 같고 또 영화도 많이 볼 것 같아서 그 형한테 졸라서 처음 이 일을 하게 되었어요. 마침 일하던 사람도 나가고 사람이 필요한 상황이라 할 수가 있었죠.

▶ 그때는 영사 기사가 시험을 보고 하는 것도 없었을 텐데 주로 어떤 일을 하셨어요?

- 그때는 자격제도나 면허제도가 없었죠. 기술을 배워서 경력에 따라 기사나 영사주임으로 일을 했어요. 저는 조수부터 시작을 했지요. 영사실은 바로 들어가서 영사기를 못 돌립니다. 맨 처음에는 조수로써 심부름도 하면서 필름 편집하는 것을 배웁니다. 필름을 붙이고 잇고 긁기도 하면서요. 주로 아세톤으로 잇고 가위로 자르고 긁어서 이었는데 가위가 무뎌지면 쇠금파리나 유리조각으로 긁었어요. 또 영사가 끝나면 필름을 가져다가 다시 감아서 대기하고 기사들의 잔심부름을 많이 했어요. 대기 상태에서 기술을 배우는 과정이었죠. 한 3년 정도 조수생활을 하다가 책임지고 영화를 할 수 있었어요. 요즘은 많이 발달되고 기계도 현대화되어서 잠깐만 배워도 하지만 그때 당시는 영사주임들이 금방 기계를 안 잡혔어요.

극장 매점원에서 영사기사가 되기까지 맨 손으로 일궈낸 시네마 천국

▶ 아세톤으로 잇고 편집하는 일도 쉽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 요즘은 스플라이싱 테이프로 전부 붙이는데, 그때 당시는 필름을 갉아서 붙였어요. 주로 이발가위를 사용했는데 나중에는 노하우가 생겨서 중간 사이만 살짝 긁어서 아세톤으로 붙일 수가 있었죠.

▶ 그러다 본 화면을 갉아먹으면 어떻게 되는 거죠?

- 본 화면을 갉아먹으면 영화가 잘려나가는데요, 영화를 보다가 가끔 스크레치나는 장면 나오고 하는 것이 그 때문이지요. 저희 같은 경우는 영화가 삼류관을 돌아다니다가 오다 보니 필름 상태가 아주 죽사발이 돼서 옵니다. 그러면 이것을 이 잡듯이 천천히 돌리면서 붙인 것이 오래 돌려서 떨어지지는 않나 떼어도 보고 또, 끊어질 것 같으면 미리 붙이고... 그걸 필름 편집이라고도 하고 손보는 거라고도 하는데 맨손으로 해야만 감각을 알기 때문에 필름에 손가락을 무수히 베어서 손이 성할 날이 없었어요. 그런 일을 주로 조수들이 하지요.

그리고 기사들이 가르쳐주면 필름을 거는데, 필름도 영사기 구조에 맞게끔 루프를 걸어서 제대로 간격을 주고, 음향이 제대로 나오게 걸렸는지도 손봐야 해요. 잘못 걸리면 필름도 버리고 영화도 망치니까 잘 배워야만 했지요. 그때 당시는 영사기가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아서 1,000자 10분짜리 깡통 하나라 영사기 두 대로 왔다 갔다 했어요. 지금은 광원 나가는 빛을 쏘는 전구 크세논램프가 있지만 그땐 카본이라고 불을 땠습니다.

카본의 스파크에서 불이 나면은 그 불꽃으로 인해서 반사시켜서 투영이 됐죠. 이것을 그냥 켜 놓고 캡이 일정 선상에 맞아야만 화면이 제대로 나오기 때문에 -멀리 놓으면 파랗고 너무 가까이 놓으면 빨갛게 되어버리니까- 그걸 죽치고 앉아서 자꾸 조여 줘야 했어요. 그걸 조여 주느라고 카본 때던 시절의 기사들은 참 힘들었어요.

▶ 저는 영화를 다 찍어서 만들어 올 때 편집이 다되어서 오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그냥 걸어서 돌리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거든요.

- 편집이라는 것이 초창기에는 10분짜리로 하다가 지금은 2,000자 20분 용을 한 단위로 해서 한 영화에 그게 한 5, 6번 정도 나옵니다. 20분짜리를 깡통마다 일단은 편집해왔어도 일단은 중간에 잘못되지는 않았는지 조사해야 해요. 처음에 2권으로 되어 있는 것을 이으면 4,000자가 되고, 그것을 처음엔 4,000자에서 6,000자로 하다가 지금은 12,000자 한 권으로 되어있죠.

▶ 그럼 보통 영화 한 편이면 몇 천자에요? 16,000자가 한편인가요?

- 네, 16,000자도 있고 10,000자도 있고 영화 한 편이 대부분 20분짜리 롤이 6개 정도예요. 이 6개를 잇는 작업을 편집이라고 합니다. 요새도 그전처럼 두 권 4,000자나 6,000자가 아닌 원 라운드로 한 번에 다 잇습니다. 12,000자를 한꺼번에 다 잇는데, 그것 역시 편집이죠. 영화사에서 왔을 때는 2,000자로 나뉘어 오니까요.

▶ 그러면 일류관, 이류관, 삼류관은 뭔가요?

- 지금은 전부 개봉관이지만 옛날에는 영화 한 편을 만들면 필름을 각 시, 도별로 예를 들어서 서울시에 한 편을 주면 경기 강원도에 한 편을 각도별로 6개 내지 8개 정도 필름을 만들어서 배분했고 그 필름 하나로 개봉관에서 먼저 개봉을 해서 끝난 후에 관에 돌렸어요. 그러면 일류관과 이류관을 거쳐 삼류관으로 보내지죠. 그러는 동안 필름은 많이 상하게 되는 거죠. 개봉관에서는 필름이 잘 안 끊어지지만 삼류관에서는 되감기를 수십 번, 수백 번 하다 보니 마모가 되고 필름 쇠에 닿아서 긁혀 있기 때문에 화면에는 소위 비가 내리지요. 게다가 자꾸 끊어지기도 해서 관객들이 소리를 지르고 난리가 나지요. 그래서 삼류관에서는 동시상영을 많이 했어요. 걸레가 된 필름은 본 프로가 1시간 40분이 되면 어떤 것은 50%가 소실이 되어 한 40분짜리 50분짜리가 되기도 하니까 한 편 더 넣어서 동시상영을 했던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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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급회사와의 헤게모니싸움,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삼류관 동시상영 시절

▶ 그런데 예를 들어 동시상영관에 가면은 물론 필름이 마모가 되어서 그런 경우도 있지만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 조금 자르는 경우도 있을 것 같아요. 손님들의 항의도 많았을 것 같고요.

- 개봉관에서 개봉 때 시간이 너무 길어서 자른 적은 있어도 하류관에서는 못 자르게 해요. 가뜩이나 짧아졌는데 더 이상 자를 것이 없지요.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당산대영’이라고 이소룡 영화가 상당히 히트 쳤을 때, 히트하는 영화는 하류관에 올수록 필름이 더 남아나질 않습니다. 그전 관에서 손님이 많으니까 많이 돌렸을 것 아닙니까. 그러다 보니 1시간 45분짜리가 한 45분 돌고 마는 겁니다.

마음 좋은 관객은 그냥 넘어가도 어떤 분은 방송국이라든가 시청이라든가 관계기관에 고발해서 난리가 나기도 했죠. 원칙적으로는 영화사에서 그렇게 잘려진 필름은 검사해서 내보내지 말거나 다시 복사해서 주거나 해야 하는데 비용 때문에 그냥 팔아먹는 거예요. 그런데 그 필름을 배급하는 회사가 헤게모니를 잡고 있으니까 그렇게 고발을 당해도 극장에서 끊거나 자른 것처럼 해서 처벌당하고 영화사는 다치지 않게 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 그런데 영사기사하시는 분들도 일류 개봉관에서 일하시는 분들보다 이류나 삼류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더 힘이 드셨겠어요. 보수는 어땠습니까?

- 보수는 개봉관이 났고 하류관일 수록 적은데 영사기사 일을 하다 보면 거기에 빠져서 다른 직종은 못 가고 천직으로 알게 돼요. 그래도 동네 CF라는 것이 있어서 부수입이 됐기 때문에 생활에 보탬이 많이 됐었죠. 개봉관이나 좀 큰 곳은 대행사가 있었지만 동네의 삼류관 같은 데는 영사실에서 기사들이 동네 CF를 직접 만들었어요. 월급이 적은 대신에 그것을 영사실에 맡겼지요.

▶ 그럼, 시험제도는 언제부터 시작해서 하게 된 거죠?

- 그전에는 갑종, 을종 해서 협회 내에서 시험을 보기는 했지만 사설이라서 공인이 안 되다가 정식으로 64년부터 시험을 쳐서 공보부장 명의로 하는 면허증을 주었어요. 그것이 85년도에 자격증으로 전환됐지요. 당시는 제가 공군 군 복무 중이라 휴가를 나와서 시험을 쳤고 합격을 했지요.

▶ 그랬군요. 그럼 지금 우리나라에 영사기사님이 몇 분이나 계세요?

- 지금 자격증 가진 사람은 3,000명 정도 되는데, 현역 종사자는 한 1,000여명 정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50십년 영화 인생을 고스란히 간직 한 낡은 수첩 하나, 3,000여 편의 영화기록 꼼꼼히 기록

▶ 수첩을 하나 들고 나오셨는데 보니까 아주 빨간 수첩인데 1957년 처음 문화관부터 시작하셔서 상영하신 영화를 적어 놓으신 거예요. 굉장히 귀한 자료를 가져오셨는데, 총 몇 편이나 영화를 돌리셨어요?

- 제가 입문 했던 시기부터 77년까지 적어놓은 것을 보니까 2,438편인데, 이게 77년까지의 기록이니까 지금까지 합친다면 아마 3,000편 넘을 것 같네요. 저 자신도 놀랐어요. 초창기인 50년대에는 외국영화들이 성행했고 나중에는 주로 한국영화를 많이 상영했어요. ‘흑기사’라든가 ‘쿠오바디스’라든가 ‘십계’라든가 ‘진흥의 도적’, ‘무기여 잘 있거라’, 잉글리트 버그만 주연의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이런 것이 외화로는 굉장히 유명했고요. 제가 ‘마의태자’를 첫 작품으로 들어가서 필름을 만져봤는데요. 그때 당시 한국영화 선호도가 상당히 높았어요.

▶ 영화는 정말 원 없이 보셨을 것 같은데 영사실에서 보시면 그 빛 때문에 제대로 잘 보입니까?

- 극장 영화를 좋아했지만 막상 들어가서 보니까 작업이고 일이지 감상이 아니더라고요. 영화 볼 시간이 없고 필름이 나가다 끊어지거나 에러가 나면 기사들이 전쟁을 치루기 때문에 거기에 신경 쓰느라고 영화다운 영화를 못 봤지요. 또, 영화를 계속 트니까 나중에는 신물이 났어요. 그래서 영화는 쉬는 날 다른 극장에 가서 봅니다. 편안하게...

▶ 영화 관람은 다른 곳에서 하셨군요. 주로 가족들과 같이 가셨겠어요. 그럼 그것은 공짜로 보셨나요?

- 기사들끼리는 다 통하니까 공짜로 봤지요. 그리고 초대권도 원 없이 뿌렸어요. 지금은 각박해서 초대권 발행은 안 되고 개봉관에서 초대권도 판다고 그러는데 그때는 영사실에서 50장이고 100장이고 가져다 썼었어요. 가족들이나 친구들이 하는 얘기가 제가 초대권으로 보인다고 하더라고요....(웃음)

가족과 친지들에겐 걸어 다니는 초대권으로 불리기도 해

▶ 요즘도 영화는 많이 보시나요?

- 그 분야에 있었으니까 화제에 오른다거나 관심 있는 영화는 좀 봅니다. 요즘에 타짜라던가, 괴물이라던가, 왕의 남자라던가 다 봤습니다. 대부분은 초대 시사권이 와서 가는 경우가 많고, 집사람이 조르거나 꼭 볼 영화들이 있으면 가끔 돈 내고도 봅니다. 그런데 공짜로 보는 것보다 돈 내고 봐야 영화가 더 재밌고 좋은 것 같아요.

▶ 맞아요! 저희가 연극 하면서 맨 날 하는 얘기가 꼭 보면 중간에 나가는 사람은 공짜표 가지고 오는 사람이라고 해요.....(웃음) 초대시사회에 선생님 같으신 분은 꼭 모셔야지요. 그런데 요즘 영화 하는 사람들이 선생님을 잘 알아보나요?

- 오래된 역사고 또, 우리는 아시다시피 어두운 공간 안에서 일하기 때문에 잘 드러나지도 않고 해서 잘 못 알아보지만 제가 영사기사 협회를 14년간 맡았었기 때문에 그걸로 좀 알려졌어요. 그래서 종사하시는 분들은 좀 알아봐 주시지요.

▶ 그런데 말이죠, 저희도 연극을 해보면 옛날에 명동 국립극장 있을 때 거기서 쭉 일하시는 분들은 저희가 연습하는 것을 딱 보시면 이 연극이 될지 안 될지를 금방 아세요. 근데 영화도 그럴 것 같아요. 영화를 보시면 이거는 손님이 들겠다 하는 것이 금방 감이 오시나요?

- 네, 그렇죠. 영화스토리를 봐도 알 수 있고 그때는 극장마다 스틸 사진을 벽이나 바깥에다 내걸었는데 관객들은 그 스틸을 보고 주연배우가 누구냐에 따라서 들었어요. 당시는 최무룡, 김진규, 최은희 이런 사람들만 나온다고 그러면 무조건 들었었죠. 생각해보면 영화도 한 장르가 그 시대의 배경이 되는 것 같더라고요. 50년대에는 토속적인 사극의 한국영화들이 많았고 외국영화도 역사극들이 많았어요. 60년대 들면서는 정상적으로 애정 영화라든지 눈물 쏟는 신파극을 했는데 기억나는 것이 전 옥씨 주연의 ‘눈 나리는 밤’, 이회춘씨와 전 옥씨 주연의 ‘애정파도’, ‘나그네 설움’, 구봉서씨와 이종철씨를 비롯한 많은 희극인들이 나왔던 ‘오 부자’를 재미있게 봤던 것 같네요.

그리고 70년대 가서는 새마을 사업이 본격화되면서 씩씩한 남자들 세계를 그린 박노식씨 이런 사람들 주연의 ‘돌아온 사나이’, ‘팔도 사나이’, ‘사나이 블루스’, ‘감찰 온 사나이’... 순 의리로 뭉쳐진 그런 영화가 주류를 이루었어요. 80년대 는 ‘미워도 다시 한 번’이라든가 하는 통속극이 나왔지만 텔레비전이 나오면서 흥행이 떨어지고 힘든 시기가 왔지요.

필름 돌리며 반추해 본 한국 영화의 역사 - 사극, 신파에서 통속극, 에로물 까지

▶ 그때는 극장 안에다 TV를 가져다 놨었던 시절도 있었지요?

- 천연색텔레비전이 80년대에 나왔어요. 극장이 70년 후반기부터 상당히 고전하다가 80년대에서부터는 소극장 시대로 변모했지요. 80년대 소극장 시대가 어떻게 해서 왔느냐면 그 이낙훈씨 라던가 이런 분들이 국회에 있을 때 연극을 하시는 분들의 활동 공간을 넓혀주시고자 큰 극장은 날짜를 잡을 수가 없으니까 소극장 100석 자리라도 장소만 있으면 연극을 하라는 소극장 법이 통과가 됐는데 엉뚱하게도 영화관으로 변질 되가지고 영화관 소극장이 확 늘었어요. 그때부터 영화들이 활성화되었는데 그전에는 영화들이 사전 검열이 심해서 사상적인 것이나 욕, 에로물 등이 제대로 표현을 못 하다가 90년대부터 심의가 완화되어서 소위 에로영화 에로티시즘이다 해서 ‘애마부인’이라든가 ‘젖소부인’이라든가 하는 영화들이 나왔어요.

▶ 키스신이라든가 베드신이라든가 이런 것을 영사실에서 직접 자르기도 하나요? 그런 것에 얽힌 에피소드들도 있을 것 같은데요.

- 영사실에서는 감히 자를 수 없습니다. 한 장면이라도 더 보여주는 것이 영사기사의 책무이기 때문에 검열기관에서 자릅니다. 50년 초에 한국영화 ‘운명의 손’이라는 작품이 한국영화 최초의 리얼 키스신인데 그때 당시는 영화에서 제대로 된 키스를 했다고 센세이션을 일으켰어요. 그렇게 키스 하나 가지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관객들이 정사를 한다고 하면 야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왔는데 보면 다 끊어먹고 내용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휘파람 불고 욕 들을 했지요. 입대고 싹 돌아가다가 딴 장면이 나오니까요. 이제는 심의라든가 그런 것이 완화되어서 욕이나 에로물이 쏟아지고 있지요.

▶ 영화를 돌리다 보면 저희 젊을 때만 해도 추석이나 설은 그때는 개만 한 마리 올려놔도 터져 나간다 할 정도로 난리 났었잖아요? 그럴 때는 더 바쁘셨겠어요?

- 명절 때가 되면 하루에 만 명 이상의 관객을 받아야 했어요. 평상시에 4,5번 돌리던 필름을 6,7번 돌려야 하는데 CF는 우리가 돌리고 싶으면 돌리고 안 돌리고 싶으면 안 돌려도 되지만 공연법상 문화 영화와 뉴스는 꼭 틀어줘야 해서 곤혹스러웠지요.

가장 기억에 남는 배우는 ‘춘향전’의 조미령 - 가장 재미있게 본 영화는 ‘오 부자’

▶ 무대 인사를 오는 배우들도 많이 보셨겠어요?

- 김진규, 최무룡, 김지미, 최은희, 박노식, 허장강씨 뿐만이 아니라 가수 나훈아, 남진, 이미자 이런 분들도 많이 오셨죠. 그리고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여성국극단이 오면 환호했지요. 특히, 남자 배우들 오면 와이셔츠를 찢고 양복을 찢고 난리였고 극장 앞 뒷좌석 200석이 전부 고장이 나버렸어요.

▶ 진짜 수많은 영화와 배우들을 보셨는데 가장 인상에 남는 배우나 영화가 있다면요?

- 모두가 다 기억에 남는데 ‘춘향전'의 조미령씨를 굉장히 좋아했고, 새침하고 참한 문정숙씨, 왈가닥 이빈화씨와 최지희씨 등 셀 수 없이 많지요. 한국영화는 ‘오 부자’, ‘꿈이여 다시 한 번’, ‘돌아오지 않는 해병’ 등을 재미있게 봤고요, 외국영화는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그리고 최근작으로는 ‘타이타닉’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 그 시절에는 영사실에 여자가 못 들어갔다면서요? 금기였나요?

- 저희가 공연법에 따라서 면허증이 없는 사람은 영사실에 출입을 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여자뿐만이 아니라 법으로는 사장도 출입을 못했지요. 지금은 여자 영사기사가 많이 생겼고 지원자도 많아요. 이미 영사기사 자격증을 딴 여자후배들이 100여 명 정도예요.

칠순의 나이에도 끝나지 않은 영화에 대한 꿈과 희망

▶ 50년 영사기사 생활을 돌아보면서 회한도 많으실 것 같아요. 감회도 새로우실 것 같고요. 앞으로 꼭 해보고 싶으신 것도 있으신가요?

- 제가 영사기사를 하다가 영사기사협회회장으로 13여 년을 일을 하면서 후배들의 근무조건, 급료라든가 처우와 보호를 위해 공보부 시절부터 문관부, 문체부를 수없이 드나들었어요. 극장주는 경비절감을 위해 우리 영사기사들을 위한 법을 없애려고 했지만 각고의 노력 끝에 지킬 수가 있었지요. 그 과정에서 노사관계법이라든가 행정적인 부분에서 무지한 저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후회도 많이 했지만 그래도 후배들을 위해 일할 수 있었던 것이 큰 보람이었습니다.

또, 극장 생활하면서 극장주의 꿈을 품고 극장운영도 했었어요. 소극장의 한계 때문에 5년 정도 밖에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극장주의 꿈도 이뤄봤지요. 제 개인의 삶을 돌아보니 정상적으로 떳떳하게 살아온 것 같아요. 50년 동안 영사기사로서 힘든 일도 많았지만 한 길에서 열심히 살아온 것이 뿌듯하기도 합니다. 그 선택에 대해서는 후회가 없습니다.

정리 ㅣ 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녹취작가 이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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