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site-verification: naverf83ad7df1bcc827c523456dbbc661233.html 김유정의 삶 100년만의 봄
홈 > 블로그 > 내 블로그 > 끄덕끄덕...
내 블로그

김유정의 삶 100년만의 봄

fabiano 5 1485  
1515077653395141.jpg

 

"장인님! 인제 저……"

내가 이렇게 뒤통수를 긁고, 나이가 찼으니 성례를 시켜 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면 대답이 늘, "이 자식아! 성례구 뭐구 미처 자라야지!"하고 만다.

이 자라야 한다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아내가 될 점순이의 키 말이다.

내가 여기에 와서 돈 한푼 안 받고 일하기를 삼 년하고 꼬박 일곱 달 동안을 했다. 그런데도 미처 못 자랐다니까 이 키는 언제야 자라는 겐지 짜장 영문 모른다. 일을 좀더 잘해야 한다든지, 혹은 밥을 많이 먹는다고 노상 걱정이니까 좀 덜 먹어야 한다든지 하면 나도 얼마든지 할말이 많다. 허지만 점순이가 아직 어리니까 더 자라야 한다는 여기에는 어째 볼 수 없이 고만 빙빙하고 만다.

"아이구 배야!"

논 가운데서 장인님도 이상한 눈을 해 가지고 한참 날 노려보더니, "넌 이 자식, 왜 또 이래 응?"

"배가 좀 아파서유!"하고 풀 위에 슬며시 쓰러지니까 장인님은 약이 올랐다. 저도 논에서 철벙철벙 둑으로 올라오더니 잡은 참 내 멱살을 움켜잡고 뺨을 치는 것이 아닌가…… "이 자식. 일 허다 말면 누굴 망해 놀 속셈이냐. 이 대가릴 까놀 자식?" 우리 장인님은 약이 오르면 이렇게 손버릇이 아주 못됐다. 또 사위에게 이 자식 저 자식 하는 이놈의 장인님은 어디 있느냐.

점순이는 뭐 그리 썩 예쁜 계집애는 못된다. 그렇다구 또 개떡이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고, 꼭 내 아내가 돼야 할 만치 그저 툽툽하게 생긴 얼굴이다. 나보다 십년이 아래니까 올해 열 여섯인데 몸은 남보다 두 살이나 덜 자랐다.

내가 다 먹고 물러섰을 때, 그릇을 챙기는데 난 깜짝 놀라지 않았느냐. 고개를 푹 숙이고 밥함지에 그릇을 포개면서 날더러 들으라는지, 혹은 제 소린지, "밤낮 일만 하다 말 텐가!"

하고 혼자서 쫑알거린다. 고대 잘 내외하다가 이게 무슨 소린가, 하고 난 정신이 얼떨떨했다. 그러면서도 한편 무슨 좋은 수가 있나 없는가 싶어서 나도 공중을 대고 혼잣말로, "그럼 어떡해?"

하니까, "성례시켜 달라지 뭘 어떡해."

하고 되알지게 쏘아붙이고 얼굴이 빨개져서 산으로 그저 도망친다.

나도 저쪽 벽을 향하여 외면하면서 내 말로, "안된다는 걸 그럼 어떡헌담!"하니까, "쇰을 잡아채지 그냥 둬, 이 바보야!"

하고 또 얼굴이 빨개지면서 성을 내며 안으로 샐죽하니 튀들어가지 않느냐, 이때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게 망정이지 보았다면 내 얼굴이 에미 잃은 황새 새끼처럼 가여웁다 했을 것이다.

사실 이때 만치 슬펐던 일이 또 있었는지 모른다. 다른 사람은 암만 못생겼다 해두 괜찮지만 내 아내 될 점순이가 병신으로 본다면 참 신세는 따분하다. 밥을 먹은 뒤 지게를 지고 일터로 갈려 하 다 도로 벗어 던지고 바깥마당 공석 위에 드러누워서 나는 차라리 죽느니만 같지 못하다 생각했다.

내가 일 안하면 장인님 저는 나이가 먹어 못하고 결국 농사 못 짓고 만다. 뒷짐으로 트림을 꿀꺽 하고 대문 밖으로 나오다 날 보고서, "이 자식, 왜 또 이러니."

"관격이 났어유, 아이구 배야!"

"기껀 밥 처먹구 무슨 관격이야, 남의 농사 버려 주면 이 자식 징역간다 봐라!" "가두 좋아유, 아이구 배야!"

참말 난 일 안해서 징역 가도 좋다 생각했다. 일후 아들을 낳아도 그 앞에서 바보, 바보, 이렇게 별명을 들을 테니까 오늘은 열 쪽이 난대도 결정을 내고 싶었다.

장인님이 일어나라고 해도 내가 안 일어나니까 눈에 독이 올라서 저편으로 힝하게 가더니 지게 막대기를 들고 왔다. 그리고 그걸로 내 허리를 마치 돌 떠넘기듯이 쿡 찍어서 넘기고 넘기고 했다.

가뜩이나 말 한마디 톡톡히 못한다고 바라보는데 매까지 잠자코 맞는 걸 보면 짜장 바보로 알 게 아닌가. 또 점순이도 미워하는 이까짓 놈의 장인님하곤 아무것도 안되니까 막 때려도 좋지만 사정 보아서 수염만 채고(제 원대로 했으니까 이때 점순이는 퍽 기뻤겠지) 저기까지 잘 들리도록 '이걸 까셀라부다!'하고 소리를 쳤다.

장인 님은 더 약이 바짝 올라서 잡은 참 지게막대기로 내 어깨를 그냥 내려갈겼다. 정신이 다 아 찔하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때엔 나도 온몸에 약이 올랐다. 이녀석의 장인님을, 하고 눈에서 불이 퍽 나서 그 아래 밭 있는 넝알로 그대로 떠밀어 굴려버렸다.

"부려만 먹구 왜 성례 안하지유!"

"이 자식! 잡아먹어라, 잡아먹어!"

"아! 아! 할아버지! 살려줍쇼, 할아버지!"하고 두팔을 허둥지둥 내절 적에는 이마에 진땀이 쭉 내솟고 인젠 참으로 죽나 보다 했다. 그래두 장인 님은 놓질 않더니 내가 기어이 땅바닥에 쓰러져서 거진 까무러치게 되니까 놓는다. 더럽다, 더럽다. 이게 장인님인가? 나는 한참을 못 일어나고 쩔쩔 맸다. 그러나 얼굴을 드니(눈엔 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사지가 부르르 떨리면서 나도 엉금엉금 기어가 장인님의 바짓가랭이를 꽉 움키고 잡아나꿨다.

"할아버지! 놔라, 놔, 놔, 놔, 놔라."

그래도 안되니까, "애 점순아! 점순아!"

이렇게 꼼짝도 못하게 해 놓고 장인 님은 지게 막대기를 들어서 사뭇 내려조졌다. 그러나 나는 구태여 피하려지도 않고 암만해도 그 속 알 수 없는 점순이의 얼굴만 멀거니 들여다보았다.

"이 자식! 장인 입에서 할아버지 소리가 나오도록 해?"




    이상은 1930년대 단편 소설가 김유정이 남긴 `봄.봄'을 부분 발췌한 것이다.

    그의 작품을 문학적으로 분석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이 소설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미술시간이었다. 

    산골동네 어린이들에게 더 가르칠 게 없었던지 미술선생님은 단편소설을 읽어주셨다. 

    사범대학을 막 졸업하고 비무장지대 인근의 산골로 온 미술선생님은 창문이 떨어질 것 같은 대포 소리에 깜짝깜짝 놀랐다. 놀란 토끼가 따로 없었다. 우리는 운동장 옆에서 포아대는 대포소리에 놀라며 이 소설을 들었다. 

    이번 설에 찾았더니 선생님이 치던 종은 현대화에 밀려 구석에 방치돼 있었다.

    반갑게도 동네 친구들과 청소를 했던 화장실은 학교를 신축하는 과정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한구석에 살아 남았다.

    아이들은 눈이 쌓인 운동장에 발자취를 남겼다.

    저렇게 뛰어놀던 친구들은 사라지거나 혹은 중년이 됐다.

              1515077654299482.jpg

1515077655193747.jpg


    김유정의 작품이 놀라운 것은 바로 주변에서 보고 듣던 농촌의 이야기가 소설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동안 문학작품은 무엇인가 도회지의 세련된 분위기로 치장돼 있어 범접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부려만 먹고 딸을 줄 생각을 하지 않은 `예비 장인'과 한판을 벌이는 `나'는 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거기에다 연인 점순이가 아주 덜 떨어졌다는 표정까지 짓자 마침내 배탈이 났다며 반항하기 시작하는데 장인 어린의 대응 논리도 기차다. 한 마디로 기득권자들이 아랫 것들을 달래는 방식이다. 농사일을 망치면 징역을 갈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요즘의 노사현장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노동자들이 파업하면 법의 심판을 받게 한다는 경영주의 논리가 '예비 장인'의 협박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연인 점순이가 도와 주는 줄 알고 장인과 한판 붙는데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결정적인 순간에 점순이는 지 아버지를 편든다. 

    그래서 파란 하늘에 눈 물이 핑돈다. 참으로 야속한 세상은 항상 파란 하늘을 캔버스로 해서 눈물이 맺히게 만든다.

    1515077655900796.jpg


    올해는 김유정의 100주년 기념사업이 그의 고향 춘천 `실레마을'에서 대대적으로 펼쳐진다.

    소설가 전상국 촌장이 이 사업을 이끌고 있다. 큰 일을 하면서도 겸손함 때문에 항상 신뢰가 가는 분이다.

    입담이 좋기로 유명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100년뒤에도 기억되는 이 땅의 문학가가 몇 명이나 되겠느냐며 김유정 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김유정이 기득권자들의 언어인 서울 말씨로 이 소설을 썼다면 아무런 맛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김유정을 '테스' 를 토마스 하디와 비교했다. 세계적인 문호로서 내세울 수 있는 한국의 문인이라는 것이다.

    사투리와 같은 언어는 바로 문화이고, 이 독특한 문화야말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갈수록 전국의 문화가 서울에 종속되면서 한국의 특성까지 사라지고 있는 현실이어서 1930년대 남긴 김유정의 소설은 오히려 빛을 발한다.

    이제 농촌에 그리운 `점순이'는 없다. 

    젊은이들이 모두 산업화된 도회지로 떠났으며 농촌 총각에 관심을 두는 여성은 눈을 씻어봐도 찾을 수 없다.

    대신 파란 눈의 외국인들이 농촌총각을 찾아오는 시대가 됐다.

    김유정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이제 농촌을 `마음의 고향'이나 `생태계 보고'로만 버려두지 말고 애정을 갖을 때다. 

    그 속에 불타 버린 숭례문 이상의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가치가 살아 숨쉬고 있다. 

5 Comments
채원 조이령 2008.03.27 21:25  
그렇군요....벌써 100주년 기념이라....재작년 실레마을 축제에 참여했더랬습니다....작가 이름을 딴 기차 역이 있다는 사실 참 고무적이지 않습니까??? 춘천 참 아름다운 고장입니다....이 봄 또 찾을까 합니다~^^*
임광자 2008.03.27 22:36  
좋은 글 읽을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 합니다.
fabiano 2008.03.27 23:53  
예전, 김유정의 봄이 교과서에 실려서 일부지만 특유의 묘사에 재미있게 앍은 기억이...새삼, 생각 납니다.
fabiano 2008.03.27 23:55  
님의 좋은 글을 자주 읽어야 하는데요...
fabiano 2008.03.28 06:06  
세월은 가도 글 향기는 남아 아직도 은은하게 풍기는 듯 합니다. 부지런히 웹서핑하여 좋은 글을 찾아내는 것도 중요한 일이네요.
Category
State
  • 현재 접속자 445 명
  • 오늘 방문자 5,838 명
  • 어제 방문자 12,641 명
  • 최대 방문자 14,619 명
  • 전체 방문자 1,561,070 명
  • 전체 게시물 10,948 개
  • 전체 댓글수 35,463 개
  • 전체 회원수 74 명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