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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덕상 교수의 저서-『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를 통해 본 조선인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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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사학자 강덕상 교수는 그의 저서『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조선인의 죽음, 한국어 출판)의
서문에 관동대지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첫째로, 이민족 권력하에 인권을 박탈한 식민지 민족사의 통한(痛恨)을 드러낸 것이며,
둘째로, 원한으로 얼룩진 재일동포의 수난사이기도 하며,
셋째로, 일본 제국주의의 차별과 전횡(專橫)의 극치의 실상을 드러낸 것이라고 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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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 주재 미국대사는 “이처럼 경악스러운 대학살이 대낮에 공공연히 일어나고 있는
일본이라는 나라는 결코 문명국이라 할 수 없다.
특히 그것을 태평스럽게 바라보며 제지하지 않는 일본 정부는 세계 속에서도 으뜸가는
야만 정부이다.”라고 기술하였다.

83년전 일본 관동지방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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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 발생과 유언비어

1923년 9월1일 오전 11시58분 일본 관동지방을 덮친 강도 7.9의 격진은 사상최대의 피해를
불러일으켰다.
사망자 91,344명 전파.소실 가옥 464,900호(이와나마 간행「近代日本總合年表」에 의함)라는 
숫자가 그 규모의 크기를 말해주고 있다.
이 소용돌이 속에서 6,000명 내지 10,000명에 달하는 조선인을 비롯하여, 중국인, 노동자,
사회주의자들이 학살당하였다.
지진이 발생한 9월1일 오후에는 이미 관동지방 각지의 경찰서내에서 유언비어가 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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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령선인들이 우물 속에 독약을 던지고, 방화,강도를 벌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파출소 앞에는 조선인 폭동이라는 벽보가 내 걸리고 경찰은 제 정신이 아닌 민중을 향해
메가폰을 들고 이를 소리치고 돌아다니는가 하면 등사판 인쇄물을 배부하는 사람도 있었다.
3일에 내무성 경무국장 이름으로 조선인 가운데는 도쿄 시내에서 폭탄을 소유하고,
석유를 부어 방화하는 자가 있다’라는 전보가 일본 전국 각지의 지방장관들에게 급전되었다.

유언비어는 경찰.군대의 통신 각 행정기관으로의 통달, 매스커뮤니케이션 등에 의해 증폭되어
이성을 완전히 잃은 일본 민중은 손쉽게 이 유언비어를 믿었던 것이다.
군대,소방서,자경단에 의한 조선인 학살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 학살의 배후에는 일본의 조선식민지배, 조선인을 차별 학대해 온 역사적 사실, 그리고
조선의 독립을 갈구하는 조선민중의 투쟁을 일본 지배층이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사실 등을
간과할 수는 없다.
자연 재해 발생하에서 타민족에 대한 이러한 학살은 인류 역사상 그 유례가 없는 만행으로
영원히 기록 전달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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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일

오후 3시경 : 사회주의자 및 조선인 방화 다수 발생(警視廳)

오후 4시 : 돌연 조선인 방화의 유언비어 관내 발생(王子署)

조선인은 도쿄시의 전멸을 기도하여 폭탄을 투척하고 독약을 사용하여 살해를 기도(巢鴨署)

오후 6시경 : 조선인 습격의 유언비어, 최초로 관내 전파(芝愛宕署)

오후 8시 : 조선인 폭행 유언비어의 관내 유포로 조선인에 대한 박해 또한 개시됨(小松川署)

9월1일에 발생한 유언비어의 특징은, 첫째로 발생지가 간토 일원의 광대한 지역에 걸쳐있다는
점이고, 둘째로 발생 시각이 다양하여 각기 독립적인 발생을 추정하게 한다는 점이며,
셋째로 비교적 피해가 적은 지역, 특히 2차 재해지로써 화재 피해가 적었던 지역이라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따라서 경찰력이 회복이 신속하게 이루어졌고, 일찍이 화재 방지가 강조되었던
지역이라는 점도 들 수 있다.

 


9월2일

불령선인의 내습이 있을 것이다.9월1일의 화재는 다수의 불령선인이 방화 또는 폭탄을 던져서
일어난 것이다.(오전 10시) 그들은 단결하여 도처에서 약탈을 감행하여 부녀를 능욕하고
잔존 건물에 불을 질러 파괴하려 하는 등 폭악이 심하여 전 시(全 市)의 청년단, 재향군인단 등은
현 경찰부와 협력하여 이를 방지코자 노력하고 있다.(오후 2시5분)
요코하마 방면에서 내습하는 선인의 수는 약 2천명으로 총포 도검등을 휴대하고 이미 大鄕의
철교를 건넜다. 군대는 기관총을 비치하고 선인의 입경을 차단시키고자 하며, 재향군인 청년단원
등도 출동하여 군대를 응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矢口방명으로 향하고 있다(오후 2시5분)
原田町을 습격한 2백명은 다시 相原.片倉의 두 마을에 침입, 농가에 들어가서 물건을 빼앗고 부녀를 살해했다.(오후 4시)
선인이 鶴見방면에서 부녀자를 살해했다.(오후 4시40분)

선인 1백10명이 寺島에서 관내 四木橋 부근에 모여 흉기를 휘두르면서 폭행을 하고 방화도 한다.(오후 5시)

선인들이 기회만 있으면 폭행을 일으키려고 계획한 것인데, 진재가 돌발됨에 따라 예정의 계획을
변경하여 미리 준비했던 폭탄과 독약을 유용하여 帝都 전멸을 꾀하고 있으므로 우물을 마시거나
과자를 먹는 것은 위험하다.

 

9월3일

선인 약 2백명이 本鄕. 向島방면으로부터 대일본방적주식회사 및 隅田역을 습격했다.(오전 1시)
선인 수백명이 本鄕. 유시마 방면으로부터 우에노공원에 내습한 모양이니 속히 이리야  방면으로
피난하라. 짐들을 가지고 갈 필요는 없다. 우일 부호로부터 분배하도록 하겠다.(오전 4시)
군대 30명이 선인의 폭동을 진압시키기 위하여 月島에 갔다.(오전 10시)
선인이 경찰서에서 석방되었으니 속히 이들을 잡아 죽여 버려라.(오후 3시40분)
선인이 시내 우물에 독약을 투입했다.(오후 6시30분)
우에노 공원 및 불타버린 곳에는 경찰관으로 변장한 선인이 있으니 주의하라.(오후 9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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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학살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52년도로 관동대지진 발발
35주년이 지난 후였다.
그후 일부 지식인과 시민단체의 관동대지진 추모열기가 커지면서 40주년, 50주년, 70주년을
계기로 많은 연구와 학술발표가 이루어졌다.

당시로는 일본 근현대 사학자 중에서 드물게 마츠오 쇼이치(松尾章一, 75)호우세이 대학 교수의
연구와 학술 논문이 발표되었다.

 

“전후 조선인 학살을 연구하는 일본인 학자는 거의 없었습니다.
재일 한국인 사학자들이 먼저 학계에 문제를 제기하여 충격을 주었습니다.
강덕상, 금병동, 박경식 선생과 같은 선구자들의 업적이 큽니다. 특히 강덕상 교수는
역사적인 대사건에 왜 일본 학계는 함구하느냐고 꾸짖었습니다.”

그 후 일일이 생존자들의 증언을 채록하고, 역사 문헌을 발굴하여, 결국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관동대지진에 관한 출간물을 발간하게 되었는데 이 책이 바로
『역사의 진실-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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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의 학살 처음 증명

『관동대지진 정부 육·해군 관계사료』에 의하면 군대가 학살에 직접 관여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귀중한 사료를『육군진재(震災)자료』라는 비공개 문서 속에서 발견하는 개가를 올렸다.

결국 일련의 자료들로 인해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이 유언비어에 의해 민중들이 저지른 행위라는 인식에서,
군에 의해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자행한 국가적인 범죄임을 입증해 주었다.
당시 육군은 피해 각 지역에서 치안과 경비를 담당해 온 반면 해군은 피난민들의 해상 수송과
식량보급을 담당해 왔다.
그러나 육군은 패전 후 맥아더 진주를 기다리는 1주일동안 수많은 자료를 소각했는데
특히 1923년 관동대지진에 관한 기록은 남겨두지 않는 치밀함을 보였다.
반면 이외로 해군은 당시 기록을 대부분 남겨 놓아 관동대지진에 군의 개입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후나바시 송신소 사건, 카메이도 사건 등이 해군의 학살 증거였다.

지진이 발생한 것은 9월1일 11시57분 경인데 유언비어가 발생한 것이 9월1일 오후 2시인 것이
그 증거이다. 또 유언비어가 퍼진 주요 지역과 학살 지역이 일치한다는 점, 그 지역이 대부분 군이
주둔한 곳(예를 들면 아카바네 등)과 일치한다는 점도 결정적인 증거라고 마츠오 교수는 주장한다.

조선인 도와준 일본인도 있다는 논리는......

아직까지 태평양전쟁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있듯, 관동대지진도 일부 일본 사람들은 다른 의견을 내놓고 있다.
관동대지진 당시 구명 활동을 벌여 조선 사람을 도운 사람도 있다는 주장도 그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본질을 희석시키는 물타기에 불과하다는 것이 마츠오 교수의 지론이다.
식민지 시절에 철도를 놓아준 것이 조선을 돕는 일이 아니라 일본의 시장확대를 위한 수단이었던
본질을 왜곡하는 것과 같은 논리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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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학살 사건은 식민지배 제도의 모순이 폭발한 것이었다. 또 식민지가 있는 한,
재발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강 교수는 그의 저서『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에서 밝히고 있다.

“지진이 일어나자, 선인에 대한 유언비어가 난무하여 민심이 극히 동요했을 뿐 아니라,
선인에 대한 박해와 폭행이 일어나고 있어, 치안유지 및 일선 융화의 차원에서, 이러한 시기에
선인이 멋대로 배회하지 못하도록.....”

이 인용은 1930년 순토(駿豆) 지방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의 관헌 기록이다.
무언가 일이 일어나면 사회불안의 원흉을 만들어 낸 일은 그 뒤에도 빈번했던 것이다.
식민지배 제도하에서 비굴하게 살아가지 않으려는 조선인이 있는 한 박해의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했던 것이다.

 

일본이라는 지배자에 의해 계획, 조작, 유포된 유언비어에 의해 수천 명의 조선인, 그리고
사회주의자들과 오스기 일가의 생명을 사라져 갔다. 그
러나 적어도 오스기 살해범은 형식적으로나마 책임을 추궁 당했지만, 조선인 살육자는
그 어떤 책임도 묻지 않았다.
희생자 유가족에 대한 애도의 말 한마디조차 없었다.
있었다면 궁색하기 짝이 없는 자기 변명뿐이었다. 그 사실은 당시의 일본 사회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강교수는, 권력의 선동에 현혹되어 살육에 가담했고, 그 대상이 조선인인 한,
흉악한 살인범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일본 사회 구조는, 준엄한 역사의 법정에서라도
단죄되어야 할 것이라고 그의 저서『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에서 거듭 강조했다.

 

출처 : 아리랑21

5 Comments
丹溪 2006.10.13 14:58  
죽어도 잊지 않아야 할, 잊어서는 안될, 잊을 수 없는,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될 우리의 역사이자 교훈입니다.
개살구 2006.10.13 16:00  
상기해야 할 슬픈 사건들이지만, 궁금한 것은 어떤 경로를 통해 저런 사진이 유포되었는가 하는 거예요, 아마도 서방의 기자들이 찍은 사진이겠지요?
fabiano 2006.10.13 19:43  
그래서 역사는 알아야 하고 연구해야 할 과제로 생각합니다.
fabiano 2006.10.13 19:48  
이것은 제 개인 생각이지만 사건과 사고가 점철된 일본역사의 뒤안길엔 엄청난 기록과 증거가 분명히 일본내에 있슴을 확신합니다. 일본의 근성과 여러 조건으로 보아 분명히....
시티핸섬 2013.05.15 12:41  
아무리해도그렇지ㅡ왜 가만히있는나라를건드리냐고일본들아 니들이뭐잘했다고실실웃어 천벌받아봐야정신차리지ㅡ 그래도우리나라는 아무죄없는데 일본 썅놈들이ㅡ 우리뿐만아니고몇몇나라들도 학살당한것도많이있네요 그리고 우리나라 존경하고 삼가고인의 명복을빕니다ㅜㅜ  일본다뜨자 덤벼ㅡ아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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