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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박기당 1 : 한국만화에 박기당이다

fabiano 5 4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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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당이 50년도 초 초상화를 그릴 때
그린 아버지 박도원의 유화초상
박기당선생은 1922년 일본 후쿠오카의 작은 도시 아까사까에서 아버지 박도원 어머니 김음전씨의 오남 일녀중 셋째로 태어났다. 기당은 만화가로 데뷔할 때의 필명이고 본명은 박성근이다. 대부분의 다른 기록에는 그의 고향이 경남 양산으로 서술되어 있지만 양산은 그의 부친 박도원의 고향이었다. 아버지 박도원은 당시 일본에서 지금의 우리 직업으로 한다면 변호사 사무장직 정도의 직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집안형편은 부유한 편이었고 일인들도 그들이 비록 조선사람 이었지만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예를 다했다고 한다.

기당은 그곳에서 우리의 초등학교 격인 아까사까 신상소학교를 다녔다. 어릴때부터 그의 신체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공부도 잘하고 그림도 잘그려 주위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고 또 자기의 주장이 강하고 책임감이 강해 마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 였다.일본인 동무들도 함부로 상대할수없을 정도의 자존심이 강한 야무진소년이었다.

그후, 그는 이스가 고등 소학교를 2년, 경수 소학교를 3년 마칠 때 쯤 일본은 전쟁에서 폐색이 짙어가며 한인들에 대한 편견이 최고조로 심해져 일본에서의 한인 생활이 날로 힘들어 갔다. 그의 아버지 박도원은 직업상 법률문제로 조선인을 두둔하다 보니 일인들과 자주 충돌을 가졌으며, 결과 여러차례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해방후 정부에서 이렇게 일본에서 옥고를 치른 것을 기록으로 확인하고 독립운동가로 추서하기도 했다.

부친의 옥고는 집안의 몰락을 가져와 기당은 더이상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바로 밑의 동생 병근과 함께 오사까에 있는 공장을 전전하게 되었다. 유리공장과 나중에는 광산에까지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한국인 근로자들도 많아 일인 노동자들과 충돌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기당은 다른 한인 노동자와는 달리 일본말도 잘할 뿐 아니라 해박한 언어 구사력과 두둑한 배짱이 있어 한인 노동자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누구하나 말을 잘못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쫓아가서 따지고 때로는 싸움을 걸어오면 물러서질 않았다. 이렇다보니 일인들은 깡패들을 고용해 기당 형제에게 집중적으로 테러를 감행하였다. 결국 어느날 동생 병근이 일인 깡패들이 휘두른 장검을 등에 맞고 큰 상처를 입고 쓰러졌다. 겨우 목숨은 건졌으나 기당의 성격으론 물러설 수 없는 도전이었다.

후에 기당은 이들을 찾아내 흔쾌히 복수를 했으며 이일로 더이상 일인들은 그들을 만만히 보지 못하고 거리를 두어 행동을 했다한다. 이러한 기당의 강직하고 불의를 못참는 성격은 그의 아버지 박도원과 똑같았다.

아버지 박도원이 해방후 귀국하여 6.25 전쟁이 발발하자 그때 부산에 있으면서 동장과 같은 역할의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주요 업무가 징집영장을 발부하는 것이었다. 발부한 고지서는 백여장인데 다음날 모인 인원은 기당형제 둘을 포함해 다른 사람 하나 이렇게 도합 3이 모였다. 이때 이미 막내아들 복근은 전선에서 사망했는데도 나머지 두아들 마저 군에 입대 시켰으니 그 성격을 알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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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의 학창시절
결국 일본은 1945년 8월에 패망하고 기당은 그해 10월 처음으로 고국으로 돌아온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란 기당은 자연 우리말이 서투르니 그 괄시가 보통이 아니었다. 취직도 힘들고 장사도 해본 경험이 없으니 처음 몇 달간은 우리말을 익히는데 전념하며 놀고 지냈다.

잠시 일본에서 얼마간 가지고 들어온 돈으로 지방에서 쌀을 사다 (전라도 정읍) 부산에서 되파는 쌀장수를 시작했으나, 몇 달 못가 돈만 다 잃고 포기하고 만다. 결국 그 원인은 우리말이 서투르고 왜놈이라 멸시하니 더 이상 그 장사를 할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장사 보다는 그가 잘할 수 있는 일을 고르다 보니 동네 상점의 간판을 가끔씩 쓰게 됐고 동네에서 글씨와 그림을 잘 한다는 소문도 나니 그림 그리는 사람들도 몇몇 알게 됐다.

그 중 윤남근 씨를 알게 됐다. 그때 윤남근 씨는 부산 중심가 광복동에 미군들을 대상으로 하는 조그만 초상화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그림솜씨에는 남에게 뒤지지 않고 잘한다는 소리를 들어온 그인지라 당장에 글씨쓰는 일을 마다하고 찾아가 사정을 하니 테스트를 걸친 후 즉석에서 일을 하게 됐다. 주로 가게에 찾아오는 미군들은 대부분 자기 초상화를 그려서 본토의 가족에게 보내는 사람들이라 종이로 그리는 것은 물론 때론 손수건이나 도자기에도 그려 달라는 주문도 많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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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사변 중 부산 광복동에서
미군 초상화를 그리던 시절
(중앙이박기당)
기당은 신이 나서 열심히 일했다. 원래 솜씨도 좋은데다 한 장에 2, 3 불 하는 그림 값이지만 그때는 그게 적지 않은 수입이라 집에도 생활비로 얼마씩 떼어주고 나머지는 호탕한 그 성격에 동료들에게 술 한턱도 잘 권했다 한다. 돈을 우습게 아는 그의 성격은 들어오는 대로 써 없애기에 바빴다.

윤남근씨는 그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눈썰미가 있어 사람을 한 두번 쓱 ?어 보고도 재빨리 그림을 쏙 빼닮게 그려서 가져가는 손님들에게 고맙다고 한두푼 더 받았지만 그런 것을 갖고 우쭐하거나 챙기지 않는 성격이고 그런 날이면 술 한잔 더 사는데 앞장이라 그 고집을 감히 막을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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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말기 생전의
박기당
이렇게 초상화 그리기에 열중일 때 어떤 한 손님의 소개로 극장간판을 그릴 수 있느냐는 제의를 받고 그 길로 극장 간판의 길로 나가게 된다. 그곳은 부산에서도 이름난 극장, 부산 시민관 이었다. 기당이 부산에서 극장간판 그리는 일을 얼마나 했는지 정확치는 않지만 그후 서울로 상경해 서울의 일류극장이란 국도 극장의 간판을 그리게 됐으니 나름대로 그의 타고난 소질을 의심 안할 수 없다 하겠다. 국도 극장에서 얼마나 간판을 그렸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한 일년 이상은 했으리라는 것이 주위의 이야기다.

결국 이 극장 간판을 그리던 국도극장 주변에 많은 그림꾼이 있었고 전에 부산에서 면식이 있던 박광현을 만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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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12월 <성문사>에서 발행된 김종래의 <충신비파> 표지,박기당이 그렸다
박광현은 그때 인기 있던 만화가로 단행본은 물론 여러만화 잡지에 그림을 연재하고 있었고 <만화 소년>이란 잡지는 직접 경영을 하고 있었다. 이 <만화 소년>에 기당은 처음으로 만화를 싣게 되었다고 전하는 이가 있지만 그 제목이나 내용은 아직 정확치 못하다.

기당 자신이 설명한 기록에는 1952년 12월부터 만화를 시작했다고 적고 있으나 여하튼 박광현의 추천으로 기당이 만화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면 박광현은 장래 자신과 둘도 없는 라이벌이며 좋은 동료로서 함께 의지할 좋은 만화가를 발굴했다 하겠다.

이둘은 초창기 서로 같이 합작으로 책을 내놓은 것도 여러권 된다. 61년 초에 발간된 박기당의 <바다의 독수리> 상·하권은 박광현이 표지를 그리고 또 62년에 나온 <엽전 열닷냥>은 속의 그림은 박광현인데 표지는 일이권 모두 박기당이 그렸다. 기당은 박광현, 김종래와 함께 그 후 한국 전통 극화체(삽화체)의 선도자로 인정 받고 있다.

기당은 <만화세계>, <만화학생>, <칠천국> 등 오십년대 후반의 많은 만화 전문지에 이름난 작가로 대우를 받으며 연재를 해왔고 중학생지인 <학원> 일반 대중잡지인 <야담>, <희망>, <아리랑>에도 연재 청탁을 불과 2-3년 만에 최고의 인기 작가로 등장하게 된다.

그가 어떻게 간판에서 초상화, 극장간판으로 직업을 바꾸면서 불과 한두 해 만에 이렇게 만화가의 큰 자질을 보였는지가 참으로 궁금한데 뚜렷이 이야기 해주는 사람이 없으니 참으로 답답하다. 그런 질문에 주위분들은 당연하다는 듯 그는 무엇이든지 잘했다고 한다. 그는 천재였어요. 천재...?

또 하나 놀란 만한 일은 그의 초기 작품을 보면 전성기의 작품과는 엄청난 실력차이를 느낄수 있을 정도로 형편없는 그림들이 많기 때문에 옛날 책이 발견되지 않기를 바라는 작가도 더러 있다. 실제 그가 <야담지>에 만화와 소설 삽화를 간간히 연재할 때(야담, 1956년) <야담지>에는 이승만, 김기창, 김영주 화백들과 김용환, 신동헌 등 당시 한국 최고의 화가와 만화가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지만 그의 그림 역시 그들과 겨루어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그는 당시 <야담지>에 대마로 소마로 두페이지 짜리를 연재하였는데 이전의 극화체와는 달리 완전한 만화체 형태로 후에 가나다라 왕국(60년)이나 감초선생(62년)과같은 만화체는 만화의 모태가 되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하여튼 그가 만화에 급속도로 진전할 수 있었던 것은 부산에서 간판과 곁들여 상점의 선전문을 도안해 주기도 했다니 그때부터 혼자 많은 습작을 해오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의 만화 첫 문하생이었던 송칠성 씨는 50년도 후반, 당시 인기있던 <칠천국>이라는 잡지에서 박기당선생의 <관파의 탑> 이라는 만화를 보고 매료 되어서 편지를 보내게 되었고 그가 다니던 강원도 주문 진중학을 졸업하자 곧바로 서울로 박선생님을 찾아 상경했다고 한다. 서울에 계시거니 하고 올라 왔더니 부산으로 가셨다해 찾아가 뵈니 의외로 부산에서 큰 전시회를 열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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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12월<성문사>에서 발행된 김정파의<아-무정>표지,이것도 박기당 그렸다
장소는 부산 상공회의소 였는데 몇몇 부산 화가들과 민족정신 문화운동을 주제로 한 작품들로 유화로 그려졌는데 대부분 박기당선생님의 작품은 충무공 이순신의 해전도였다고 기억하고 당시 어린 마음에 유화로 그린 멋진 그림들을 보고 박선생님에게 더 큰 존경과 신뢰감을 느끼게 되었다 한다.
박선생은 전시가 끝난 후 그 그림들 중 일부를 진해 해군 박물관에 기증했으며 지금도 그곳 진해 박물관에는 그의 작품(충무공 영정)이 지방문화제에 지정되어 현재까지 잘 보관되고 있다 한다.

기당은 일본에서 생활하는 동안 충무공 이순신을 가장 존경하게 되었고 그후 그의 작품속에서 직간접으로 이순신 장군의 등장을 종종 볼 수 있다(바다의 독수리 61년 작). 또 그의 작품 후반기에 화문각에서 간행된 <성웅 이순신>(74년)에서도 중간중간 유화로 <해전도>를 그려 넣은 것으로 보아 충무공에 대한 그의 각별한 사랑을 잘 읽을 수 있다.

그의 본격적인 단행본 발행은 1957년부터 이루어지는데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만리종>(동방문화사)은 1959년 12월에 발행되어 큰 인기를 얻게 된다. 대부분의 많은 원로작가들은 박기당의 대표작으로 <만리종>과 <불가사리>(60년 독수리 문고)를 꼽고 있으나 60년 발행된 <눈물의 절벽>을 더 평가 하는 사람도 있다.

1958년에는 딱지본 만화와 격을 달리 하는 본격적인 단행본 형태의 호화양장한 책이 발간되는데 이는 책의 페이지수(250)나 원색을 넣은 것이나 고급 동화책 못지 않는 고가의 책을 성문사에서 발행했다. 이 성문사 만화씨리즈의 주요 작가는 박기당(손오공, 예수님), 박광현(임꺽정, 야광주), 이병주(수호전), 신동우(삼총사), 김종래(충신비사), 추동식(쿼바디스), 송방(무쇠탈), 김백송(사도세자) 김정파(아-무정)등으로 가격이 500환이나 되었고 하드커버의 속은 일부 원색으로 당시로선 고급책 이었다.

지금 그 책들은 50-60년대는 물론이고 70년대 초까지를 살펴보아도 종이 재질이나 인쇄 상태 제본형태 등 가장 책다운 책으로 주목 받기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특이한 점은 이 대열에 기당이 주역으로서 10여권 되는 책 표지를 그가 다 그렸다는 그것은 물론 그 당시 그가 최고의 작가로 출판사에서 대우받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사주로서는 고가이고 심혈을 기울여 발간되는 책이 어떻게 독자들에게 호응을 얻을 수 있을까 고심하지 않을 수 없겠고 그 중 박기당 생각을 했을 것 이 아닐까!

김종래나 박광현 역시 최고의 작가들인데! 아마 기당의 극장간판 시 유화 실력을 믿은 것은 아닌지! 그때의 몇작품 표지를 보면 칼을 든 주인공 무장의 얼굴이 그때의 인기 영화배우 장동휘와 너무나 흡사한 것을 느낄 수 있다.

 
                                                                                                                                      글 : 오 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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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당과 그의 친구  



5 Comments
아무개 2015.06.11 07:28  
이사진은 중앙이 박기당선생이시고 선생님 왼쪽이  문하생 고무창선생이시고 검은학생복은 역시 문하생 송길성(?)선생같은데  확실치는않습니다
fabiano 2015.06.11 09:03  
아무개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습니다.댓글, 감사합니다.
악동이 2017.10.13 04:15  
검은학생복은 당시 만화를 배우던분으로 김성칠형입니다.
fabiano 2017.10.13 12:45  
위 댓글을 다신 분의 견해에 검은 학생복을 입으신 분은 송길성(?)씨 같다고는 했지만 확실치가 않다고 했으니 악동이님의 의견에 따라 김성칠씨로 인정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bulesky 06.13 18:21  
안녕하세요. 송길성화백님은 제 아버지이시고,  위의 사진에 제 아버지는 계시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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