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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고려인 이야기(4)

fabiano 0 1079  
이 글은 김재영의 연해주 고려인 리포트<대지의 슬픈 유랑자들> '내 눈물에 당신이 흐릅니다' 라는 소설의 일부입니다. -한얼미디어 출판-
조국광복의 발원지인 연해주를 분석하고 고려인들이 일구어 낸 황금같은 옥토을 소개 함으로써 민족긍지를 되살리고 오늘의 우리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독립투사들의 몸으로 던진 피흘린 대가이었음을 확인하고 나아가 잊고 있었던, 지금도 유랑신세로 떠도는 연해주 고려인들의 삶을 재조명 하므로 역사 속에 감추어진 그들의 업적을 드높이 평가해야 한다는 인식에 감히 포스트에 옮겨 보았습니다.초인류 인터넷의 강국이며 조선업과 반도체의 업적으로 세계의 위상에 우뚝 선 한국이라는 나라가 있건만 20세게 밀레니엄 시대에 우리의 핏줄인 한민족이 저토록 아픈 질곡의 삶으로 아프리카 빈민보다 못한 비참한 실상으로 러시아 변방 광활한 땅덩어리에서 아직도 버려진 우리민족인 고려인이 있다는 것에 슬픔이 강물처럼 흐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름은 바로 고려인일 것입니다.
참고로 김재영의 소설 '내 눈물에 당신이 흐릅니다'는 구 소련이 붕괴되면서 생겨난 독립국가의 그 어느나라에도 속하지 못하고 러시아 연해주에서 무국적자로 살아가고 있는 고려인의 기구한 삶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 이름도 슬픈 수이푼강

 

블라디보스톡에서 북쪽으로 112KM 떨어진 곳에 우수리스크라고 하는 인구 20만의 중소도시가 있다. 연해주에서는 주도 블라디보스톡 다음으로 큰 도시이자, 고려인이 제일 많이 모여 살고 있는 곳이다. 우수리스크를 고려인의 도시라고 할 정도이다.
이곳엔 고려인 뿐아니라 중국에서 넘어와서 보따리 장사를 하는 조선족들이 거대한 상권을 형성하고 있다. 또한 북한에서 파견된 노무자들과 사업을 위해 다녀가는 한국사람들로 인해 우수리스크는 거대한 한민족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우수리스크는 과거 발해의 5경 12부 중 한 부인 솔빈부가 있었는데, 1860년 북경조약으로 러시아 영토가 되었다. 한인들의 이주가 급증하면서 우수리스크 역시 항일투쟁의 중요한 거점이 되기도 하였다. 1917년 5월 한인들의 제1차 대표자회의가 이곳에서 개최되어 '전로 한족회' 가 발족되었고, <청구신보>도 이곳에서 간행되었다. 우수리스크의 대표적인 항일 독립운동가로는 이상설 선생을 꼽을 수 있다. 그 외에 고려사범대학의 조명희 선생이 있으며, 의병활동을 활발히 지원하던 최재형 선생이 총살당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우수리스크는 초입에서 아게에바 거리를 지나 우쩨스노예 마을로 향하는 수이푼강 근처에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보재 이상철 선생은 1870년 충북 진천에서 출생하여 1917년 3월 2일 48세의 나이로 우수리스크에서 작고하기가지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독립운동의 지도자였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과 이위종을 대동하여 독립을 주장하였고, 연해주에서 성명회와 권업회를 조직하여 활발히 활동하였다. 임종 전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죽는 욕된 몸을 우수리스크 강에 화장시켜 달라는 유언대로 선생의 유해는 수이푼강에 한줌의 재가 되어 뿌려졌다. 그 강물은 블라디보스톡의 아무르만으로 흐르고 동해에 이르러 조국광복의 염원으로 파도쳤을 것이다.
이 외에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아직 조사되지 않은 무명의 수많은 독립지사들이 이곳을 거쳐 하바로브스크로, 만주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광활한 대지를 누볐을 것이다. 오늘도 이상철 선생의 유허비 앞에는 라즈돌나야강(수이푼강)이  비통했던 역사를 말해주듯 적막한 주변 대지와 어우러져 잔잔히 흐르고 있다.

수이푼강 건너에는 크라스노야르라는 마을이 있는데, 옛날 발해의 솔빈부 성터였다. 이곳에는 슬픈 전설이 하나 전한다.
926년 거란군사와 발해 군사들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발해 군사들이 끝까지 투쟁하다 모두 산화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발해의 여자들이 자식과 남편의 죽음을 애통해 하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오늘날까지 '슬픈 강', '수이푼강' 이라고 부른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우수리스크 주변으로 중아아시아에서 재이주해 온 고려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 정착촌이 대여섯 곳 형성되어 있다.  크레모보, 플라타노프카, 뽀뽀프카, 라즈돌노예 등이 그곳이다. 역사적 아이러니 속에서 다시 중앙아시아에서 돌아오고 있는 고려인들은 이곳에서 새로운 둥지를 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폐허가 되다시피 한 이곳 사정은 너무나 열악해 고려인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조국을 떠나 연해주로, 중앙아시아로, 또다시 연해주로 돌아오고 있는 고려인들. 아, 이들의 유랑의 끝은 정녕 어디란 말인가.

 

*이 글은 <박환의 항일유적과 함께하는 러시아 기행>(국학자료원)을 참고하였다.

-김 알렉산드라 폐트로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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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죄없이 죽어간 사람들에게 인사드려라

 

블라디보스톡 기차역에서 모스크바 행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가면 14시간만에 도착하게 되는곳이 하바로브스크이다. '하바로브' 라는 사람이 1885년에 도시를 건설했다 하여 하바로브스크로 명명된 도시이다. 현재 인구 약 80만 명, 그 중 고려인은 약 1만 명 정도라고 한다.
도시 한복판을 잔잔히 흐르고 있는 아무르강은 여름철 시민들의 융일한 휴식공간이며, 서구식 도시 건물들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절경을 이루고 있다. '아무르(깔라가)' 라는 고기가 살고 있다고 해서 아무르강이라고 부르는데, 중국의 흑룡강에서 발원하여 하바로브스크를 끼고 흘러 태평양으로 이어진다. 수심이 깊어 여객선이 중국과 이곳을 매일 오고간다. 1시간30분 밖에 안 걸리는 가까운 거리이기 때문에 이곳도 중국의 보따리 장사들이 큰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하바로브스크는 1900년대 혁명활동의 중심지였는데, 1917년 이동휘와 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를 중심으로 한인사회당이 이곳에서 창당되었다. 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는 한인 최초의 공산주의자였다. 하바로브스크 마르크스 거리 24번지에는 그녀의 얼굴이 동판으로 새겨져 있다.

1917~1918년 이 건물에서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스탄게비치)이 일했다. 그녀는 볼세비키당 시위원회 사무국원이며 하바로브스크시 소비에트 외무위원이기도 하였다. 1918년 그는 영웅적으로 죽었다.
*한인사회당을 창건한 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짧은 기록으로 만날 수 있는 그녀는 1910년대 소련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여성 혁명가로 인식되고 있다. 우리에게는 전혀 생소한 이름이지만 중국 상하이에서 간행된 <독립신문> 1920년 4월 17일자에는 그녀를 "혁명 사상으로는 대한 여자의 향도관, 사회주의로는 대한 여자의 선봉장, 자유정신으로는 대한 여자의 고문관, 해방투쟁으로는 대한 여자의 사표자" 라 하여 자유정신과 독립투쟁에서 그녀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해 조국이 강점당한 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많은 한인들이 우랄지역으로 가 무기공장과 벌목장에 가서 일을 하게 되었다. 제정 러시아는 언어적 장애 등으로 계약 기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임금을 주지 않았다. 이에 블라디보스톡의 조선 인민회의에서는 1914년 러시어어에 능통한 김 알렉산드라를 파견한다. 당시 한인사회의 여성이 홀몸으로 2만 리 우랄지역으로 간다는 것은 어지간한 용기를 가지고는 할 수 없는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남편과 두 아이를 둔 어머니로서는... . 그러나 그녀는 남편에게 이렇게 이별을 전했다고 한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가정의 사람보다 사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어요. 두 아이나 잘 길러주십시오."
그녀는 여성이었지만 참으로 강한 의지의 소유자였다. 결국그녀 우랄지역으로 가 임금문제를 해결하고 한인들의 큰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였고, 그녀는 예카체린부르크에서 볼세비키가 되었다. 그녀는 다시 극동지역으로 파견되었는데, 한인 노동자들을 보호하고 조국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이 길만이 유일한 선택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다 1918년 9월에 러시아 반혁명 세력에 붙잡힌 김 알렉산드라는 한인 왜 러시아 내전에 끼어드느냐고 묻자, "나는 민족주의자가 아니고 사회주의자다. 러시아 볼세비키와 함께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것이 조선의 진정한 해방을 위하는 것이다" 라고 대답했다.
김 알렉산드라는 여성이라는 제약을 뒤어넘어 독립투사로서, 공산주의 혁명가로서, 자유주의자로서 시대적 소임을 다했다. 그녀는 심한 고문 끝에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하바로브스크 우조스 언덕에서 산화하였다.

하바로브스크 시내를 벗어나 공항 쪽으로 가다보면, 마르크스 거리 입구에 주앙 공동묘지가 있다. 이곳엔 1937년 강제이주 때 죄없이 죽어간 한인들과 러시아인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1990년 10월에 건축한 '기억사원' 이라는 조그마한 사원이 있다. 여기에 작 조명희, 박 알렉산드라 미하일로비치, 강고간 등 3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그리고 묘비에는 "여기에 잠깐  서서 스탈린에 죄없이 죽어간 사람들에게 인사드려라" 고 씌어졌다.

하바로브스크에서 제일 큰 호텔인 인튜리스트 호텔 근처 콤소몰 거리 89번지에는 작가 조명희 선생이 살던 2층짜리 목조건물이 있다. 충북 진천 출신인 조명희 선생은 1928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하바로브스크에서 교사로 일했으며, 한때 소련 작가동맹 원동지부에서 요직을 맡기도 했다. 그리고 동포 신문인 <선봉>과 <노력자의 조국>이라는 잡지의 편집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의 대표작은 일제의 농민수탈과 이에 저항하는 지식인 운동가의 삶을 그린 <낙동강>과 <만주의 빨치산>, <붉은 깃발 아래에서>, 짓밟힌 고려인> 등이 있다.

1937년 가을 어느 날, 그는 소련 헌병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리고 1938년 4월 15일 사형언도를 받고 5월 11일 총살되었다. 이유는 그가 일본의 첩자들을 도왔다는 죄명이었다. 그의 억울한 누명은 스탈린이 죽은 뒤 1956년 제20차 당대회 때 복권되었지만, 이미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하바로브스크 시내 한복판에는 한인들의 이름을 따서 지은 거리가 있어 눈길을 끈다. 마르크스 거리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2~3KM의 '김유천 리'가 그곳이다. 김유천은 조선인으로서 소련군 76여단에 소속되어 1929년에 증동 철도사건 때 참전하여 전사한 인물이었다. 소련군에 입대한 그는 러시아인 지휘관 꼰스딴찐 자빠린과 친했다. 두 사람은 공산당원이었고 소대를 지휘했다. 1929년 10월 2일 자빠린은 소대을 이끌고 적의 요새를  공격하다가 싸움터에서 전사하였다. 그러자 김유천은 동지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장렬히 싸웠고, 결국 전사하고 말았다. 그 후 두 사람의 무덤에는 기념비가 세워졌고 붉은 별이 장식되었다. 1930년 근로자 대표 하바로브스크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도시의 한 거리는 김유천 거리로, 또 다른 거리는 꼰스딴찐 자빠린 거리로 명명하였다.
하바로브스크 거리를 거닐면 이렇게 이 땅을 살다 간 고려인들의 숨결이 느껴진다.

 

*이 글은 <박환의 항일유적과 함께 하는 러시아 기행>(국학자료원)을 참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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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항일 독립운동 의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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